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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오한 메타포와 같지만, 사실은 직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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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약간 실망이랄까? 가장 근간을 이루는 핵심 비유가 너무나 직접적인 듯 하다. 특히 마지막 광고문구... 플라톤의 동굴이라~ 사라마구의 다른 소설의 인물들도 기민하거나 동적이진 않았지만, 그래서 지속적인 독백들이 있었지만 별로 지루하지 않았던게 뭔가 예상하지 못할 이야기 전개가 있었기 때문인데, 그런 상상력이 너무나 정통적인 비유의 틀 속에서 그 효과를 잃어버린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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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약간 실망이랄까? 가장 근간을 이루는 핵심 비유가 너무나 직접적인 듯 하다. 특히 마지막 광고문구... 플라톤의 동굴이라~ 사라마구의 다른 소설의 인물들도 기민하거나 동적이진 않았지만, 그래서 지속적인 독백들이 있었지만 별로 지루하지 않았던게 뭔가 예상하지 못할 이야기 전개가 있었기 때문인데, 그런 상상력이 너무나 정통적인 비유의 틀 속에서 그 효과를 잃어버린게 아닌가 싶다.


나쁘다는게 아니라... 처음부터 주인공의 생활근거(가마)와 센터, 그 둘 사이에서 어떤게 동굴이냐? 라는 서두부터 나오는 고전적인 철학적 메타포 사이에서 약간의 긴장을 느끼고 또 기대했는데, 진짜 동굴이 나타나버리다니... 그 '진짜 동굴'을 주인공이 결심하게 되는, 고전적 철학 메타포의 또다른 주인공이 되버리게 하는 계기가 된다는게, 다소 막나가는 혹은 소설적 멋내기가 과도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특히 도자인형들을 가마에서 꺼내는 장면에서..


현대 자본주의는 동굴로부터의 탈주와는 거리가 먼, 동굴속에 안주하고자 하는 인간의 수동적 욕망이 변형되고 확대된 또 다른 동굴일뿐이다~ 뭐, 이정도가 메시지라면 메시지겠지? 주인공들은? 결국은 또 다른 욕망(탈주에의)을 확인하고 깨닫고 실현하는 상징이라고 해야겠지만, 층층히 얽힌 동굴과 사람의 비유 (센터와 외부인, 가마와 인형, 센터지하의 동굴과 해골, 그리고 기존의 삶과 방랑)가 과도해서, 메타포가 메타포일 수 없게 되버린 듯하다.


이런 다층적 메타포가 기법적으로는 탁월한 성과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지만, 나한테는 안맞는다.

YES마니아 : 골드 e****s 2016.05.27. 신고 공감 1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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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서평 - 뒤집어진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
"[동굴] 서평 - 뒤집어진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 내용보기
... 이를테면, 지하의 동굴 모양을 한 거처에서, 즉 불빛 쪽으로 향해서 길게 난 입구를 전체 동굴의 너비만큼이나 넓게 가진 그런 동굴에서 어릴 적부터 사지와 목을 결박당한 상태로 있는 사람들을 상상해 보게. 그래서 이들은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앞만 보도록 되어 있고, 포박 때문에 머리를 돌릴 수도 없다네. 이들의 뒤쪽에서는 위쪽으로 멀리에서 불빛이 타오르고 있네.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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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를테면, 지하의 동굴 모양을 한 거처에서, 즉 불빛 쪽으로 향해서 길게 난 입구를 전체 동굴의 너비만큼이나 넓게 가진 그런 동굴에서 어릴 적부터 사지와 목을 결박당한 상태로 있는 사람들을 상상해 보게. 그래서 이들은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앞만 보도록 되어 있고, 포박 때문에 머리를 돌릴 수도 없다네. 이들의 뒤쪽에서는 위쪽으로 멀리에서 불빛이 타오르고 있네. 또한 이 불과 죄수들 사이에는 위쪽으로 [가로로] 길이 하나 나 있는데, 이 길을 따라 담(흉장)이 세워져 있는 걸 상상해 보게. 흡사 인형극을 공연하는 사람들의 경우에 사람들 앞에 야트막한 휘장(칸막이)이 쳐져 있어서, 이 휘장 위로 인형들을 보여 주듯 말일세. 

...

이 담을 따라 이 사람들이 온갖 인공의 물품들을, 그리고 돌이나 나무 또는 그 밖의 온갖 것을 재료로 하여 만들어진 인물상들 및 동물상들을 이 담 위로 쳐들고 지나가는 걸 말일세. 또한 이것들을 쳐들고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서 어떤 이들은 소리를 내나, 어떤 이들은 잠자코 있을 수도 있네...

- 국가/정체 514a ~ 515a (박종현 역)



<동굴>이라는 제목. 과연 이 제목으로부터 무언가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있을까. 플라톤적인, 특히 정치적 이념들로 가득한 환상적인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작가로부터, 그가 제시한 <동굴>이라는 제목으로부터,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이외에 무엇을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우습게도 사라마구는 독자의 예상을 깨고 플라톤의 비유와는 매우 다른 지점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평범한 두 인물의 일상적인 삶의 장면으로부터, 도자기공 시프리아노 알고르와 도시의 외곽에서 그 영향력을 나날이 확장해 나가고 있는 쇼핑 센터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는 그의 사위 마르살 가초가 함께 장인은 도자기로 구운 그릇과 병을 납품하고, 사위는 출근을 하기 위해 함께 센터로 향하는 장면으로부터 말이다. 


대대로 도자기 공방을 운영하고 있는 시프리아노 알고르는 곤경에 처해있다. 어디까지나 상품의 판매를 통한 자본의 축적을 목적으로 하는 센터는 시프리아노의 도자기가 창고에 쌓이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는 납품 계약을 파기한다. 물론 매우 온당하고 합리적인 절차와 형식을 통해서. 


시프리아노에게도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위 마르살이 센터에서 직급이 올라가 그와 함께 주거와 복지 혜택이 보장된 센터로 들어가 살 수 있는 기회도 있고, 총명한 딸 마르타의 도움으로 무언가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 센터에 납품할 수도 있다. 가령 이국적인 도자기 인형과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상처한 그에게 사랑의 기회가 찾아오기도 한다. 우연히 동네에서 마주친 이사우라 에스투디오사, 아니 이사우라 마드루가와의 사랑의 마주침. 그들과 함께, 그리고 또한 우연히 그가 찾은/그를 찾아온 개 파운드와 함께 자신의 공방을 꾸려나갈 꿈을 꾸면서.


그러나 그 작은 희망은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마치 깨진 도자기와 같이 아무 쓸모 없이 되어 버린 그 자신의 오래된 기술, 그 모든 노력에도 센터의 시장 조사를 통과하지 못한 그와 마르타의 도자기 인형들, 그리고 이어지는 마르살의 진급과 센터의 삶, 사랑하는 이사우라 그리고 그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파운드와 헤어짐. 이렇듯 모든 것은 최종적으로 마치 자본의 지배를 연상시키기라도 하려는 듯 그려진, 모든 향락과 소비가 집합되어 있는, 그러나 갑갑한 센터의 삶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동굴, 그 예의 철학자의 동굴이라는 것은 소설의 종결부에 이르러서야 등장한다. 갑자기 이상한 것이 센터 확장 공사 중에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돌지만 아무도 그 실체를 알지 못하는, 그런 뜬 소문과 같이. 시프리아노는 그 금지된 곳을 찾아 센터의 여기저기를 헤메다가 결국에는 우연히 만나게 된 사위 마르살과 함께 마치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와 같이 의자에 꽁꽁 묶여 벽을 향해 앉혀져 있는 여섯 구의 시체들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사우라와 파운드를 포함한 일가족을 데리고 센터와 심지어 자신이 살던 동네 마저도 떠나게 된다.


간단히 살펴본 이 그냥 그럴 듯한 이야기는 언뜻 보기에 별로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와는 닿는 부분이 없는 듯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철학적 성찰도 아니며, 어떤 우화('동굴의 비유')에 대한 우화, 이야기를 이야기로 풀어낸 작업이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일상적이고 평범한, 약간 더 분명하게 이야기 하자면, 진부한 이야기로. 하지만 이런 배치에서, 그리고 소설 속에서 말하고 있는 주목해야할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도록 하자. 


1. 전체 보다 큰 부분(의 합)


누군가 부분이 전체보다 크다는 말을 하면 아마도 미쳤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물론 당연히 전체가 그것에 포함된 부분 보다 크다. 어떤 집합을 상정하고 그 집합에 대한 벤다이어 그램 같은 것을 그려본다면 당연히 그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식적, 직관적 판단과는 달리, 집합론적으로 접근해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말하자면 원소의 수, 즉 집합의 크기(cardinality)를 가지고 이야기 하자면 말이다. 알랭 바디우가 제시하는 초과점의 정리(theorem of point of excess)는 국지적인 의미에서 부분이 전체보다 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이는 유한 집합의 영역에서라면 아주 간단하게 보일 수 있다. 원래 {1, 2, 3}이라는 집합이 있다면, 이 집합의 부분 집합들의 합, 즉 멱집합(power set)은 {{}, {1}, {2}, {3}, {1,2}, {2,3},{3,1}, {1,2,3}}으로 원소의 수에 있어(일대 일 대응관계로 볼 때), 원래의 집합 보다 더 크다. 하지만 현실의 상황과 같은 무한 집합에 대해서라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된다. 즉 어떤 무한 집합과 이 무한 집합의 부분 집합의 합인 멱집합을 비교하여 각 집합의 원소들의 일대 일 대응관계를 나타낸다면, 무한한 원소들을 가진 두 집합들의 원소의 수는 양쪽 다 무한이니 같은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바디우는 전체적인 의미에서 답을 주는 것은 칸토르의 정리**이며, 이 정리는 무한을 포함하는 전반적인 영역에서 전체보다 부분이 클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사회 내에서, 한 사회의 부분들을 통제하는, 혹은 집합 속에서 집합에 불안을 초래하는 공집합을 셈하는, 기제가 셈한 부분 집합들의 합이 그 사회 혹은 원래의 집합 보다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다. 말하자면 국가는 사회 속에 있지만, 사회는 국가(state)의 통제를 받는다. 물론 이 소설이 그려내는 세계 내에서 거대 집단으로서 사회 내의 구성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센터'라는 이름으로 드러나기는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사회를 통제하는 상태(state)이며 단지 권력이 국가로부터 자본으로 이양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뿐이다. 마치 권력이 시장에 넘어갔다던 노무현의 말처럼 말이다. 


2. Que sera, sera.


50년대의 노래 제목으로 유명해진 이 말은 보통 '사는 게 그런 거지'라는 정도로 번역하는 말이다. 하지만 원래 'Quel que sera, sera'인 이 경구의 의미는 '일어날 것은 일어난다'라는 것으로, 사라마구는 이 말을 여러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이 말을 읽을 때, 이것은 마치 예정된 것, 그저 사회의 법칙이나 사회가 굴러가는 관성에 따른, 필연적인 어떤 것을 의미한다고 받아들이게 되는데, 문제는 시프리아노 알고르의 일가의 행로는 결코 어떤 기존의 상태에 의해 통제된 자리에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는데 있다. 


그러나 만일 이 '일어날 것은 일어난다'는 말을 단순히 어떤 필연으로 읽지 않는다면, 이로부터 어떤 귀결을 끌어낼 수 있을까?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일어날 것은 일어난다'라는 말은 이념에 관한 것이다. 평범하지 않은 것,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정상이라고 간주하는 것에서 벗어난 것, 실제로 만일 지금은 없지만 사람들의 머리속에 있는 많은 생각들이 실현되지 않았다면, 현재의 상황을 구성하는 많은 부분들 역시 없었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공화국이나 민주주의라는 정체가 그렇다. 프랑스 혁명 이전에 그런 가치를 실현하는 어떤 집단적 움직임은 없었으며 - 혹은 시도는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실현에 성공한 움직임은 -  그 이후에도 상당히 오랜 기간이 지나기 전에는 결코 당연한 것으로,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현재라는 시점에서 과거를 회고적으로 바라볼 때에야 비로소 어떤 필연이라는 것이, 확고하게 정해져 있는 것이 보일 뿐, 인간의 역사는 결코 애초에 정해진 경로가 아니라, 어떤 우연한 실험에 의해, 머리 속에 있는 생각 혹은 이념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계속적인 탐색에 의해 이루어진 것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우리에게는 새로운 실험이, 현 상태 또는 과거의 삶에 대한 만족이 아니라 - 알고르 일가가 센터를 떠나 과거의 터전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는 것처럼 - 새로운 삶에 대한 탐색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 소설의 결정적인 장치로서의 '철학자의 동굴'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3. 뒤집어진 '동굴의 비유' - 지배자를 위한 것이 아닌 익명성의 비유 


잠시 플라톤이 말하는 '동굴의 비유'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이 비유가 등장하는 <국가> 7권의 성격에 대해서 말이다. '동굴의 비유'가 제시되는 부분에서 주로 이야기 되는 것은 결국 '선의 이데아'를 깨닫게 되는 어떤 사람, 과거에는 동굴 속에 묶여 다른 죄수들과 함께 벽에 비추어지는 영상을 현실로 착각하고 살았으나, 그 속박으로부터 풀려나 외부의 빛과 현실을 보고 동굴로 되돌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외부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람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결국 철학자에 관한 이야기인데, 플라톤은 이 비유에 이어 철학자가 되기 위한 교육(예비 교육과 변증술)에 대해, 그리고 그가 통치자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할 실무(수호자로서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 한다. 철학자는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야 한 도시를 지배하는 자리에 이를 수 있다. 


재미 있는 것은 사라마구가 이 '동굴의 비유'를 전용하는 방식이다. 그는 이 비유를 뒤집어진 방식으로 전용하고 있는데, 세 가지 의미에서 그렇다. 첫째, '동굴의 비유'가 글에서 등장하는 위치: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는 <국가> 7권의 도입부에 등장하지만(물론 플라톤의 <국가>의 각 권을 나누는 근거는 없다), 사라마구의 소설에서는 종결부에 등장한다. 둘째, 실재를 대면하게 되는 위치: 플라톤의 비유에서 동굴 속에 갇힌 사람이 '실재'를 대하게 되는 자리는 동굴 바깥이나, 사라마구의 소설 속에서 어떤 '실재'가 발견되는 곳은 센터의 깊숙한 어딘가에 위치한 동굴 속이다. 셋째, 실재를 대면하는 자의 지위: 플라톤의 비유에서 실재를 보게 되는 사람은 지배자의 위치에 서야할 철학자이지만, 사라마구의 소설에서 실재를 대면하는 사람은 그저 '평범하고 익명적인' 전직 도공일 뿐이다.   


4. 빠져나감의 이념 - 새로운 것을 향한 방황


결국 관건이 되는 것은 지배자들이 아닌 평범한 자들이 실재를 대할 때 있게 될 일들인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사라마구의 다른 소설 <눈뜬자들의 도시>가 말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야기일지 모른다. 평범한 사람들의 '투표 거부', 그것은 이 소설의 전편인 <눈먼자들의 도시>에 이어지는 상황이다. 바로 국가와 민주주의의 현 상태에 대한 어떤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 그것이 이 두 이어지는 소설이 말하는 익명적이고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동굴>이라는 소설 역시 위에서 언급한 소설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어떤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것은 결국 어떤 이념으로, 어떤 확실하지는 않지만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한 빠져나감의 이념으로 이어진다. 


말하자면 '동굴'이라는 실재와의 마주침은, 좀 더 정확히 말해 '동굴' 속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의자에 묶인 채 벽을 보고 앉아있는 시체들이라는 실재와의 마주침은, '센터'를 떠난 삶으로, 즉 자본의 지배를 벗어나는 탐색으로 이어진다. 분명히 그런 삶은 일종의 정처 없는 방황이다. 현 상태 내에서의 정착도, 혹은 그 이전의 전통적인 삶으로도 돌아가지 않는, 새로운 것을 위한 탐색. 물론 안정이 보장되지 않는 삶. 하지만 근/현대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것을 모색했던 방황 말이다. 현재 우리 사회 내에서 논의되고 있는 사회가 나아갈 방향들, 예를 들면 보편 복지라는 것 역시 이전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 중 하나일 수 밖에 없다. 아니 애초에 지금도 세계의 지배적 이념인 주류 경제학의 지식 체계 - 또는 의견의 체계 - 에 따르자면, 복지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선별적 복지, 시혜적 복지의 형태로만 가능할 뿐이다. 하지만 그런 고정된 지식 혹은 의견의 체계는 동굴 속의 실재와 마주한 시프리아노 알고르가 보았던 동굴 속의 시체들이 속박되어 있던 의자인 것은 아닌가. 


분명한 것은 이 <동굴>이라는 우화, '동굴의 비유'를 뒤집어 오늘날의 허구로 다시 쓴 이 새로운 우화는 이런 고정에서, 묶여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바깥을 향해 나가는 것을, 빠져나감의 이념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 소설은, 비록 원래의 비유를 뒤집어 놓은 것일지언정, 여전히 플라톤적인 맥락 위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실을 지배하는 인식의 방식인 의견(doxa)과 단절하고 추론(dianoia)을 거치지 않는 이상 이념 혹은 이데아(idea)에 이를 수 없다는 플라톤의 입장 위에 말이다. 


* 초과점의 정리는 알랭 바디우의 책 <존재와 사건>에서 증명 방식을 정리했음을 밝힌다.  

초과점 정리: 

바디우가 초과점의 정리(theorem of point of excess)라고 부르는 것은 위에서 말한 그대로 멱집합을 통해 부분 집합을 셈하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바디우의 보다 형식적인 증명 방식에 따르면... a의 모든 정상적인 원소들의 집합 c는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c={b | b∈a & ~(b∈b)}. (바디우는 자기 귀속이 금지되는 항 또는 원소를 '정상적 원소'라고 명명하며, 자기 귀속이 되는 원소를 '사건적 원소'라고 명명하는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집합론 또는 수학적 존재론에서 자기 귀속은 금지되기 때문이다.) 이 때 정상적인 성질을 가진 모든 원소 b를 a에 분리해 넣게 되면, a의 실존하는 부분을 얻게 된다.(이를 a의 정상적인 부분 집합이라고 명명한다.) c가 a에 포함되기 때문에[c⊂a, 왜냐하면 모든 c의 원소가 a에 귀속되기 때문], c는 a의 부분집합들의 집합에 귀속된다[c∈p(a), p는 멱집합(power set)을 의미]. 그런데 c는 a 자체에 귀속되지는 않는다. 만일 c가 a에 귀속된다면(c∈a), c는 정상항이기 때문에[~(c∈c)], a의 정상적인 부분 집합에 귀속되는 것이 되며, 그것은 c 자체가 된다(c∈c). 그러나 문제는 이는 c∈c이면서 동시에 ~(c∈c)가 되기 때문에 모순. 따라서 c는 a에 귀속되지 않는다는 결론. 이것은 결과적으로 언제나 집합 a의 원소가 아닌 p(a)의 원소가 적어도 하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귀속과 포함이 항상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다시 말해 부분 집합의 합은 원래의 집합 보다 크다. 


** 칸토르의 정리 역시 귀류법을 사용하여 증명하게 되는데, 초과점의 정리와 거의 유사한 방식의 증명법을 따른다.(이 증명법은 위키피디아에서 제시한 세가지 방법 중 한 가지를 정리함.)

칸토르의 정리:

두 집합의 원소의 수가 같다는 것은 어떤 두 집합의 원소가 일대 일 대응관계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한 집합의 영역에서 원집합 A와 멱집합 P(A)의 원소의 수와 A의 원소의 수는 전자가 크거나 또는 같다.(증명은 당연히 멱집합이 크다는 결론을 내기 위해, 같다는 가정에 모순이 있음을 보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만일 A와 P(A)가 같다면 두 집합의 원소들이 일대 일 대응을 하게 될 것이다. 이 때 f를 일대 일 대응관계의 함수라 하고, A의 멱집합의 원소(A의 부분 집합)인 집합 B가 있다고 하자[B ∈ P(A)]. 이 집합 B는 A에 귀속되는 모든 원소들 중 P(A)와 일대 일 대응 함수 f(x)에 귀속되지 않는 원소들로 이루어진다고 정의한다[B = {x∈A | ~(x∈f(x))]. 그런데 A와 P(A)가 일대 일로 대응한다면 f(x) 역시 P(A)의 부분 집합일 수 밖에 없으므로 B와 f(x)는 같아야만 한다. 

이 때 A에 귀속된 원소 x는 f(x)에 귀속되거나 또는 귀속되지 않을 것이다. a) x가 f(x)에 귀속되는 경우, f(x)는 B와 같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B의 정의에 따라 B는 f(x)에 귀속되지 않은 원소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b) x가 f(x)에 귀속되지 않는 경우, f(x)는 B와 같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B의 정의에 따라 x는 B에 귀속되지만 가정에 따라 f(x)에는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f(x)는 B와 같을 수 없으며, 따라서 P(A)는 A보다 크다(또는 원소의 수가 많다). 다시 말해 무한의 영역에서도 부분의 합은 원래의 집합보다 크다.(|A|<|P(A)|)

이것은 칸토르가 제시한 대각선 논법(diagonal argument)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대각선 논법의 적용은 여기에서 정리하기 보다는 위키피디아의 해당 항목에 자세한 운용례가 있으므로 링크로 대체.(http://en.wikipedia.org/wiki/Cantor%27s_diagonal_argument)



j******n 2012.04.06.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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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동굴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내용보기
시스템에 속한 삶. 거대한 틀 속에 맞춰져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것이 자본주의던, 공산주의던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그 순간 이미 시스템에 속하게 되고, 시스템에 적절히 적응하지 않으면 살아가는 것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시스템이 원하는 것, 시스템의 원활한 기능에 필요한 것 등이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고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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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에 속한 삶. 거대한 틀 속에 맞춰져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것이 자본주의던, 공산주의던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그 순간 이미 시스템에 속하게 되고, 시스템에 적절히 적응하지 않으면 살아가는 것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시스템이 원하는 것, 시스템의 원활한 기능에 필요한 것 등이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고 판단한다. 인간 사회가 지금보다 덜 발달되었을 때는 그 크기도 작았고, 요구하는 것도 적었다. 물론 그것이 더 인간적인 삶이었나에 대해 쉽게 말할 수 없는 부분이기는 하다. 인간적인 삶에 대한 수많은 기준 중에서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대답은 천차만별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에 인간이 자신이 하는 일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가치를 찾았던 것에 비해서, 지금의 거대한 시스템은 그런 것들보다는 시스템의 논리에 의해서 인간의 가치가 평가가 된다. 거기에는 어떤 인간적인 부분도 간섭할 여지가 없다. 톨스토이의 ''부활''에서 지적했듯이, 시스템의 규모가 커지고 조직이 발달할 수록, 인간은 시스템 속에 속한 하나의 부품으로 전락하게 되고 책임감과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잔인한 일을 하게 되더라도 그것은 명령받은 것들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책임져야하는 일들은 아무것도 없게 되고 죄책감도 크지 않다. 모든 것은 시스템이 결정하는 것. 그 안에서는 개인적 결정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은 거대한 집단의 일부분일 뿐이다. 거기엔 여론 조사와 통계가 있을 뿐이고 집단의 두리뭉실한 의견만이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어쨌든 인간 사회의 시스템 발전(규모적인 면이든 질적인 면이든)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제와서 다시 농경, 수렵 사회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은 정신나간 소리로 들릴 수 밖에 없다. 시프리아노가 도자기 판매를 거부당한 후에도 어떻게 해서든 센터에 물건을 팔려고 했던 것처럼, 우리는 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가 위해 시스템이 요구하는 것들을 무시하고 살아갈 수는 없다. 정작 무서운 것은 거대한 시스템이 아니라, 그 시스템을 알지 못하는 것, 시스템 너머에 있는 것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소설은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현대적으로 풀어쓴 책이라고 소개되어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는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현실이 사실은 그림자일 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현실이 정말 그림자인가 하는 것을 파악하는 것은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것과 여러 방법으로 습득한 지식을 통해 판단을 내리고 세상을 바라본다. 그림자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결코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다. 결국 그들은 진실은 알지 못한 채 동굴(시스템)이 보여주는 만들어진 진실만을 볼 뿐이다. 그 곳에서 사는 삶 속에는 ''진정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시프리아노가 센터의 삶 속에서 이상함을 느꼈던 것은 그가 비교적 센터의 시스템에 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리라.) 만약 센터처럼 동굴을 관리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은 우리에게 선택적으로만 보여주는 것을 통해서, 동굴 속의 사람들을 자신의 뜻대로 조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직접적인 방법이던 간접적인 방법이던 동굴 속에서의 삶이 모든 것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은 결코 자신이 내리는 판단과 자신의 가치가 스스로에게서 발생한 것이 아닌 조작되고 기만적이라는 것을 판단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거대한 시스템 속의 꼭두각시라는 것을 결코 알 지 못한 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람자인 것을 알았다고 해도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도 결코 아니다. 동굴을 떠난 후에 만나게 될 세상이 과연 햇빛이 내리쬐는 실체로 가득찬 세상일 지, 혹은 그것 조차도 더 큰 동굴의 일부일 지, 아니면 햇빛을 반사하는 달빛의 세계일 지를 판단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우리는 동굴(시스템) 안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을 판단할 근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더군다나 동굴의 그림자를 만드는 강렬한 햇빛을 판단하기에 우리의 눈은 너무나 약하다. 이미 동굴은 우리에게서 진실을 파악할 능력을 많이 차단해왔고, 우리는 그것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설령 진실을 알았다고 해도, 그 이후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글쎄. 지금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말은 쉽사리 판단할 수 없다는 말 뿐이다. 작가는 센터라는 거대한 시스템과 그 시스템에 속하여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소설 속의 상상의 이야기가 아니다. 시스템은 우리의 고도로 발달된 사회이며, 등장인물들은 바로 우리들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하듯이 우리의 많은 부분은 벌써 시스템에 속해있다. 우리의 가치와 정체성은 바로 이 시스템을 바탕으로 해서 세워져있다. 우리의 정체성이 과연 ''나''라는 독특한 개인의 발현인 것인가 하는 어려운 문제는 이제 고개를 들었을 뿐이다. 소설 속 주인공인 시프리아노는 60대의 노인이다. 이미 70을 넘은 작가는 젊은 시절의 자신에게 충고하듯 시프리아노의 이야기를 썼을 것만 같다. 그 때에는 알지 못했지만, 지금은 깨닫게 된 노인의 현명함으로 자신의 지난 날을 회상하듯. 그의 이 친절한 충고와 교훈은 우리에게 자유롭게 남겨져있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는 우리의 선택의 문제이다. 그러나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난 후에 어떻게 될 것인 지 본인들은 결코 알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이러한 충고를 받아들이고 난 후에 어떻게 해야할 지, 그 결과가 무엇일 지 결코 알지 못한다. 센터에서 나와 다른 곳으로 이사하기로 결정한 시프리아노 알고르의 식구이 무엇을 했는 지, 어떻게 됐는 지 나와있지 않은 소설의 결말처럼 말이다.
y***s 2006.10.19.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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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자본주의라는 동굴을 들여다보다
"'동굴'- 자본주의라는 동굴을 들여다보다" 내용보기
사라마구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따옴표나 다른 문장부호 없이 오로지 쉼표와 마침표로만 진행된다. 단락이 바뀌지 않는한 책을 펼쳤을때 온통 활자다.   그만큼 독자의 집중력을 요구하는데, 그 집중력의 결과가 뻔하거나 허망한데 이르르면 실망이 배가 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눈먼 자들의 도시>보다는 별 재미가 없었다.   역자의 친절한 배려(?)로 플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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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마구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따옴표나 다른 문장부호 없이 오로지 쉼표와 마침표로만 진행된다. 단락이 바뀌지 않는한 책을 펼쳤을때 온통 활자다.

 

그만큼 독자의 집중력을 요구하는데, 그 집중력의 결과가 뻔하거나 허망한데 이르르면 실망이 배가 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눈먼 자들의 도시>보다는 별 재미가 없었다.

 

역자의 친절한 배려(?)로 플라톤 '국가론' 7권의 동굴 비유가 책 앞에 실려있는다. 500쪽 가까이 되는 <동굴> 한 권보다 결국 소크라테스의 짧은 대화가 담고 있는 인사이트가 큰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다른 점이 있다면 소크라테스가 인간의 본능이 계몽돼있지 않음을 설명하기 위해 동굴 비유를 들었던 것과 달리 사라마구는 자본주의의 어둠에 속박된 현대 사회를 동굴로 표현했다. 

  

창조라는 고귀한 행위를 통해 인간의 노동력이 정당한 가치 평가를 받는 시대는 지났다.

 

대신 인간의 노동은 '수요'라는 몰가치한 데이터로 측정되고 곧 사회 전체를 구성하는 부품으로 전락해 거리낌없이 대체, 폐기되고 만다.

 

  

 

원래 자기가 모르는건 생각해 내기 어려운 법이에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는 건 바로 그것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인 것 같은데.(p.205)

 

사람은 침묵이야, 그래, 그거야, 침묵, 사람들은 모두 자기만의 침묵을 갖고 있어, 그 침묵이 바로 그 사람이야.(p.253)

 

기대는 놀라움을 없애버릴 뿐만 아니라, 감정을 둔하고 하찮게 만들어 버린다. 사람은 어떤 것을 바라거나 두려워하면서 이미 그것을 실제로 경험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태가 된다.(p.350)

 

들판의 백합을 생각해 봐, 백합은 힘들여 일을 하지도 않고 실을 만들어내지도 않잖니. 그것도 좋은 말이긴 한데, 그래서 백합은 백합일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p.460)

p****o 2009.08.21.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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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삶은 얼마나 진실된 것일까?
"우리가 사는 삶은 얼마나 진실된 것일까?" 내용보기
즐겨읽는 SF내지는 실용적인 책을 읽기에도 좀 지겨워져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책을 고르자고 마음먹었다. 요즘 부쩍 이..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관심이 늘었는데, 예전에 신화에 대한 책을 몇권 연달아 읽은 것도 바로 그 관심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결론적으로 그리 성공적이지는 않았지만, 이 부분은 나에게 문제가 있는지 책에 문제가 있는지 아직 불명확하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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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겨읽는 SF내지는 실용적인 책을 읽기에도 좀 지겨워져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책을 고르자고 마음먹었다. 요즘 부쩍 이..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관심이 늘었는데, 예전에 신화에 대한 책을 몇권 연달아 읽은 것도 바로 그 관심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결론적으로 그리 성공적이지는 않았지만, 이 부분은 나에게 문제가 있는지 책에 문제가 있는지 아직 불명확하기 때문에 잠시 보류... 나중에 다시 한번 읽어보고 판단해야 겠다. 여하튼, 그런 이유로 주제사라마구의 책을 집어 들었다. 예전에 ''눈먼 자들의 도시''를 워낙 재미있게 읽은 기억도 있고해서 고른 책이 바로 이 동굴... 제목이 암시하듯 이 소설은, 동굴 속에서 밧줄에 묶인 채 벽에 비친 그림자를 실재라고 생각하며 사는 수인(囚人)들에 관한 플라톤의 동굴 비유를 센터라는 물질문명의 정수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로 되살려낸 작품이다. yes24의 책소개에 있는 글이다. 뭔가 느낌이 확 오는듯 하여.. 구매하였다. 웬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이 혹은 삶의 허무를 날카롭게 파헤쳐 줄것 같은 소설이었는데, 결과적으로 플라톤의 동굴 자체에 대해서는 책 끄트머리에 잠깐 이야기가 나온다. 그렇다고해서 저 책소개가 거짓부렁은 아니고... 전체적인 구성은 위의 책소개에 있는대로이고, 이는 어떻게 보면 좀 뻔하다 싶을 정도이기 때문에 별다른 감상이 없다. 자본주의의 물질적인 속성, 비인간화, 전통을 고수하면 살아가는 방식과 이익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물질만능주의가 서로 만났을때 생기게 되는 갈등들... 등등.. 오히려, 이런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등장인물들이 겪게되는 소소한 일상에서 더 의미있는 말들을 찾을 수가 있었다. 지금 옆에 책이 없어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기억을 되살려서 인용해 보자면.. - 복잡하게 표현해야 하는 감정은 진실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 조직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모든 걸 결정할 수 있는것 같이 행동하지만, 알고 보면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이야기(이건 마치 내 이야기 같다) - 모든 것은 상상력에서 시작된다는 말. - 음.. 생각이 안난다..--; 여하튼 곰곰히 곱씹어볼만한 구절들이 꽤나 많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순간 벌써부터 이 책을 다시한번 꼼꼼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난 얼마나 글을 건성으로 읽고 있는것일까? 그러고보면 책 빨리 읽는 것도 병이다. 뭐 덕분에 좋은 책은 두번씩은 읽지만, 그렇게 해서 장점을 보지 못하고 스쳐간 책이 또 얼마나 많겠는가? 현대의 자본주의화된 생활방식에 대한 통찰은 번뜩이지만, 결론적으로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대안은 없다는 점이 가장 아쉽다. 이건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은 사회과학서가 아니라 소설책이니까. 최소한 내가 살고 있는 삶의 삭막함과 무미건조함을 다시 한번 되돌아볼 수 있게 해주지는 않겠는가? 소설속의 주인공들은 자신들의 삶이 그림자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고 여행을 떠나듯이 말이다.
p***o 2007.01.04.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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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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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세상을 떠난 주제 사라마구를 언급할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작품은 바로 <눈먼 자들의 도시>일 것이다. 영화로도 만들어져 많은 이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킨 해당 작품과 이번에 내가 읽은 <동굴>은 다른 듯하면서도 닮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모두가 만족하고 지향하는 현실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 때문이었다. 책의 가장 앞부분에서도 만나볼 수 있듯, 플라톤의 동굴이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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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세상을 떠난 주제 사라마구를 언급할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작품은 바로 <눈먼 자들의 도시>일 것이다. 영화로도 만들어져 많은 이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킨 해당 작품과 이번에 내가 읽은 <동굴>은 다른 듯하면서도 닮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모두가 만족하고 지향하는 현실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 때문이었다. 책의 가장 앞부분에서도 만나볼 수 있듯, 플라톤의 동굴이 아마도 이 책의 모티브인 듯했다.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지 인간의 어리석음으로는 구분이 어려운, 본격적으로 동굴이 소설 속에 등장하기 전까지 우리는 우리 자신이 범한 실수를 똑같이 행하고 있는 등장 인물들과 만나게 된다.
등장 인물들은 변화하는 세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모두가 플라스틱으로 만든 가볍고도 깨지지 않는 제품을 선호하는 시대에 주인공들은 도자기를 굽고자 안간힘을 썼다. 보존되어야 마땅한 것으로 여겨지는 장인 정신 따위를 기대하기엔 마을에 드리운 센터의 힘이 너무도 거대해서, 만들어진 도자기들은 센터를 거치지 않고선 어느 곳으로도 판매될 수 없었다. 즉, 센터의 결정에 한 가족의 생계가 모두 걸린 셈이었다. 역시나 예상대로 그들에겐 더 이상의 납품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잠시 인형을 만들어보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으니, 테스트 제품에 대한 비용 지불은 어쩌면 센터가 보일 수 있는 유일한 인간다움이었는지도 모른다.
사위 마르타의 상주 경비원으로의 승진은 사실 모두가 꿈꾸는 바라고도 할 수 있다. 작품 속에서 그려진 센터에서는 불가능이란 없어 보인다. 비록 실재는 아니지만 주인공은 그 안에서 내리는 비를 맞는 경험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 오래도록 차를 끌고 이동치 않아도 실제 모습과 꽤 흡사한 바닷가를 만날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이들의 변화된 삶을 긍정적으로 그리길 꺼려한다. 이미 한국에서는 보편화되어 있는 개성 없는 아파트를 센터가 닮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미 한 차례 도자기를 거부함으로써 주인공 가족의 경제적인 부분에 궁핍함을 가져다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정체성을 결정 짓는 노동마저도 앗아가 버린 센터임을 작가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주지시킨다. 그리고 마침내 동굴이 등장한다. 사실 동굴의 존재 자체는 새로울 게 없다. 어린 시절 초등학교 운동장 밑에 무덤이 있다는 소리를 수시로 들었던 나로서는 센터 밑바닥에서 사람 시체나 그에 준하는 무덤 따위가 발견되었다 하여도 ‘그런가보다’라며 아무렇잖게 넘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그보다 복잡하게 전개된다.
모든 게 갖추어진 현대 문명은 자꾸만 내 마음에 허영심을 불어넣는다. 세상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숨쉴 틈을 주지 않고 신제품들이 쏟아지고 있는데, 돈만 있으면 그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다는 식의 사고가 팽배해 있다. 문제는 어느 누구도 제가 원하는 만큼의 소비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하지가 못하다는 데에 있다. 나는 쉬지 않고 일을 하는데 왜 돈은 나를 외면하는가! 돈 역시도 인간이 만든 품목에 불과하지만 우리는 그 돈의 지배를 받고 있다. ‘노예’라는 단어는 어쩌면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돈에 웃고 또 운다. 어떠한 자극도 없이 모든 게 풍요롭다면 우린 우리 자신에게 만족하며 살 수 있을까? 더 큰 자극만을 꿈꾸다가 결국에는 사는 것과 죽는 것 사이의 경계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무미건조하게 생을 마감하게 되진 않을까?
사는 것에 정답이 있다면 참 좋겠지만 모두가 다른 형태의 삶을 사는 걸 보면 알 수 있듯 정해진 답이란 건 있을 리 없다. 이 소설의 결말이 무언가를 기대하게 만들면서도 한 편으로는 그래서 무엇이 어떻게 되었다는 것인지 모호함만을 우리에게 안겨다 주는 것도 어쩌면 그래서일 게다. 아마도 그들은, 이미 생계의 기반을 잃은 입장인지라, 거친 풍랑을 만나 흔들리는 배 마냥 이리저리 흔들릴 것이다. 하지만 어려움 속에서 적어도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에 눈을 뜨고, 나아가 함께한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를 깨달았을 것이란 판단은 든다. 자고로 사는 것은 그래야만 하는 법이다. 모든 것이 갖추어진 온실 속에서 나 죽는 날이 언제인지를 손꼽아 기다리는 것을 삶이라고 칭해서는 아니 된다.
소설의 무게감을 논하는 것은 옳은 독서 방법이 아닐 수도 있다. 허나 이 책은 굳이 무게를 따지자면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작품이란 말을 마지막으로 하고 싶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진 않으나 적어도 지금의 이 삶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게는 만드는, 자, 그렇다면 이제 당신은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동굴로부터 탈출을 꿈꿔야 하는 시점에 당도했다. 떠날 것인지 안주할 것인지, 만일 떠난다면 누구와 어디로 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당신의 몫이다. 거기까지는 작가도 펜을 드리우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달의 사락 q*****2 2011.02.05.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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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의 의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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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의미, 의미..... 내가 좋아하지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자신만의 룰이 엄격해서 때로는 읽다가 머리속에서 부딪치는 의미들에 지쳐 잠시 책을 놓게 만드는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작품이다. '눈먼자들의 도시' 이후 줄곧 그의 이야기들을 하나씩 읽어오고 있다.   '동굴'은 어설프게 읽더라도 자본주의를 꼬집고 있다는 게 여실히 느껴진다. 작은 마을에서 도자기를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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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의미, 의미.....

내가 좋아하지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자신만의 룰이 엄격해서

때로는 읽다가 머리속에서 부딪치는 의미들에 지쳐

잠시 책을 놓게 만드는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작품이다.

'눈먼자들의 도시' 이후 줄곧

그의 이야기들을 하나씩 읽어오고 있다.

 

'동굴'은 어설프게 읽더라도

자본주의를 꼬집고 있다는 게 여실히 느껴진다.

작은 마을에서 도자기를 구워 도시의 '센터'에 팔고 있는

주인공 알고르는 어느 날 센터로부터 더 이상 고객들이 흙으로 구워 낸 도자기를 원하지 않으니 거래를 지속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는다.

고객들은 잘 깨지고 무거운 도자기보다

가볍고 깨질 염려도 없으며 가격도 저렴한 플라스틱을 선호한다.

 

곧바로 좌절했다면 자본주의에 무너진 '전통적' 인간성을 설명하기에는 비참함이 덜했을지 모르겠다.

알고르와 딸 마르타는 흙으로 만든 도자기가 팔리지 않는다면,

인형을 구워서 팔아보기로 결심한다.

우여곡절 끝에 인형 300개를 만들지만,

결국 이마저도 센터의 고객수요설문조사(굳이 말을 붙이자면)에서 고객들이 선호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

더 이상 팔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센터의 구매차장이 설문조사용으로 쓰인 인형 300개의 가격을

큰 선심쓰듯, 센터는 매우 합리적이고 공정하다는 듯

알고르에게 지불할 때 쳇, 하는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사위가 센터의 상주경비원으로 승진하면서

알고르도 센터에서 살게 된다.

이 '센터'라는 곳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처럼

무자비하게 크고, 끝을 알 수 없이 뻗어나가며,

그 내부에서 쇼핑, 운동, 여가생활, 심지어는 바다와 같은 자연 체험까지 할 수 있게 만들어놓은, 그리고 지하로 10층, 지상으로 50층의 규모를 자랑하는 주거공간이자 상업시설이기도 하다.

 

어느 날 센터 지하에서 동굴이 발견되는데,

이 동굴은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 나오는 동굴처럼 생겼다.

그 안에 쇠사슬로 묶인 남녀 여섯 사람의 시체,.. 플라톤의 동굴이었다.

그 모습이 '우리' 라는 것을 깨닫고 알고르는 자신이 원래 살고 있던, 낡은 가마가 있는 집으로 돌아온다.

딸과 사위 역시 마을로 돌아와 함께 어디론가 떠난다.

이런 애매한 끝맺음이 해피엔딩인지 아닌지,

사실 난 잘 모르겠다. 난 '아니다' 쪽이다. 

이들이 플라톤의 동굴을 경고로 여기고 그곳을 떠날 때, 

센터에서는 '플라톤의 동굴'을 관광상품으로 내걸어 팔기 시작한다.

 

자본주의에 느끼는 염증,

자본주의에서 말살되는 전통과 개인,

우리가 너무 오래 잊고 있었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자본주의는 아직도 실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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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이분, 책 너무 어렵게 쓰신다.

책이 날 피로하게 하다니. 전공책도 아닌데 말이야.

w***r 2009.10.2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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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동굴" 내용보기
고등학교 윤리시간에 잠깐 들어본 ''동굴의 우상''에 관한 이야기가 책 맨 앞에 소개 되어 있다. 동굴의 벽에 비친 그림자만이 세상의 참모습이라고 인식하며 살던 사람들은 동굴밖의 세상, 찬란하고 밝은 빛의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오히려 그 세상을 보고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상하게 취급 하게 된다는 이야기. [눈먼자들의 도시], [돌뗏목] 등에 비해서는 참으로 현실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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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윤리시간에 잠깐 들어본 ''동굴의 우상''에 관한 이야기가 책 맨 앞에 소개 되어 있다. 동굴의 벽에 비친 그림자만이 세상의 참모습이라고 인식하며 살던 사람들은 동굴밖의 세상, 찬란하고 밝은 빛의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오히려 그 세상을 보고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상하게 취급 하게 된다는 이야기. [눈먼자들의 도시], [돌뗏목] 등에 비해서는 참으로 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룬다. 모든 사람들이 갑자기 앞을 못보게 된다거나, 이베리아 반도가 유럽대륙에서 떨어져 나간다는 ''대담한'' 설정은 이야기로서의 재미를 한층 더 높여주는 게 사실이다. 그에 비해 이 소설은, 시골에서 도자기를 구우며 도시의 ''센터''에 물건을 납품하는 도공과 그의 딸, 센터의 경비원인 사위, 이웃집 미망인, 그리고 개 한마리가 등장인물인데, 하루아침에 센터로부터 납품 중지 통보를 받고 앞날을 걱정하거나, 센터의 상주 경비원이 되기 위해 애를 쓰거나, 이웃집 미망인과의 미묘한 감정을 키우거나, 길 잃은 개를 데려다가 키우는 등, 주제 사라마구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룬다.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센터''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읽힐수도 있겠으나, 제목과 서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동굴''을 감안한다면, 저자가 중점을 둔 부분은 그보다는 오히려 뒷부분에 치우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은 또다른 큰 동굴인 셈이고, 진정한 세상의 모습을 찾기 위해서는 이 동굴을 빠져나가 강렬한 태양빛을 직면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비록 그 용기있는자들은 동굴에 남아 평생을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이상한, 비정상적인 사람들로 손가락질 받겠지만.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바라는 참세상의 모습을 찾게 될지, 아니면 너무 강한 햇빛에 그만 눈이 멀어버릴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y****2 2006.09.19.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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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자리가 "동굴"일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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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의 비유 중에서」   소크라테스 : 우리의 본성이 얼마나 계몽되어 있는지. 또는 계몽되어 있지 않은지 비유를 들어 보여주겠네. 보게! 지하의 굴에서 사는 사람들을. 그 굴의 입구는 빛을 향해 열려 있고, 굴의 전면을 차지하고 있네. 그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여기 살고 있는데, 다리와 목이 사슬에 묶여 있어서 움직이지 못하지. 사슬 때문에 고개를 돌릴 수도 없으니 오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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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의 비유 중에서」

 

소크라테스 : 우리의 본성이 얼마나 계몽되어 있는지. 또는 계몽되어 있지 않은지 비유를 들어 보여주겠네. 보게! 지하의 굴에서 사는 사람들을. 그 굴의 입구는 빛을 향해 열려 있고, 굴의 전면을 차지하고 있네. 그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여기 살고 있는데, 다리와 목이 사슬에 묶여 있어서 움직이지 못하지. 사슬 때문에 고개를 돌릴 수도 없으니 오로지 앞만 바라볼 수 밖에. 그 사람들의 머리 위와 등 뒤에서는 약간 거리를 두고 불이 타오르고 있고, 불꽃과 수인들 사이에는 경사로가 있네. 자세히 보면, 인형술사들이 공연할 때 앞에 쳐놓고 그 위에서 인형들을 조종하는 막처럼 그 경사로를 따라 서 있는 나지막한 벽이 보일 걸세.

글라우콘 : 그렇군요.

 

소크라테스 : 갖가지 그릇과 나무나 돌 같은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진 동물  조각상들을 그 벽위로 들고 벽을 따라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이는가? 그들 중에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도 있고, 침묵하는 사람들도 있네.

글라우콘 : 참으로 이상한 이미지로군요. 그 수인들도 이상하고.

 

소크라테스 : 우리와 똑같지. 그들은 자기 그림자나 서로의 그림자밖에 보지 못한다네. 불꽃이 동굴의 반대편 벽에 던져주는 그림자들 말일세.

글라우콘 : 맞는 말씀입니다. 고개를 움직일 수 없으니 어찌 그림자 외의 다른 것을 볼 수 있겠습니까?

소크라테스 : 그럼 사람들이 들고 지나가는 물건들도 역시 그림자밖에 보이지 않을까?

글라우콘 : 예.

 

소크라테스 : 만약 그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자기들이 실제로 눈앞에 있는 것에 이름을 붙여주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겠나? 한 발 더 나아가 이 감옥의 반대편에서 메아리가 들려온다면, 그 사람들은 벽을 따라 지나가는 사람들이 말을 할 때 그 목소리가 지나가는 그림자에서 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나?

글라우콘 : 그거야 의심의 여지가 없지요.

 

소크라테스 : 그들에게 진실이란 문자 그대로 이미지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을 걸세.

글라우콘 : 물론이지요.

 

소크라테스 : 이제 다시 자세히 살펴보게. 만약 그 수인들이 풀려나서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닫는다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봐. 우선 그들 중 누가 사슬에서 풀려나 갑자기 일어서서 고개를 돌리고 빛을 바라보면 빛을 향해 걸어가게 된다면, 그는 심한 통증을 느낄 걸세. 빛이 그를 괴롭힐 테니까. 그는 과거에 그림자로만 보았던 현실을 볼 수 없겠지. 이때 누군가가 그에게 이런 말을 한다고 생각해 보게. 예전에 당신이 본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당신이 존재에 가까이 다가가며 더 현실적인 삶을 향해 눈을 돌리게 되면, 시야가 더 선명해질 거라고. 그러면 그가 뭐라고 대답하겠나? 이제 그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는 그 누군가의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자기들 옆을 스쳐 지나가는 여러 물건들에 이름을 붙여주라고 한다고 상상해 보게. 그가 곤혹스러워지지 않겠나? 자기가 전에 보았던 그림자가 지금 보고 있는 물건들보다 더 진실했다고 생각하지 않겠나?

글라우콘 : 훨씬 더 진실하게 보이겠죠.

 

소크라테스 : 만약 그가 빛을 똑바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면, 눈이 아파서 시선을 돌려 자기가 불편없이 볼 수 있는 대상들 속에서 피난처를 구하지 않겠나? 그리고 그것들이 지금 자기가 보고 있는 물건들보다 더 선명하다고 생각하겠지?

글라우콘 : 그렇겠죠.

 

소크라테스 : 한 번 더 상상을 해보게. 그가 가파르고 울퉁불퉁한 경사로를 마지못해 끌려올라가면서 버티다가 태양과 직접 마주하게 되면 고통과 괴로움을 느끼지 않겠나? 그가 빛을 향해 다가가면 눈이 부실 것이고, 따라서 그는 현실이라는 것을 전혀 볼 수 없게 되지 않겠나?

글라우콘 : 잠깐 동안은 전혀 볼 수 없겠죠.

 

소크라테스 : 그는 지상의 세계에 익숙해져야 할 걸세. 처음에 그가 가장 잘 볼 수 있는 것은 그림자겠지. 그 다음에는 물에 비친 사람들과 여러 물건들의 그림자일 테고, 그 다음에는 그 물건들을 직접 볼 수 있겠지. 이제 그는 달빛과 별빛, 별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는 하늘을 바라보게 될 걸세. 아마 낮의 햇빛이나 태양보다 밤하늘과 별들을 더 잘 보겠지?

글라우콘 : 그렇겠죠.

 

소크라테스 : 마지막으로 그는 태양을 볼 수 있게 될 것세. 물속에 비친 태양을 보는 대신 태양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서 태양을 보게 되겠지. 그는 태양을 원래 모습 그대로 바라 볼 걸세.

글라우콘 : 그렇겠죠.

 

소크라테스 : 그러면 그는 계절과 해(年)를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태양이며, 태양이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든 것을 수호해 준다고 주장할 걸세.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이 익숙하게 보아오던 모든 것들의 원인이 바로 태양이라는 말도 하겠지?

글라우콘 : 틀림없이 그는 먼저 태양을 보고 난 후에 이성적인 추론을 하겠죠.

 

소크라테스 : 자기가 옛날에 살던 곳과 그 동굴에서 통하던 지혜, 그리고 자기와 함께 갇혀 있던 사람들이 생각나면, 그는 이렇게 변화한 자신을 축하하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않겠나?

글라우콘 : 틀림없이 그렇겠죠.

 

소크라테스 : 만약 그들이 지나가는 그림자들을 가장 빨리 알아보고 어떤 것이 먼저고 어떤 것이 나중인지. 어떤 것이 함께 지나갔는지 말할 수 있는 사람, 따라서 미래에 대해 결론을 내리는 능력이 가장 뛰어난 사람에게 명예를 안겨주는 습성이 있었다면, 그가 그런 명예를 누리고 싶어하거나 그런 명예르 인정받은 사람을 부러워할 것 같은가? 그는 호메로스처럼 일허게 말하지 않겠나? 그들처럼 생각하고 그들처럼 사느니 가난한 주인의 가난한 종이 되는 편이 더 낫다고.

글라우콘 : 예, 그는 틀린 생각을 품고 그렇게 비참하게 사느니 차라리 고통을 겪는 편을 택할것 같습니다.

 

소크라테스 : 한 번 더 상상해 보게. 그런 사람이 갑자기 태양이 있는 곳에서 벗어나 과거와 같은 상황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눈에 어둠을 가득 채우지 않겠나?

글라우콘 : 그렇게 되겠죠.

 

소크라테스 : 그리고 그의 눈이 아직 적응하지 못해 시력이 약할 때, 눈이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지는 데는 아마 상당한 시간이 걸릴 걸세. 만약 어떤 콘테스트가 열려서 그가 동굴 밖으로 나가본 적인 없는 수인들과 그림자를 측정하는 경쟁을 벌이게 된다면, 그가 우스꽝스러운 꼴이 되지 않겠나? 사람들은 그가 한 번 오라갔다 오더니 눈을 잃어버렸다고, 올라갈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말하겠지. 만약 누가 다른 사람의 사슬을 풀어주고 빛을 향해 데리고 올라가려 한다면, 그들은 그 범죄자를 붙잡아 사형선고를 내릴 걸세.

글라우콘 : 그거야 의심의 여지가 없는 말이죠.

- 플라톤, "국가론", 7권 중

 

소설 한 권을 읽는데 8일이 걸렸다면 일단 소설이 가지는 '흥미유발'과 '재미' 부분에서는 읽는 사람과 교감하지 못했다는 뜻. 대화의 구분도 없이 소설속 중심인물인 64세 나이의 도공 시프리아노 알고르와 그의 딸이자 도자기 굽는 일을 돕는 또다른 중심인물인 마르타와 그의 남편이면서 소설의 주제와 관련한 중심 무대인 센터의 비상근 경비원에서 상주 경비원이 되었다가 "동굴"의 깨달음으로 상주 경비원 자리를 버리고 나온 사위 마르살 가초, 그리고 미망인이었는데 시프리아노 알고르를 사랑하게된 여인 이사우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설을 전개해 나가는 화자-전지적 시점에서 전개하면서 짐짓 아닌척 생각과 행동을 묘사하고, 또 상황과 반응에 대해서 나레이션처럼 설명하는-까지 그들의 대화와 생각들이 문단 구분도 자주 없이 쭉~ 이어져 있어서 잠시 잠깐이라도 주의가 산만해지면 어느샌가 읽은 곳을 또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센터가 선전하는 안락하고, 행복한 소비의 터전인 센터에서의 삶을 살게 되지만-마르살 가초가 상주 경비원으로 승진하여- 자연의 본성을 잃어버린채 감옥 속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고, 소비되게끔 설계된 자연에 대한 이질감에 혼돈을 느낀다. 안정적인 삶이 가능한 것에 만족해야 하나? 아니면 비록 굶주림이 기다린다 해도 대자연의 품에서 삶의 쟁투를 겪어내는 것이 맞나.

 

그러다 우연히 센터 지하의 확장공사중 발견하게된 소크라테스의 동굴 속 묘사와 같이 파묻혀 있는 시체들을 보면서 '우리'의 모습임을 깨닫게 된 순간....

인위적인 삶의 터전, 욕망과 두려움의 비빔범벅에서 벗어나 '날 생'의 삶의 자리로 용감히 옮겨온다.

 

지금 내가 있는 이 생각의 자리가 "동굴" 일 수 있음을 음미해 볼 수 있는 계기였다.

k*****6 2009.05.09.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