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시 흥행에는 막장만한 게 없다. <창선감의록>. 고등학교 때 문학 공부를 무지 열심히 했거나, 대학에 와서 관련 학문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라면 들어보기도 어려웠을 우리 고전이다. 개인적으로 내가 고3 때 언어영역 문제집을 백여 권을 풀었는데도 한 번 보지 못했던 것을 진짜 수능시험 날 이 지문을 처음 보고 깜놀했던 기억도 있다. 彰善感義錄(창선감의록), 직역하면 '선을 밝히고 의를 느끼게 하는 이야기' 쯤 되겠다. 중국 명나라를 배경으로 봉건적 대가족제도 하에서 벌어지는 각종 막장 이야기의 종합 선물세트 되시겠다. 명나라 때 높은 벼슬을 지내던 '화욱'에게는 세 부인이 있다. 복잡한 가족관계의 정리를 위해 편의상 번호를 붙여본다.
가장 : 0번 화욱 부인 : 1번 심씨 / 2번 요씨 / 3번 정씨. 자식 : 1-1번 아들 화춘 / 2-1번 딸 화빙선 / 3-1번 아들 화진. 기타 친족 : 4번 화욱의 누나 성부인(성씨 집안에 시집갔으므로) 4-1번 성부인의 아들 성준 5-1번 화진 부인1(윤부인) / 5-2번 화진 부인2(남부인) 대강 요약하면 이렇다. 1번과 1-1번이, 0번과 2번이 죽고 난 후 2-1번, 3-1번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하나, 4번의 보호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즉, 정부인이 소실의 아이들을 미워하고 해치려고 하는 전형적인 가정사 이야기이다. 하지만, 역시 전형적인 고대소설답게 주인공 화진은 잘생기고 똑똑하고 누가 봐도 좋아하는 엄친아다. 자객을 보내면 자객이 길을 잃고 엉뚱한 사람을 죽이질 않나, 길을 잃으면 신선이 나타나 길을 가르쳐주고 보너스로 도술에 병법까지 가르쳐준다. 거기에 아버지끼리 미리 약속한 혼처에는 초특급 미녀 2명이 기다리고 있다.(뭐 이래....) 그래서, 흔히 이 소설을 전형적인 영웅소설의 구조를 갖춘 소설이라고 분석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일들이 너무 쉽게쉽게 이루어지는 바람에 읽는 독자들은 김이 빠질 법도 하다. 뻔한 이야기는 재미가 없으니까. 그래서 소설의 70%가 진행될 때까지 화진은 무력하게 당하기만 한다. 1-1번이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화진을 모함하여 옥에 갇히게 하고, 그의 두 부인중 5-1번은 승상 엄숭의 아들의 첩실로 몰래 보내버리고, 5-2번은 독살하기에 이른다. 아마 이 작품이 요즘의 일일드라마로 만들어졌다면 5-1번과 5-2번의 위기에서 시청률이 최고조에 달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렇게 플롯도 많고 등장인물도 많으니 전개가 빨리 될 리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창선감의록은 조선 후기에 창작되어 사람들이 즐겨 읽은 것으로 추정하는데,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이 아니라 세책가(책을 빌려주고 돈을 받던 곳)에서 에피소드별로 찔끔찔끔 출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딱 요즘의 일일드라마 정도로 보면 되겠다.
어찌되었든 주인공에게 닥쳤던 이러저러한 고난이 지나고, 기연을 만나 병볍을 배운 화진이 때마침 발생한 해적들의 반란을 평정하고 출세하게 됨으로써 이 모든 비극은 끝나고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여기에 껍데기는 제법 근대소설의 모습을 자생적으로 갖추어가고 있는 듯하지만, 아직도 벗어던지지 못한 권선징악의 메시지는 끈질기에 끄트머리에 엉겨붙는다. 시종일관 '이 인간들이 왜이래' 싶을 정도로 화진을 괴롭히며 몹쓸 짓을 일삼던 1번과 1-1번. 모든 음모가 밝혀지고 옥에 갇히자, 언제 그랬냐는 듯 확! 새 사람이 된다. 사실 어이없을 정도로 그들에게 당하면서도 화진은 원망은 커녕 그 비슷한 소리조차 한 마디 없고 그저 잘못 섬긴 자신의 탓이라며 하늘만 본다. 작가는 살아 움직이는 인간 화진이 아니라 '孝'와 '義'의 화신으로서의 인물을 만들어 조종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의 마지막도 '이러저러해서 화진과 두 부인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라, 개과천선한 1-1번을 보고 '이 일을 보건대 사람의 성품이 본디 착하다함이 과연이로다!'라는 감탄으로 소설이 마무리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옥을 쪼지 아니한즉 그릇을 이루지 못하나니, 군등이 금일 영화함이 어찌 곤액중으로부터 난 것이 아닌 줄 알리요!"하는 훈계가 더해짐으로써 이 소설은 막장의 이야기를 통해 '孝'와 '義', 그리고 고난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자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윤리 교과서같은 아쉬움에도 불구, 이 소설은 재미있다. 인물간의 갈등, 고난을 해결해나가는 주인공의 모습 등은 오늘날 보아도(요즘도 그러니까. 소설처럼) 충분히 흥미있을 만하다. 메시지는 그렇다해도 역시나 막장 껍데기는 예나 지금이나 잘 팔리나 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