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VD 재생기에 이상이 생겨 빌려놓고 한동안 못 봤던 영화다. 2시간이 넘는 상영시간을 견디며 쉬엄쉬엄 봤다. '견디며 봤다'는 것은 순전히 개인적 취향의 문제이다. 자극적이거나 빠른 화면 전개 따위 없다는 말이다. 호흡을 천천히 내뱉으며 보면 된다.
배경은 일본 패전 후로 어수선하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전쟁이 끝나기 전 농림부 소속 공무원으로 베트남에 파견된 유키코가 그곳에서 상사 도미오카와 불륜에 빠진다. 귀국하면 아내와 헤어지겠다는 남자의 말을 찰떡처럼 믿었지만, 관청을 그만둔 남자도 살 길이 막막하다. 남자를 잊지 못하는 유키코는 그의 주변을 끊임없이 맴돌고, 도미오카는 가는 여자 안 잡고 오는 여자 마다치 않는 나쁜 남자면서 단호하게 자살도 감행하지 못하는 지질한 남자다.
친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한 유키코에게 삶은 곧 죽음이다. 그런 그녀 앞에 등장한 도미오카는 죽음 같은 삶에 의지를 부여한 인물이다. 그러니 객관적으로 나쁜 남자 도미오카를 그녀는 미워할 수 없다. 도미오카가 '방' 구하라고 돈을 주지만, 그녀는 숨은 애인이 아니라 공식적인 아내로서 둘 만의 '방'을 갖고 싶어한다. 떠도는 구름처럼 두 사람의 인연은 흩어졌다 뭉친다. 겨우 찾은 그들만의 방은 일 년 내내 비가 퍼붓는 변방의 섬에 있다. 고난이 거기서 끝나는가 싶었다. 그러나 구름이 떠도는 것은 바람이 불기 때문이다. 결국 구름이 멈추는 곳은 바람의 쉼터였다.
흔히 인생을 부운(浮雲)에 비유한다. 이 영화에선 유키코와 도미오카의 떠도는 생활이면서 머무르지 않는 도미오카의 마음을 좇는 유키코의 사랑 같다. 사람의 마음을 손에 잡을 수 있다면, 애끓는 고통은 없을 것이다. 영화는 "꽃은 생명은 짧고, 괴로움은 끝이 없구나"란 자막과 함께 끝난다. 사랑은 짧고, 인생의 고통은 길다.
어쩐지 나는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을 무시할 수 없었다. 전쟁의 흉터가 남은 무너진 건물, 북적거리는 암시장, 미군을 상대로 생계를 이어가는 가난한 여자들, 변변한 방 한 칸 없이 떠도는 사람들, 한 편에선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자고 합창하는 사람들, 패전을 세계의 종말로 여기는 듯 마음이 병든 사람들을 상대로 어설픈 치료술을 통해 구원을 얘기하는 사이비 종교, 먹장구름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처럼 어지러운 시대 상황이 또 다른 '부운(浮雲)' 같았다.
그렇게 번잡한 세상에서 둘 만의 공간을 찾는 두 사람은 그들의 사랑이 불륜이기에 더욱 애처롭게 느껴졌다. 혼자 몸 건사하기 빠듯한 인정머리 없는 세상에서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두 사람이기에 더욱 절실했을 것이다. 하기야 시대를 떠나서 인정받지 못하는 불륜에게 그들만의 공간은 언제나 간절한 바람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