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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학의 숭고와 관련해서 진중권의 아트앤스터디 강의와 "현대미학강의" 책에서 처음 알게 된 '베이컨', 그는 경험주의 철학자 베이컨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 책에서도 '경험'이라는 단어를 많이 만나게 된다. 예술가의 합리성과 주관을 거쳐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노력한 기존의 미술이 아니라, 감각이 먼저 경험한 날 것 같은 인간의 모습을 그의 그림들에서 볼 수 있다. 그래서 들뢰즈는 그의 그림을 가지고 "감각의 제국"이라는 책을 썼단다.
얼굴인데 눈코입이 뭉개져 불분명하다, 이빨이 많이 보이는 입은 짐승처럼 포효하는 것 같다, 양감 있는 고기덩어리 같은 근육들이 뒤틀려있다, 피부는 멍든 것처럼 불긋 푸릇하다. 악몽에 나올 것 같은 얼굴과 몸들. 이러한 묘사를 통해 베이컨은 현대인이 당하는 폭력과 분열, 고통을 보여준다.
그의 그림에는 패턴이 있다. 묘사할 대상을 투명한 조각상 위에 올려놓거나 유리상자 안에 넣은 것처럼 3차원 프레임을 만들어둔다. 액자 안에 있는 것을 우리가 그림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베이컨은 자신이 그린 인물에 이것은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는 인위성을 부과하는 것이다. 자주 등장하는 기하학적인 선들은 인물을 가두는 감옥 같기도 하고 그 인물에 가해지는 폭력적인 에너지 같기도 하다. 그의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에는 기존의 미적 인식 태도에 따라 '무엇을 그린 그림'인지 유심히 보게 된다. 계속 보아도 여전히 뚜렷한 주제는 알 수 없지만, 어렴풋이 떠오르는 형상이 있다.
특히 그는 삼면화를 종종 그렸다. 중세에 성당에 장식하기 위해 많이 그렸던 삼면화의 세속적 버전인 그의 삼면화는 수수께끼를 담고 있다. 같은 인물을 왼쪽, 정면, 오른쪽에서 보고 그린듯 하지만 왜 그 세 이미지가 병치되어 있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이렇게 논리적, 이성적이지 않고 경험적, 감성적인 것이 그의 그림의 일관된 특징이다.
무엇보다 저자는 그림을 작가의 연대기적 경험과 떨어뜨려놓고 보자고 계속 주장한다. 물론 그림을 작가의 경험에 가두어서는 안되겠지만, 그것들이 어떻게 칼로 자르듯 깔끔하게 나누어질 수 있겠는가. 특히 두 인물을 그린 작품에는 베이컨의 동성애적 성향이 어떻게든 개입되어 있을테고, 마찬가지로 다른 그림에도 작가의 개인적 경험이 그림에 반영되어 있을텐데 그에 대한 언급을 저자가 일부러 회피하는 것 같아서 아쉬웠다.
아무래도 이런 시리즈는 도판이 많고 글씨가 적으리라는 생각 때문에 머리도 식히고 한 작가의 그림도 모아서 볼 겸 해서 도서관에서 5권을 빌려왔다. 평소 마로니에북스에서 나오는 잘 만든 미술 관련 서적들에 감사한 마음도 있었고 책에 대한 신뢰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은 글씨가 많을 뿐더러 외국인 비평가가 어려운 문체를 사용하여 미학자들의 언어로 쓴 듯한 내용이 다시 번역을 거쳤기 때문인지 읽기가 정말 어려웠다. '벨라스케스' 책도 동시에 읽었는데, '베이컨'보다는 '벨라스케스' 책이 좀 더 읽기가 수월했다. 원작이 문제인가, 번역이 문제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