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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의 책 소개글이 환상적이다. 그리고 책의 부제가 "세계 지성들의 빛나는 삶과 죽음"이라고 멋지게 붙여져 있어서 (원제에는 이런 부제가 없다) 선뜻 인터넷으로 구입을 했는데....기대 이하여서 실망이었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이었는지도 모르겠다.작년에 실망스럽게 읽었던 "나에게 남겨진 생이 3일밖에 없다면" 과 비슷한 느낌이 밀려 왔다. 내게 남은 생이 3일이 남았다면...이라는 책에 기고한 17명의 한국 문사들은 거의 위선으로 일관했다. 나도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정말 정확하게 생이 3일 남았다면....슬프게도 그럴싸하고 멋진 생을 마감할 3일간의 일정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책제목이 아주 그럴싸하듯...책 기획자의 의도는 좋았으나 내용이 나올 수 없는 기획이었던 셈이다.삶이 3일이 남았든 30일, 300일이 남았든..결국 지금 사는 것처럼 어영부영 지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깨닫지 못한 작은 존재이므로....
죽음을 그리다...라는 이 책도 제목은 그럴싸했고 작가의 기획의도도 그럴싸했으나 결국 죽음에 임박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문호들의 마지막도 그럴싸하지 못했다. 작가가 좋아하는 작가들을 모아서 그 작가들의 죽음에 대한 소문, 자료들을 모았으나.....그중 제법 정확하게 남아있는 일부 문인들의 죽음 순간도 결코 작가가 기대했던 것처럼 우아하거나 촌철살인 같은 경구나 선사들의 입적 때 남기는 열반송처럼 멋진 말을 남기지 못했고 밋밋했거나 참으로 실망스런...범부들의 그것과 같은 것이었음을 확인 할 수 있었을 뿐이다. 또 대부분의 문인들의 경우엔 죽음의 순간에 대해서 정확하게 남겨진 것이 없어서 결국 작가가 각문인들의 작품속에 남겨진 죽음에 대한 기술이나 철학, 인생관등을 가지고 작가가 그야말로 추리소설을 쓴 실망 그자체의 에세이집이 되었을 뿐이다.
이책으로 프랑스 메디치상을 수상했다고 되어 있어 무슨 상인가..하고 찾아봤더니..."...프랑스에는 공쿠르 상 외에도 무수한 문학상들이 존재한다. 그 종류로는...1909년 에드몽 공쿠르의 유언에 따라 제정된 공쿠르 상이 그 시초이고, 1925년 제정된 르노도 상.....등등등... 1958년 만들어진 후 새로운 기법을 추구하는 작가들에게 수여되는 메디치 상 등이 대표적인 문학상이다. 기존의 문법 틀을 깨고 새로운 기법을 추구하는 작가에게 주는 상...(출처 : ''메디치상이란 무엇인가요?'' - 네이버 지식iN)"..뭐 그렇게 권위있는 상은 아닌 것 같다.
작가가 문인이라...작가가 평소 흠모해 온 작가들은 죽을 때 아마도 멋진 장면이나 말들을 남겼으리라 지레 짐작하고 이 책을 쓰게 된 것 같은데....글쎄...작가라고 멋진 죽음을 했을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 된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작가건 대통령이건 그 누구건...죽음앞에선 그저 발가벗은 인간일 뿐이다. 굳이 작가라서 죽음이 달라야 한다면 오히려 말과 글로 삶을 살았던만큼 더 위선적이거나 작위적인 장면을 연출할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라고 깨달은 사람은 아니며 대통령이거나 최고 권력자 또는 유명한 철학자나 재벌이라고 해서 삶을 깨달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에 태어나 한세상 자기에게 부여 된 시간만큼 부여 된 역할을 하고 원래의 흙, 물, 불, 바람으로 돌아가게 되는 벌거벗은 동일한 인간임에 죽음이 무엇이 다를 수 있을까....그렇게 생각한 발상 자체가 오만이다....
한국어 번역판의 부제목을 "세계지성들의 빛나는 삶과 죽음"이라고 원제목에는 있지도 않은 것을 이렇듯 선정적이고 상업적으로 의도적으로 뽑은 출판사의 무책임과 상업성이 너무 심하게 거슬린다. [인상깊은구절] 말과 글도 피부처럼 늙어가고, 죽음, 공허함, 지방으로 덮인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파스칼: 인간은 無에서 나왔으므로 무를 볼 수 없고, 무한으로 쏠려가므로 그 것 또한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사물의 원칙도, 목적도 알지 못하는 영원한 절망속에서, 사물들의 겉모습을 알아 차리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본래 자리에서 떨어져서 다시 돌아 갈 수 없게 된 인간 인간은 혼자다. 따라서 인간은 홀로 죽을 것이다. 세비네 부인: 노년의 고통을 느껴야 하는 운명의 순간까지 질질 끌려 온 것 같다. 나는 거울 속에서 쭈끌쭈글한 할망구의 얼굴을 본다. 결국 이렇게 늙어 버렸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짜증스러운 병, 고통, 점점 사라져 가는 기억, 흉한 모습으로 가득한 노년의 여정을 밟지 않으려 기를 쓰고 있다 아무일도 하지 않는데도 하루하루가 흘러간다는 사실 때문에 화가 나요. 우리의 가련한 삶은 하루하루로 이어져 있고, 우리는 매일 시간을 허비하면서 늙어, 결국 죽음을 맞게 되죠 난 죽는 게 너무 두려워. 그래서 삶을 더 증오하지. 살면서 고통을 겪다가 결국 죽음을 맞게 될테니까... 볼테르: 삶이란 잠들 때까지 얼러서 재워야 하는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철저하게 잃어가며 죽음을 맞는다. 발자크: 나는 아내가 있지만 홀로 죽어간다.............더는 숨길 수도 없다. 하지만 내가 왜 이 빚을 갚기위해 낑낑댔을까? 왜 이 빚을 갚기 위해 고생한걸까? 내가 정말로 진 빚은 무엇인가? 누구에게? 무엇을?... 난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 그녀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더이상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난 누구를 그리워 하는가? 하인리히 하이네: 죽음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어요. 지금처럼 죽음이 아주 가까이 느껴지면 난 삶에 집착하고 싶소. 비록 삶이 썩은 들보라해도 말이오... 안톤 체호프: 사랑한다는 건 누군가에게 자신이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작은 존재라고 말하는 일과 같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반대로...행동하기 시작한다...그래서 슬픔이 시작되는 게 아닐까...)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의사들이 정해준 대로 죽고 싶지 않아요. 난 자유롭게 죽고 싶소 지그문트 프로이드: 늙음으로 인한 비참함과 괴로움에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나는 그리움을 품은 채 無로 가는 길을 준비한다. 죽음을 준비하는 일은 의미의 不在를 준비하는 일이다..... 죽음이란 무의미속으로 들어가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에 아무 목적이 없는 행위는 죽음밖에 없다. 죽은 사람들은 각자 다르지만, 죽음은 언제나 똑같다. 삶의 의미가 없으면 살아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도로시 파커: 시간, 바이올린.....,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것 같지만, 도로시 파커는 단 한번도 원하는 것을 가져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죽는 순간까지 아는 사람이 있을까...? 혹 알았다고 해도...그 것을 가졌다고 해도 그 것이 가졌던 것인지 어떻게 아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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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누구나 피하고자하나 피할 수 없는 유일한 사건입니다. 다만 죽음을 어떻게 맞는가는 선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죽음을 그리다>는 그런 선택에 도움을 줄만한 책읽기였습니다. ‘세계 지성들의 빛나는 삶과 죽음’이라는 부제처럼, 16세기말에 죽은 몽테뉴로부터 20세기 말에 죽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에 이르기까지 사상가와 문호 23명이 죽음을 맞는 과정을 소개합니다.
프랑스에서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는 저자는 평소 ‘작가들의 마지막 말과 글을 모은 책’을 쓰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다양한 자료에서 발췌한 인용문들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읽는 흐름이 끊어질 수는 있습니다. 그리도 그러한 인용문들이 전하는 작가들의 최후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사실여부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그저 작가들이 남긴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과 글 중 우리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살펴보고, 지금까지 우리가 몰랐던 작가들의 모습을 좀더 가까이 들여다보려했다고 합니다.
첫 번째로 등장하는 몽테뉴는 ‘죽음은 우주 질서의 일부이자 삶을 이루는 한부분이다. 그러니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바라지도 말라(29쪽)’는 말을 남겼습니다. 몽테뉴는 평소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했을 뿐 아니라 그의 수상록에서도 죽음에 관한 내용을 쉽게 만날 수 있다고 합니다. 몇 년 전에 읽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마무리하지 못한 그의 수상록을 조만간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파스칼 역시 죽음에 대하여 많은 고민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의 <팡세> 역시 죽음에 대한 글로 가득하다고 했습니다. ‘갑자기 죽는 것이야말로 가장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라고 한 것을 보면 파스칼은 얼떨결에 당하는 죽음보다는 당당하게 죽음을 맞고 싶었나 봅니다. 생트 뵈브는 그의 죽음을 이렇게 전합니다. ‘파스칼은 아주 슬퍼 보였지만, 그래도 충만한 기쁨을 느끼며 죽어갔다. 죽음을 맞는 순간, 그는 갑작스럽게 힘이 빠지는 듯 보였지만 고통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의 <팡세>의 마지막 몇 장과 비슷한 구성이 있다(58쪽)’ 사실적으로 보이지만 주관적인 묘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아는 것이라곤, 얼마 후에 내가 죽을 거라는 사실뿐이다. 하지만 내가 정말 알 수 없는 건 피할 수없는 죽음의 정체다(65쪽)’라고 한 것을 보면 담담하게 죽음을 맞았다는 그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가 하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자주 만났던 세비네부인의 경우 ‘난 죽는 게 너무 두려워, 그래서 삶을 더 증오하지. 살면서 고통을 겪다가 결국 죽음을 맞게 되니까(77쪽)’라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발자크의 죽음을 전하는 세 가지 이야기에서, 대문호들의 죽음에 대한 기록들을 저자가 어떤 시각에서 다루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전기작가들은 유명인들을 단정하고 겸손한 성격으로 미화해서 후대에 선보인다. 하지만 나는 유명인들의 결점, 실패, 비밀, 분노, 범죄, 악행, 우스운 짓, 수치스런 행동에 더 관심이 있다. 그게 더 글 쓰는데 도움이 되니까 말이다.(138쪽)’ 사실 선정적인 내용에 독자들이 더 관심을 가진다는 속설에서 저자 역시 자유로울 수가 없었나 봅니다. 이런 이유때문인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23명의 대문호들에 대하여 흔히 알고 있던 모습과는 다른, 때로는 충격적인 이야기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한 저자 덕분이겠지요.
대부분의 인사들이 자연사를 맞았습니다만, 부인과 함께 죽은 슈테판 츠바이크의 경우 자살한 경우입니다. ‘표절된 죽음’이라는 표제를 붙인 것처럼 그는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와 헨리에트 포겔의 죽음을 따라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죽음을 그리다>를 쓴 작가 스스로 고백한 짓궂은 면모의 일부일 수도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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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도 구입한 지는 꽤 됐는데 읽지 못했던 책이다. 주제는 역시(!) 죽음. 부제는 다음과 같다. '세계 지성들의 빛나는 삶과 죽음'. 아, 참으로 거창도 하지. 뒷면에는 이렇게 써있다. '메디치 상을 수상한 아름답고 지적인 에세이! 죽음 앞에 벌거 벗은 위대한 문인 23인의 영호을 담은 책'. 어느 광고가 그렇지 않으랴만, 과장이 좀 심하다. 에세이라는 것에는 동의하고 게다가 에세이라는 장르를 택한 것에 대해 플러스 점수를 주고 싶지만 아름답거나 지적인 것 같지는 않고 죽음 앞에 벌거 벗은 문인들의 모습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것이 세계 지성들의 '빛나는' 삶과 죽음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 책은 23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서술을 하고 있는데, 글쎄. 저자가 이 책이 에세이임을 분명 알고 있었기에 형식상으로 불만이 생긴다. 23명의 인물들을 중심에 놓을 것이 아니라, 차라리 자신과 죽음을 중심에 놓고 23명의 문인들을 끌어왔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결과적으로, 읽다보면 누구누구는 어찌어찌하다 어찌어찌 죽었고 어떤 일까지 있었더라... 하는 식의 이야기만 머리 속에 남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형식상의 아쉬움이 남는다는 거다. 또 형식이 달라졌으면 내용도 크게 달라졌을테니까. 모든 글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아주 소박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내는 것이 보편적인 감흥을 일으킬 때도 적지 않은 법.
그리고 파스칼이 생각하기에, '죽다'라는 동사가 '살다'라는 동사와 다른 점은 목적어가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삶을 산다'라고는 하지만, '죽음을 죽다'란 표현은 쓰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죽다'는 부사구와 함께 쓰인다. 예를 들어 '죽을 것 같은 고통 때문에 죽다'라고 표현한다. 일반적으로 '죽음' 앞에 '아름다운' 같은 형용사를 붙이기도 한다.
이런 부분이 파스칼이라는 인물 파트에 들어있을 것이 아니라 자신의 단상에 화두로 던지면서 글을 진행했으면 어떠했을까. 풋. 하긴 지는 쓰지도 못하는 주제에. -_-;;;
여튼 그리 추천하고 싶지는 않은 책. |
| 나는 책을 읽으면서 책에 집중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 책을 읽는 동안 그런 생각이 점점 심해져 책 읽다 말고 심각해져버리기도 했다. 죽음을 그려낸 이 책, 부제에 나온 것 처럼 세계 지성들의 빛.나.는. '삶'과 죽음이 담겨 있는거 맞나? 라는 생각이라도 들기 시작하면 책에 손가락 끼워놓고 이미 마음은 삼천포로 빠져들어버리고 만다.나는 이 책을 쓴 작가가 '죽음'에 대해 지독히 냉소적이다, 라고 생각을 했다. 아니, 좀 더 내 느낌을 얘기하자면 '죽음'이라는 것 까지 가지 않고 이 책에 언급된 수많은 작가들의 '삶'에 대해 지나치게 냉소적으로 쓰고 있다는 것이다. 왜 난 그정도로밖에 느끼지 못하고 있는걸까? 무슨 상도 받았다는데 말야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걸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거 아냐? 라는 생각을 할때쯤엔 이미 책의 주제와는 상관없이 얼마나 더 많은 이야기가 남아있는가만을 헤아리며 책장만 넘기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내 밑바닥에 깔려있는 '죽음의 공포'가 서서히 올라와 내 심장을 치기 시작했다. 나는 이 책과 마주하기 싫은거야. 아니, 나는 '죽음'이라는 것을, 거울을 통해서 보는 진실같지만 거짓인 그런 모습으로라도 마주하기 싫었던거야. 이렇게 뒤늦게 서서히 올라온 죽음에 대한 생각이 이 책을 '죽음'에서 '삶'으로, 박제화되고 미화된 삶의 모습이 아니라 투명하게 바라보이는 삶과 죽음을 그려낸 책으로 읽을 수 있게 해줬다.'자기 존재, 자기 말의 극한에 있는 존재, 자신의 군더더기를 삭제하다가 자신이 삭제되는 존재인 작가의 죽음은 평범한 인간의 죽음과 무엇이 다른가? 이들의 죽음은 우리에게 무엇에 대해 말하는가? 작가들의 죽음은 흥미를 일으키거나 우울한 비밀, 이들이 일으키는 혐오감, 또한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여러분은 혼자가 아니라고 알려주는 이들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게 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우리에게 현실, 의미없는 글 이면에 존재하는 뭔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작가가 된다는 것은 언어가 죽음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는지 생각하는 일이다. 그런데 죽음은 언어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는가?"(330)수많은 소설 속 삶과 죽음은 그 글을 쓴 작가의 삶과 죽음이 아니며, 삶의 모습과 죽음의 모습이 같을수도 없다. 그런데 왜 그들의 죽음에 관심을 갖게 될까? "난 이 책에서 작가들의 죽음을 사실 그대로만 전달하지는 않았다. 좀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 책에 나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그렇다면 이 책은 나의 죽음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것이다. 내 글은 간접적으로 나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죽음을 샅샅이 파헤치면서도 죽은 이들이 남긴 말을 비스듬한 거울처럼 삽입하며 글을 쓴다..."(342-343)결국 죽음이라는 것은 죽은이들의 몫이 아닌 것 같다. 지금 살아있는 자들에게 남겨진 몫이라는 생각이다. 죽음의 의미는 죽음을 그려내고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이 아니라 그 죽음의 의미를 내 삶에 새겨넣는 것 아닐까?책을 읽어가는 동안 '죽음'이라는 것은 내게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렸었다. 음악이 천재라 불리웠던 모짜르트가 죽고 난 후 쏟아지는 빗속에서 관도 없이 그대로 구덩이 속으로 던져지던 장면. 아마데우스라는 영화였을 것이다. 그런 무미건조하다 못해 죽음이라는 것이 차갑게 식어버린 시체와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었다. 그런데 책의 마지막장까지 다 읽고 난 지금 내게 떠오른 것은 한 베트남 주교님의 글이다."나는 기다리지 않으리라. 현재의 순간을 사랑으로 채우며 살아가리라". (지금 이 순간을 살며, 구엔 반 투안, 바오로 딸)죽음은 살아있는 자들에게 남겨진 의미이며, 내가 살아있는 동안의 의미일 것이다. 그 이후의 의미에 대해서는 나도 모른다. 다만 지금 이 순간을 살며 죽음의 의미를 삶에 새겨넣을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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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그리다:세계 지성들의 빛나는 삶과 죽음/미셸 슈나이더/이주영/아고라
하지만 죽음은 그리 문학적이지 않다.
부드럽게 낭송되는 시처럼 다가오는 죽음은 없다.
죽음은 더듬거리고 머뭇거리며 서서히 다가온다.
죽음이 가지고 있는 어리석은 모습이다. (본문 중에서. p193) 이런 책을 왜 구입을 했을까 하는 스스로에 대한 의아심과 함께 이런 주제로 책을 쓴 저자의 의도 역시 궁금하다. 이런 의문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작가들의 마지막 말과 글을 모은 책, 나는 언제나 이런 책을 읽거나 쓰고 싶었다라면서 내 책에서 날 다시 발견하고 날 피하기 위해서 (중략) 앞으로 다가올 나의 죽음을 작가들의 죽음을 통해 대충 간접적으로 보기 위해서 나는 이 책을 썼다라고 책을 쓴 이유를 밝혀 놓았다. 세계 지성들의 빛나는 삶과 죽음이라는 부제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거장들의 ‘죽은 이들의 거울’이라고 하는 저자의 말이 딱 어울리는 책이다. 소설가의 삶이 소설처럼 되는 건 아니다. 소설가의 죽음 역시 소설처럼 오히려 자신이 원하던 정 반대의 모습으로 죽어갔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죽음은 언제나 참혹하고 비참함의 극한에 이르러서야 마무리된다. 그것이 저승사자들이 즐겨하는 죽음의 유희이기 때문이다. 단지, 거장들의 죽음은 아름답게 포장되어 있을 뿐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다면 저자는, 위대한 지성들 역시 그들의 작품과는 달리 평범한 사람들과 꼭 같이 추한 소리 없이 맞는 죽음을 가장 두려워했던 몽테뉴는 설염 때문에 아무 말도 못하고 죽음의 시점까지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쓸 수밖에 없는 기묘하고도 당당하게 죽음을 맞고 싶어 했던 파스칼은 ‘나는 절대 홀로 죽지 않는다’는 스탕달은 자신이 원했던 묘지명조차도 그가 죽은 후 책과 꽃, 그리고 연인들, 정확히 이 순서로 좋아했던 하이네였지만
장미, 순수한 모순, 관능 그리고 많은 눈꺼풀 아래 누구의 것도 아닌 잠이고 싶은 마음이여라는 시를 자신의 묘비에 새겨지기를 저녁밥 잘 먹고 잠자리에 들어, 자는 듯 고요하게 가는 것이 소원이라고 그런 죽음이야말로 “내게 무덤은 이 세상 황후의 침대보다 더 부드러운 것이다”라는 표현에 꼭 맞는 죽음일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죽음에 영원한 안식 있을진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