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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 끝없는="" 음악의="" 길="">을 읽으면서 저는 가슴속에 북받쳐 오르는 뜨거운 감동을 맛보았습니다. 윤이상은 어린 시절 통영의 바다를 바라보면서 꿈을 키웠습니다. 밤바다를 떠가는 오징어잡이 배와 등대, 갈치잡이 어선의 휘황한 불빛, 그리고 밤낚시를 통해 끝없는 음악에 대한 상상력을 넓혀 나갔다는 사실을 확연히 깨달았습니다.
또한, 비교적 전통문화가 온존되어 있던 통영이라는 지역적 특성상 통영오광대놀이, 무당굿, 연등행사, 다리밟기, 단오제 풍습, 연날리기 경연대회 등 풍부한 문화유산을 윤이상이 직접 눈으로 보며 어린 시절부터 몸소 향유해 왔던 것도 윤이상의 예술세계의 폭과 깊이에 영향을 미쳤던 것도 아울러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동베를린 사건에 엮이면서 정치적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1967년 김형욱이 발표한 ‘간첩단 사건’은 천지를 놀라게 했습니다. 하지만 2006년 1월 국정원의 과거사진상위원회는 그러한 간첩단 사건이 터무니없는 조작이었음을 밝혔습니다. 국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과도하게 수사했다는 것도 증명해 내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그 당시 체제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뭔가 충격적인 사건을 만들어 국민들의 눈과 귀를 현혹할 재료가 필요했습니다. 그게 바로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그리고 동베를린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처음엔 동베를린 사건을 간첩단 사건으로 몰고 가려다가, 실체도 없는 상태에서 조작해낸 간첩 운운하는 부분은 대내외의 격렬한 항의와 비판 속에 유야무야된 채, 결국 관련자들을 국가보안법으로 옭아매어 차디찬 옥벽에 몰아넣고 말았습니다.
윤이상은 쇼스타코비치와 함께 현대음악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위대한 음악가입니다. 우리가 저 2002년 월드컵을 통해 한 덩어리가 되었음을 긍지를 가지고 추억하고 있듯이, 또한 우리에게 남겨진 오랜 문화유산을 뿌듯한 보람으로 여기고 있듯이, 이제 우리는 11년 전에 타계한 통영 출신의 한 탁월한 음악가가 전 세계의 음악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예술인으로 기억된다는 것을 가감 없이 우리 아이들에게 들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고난을 받았지만 생을 포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는 음악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감옥에 갇혀 머리맡에 놓인 물그릇이 꽁꽁 어는 살인적인 추위와 굶주림을 참으면서 그가 찬 마룻바닥에 이마를 댄 채 그려나갔던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목숨보다 소중한 음악이었습니다. 음악은 그의 자존심이었고 혼이었습니다. 음악은 그의 삶 자체였으며 그가 존재하는 이유 자체였습니다. 우리에게 윤이상과 같은 헌걸찬 정신의 소유자란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 존재인가요.
요즘 우리 아이들은 조급한 경향이 있습니다. 핵가족과 아파트 문화, 급속히 유입된 서구문화에 편승한 이기주의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참을성이 없고, 자기 자신만을 위하며, 남을 배려할 줄 모릅니다. 따지고 보면 아이들은 잘못이 없습니다. ‘문제아는 없고 문제 부모만 있다’는 건 세상이 다 아는 자녀교육 이론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요새 아이들과 달리 소년 윤이상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어릴 적부터 오래 참고 인내할 줄 알았습니다. 바이올린을 깨뜨리며 음악의 길을 포기하도록 강요했던 아버지의 완고함 앞에서도, 어린 윤이상은 서글픈 울음을 울었을지언정 내면에서 키우던 음악의 꿈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식민지 시절, 해방 이후의 어수선한 정국 속에서 윤이상은 독립운동을 했고 고아들을 양육하는 사업을 하면서 자신의 몸을 조국의 재건을 위해 바쳤습니다. 음악교사로서 고향 인근의 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음악의 길을 걷고 싶어 비교적 늦은 나이인 만 39세, 우리 나이로 꽉 찬 마흔에 서양 음악의 본고장인 유럽으로 날아갑니다. 그는 유학 가기 전까지의 삶을 백지로 돌리는 놀라운 선언을 스스로에게 던집니다. 그 전까지의 삶이 무가치해서가 아니라 앞으로의 삶을 무서운 각오로 새로 써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백기완이 말하는 장산곶매처럼 자신의 둥지를 깨는 것과 같습니다. 머나먼 나라로 날아가서 무서운 맹수와 싸워 이기기 위해 돌아올 곳을 없애는, 그리하여 배수의 진을 치는 의미로 자신의 삶의 터전을 산산조각 내는 강인한 결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윤이상은 1955년 앞으로의 인생 설계를 합니다. 유학에서의 성과를 내겠다고 하는 공부 계획, 공부를 통해 학위를 취득한 이후 작곡가로서 입지를 세우겠다는 계획, 실내악곡과 관현악곡 그리고 교향곡을 몇 년간 어떻게 작곡하겠다는 작곡 계획, 교수로서 입지를 세운 이후 한국의 후학들을 어떻게 가르치겠다는 교육 계획 등 자신의 일생 동안의 계획표를 세우기에 이릅니다. 윤이상은 자신이 유학을 떠나기 전에 세웠던 계획의 대부분을 모두 다 달성합니다. 특히 작곡 면에서는 자신이 세운 계획보다 초과 달성하였으니, 그가 고난에 찬 일생을 맞으면서도 자신의 예술적인 노력을 얼마나 초인적으로 투여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일생 동안 5개의 교향곡을 포함하여 총 150여 곡을 썼습니다. 40세에 유학 간 사람 치고는 놀라운 다작입니다. 하나같이 특별한 감흥을 일으키는 독특한 곡을 쓴 윤이상의 음악은 오늘날 현대음악의 5대 거장이라고 불릴 만큼 뛰어난 데가 있습니다. 1958년 다름슈타트 국제음악제에서 데뷔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후 생을 마감하기까지 37년간 유럽 음악사에 길이 남는 위대한 음악가로서 세계인들의 추앙과 존경을 받았던 윤이상. 곡절 많았던 그의 삶과 발자취를 다시 더듬어보며 되새길 수 있게 된 이 책을 만나게 된 것을 무척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자신의 음악 인생을 온통 바치고 싶어 했고, 실제로 그런 생각을 몸소 실천했던 선각자 윤이상. 그러나 유학 시절 그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갔던 동베를린 사건의 아픈 상처로 인해 평생 괴로움을 삭이지 못했던 비운의 예술가였기에 그의 인생 곳곳에는 늘 외로움과 비애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집 정원을 직접 파서 한반도 모양의 못을 만들고, 그 못을 바라보며 갈 수 없는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대신했던 윤이상의 쓸쓸한 나날은 고독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그러한 괴로움과 고독, 아픔과 상처를 뛰어넘는 아름다운 곡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윤이상은 오늘의 우리에게 자랑이자 긍지이며, 내일을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에게 미래를 열어가는 비전이 될 것입니다. <윤이상, 끝없는="" 음악의="" 길="">을 읽게 되면 비로소 만나게 되는 그의 고난에 가득 찬 생애, 고통을 뚫고 찬란히 꽃핀 예술혼의 소중한 의미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상깊은구절] 백년 세월은 한 마리 나비의 꿈과 같아라. 지난 일 돌아보니 덧없구나, 세상이여. 오늘 봄이 오면 내일은 벌써 꽃이 지네. 벗이여, 술잔을 드세, 저 등불이 꺼지기 전에. 쓸쓸한 내용의 합창이 울려 퍼지면서 오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얼어붙은 감옥에서 죽음과 싸우며 쓴 이 곡은 오페라 부파, 즉 희극 오페라였습니다. 합창 다음부터는 관객 누구나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이야기가 전개되어, 오페라극장에는 활기가 넘쳤습니다. 장자 부인 역의 슈미트, 젊은 과부 역의 프란체스카는 훌륭한 노래와 연기력을 보였습니다. 무대 장치도 이국적이어서 눈길을 끌었습니다. 비록 옥중에 있었지만, 윤이상의 정신은 시퍼렇게 살아서 무대 위를 넘실거렸습니다. 그의 혼은 결코 꺾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간첩으로 몰았던 권력도 결국 한 마리 나비의 꿈처럼 덧없이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보여준 겁니다. “브라보!” 공연이 끝나자, 관객석에서는 우레 같은 환호와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습니다. 무려 31번의 커튼콜을 받을 만큼 열광적인 호응이었습니다. 오페라극장에는 무대 앞에 커튼이 쳐져 있게 마련입니다. 관객들이 열렬하게 박수를 치면, 막이 다시 올라가고 출연진이 무대에 나와서 인사를 합니다. 이것을 커튼콜이라 합니다. 커튼콜의 횟수는 곧 공연의 성공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는 것이지요. 뜨거운 성공을 거둔 뒤라서 작곡가 윤이상의 자리는 더욱 허전해 보였습니다. 만일 윤이상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날 밤 영광의 주인공이 되었을 겁니다. ‘현대 오페라의 갈 길을 윤이상의 오페라가 열어 주었다.’며 비평가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독일 사람들도 즐거운 마음으로 오페라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서독의 뉘른베르크 오페라극장에서 오페라 <류퉁의 꿈="">과 <나비의 미망인="">이 공연되어 격찬을 받자, 전 세계 사람들은 윤이상을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때를 같이해 독일 정부는 윤이상을 빨리 석방해 달라는 공식 서한을 한국 정부에 보냈습니다. (본문 내용 18~20쪽)나비의>류퉁의>윤이상,>윤이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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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 선생은 일본 유학 시절, 일제의 사슬로부터 독립하고자 무인도에서 무기 제조를 하는 등 무장독립투쟁을 위한 모색을 했고, 조선어로 악보를 그렸다는 이유로 일경에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하는 등 민족 지사로서의 면모를 지닌 분이다.
유학 간 지 2년 만인 1959년에 세계적인 음악가로서 입지를 굳힌 윤이상은, 본래 일본 유학시절부터 책상 앞에「사신도」를 붙여놓고 음악의 영감을 떠올릴 만큼「사신도」에 매료된 사람이었다. 그는 1963년 북한을 방문하여 꿈에도 그리던 강서대묘의「사신도」를 직접 본 뒤 깊은 충격에 사로잡힌다. 자신의 예술적 원천인「사신도」를 눈으로 직접 본 윤이상의 감회는 감동 그 자체였다.
중앙정보부는 윤이상의 북한 방문을 문제 삼아 베를린에서 그를 전격 납치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체제 유지에 급급하던 유신 당국은 그 무렵 재불 화가 이응로, 국내의 천상병 시인 등 내로라하는 문화 예술인들을 동 베를린 사건으로 엮어 구속시킨다. 윤이상은 이때 받은 납치와 고문, 사형선고와 무기징역 등 중형 구형의 충격을 뼈아프게 겪는다. 결국, 국제적인 예술가들의 끈질긴 석방 요구에 의해 풀려난 이후에도 평생 이때의 아픔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윤이상은 그 깊은 상처를 딛고 일어서서 불멸의 명작들을 써낸다.
윤이상은 드라마틱한 생애 동안 뛰어난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현대음악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작곡계에 널리 떨쳤다. 도교 철학과 불교의 심오한 세계를 음악적으로 구현하여 유럽인들에게 동양 예술의 오묘한 맛과 깊이를 보여주었던 윤이상이 작곡한 오페라「심청전」은 용서와 화해, 사랑과 평화의 높은 정신적 영역을 보여준 수작으로 꼽힌다. 1972년 뮌헨올림픽의 개막작으로 상연된 이 작품은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슴 뭉클한 감동과 함께 깊은 인상을 남겼다.
윤이상의 음악적 업적을 인정한 유럽 사회는, 음악 활동에서 놀라운 공적을 세운 사람에게 주는 킬 문화상 수여를 통해 그의 빼어난 예술 세계에 대해 공감을 표시했다. 훗날 독일의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은 71세의 윤이상에게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훈장’을 수여함으로써 유럽의 문화예술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그의 빛나는 예술혼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보여주었다.
기억해야만 할 것은, 윤이상이 조국으로부터 박해를 받으며 고난 가운데 있었으면서도 항상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열망해 마지않았다는 점이다. 이 같은 숭고한 철학과 세계관을 몸속 깊이 각인한 채 평생 남북이 통일되는 그날만을 손꼽아 헤아리며 열정을 불태우던 그는, 끝내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채 이국땅에서 쓸쓸히 묻혔다.
한국이 낳은 불세출의 음악가 윤이상은 체제 유지에 급급하던 박정희 정권의 희생양이 되었지만, 감옥에서 풀려난 뒤에도 그의 음악과 예술철학에 대한 금제는 무려 30여 년 동안 지속돼 왔다. 최근 들어 윤이상평화재단이 생기고 서울과 부산, 통영 등 주요 도시에서 윤이상음악제가 열리는 등 그의 예술작품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져 반가운 마음이 든다.
이 책 『윤이상, 끝없는 음악의 길』을 펼치면 우리나라의 한 천재 음악가가 어떤 길을 걸으며 자신의 음악세계를 구축해왔는지, 그 고난의 세월과 치열한 예술적 노력의 흔적들이 생생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윤이상이 조국의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지, 그러한 그의 업적이 남북 모두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도 간결하고 쉬운 문체로 손에 잡힐 듯이 그려져 있다. 아는 사람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이다. [인상깊은구절] 은퇴하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언제나 생각했습니다. 그저 조용히 통영 바닷가에 앉아 물고기를 낚고 싶었습니다. 마음속에서 음악이 들려와도 그것을 써 두려고도 하지 않고, 고요 속에 몸을 뉘었으면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땅에 묻히고 싶었습니다. 윤이상이 기억하는 조국은 분단되지 않았습니다. 조국이 통일될 때까지 윤이상은 남한에도, 북한에도 속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통일된 조국이라야만 윤이상은 귀향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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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 끝없는 음악의 길』을 읽기 전까지 윤이상은 내겐 낯선 이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을 찬찬히 읽으면서 나는 윤이상이라는 인물과 친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그가 소년 시절부터 음악에 뛰어난 소질이 있었으며, 비록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음악을 공부하겠다는 집념을 꿋꿋하게 키워온 점이 새롭게 보였다.
작가가 없는 사실을 꾸며서 쓴 게 아니라, 있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한 대목이 돋보였다. 그래서 윤이상의 집념이 더욱 마음에 다가왔고, 그 집념 속에서 일군 예술이 무척 소중하게 여겨졌다.
윤이상은 한국이 낳은 위대한 음악가이다. 하지만 소년 시절의 윤이상은 밤바다를 좋아하고 하늘의 별을 헤아리는 걸 좋아하는 꿈 많은 소년이었다. 그가 남다른 점은 밤낚시를 하기 위해 혼자서 캄캄한 밤길을 십리도 넘게 걸어가, 통영 해안가의 바위틈에 앉거나 선 채로 긴 밤을 견디어냈다는 점이다.
그는 밤하늘과 끝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멀리 오징어잡이 배에서 환하게 불을 밝히고, 갈치 잡이 배에서 펄떡이는 갈치의 눈부신 비늘을 보며 한없는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 점이다. 윤이상은 꼬마 철학자였다. 별들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거나, 출렁이는 파도의 노래에서 수많은 음악의 언어들을 들을 줄 알았다.
윤이상의 마음속에는 이때부터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풍성한 소리들, 음표들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때때로 악상기호로 나타났고, 때때로 한 소절의 악보로 나타났다. 결국, 그 모든 것들이 모여서 윤이상의 빼어난 음악을 이루게 되었다.
윤이상은 생의 후반부에 이르러 가까운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조국에 돌아가면 고향 통영의 바다를 실컷 보면서 낚시를 해 보고 싶네. 그리고 젊을 때처럼 시나 소설을 쓰고 싶은 마음도 있다네.”(본문 190쪽)
윤이상의 마음에 풍부한 음악을 제공한 고향, 윤이상으로 하여금 음악을 못 견디게 하고 싶게 만든 통영의 바다를 그는 평생 잊지 못했다. 그의 일생의 주제가 된 고향 통영은 조국 한반도로 확대되어 한국의 민주화를, 그리고 남북한의 통일을 궁극적으로 추구하게 된 것이다.
유럽인들의 심금을 자아낸 그의 음악세계는 1958년 다름슈타트 국제현대음악제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후 1972년 뮌헨 올림픽 개막작으로 초연된 오페라「심청」으로 빛을 발했다. 그는 그 뒤로 유럽 음악사에서는 결코 없어서는 안 될 가장 귀중한 음악인으로 기억되어, 1988년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훈장’을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으로부터 수여받고 1992년 함부르크자유예술원의 ‘공로’상을 수상한 데 이어 1995년 독일 바이마르에서 괴테상을 수상하는 등 유럽 사회 최고의 명예를 안으며 전 세계 음악인들의 존경을 받게 된다.
『윤이상, 끝없는 음악의 길』의 추천사에서 황병기 교수는 “이 책을 통해 여러분은 윤이상 선생님이 얼마나 많은 고뇌와 노력을 통해 위대한 예술가로 거듭났는지를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뛰어넘고, 수많은 사람들을 뛰어넘었으며, 아픈 시대마저 뛰어넘으려 했던 선생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진정한 거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화여대 한국음악과 명예교수로서, 그 자신 걸출한 음악가인 황교수의 추천사가 가슴을 깊이 울렸다.
또한 이 책의 지은이가 서문에서 “이 원고를 꼼꼼히 읽고 의견을 주신 윤이상 선생님의 부인 이수자 여사”라고 언급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출간 전에 원고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책에 대한 신뢰가 갔다. 윤이상, 이제는 나에게 매우 친숙한 이름이 된 것만은 사실이다. [인상깊은구절] 윤이상은 자신의 음악이 경쾌한 것이 아니라, 정의를 향한 절규에 가깝다고 말해 왔습니다. 작곡가는 예술가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 세계에 살고 있는 한 인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코 이 세계를 무관심하게 바라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본문 17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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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으로 태어나 유럽 한복판에서 세계적인 음악가로 우뚝 서게 된 윤이상은 고난 속에서 불멸의 꽃을 피워낸다. 기록에 의하면, 윤이상은 어릴 적부터 음악적 재질을 나타냈고 음악인으로 성장하려는 뜻을 일찍부터 세웠다 한다. 완고한 아버지의 제재에 의해 그 뜻이 좌절될 뻔했으나, 그는 음악가가 되기 위한 자신의 목표를 결코 수정하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로부터 광복이 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 끝에 그는 꿈에도 그리던 작곡가가 되었지만 더욱 근원적인 음악적 지식에 갈증을 느껴 결국 유럽 유학 길에 오른다. 이후 펼쳐지는 음악가로서의 대성공 뒤에는 예기치 않은 늪지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동베를린 사건으로 인해 목숨이 경각에까지 이르는 파란만장한 굴곡을 겪은 그이지만, 윤이상은 끝내 음악으로써 절망의 협곡을 건너뛰고야 만다. 세계 현대음악의 거장으로 불리며 전세계인들의 깊은 존경의 대상이 된 그는 베토벤, 모차르트, 차이코프스키 이후 스트라빈스키와 어깨를 겨루는 거장으로서 음악사의 큰 획을 그었다. 우리 아이들에게 진정으로 읽히고 싶은 것은, 윤이상은 어떤 경우에도 음악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떤 삶의 목표를 정할지라도 정말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이 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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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는 그저 덤덤했습니다. 하지만 책장을 한 장 한 장 읽어나가다가, 그분이 세계에서도 그 실력을 인정받은 위대한 작곡가라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과거 우리나라의 정치 상황이 험악해서 그분이 고난을 겪었지만,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에서 그분에게 들씌워진 혐의는 무죄로 판명났고 또한 과거 박 정권이 공안정치를 펼침에 따라 억울하게 잡혀간 사실도 다 밝혀졌습니다.
유럽에서 이룩한 윤이상 선생의 업적과 뛰어난 음악성에 대해서 지난 수십년간 우리 사회가 제대로 평가한 적이 없었고, 무관심으로 일관한 것은 대단히 커다란 손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 눈높이에서 쓴 어린이 평전 <윤이상, 끝없는 음악의 길>을 통해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이 윤이상 음악의 높은 경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알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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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윤이상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윤이상을 자세히 아는 사람을 만나기란 더 힘들다. 그는 여전히 의문부호 속에 들어가 있고, 그의 음악은 여전히 난해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쳐놓은 수상한 그물 속에 그가 갇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의 음악은 더 널리 우리에게 다가와야 한다. 아니, 그의 음악을 결박지은 그 어떤 올가미를 우리가 과감히 풀어헤쳐야 할 것이다. 그 하나의 방법은, 윤이상의 음악을 어렵다고 여기지 말고 자꾸 듣는 것이다. 그렇게 했을 때, 그의 음악을 억압하는 보이지 않는 손들이 힘을 잃을 것이다. 또한, 그렇게 했을 때, 그의 음악이 온전히 우리 모두의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손에서 놓기 힘든 까닭이 여기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