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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낭만을 , 형에게 현실을 수혈받아 타자의 시선으로 갈무리하기
"아버지에게 낭만을 , 형에게 현실을 수혈받아 타자의 시선으로 갈무리하기 " 내용보기
두 해 전이었던 모양이다. 온라인에서 만나 교우하던 이들이 온라인에서 벗어나 세상에 나와서 해후한 적이 있었다. 온라인 속에서 살아온 닉네임만큼이나 다양한 외양과 성격을 가진 이들과의 만남이었다. 그 곳에서 만난 지인이 소개했던 책이 <캥거루가 있는 사막>이었다. 책을 구입하고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글쓴 이는 해이수라는 이름으로 글을 쓴 모양이다. 설핏 그의
"아버지에게 낭만을 , 형에게 현실을 수혈받아 타자의 시선으로 갈무리하기 " 내용보기
두 해 전이었던 모양이다. 온라인에서 만나 교우하던 이들이 온라인에서 벗어나 세상에 나와서 해후한 적이 있었다. 온라인 속에서 살아온 닉네임만큼이나 다양한 외양과 성격을 가진 이들과의 만남이었다. 그 곳에서 만난 지인이 소개했던 책이 <캥거루가 있는 사막>이었다. 책을 구입하고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글쓴 이는 해이수라는 이름으로 글을 쓴 모양이다. 설핏 그의 존재는 해이수라는 이름 속으로 감추어졌다. 어떠한 의미인지 알 수 없으나 글을 읽으면서 필명 아래로 자신의 존재를 감추기는 했으나 글에서는 자신의 존재를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그의 세계로 이제 들어갈 준비가 되었다.

 

    <캥거루가 있는 사막>은 표제작인 ' 캥거루가 있는 사막'을 포함해서 총 여덟편의 글이 모여있는 소설집이다. 소설집은 분절된 의식의 편린들이 모여있다.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놓았지만 소설집의 묘미는 분절된 의식의 개별적 혼합에 의한 재구성이다. 편린들을 주워모아서 진실인지 허상일지 알 수 없는 존재를 재구성하는 맛이 있다.

 

    해이수의 소설집에서 중심에 있는 것은 아버지의 이미지 , 형의 이미지 , 이방인의 냉철한 이미지 정도가 아닐까? 아버지에게서 어쩔 수 없이 피내림한 낭만주의는 표면에 드러나지 않고 혈관 아래로 유유히 흐른다. 형에게서는 현실을 살아가는 방법 혹은 현실의 갑갑하고 팍팍함을 수혈받았다. 아버지와 형에게서 받은 것들을 포장한 것은 투박하지도 세련되지도 않은 타자 혹은 이방인이 겪는 냉혹한 시선으로 갈무리 했다. 이러한 편린들이 해이수의 의식을 반영한다.

 

아버지의 로망은 '몽구 형의 한 계절'과 '출악어기'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몽구 형의 한 계절'에서 나를 몽구 형에게 보내면서 글쟁이로 거듭나길 바라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소설가로서의 로망을 기대하는 모습을 그려내고 '출악어기'에서 아버지는 고전을 강독하면서 길 위의 삶을 동경하고 길 위에서 살고 길 위에서 생을 마감하는 무엇인가를 갈구하는 낭만주의자의 삶을 그려내기도 한다. 해이수는 아버지의 이미지에서 피내림을 했지만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지는 않는 것 같다. 고상해 보이던 아버지는 몽구 형과의 대화에서 저급한 언어들로  이제까지의 언사들이 허식이었음을 폭로하고 출악어기에서도 길 위의 삶이 어떠한 의미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숨겨둔 아이들을 보기 위한 여정이었으며 고전을 강독하는 것도 허식었음을 까발린다. 아버지에게서 받은 낭만이지만 자기복제에 앞서서 철저히 깨부수는 자기부정의 의식을 행한다.

 

    '몽구 형의 한 계절' '어느 하오의 빈집털이' '돌베개 위의 나날'에 나타난 형 혹은 선배의 이미지는 소설가 혹은 소설의 임무인 현실에 대한 직시를 보여준다. 몽구 형은 '삐루 꼬뿌'를 깨고 다시 자신이 간직한 매실 장독을 나를 통해 깨어버리게 함으로써 외면했던 현실로 귀환을 하고 , '돌베개 위의 나날'에서 호주 유학생의 삶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호락호락하거나 판타스틱하지 않음을 불자(불법체류자)이면서 청소업을 하는 선배의 입과 행동을 통해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어느 하오의 빈집털이'에서도 선배의 모습은 안정되어있지 않고 뒤틀어진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낭만이 결여된 현실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낭만의 핏톨을 가진 사람들이 보기엔 마음이 일그러진 장애처럼 보인다. 그러나 더 슬픈 것은 그렇게 살지 않으면 현실을 살아낼 재간이 없다는 점을 인식하는데서 온다.

 

    이방인의 냉혹함이란 형의 현실인식과 궤를 같이한다. 호주 유학생 , 유학생 청소원 , 여행 가이드 등으이 해이수의 중심인물이지만 그들이 속한 사회에서는 이방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독자가 가질지 모르는 판타지를 일말의 망설임 없이 부순다. 현실은 판타지로 가득한 곳이 아니라 판타지 포장된 사살성과 인과의 법칙으로 움직이는 곳임을 해이수는 보여준다. 해이수가 선택한 글쓰기는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글쓰기 전략을 구사한다. 극단적 리얼리즘도  아니고 리얼리즘이라고 규정하기도 힘들다. 굳이 말하자면 해이수의 리얼리즘이라고 해두어야한다. 적당하게 사실적으로 보여주기 중도적 리얼리즘이라고 해두어도 좋겠다. 

 

    '환원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봐야한다. '환원기'는 해이수의 글쓰기에 대한 자기 고민의 토로이다. 스승의 글을 훔쳐 등단한 작가는 스승의 화두를 다시 생각한다. 호리병 속의 새에 대한 화두다. '너는 네 안의 칼자루를 두고 왜 남의 칼자루를 들려고 하느냐'는 스승의 일갈은 글을 쓰는 자라면 꼭 한 번 이상은 고민해왔을 문제다. 자신의 칼로 자기 글 속에 허상과 허깨비 우상들을 베어낼 수 있을 때 즉 자기 자신에게 할복을 행할 수 있을 때 타인의 칼자루를 빌리지 않아도 스스로의 글로 타인을 죽일 수 있는  경지에 이를 수 있지 않을까하는 고민이다. '줄탁지기'라는 고사가 인용된다. 병아리가 쪼는 지점을 어미닭이 정확히 쪼아주어야 병아리가 세상으로 나올 수 있다는  고사인데 어긋나면 세상 빛을 볼 수 없다는 이야기다. 사제의 관계라고 해야하나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미가 병아리의 울림을 듣고 거기에 반응할 수는 있어도 어미가 먼저 껍질을 쪼아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어미와 병아리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변형되기도 하고 다시 글쓴이와 독자와의 관계로도 변형될 수 있지 않을까? 작가가 쓴 글에 독자가 반응하는 것 공명이 일어났을 때 좋은 글은 세상에 나오는 것이 아닐까 잠시 상념에 잠겨본다.

 

    마지막으로 표제작 이야기를 해야할 시간이다. 호주의 사막을 여행하는 나는 코바와 우미코를 차례로 만난다. 나는 동성동본 애인 때문에 고민이다. 현실과 도덕적 윤리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 관념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다. 현실과 관념의 싸움에서 형체가 없는 관념이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코바와의 여행에서 캥거루는 후진이라는 것을 모르게 운명지어졌다는 소리를 듣는다.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않고 버스를 향해 뛰어드는 캥거루는 그렇게 운명지어졌다는 것이다. 우미코와의 만남을 통해서 나는 비밀에 대한 것을 묻어두는데 나는 그 비밀을 마지막에 풀어본다. 동성동본의 문제보다 더 윤리적으로 지탄받을 형국의 근친상간의 문제가 우미코의 비밀이었던 것이다. 세상에서 자신이 처한 문제만이 가장 큰 문제로 부각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더 큰 문제를 부각시키므로써 다시 사막과도 같은 현실로 돌아가서 사막이 아무리 덥고 힘들거 살기 힘든 환경일지라도 캥거루가 태어나면서 피내림한 운명이라는 것을 향해 돌진한다. 관념이 지배하는 세상에 당당히 도전장을 내미는 것이다. 그렇게 운명지어졌다면 캥거루처럼 부딪혀 죽으면 그뿐 후진은 없다.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캥거루는 사막을 가로질러 지금도 뛴다. 버스는 캥거루를 조심하고 비켜간다. 그렇게 현실은 진행된다.

 

    해이수는 자신이 만들어낸 관념도 쓸만치 써먹었고 경험도 쓸만치 써먹었으니 이제 어떻게 칼자루를 들고 설칠 것인지가 궁금해진다. 자신 속에 있는 칼자루를 들어 허상과 관념을 까부수고 독자들에게 위협적이지만 그 위험성 때문에 오르가즘을 느낄만큼의 흥분을 전해줄지 궁금해진다. 아니면 타인의 칼자루를 빌어 관념과 허상들 사이에서 칼질을 할 것인가? 해이수의 다음 글들은 언제 소설집이 되어 나올지 소설이 되어 나올지 은근히 기다려진다. 그 오르가즘에 카타르시스에 죽음을 맞으면 나로서는 가장 아름다운 죽음이라 말하겠다.

 

y*******n 2008.02.21. 신고 공감 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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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는 캥거루가, 책꽂이에는 해이수가
"사막에는 캥거루가, 책꽂이에는 해이수가" 내용보기
해이수의 <<캥거루가 있는 사막>>을 읽습니다. 해이수 작가의.  <엔드 바 텐드>가  세종문화도서에 선정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듣고 <캥거루가 있는 사막>을 다시 꺼내든 것은 이것이 그의 첫 작품집이기 때문이다. 해이수 작가의 단편집을 보면 한 사람이 썼다고 보기엔 너무나도 놀랍다. 각 작품마다 마치 다른 영혼이 깃들어 쓴 것 마냥 다채롭다. 또한 작품 하나하나마다 공들
"사막에는 캥거루가, 책꽂이에는 해이수가" 내용보기

해이수의 <<캥거루가 있는 사막>>을 읽습니다. 

해이수 작가의.  <엔드 바 텐드>가  세종문화도서에 선정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듣고 <캥거루가 있는 사막>을 다시 꺼내든 것은 이것이 그의 첫 작품집이기 때문이다. 해이수 작가의 단편집을 보면 한 사람이 썼다고 보기엔 너무나도 놀랍다. 각 작품마다 마치 다른 영혼이 깃들어 쓴 것 마냥 다채롭다. 또한 작품 하나하나마다 공들여 읽을 수밖에 없다. 해이수 작가를 한 번 접한 사람은 그의 작품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을 게다.

<몽구 형의 한 계절>
이 단편에서 ‘몽구 형’의 캐릭터는 매력적이다. 자신의 세계에 꼭 갇혀 있으면서 자기만 아는 해답을 내놓는 사람이다. 폼생폼사다. 온갖 폼은 다 잡으면서 자존심을 지키지만 사실 소설은 제대로 쓰고 있는지 의심이 가는 사람이다. 그의 말하는 수법이 꽤나 웃음을 자아낸다. 동문서답 같은데 우문현답일 수도 있는 듯한 대화와 삶이 이어진다. 캐릭터의 특징을 이토록 재미있게 이끌어 내다니 역시 해이수 작가다.
‘몽구 형의 한 계절’에서 이 마지막 부분은 나에게는 비장함으로 다가왔다. 몽구 형의 의도가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한 답은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삐루 고뿌의 이야기와 겹치면서 '소설'에 대한 의지의 발현이라고 여겨진다. 깨어야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깨라!” 이 한 마디는 나에게도 갇힌 세상을 깨고 나아가라는 말로 들린다. 작중 인물인 ‘나’에게도, 해이수 작가에게도 곧 알을 깨고 소설로 자신을 증명할 날에 도전장을 던지는 말이다. 그래, 힘들지라도 한 번 항아리를 갈라보자.
“깨라!”

<돌베개 위의 나날>
‘해이수의 소설이 '이방인의 소설’이라는 문학평론가 강유정의 평은 이 소설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개인적인 평일 수 있겠지만, <<캥사>>에서 <캥거루가 있는 사막>과 <돌베개 위의 나날>은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호주에서의 유학 생활의 단면을 여지없이 보여주어 중심이 아닌 곳에서 살아남으려 몸부림치는 자들의 이야기다. 변기 청소를 하는 유학생의 모습은 처절하다 못해 처참하다. 살아남기 위해서, 아니 겨우 그 땅에 겨우 빌붙기 위해서 식자는 가장 천한 일에 팔을 걷어 부친다. 그의 아내에게 여자로서의 최소한의 삶을 누리게 해줄 힘도 없다.
한 번이라도 의식주에 위협을 당해 본 사람들은 이 소설을 읽으며 감정을 이입할 수밖에 없다. 내 화장대 서랍을 열어 본다. 친구가 준 샘플이 아직 반이나 남아 있다. 한때(혹은 지금도 때때로) 필수품을 챙길 여력이 없었던 시절은 저절로 이 소설과 오버랩이 된다. 꼬물거리는 아기들을 먹이기 위해 쉴 틈 없이 일한 어깨가 아파서 한밤중에 저절로 눈이 떠진 적이 있다. 아무도 두드려 주지 않았던 어깨를 혼자 잡은 채 오열했던 그 울음을 기억한다. 그 울음은 ?돌베개 위의 나날?로 위로받는다.

<출악어기>
방랑벽, 김동리의 ?역마?와 ?출악어기?를 비교한다면, 전자는 운명적으로 타고난 역마살이며, 후자는 유전적으로 이어받은 방랑의 피이다. 유전적인 방랑이라는 면은 또한 두 작품의 공통적 맥락이기도 하다. 어쨌든 현대판 역마살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출악어기?에서의 아버지는 온통 문학과 철학과 그리고 길에 빠져 있다. 수렁에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듯이 아버지는 잘못 나선 길이라도 돌아오지 않는다. 서술자 ‘나’ 또한 아버지의 피가 면면하게 흐르고 있어 길을 거역할 수 없다.
나는 ?출악어기?의 아버지를 한편 이해하면서도 한편 그에게 분노한다. 방랑의 피를 이기지 못한 아버지는 낭만을 핑계 삼아 가족을 내팽개쳤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그런 피가 끓는 작가들을 대변하며 길을 나서는 사람들을 투영시켜 보여준다. 내 안에서도 그런 면이 숨어 있음을 안다. 그것을 끄집어내 보면서 나를 이끄는 길을 찾아가려는 욕망을 문지른다. 글쓰기를 향한 무한한 욕망은 가족을 책임질 수 없는 길이 될지도 모른다. 생계와 문학에 대한 욕망 사이에서 작가는 언제나 갈등할 수밖에 없다. 의무감과 책임감은 욕망을 억제시키는 효과적인 장치이지만 욕망을 언제까지 억제시킬 수도 없다. 또한 그 욕망은 현실적으로 전혀 쓸모가 없으며, 자신을 과장하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우리 전통무용단>
몸에 밴 자연스러움, 진정으로 흥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진정한 무용수였다. 박자에 맞춰 온 어깨로 흥겨움을 표현할 줄 안다면 그들의 삶은 축제의 연속일지도 몰랐다. 예술이 별거인가, 하는 생각을 한다. 시장에서 즐겁게 오고가는 대화가 시요, 친구들끼리 속닥거리는 추억이 소설이요, 스스로 즐기는 가식 없는 어깨춤이 무용이다. 내가 중심이 된 것이 우리 밖으로 퍼져나가 세계의 중심이 된다. 타고난 사람이 노력하는 사람을 이기지 못하고, 노력하는 사람이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 이제 나도 즐겨볼까, 덩실, 낙양동천 이화정!


<어느 서늘한 하오의 빈집털이>
호주의 한가운데에서 몸부림을 치는, 아닌 척하는 그들의 모습. 자신이 버림받으면서도 버리는 척하는 선배. 그를 이렇게 몰아간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의 삶을 전복시킨 것은 타지에서의 각박한 삶이 아니었을까. 초라하다. 이 작품 속에서 <돌베개 위의 나날>이 겹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게다.


<캥거루가 있는 사막>
해이수 작가의 데뷔작이다. 사막의 상징성과 캥거루의 운명은 인물이 처한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잘못될 운명인 줄 알면서도 길을 나서는 이방인의 모습이다. 사막에서 출발하여 다시 사막으로 회귀하는 그들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시작도 끝도 없는 길을 걸을 뿐이다. 결론을 지을 수 없는 사랑, 금지된 사랑을 품은 그들의 모습은 마치 죽음을 향해 달려드는 캥거루와 같다. 안 될 걸 알면서도, 죽을 것을 알면서도 뒷걸음질 칠 수 없으며, 절벽이 앞에 가로놓여 죽음을 인지하면서도 사랑은 멈추지 않는다. 도망쳐 보아도 도망칠 수가 없다. 비극적 운명의 사랑이란 끝도 없이 떠돌 수밖에 없는 삶이다.


<관수와 우유>
이 작품은 네이버오디오클립 ‘세 가지 열쇠말로 열어보는 문학 이야기’에서도 소개하였다. 이 이야기는 많은 청소년들에게 자신을 지키고 바른 길을 찾을 수 있게 도움을 줄 것이다. 더 많이 읽히고 더 많이 이야기하게 하고 싶다.
진실이란. 요원한 것인가. 우리에게는 진실을 밝힐 능력이 선천적으로 주어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능력이 없거나, 진실을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제대로 말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가해자일 때도 피해자일 때도, 방관자일 때도 그것은 마찬가지의 상황이 된다는 것이 답답하기 그지 없다.
어제 우리 학교 학생이 중학교 시절 억울하게 당했던 이야기를 써냈다. 당당하게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그저 당하고 뒤에서 저주를 퍼붓는 것밖에 복수할 길이 없는 자신의 상황을 답답해 하는 글이다. 우리의 관수와 학생들에게 패배감을 먼저 주고 포기를 먼저 배우게 해서는 안 된다. 약자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진실이 통하는 사회가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 아이들이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갖기를 바란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소통의 길을 찾도록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해진다.

<환원기>
고등학교 과정에서 이 작품을 김만중의 ‘구운몽’과 연결하여 가르치면 환상적이겠다는 생각을 했다. 작가가 되기 위해 스승이 던진 화두를 풀어야하는 성진의 모습은 ‘구운몽’에서 깨달음을 얻는 성진의 모습과 비교할 수 있다.
이 작품의 맨 앞에는 줄탁고사가 제시되어 있다. 갇혀 있는 세계에서 깨어나가야 하는 인물의 행보를 미리 암시한다. 성진은 스스로 자신을 깨지 못하고 스승의 작품을 훔치고야 만다. 남의 칼로 자신을 죽여버린 꼴이 되었다. 자신이 열망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남이 가진 능력? 남들이 원하는 능력? 사회에서 만들어낸 질서에 영합하는 것? 성진은 눈을 타인의 선에 맞추어 잘못된 선택을 해버린 게다.
그러면 이제 내 안을 들여다보자. 나 또한 남의 기준에 맞추어 나를 병 안에 가두고 두려워하고 있지 않은가. 아무도 나를 가두지 않았는데 스스로 나를 가둔 것은 아닌가. 온전한 나를 찾아 내 안의 칼을 벼려야겠다는 깨달음이 병을 깨길 바란다. 아니, 단 한 번도 내 자신이 병 속에 있지 않았음을 스스로 깨닫기 바란다.

m******i 2020.07.27.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