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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어떻게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을까? 21세기 현대의 과학은 바로 옆 분야의 언어조차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절감한다!) 고도로 발달해 있고, 전문화되어 있다. 그러나 그 고도화된 전문화의 바탕에는 어떤 궁극적인 정신이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것이 없다면 그것들은 ‘과학’이라는 하나의 용어로 불리지 못할 것이고, 또한 비록 어렵지만 대화조차 시도하지 못할 것이다. 그 하나의 정신은 사람마다 달리 파악할 수 있고, 또 때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달리 설명할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무언가 어슴푸레 잡히는 것이 없는 것도 아니다. 찰스 길리스피는 그것을 ‘객관성’이라는 정신, 혹은 관습, 혹은 기준으로 보고 있다. 과학은 ‘객관성’이라는 ‘칼날’ 위에 서 있음으로 동시대의 다른 과학자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었고, 후배들에 전수될 수 있었으며, 현대의 (사람에 따라서 달리 생각할 수 있지만) 권력을 움켜 쥘 수 있었다.
과학에서 객관성이란 무엇일까? 이 책에서 길리스피는 객관성에 대해서 정의하지 않는다. 마치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식이기도 하고, 이 책에서 서술하고 있는 과학사, 과학사상사를 따라가다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라는 식이기도 하다. 갈릴레오에서 케플러, 뉴턴, 하비, 멘델, 다윈, 카르노, 맥스웰, 아인슈타인(나는 이 목록에 많은 이들을 빠뜨렸다)에 이르는 과학자들의 업적과 그들의 정신은 자신들만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방식으로 과학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한 것이었고, 자연의 모습을 누가 보더라도 그럴 듯하게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을 ‘진리’라고 부를 수는 없어도, ‘객관성’만은 담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과학을 판정하는 기준은 ‘객관성’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은 ‘객관성의 칼날’ 위에 서 있다. 현대의 과학도 다를 수는 없다.
갈릴레오부터 시작하는 근대 과학의 흐름을 쓰고 있고, 또 과학자들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는 있지만, 과학자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들의 과학적 업적을 바탕으로 전개되고는 있지만, 결국엔 그들의 업적은 ‘과학적’ 업적이 아니라 ‘과학사상사적’ 업적으로 전환되어 설명한다. 에피소드는 하나도 없으며, 과학을 철학적으로 이해시키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기존의 말랑말랑한 교양과학서와는 차원을 달리하게 쉽지 않다. 의미가 있다. 그 과학자들이 자신이 하는 일을 그처럼 사상사적으로, 철학적으로 이해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업적은 시대와 발맞춰, 아니 시대를 앞지르며 새로운 사상을 싹틔웠다고도 할 수 있다. 이 과학적 성취에 뒤떨어진 철학은 고리타분한 말장난으로 전락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비유를 자주 사용하고는 있지만, 전혀 감성적이지 않는 비유들이고, 감동스러운 장면은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은 과학의 흐름을 감동적으로 쓰고 있다. 이전의 설명을 뒤집어 엎고 비약하는 과학에 감동하는 사람이 흔하지는 않겠지만, 그들이 그 상황에서, 그러한 비약을 이루기 위해 쏟아 부어야 했던 정신적 고투를 조금만 들여다본다면 감동스럽지 않을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것을 명시적으로 쓰고 있지는 않지만, 분명 그런 감동을 주고 있다. 감성적인 언어만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라, 딱딱한 언어로도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은, 과학이 가진 힘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책을 덮고 생각한다. 나의 과학은 ‘객관성의 칼날’ 위에 서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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