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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책 <양수리의 봄>은 표지만을 놓고 볼 때 자못 수상한 책이었다. 부제가 “수초섬에 사는 물새들의 희망찬 노랫소리”이고, 지은이가 “자연 생태에 관심이 많은 동화작가인 점, “아이들에게 자연의 소중함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주”라는 책 홍보 문구를 보면, 책은 얼마 전부터 부쩍 늘고 있는 ‘생태 동화’로 보였다. 그러나 책 뒤표지의 “꼬마 물닭 비비추가 과연 친아빠를 만날 수 있을까요?”라는 문구를 보면, 책은 주인공이 “너무나 큰 시련”을 겪으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해나가는 ‘성장동화’에 속하는 듯했다. 본문 뒤의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살펴볼 때, 이 책은 아무래도 ‘생태 동화’에 무게들 두려고 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책은 자칫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어정쩡한 책이 될 성싶다. 혹은 ‘생태동화’와 ‘성장동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다 잡을 수 있다는 작가와 출판사의 원대한 야심이거나 치명적인 실수가 될 지도 모를 일이다.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의 우화 버전과 생물학 버전, 생태 동화의 필요 충분 조건 어릴 적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를 학교에서 배운 적이 있다. 국어인지 도덕 과목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 나지 않지만 ‘자연’ 과목은 분명 아니었다. 그 이후에도 자연 과목에서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를 다시 배운 적이 없고, 실제 자연 속에서도 ‘개미와 베짱이’를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베짱이는 그저 겨울을 걱정하지 않고 여름 내내 나무 그늘 아래에서 노래를 부르는 곤충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정석대로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 버전’을 통해 ‘미래를 위해 늘 개미처럼 부지런해야 한다는 교훈’을 배웠다. 동물행동학자인 최재천의 말을 빌리자면 “베짱이가 쉬지도 않고 계속 노래를 해야 하는 까닭은 세월이 좋아 놀고먹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여름이 가기 전에 여러 암컷들에게 잘 보여 더 많은 자손들을 퍼뜨려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번식기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열심히 먹어 몸을 살찌운 수컷”들이 제 짝을 찾기 위해 “노래를 부르느라 자신의 위치가 포식동물들에게 알려지는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나무 그늘에 숨어 나름대로 열심히 일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또한 “개미들은 군락 전체로 볼 때 부지런한 것이지 한 마리 한 마리를 놓고 볼 때는 결코 부지런한 동물이 아니라”며, “대체로 어느 군락이건 일하는 개미들이 전체의 3분의 1을 넘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개미들에 비해 두 배는 족히 되는 개미들이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만 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평소 “알면 사랑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고 한다. 최재천은 “알면 사랑한다.”는 말에 이어 “동물들이 사는 모습을 알면 알수록 그들을 더욱 사랑하게 되는 것은 물론 우리 스스로도 더 사랑하게 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고 한다. 최재천은 또한 “나는 동물행동학을 연구하는 자연과학자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의 모습에서 인간을 보려는 인문학자이고 싶다.”고 덧붙이고 있다. 우리는 최재천의 말 속에서 “(어린이가 읽을) 자연 생태를 다룬 책”, 생태 동화가 갖추어야 할 요소들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생태 동화는 ‘자연과학자의 관찰력’과 ‘인문과학자의 사고력’(철학)을 모두 갖추고 있어야 한다. 우선 자연과학자의 관찰력은 동물이나 식물, 자연을 사랑하기 위한 ‘앎의 필요 조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그친다면 ‘생태 동화’라 할 수 없다. 책이 그러한 ‘필요 조건’만 갖추고 있다면, 그것은 ‘자연 도감’ 혹은 ‘백과사전’으로 불려야 옳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태 동화는 ‘인문학자의 철학’을 아울러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 철학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문제를 푸는 일이다. 인간은 만물(萬物)의 영장이라 한다. 그러나 이 말이 곧 ‘인간은 자연의 지배자’라는 말은 아니다. 만물 중에 으뜸이라 함은, 곧 인간은 ‘구천 구백 구십 구 가지 동물(과 식물)’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도 자연의 질서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자연의 일부라는 틀림 없는 사실을 바로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 책의 지은이의 말처럼 “오늘 날 자연을 망치고 있”고 “비비추와 비또베또, 체리가 살아갈 땅과 물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은, 인간은 자연을 지배해야 한다는(지배할 수 있다는) 욕심 때문인 것이다. 자연에 욕심이 있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간섭을 하지 않을수록 자연은 더욱 풍성해진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는 인문학자의 철학은 곧 ‘자연과 더불어 사는 법’을 깨우쳐 준다. 그 인문학자의 철학은 생태 동화의 충분 조건이 된다. 올바른 생태동화는 자연과학자의 필요 조건과 인문학자의 충분 조건이 모두 갖춰져 있어야 한다. 동화 중에서도 역사물과 함께 생태 동화를 쓰는 일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사계의 이미지, 시간적 생태적 특징 책은 ‘봄-여름-가을-겨울-새봄’의 변화를 순서대로 그리고 있으며, 34개 각 소제목마다 2~10쪽으로 지면을 구성하고 있다. 따라서 책은 글 자체의 힘 이외에도 짧은 글을 여럿 배치함으로써 끝까지 읽히게 하는 효과를 얻고 있다. 책은 시간적 배경 이상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각 계절의 특징이나 변화를 시각적․청각적 이미지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책은 봄을 “얼었던 강물이 녹고 파릇파릇한 새싹이 올라오는 3월”(14), “찬바람에 오들오들 떨던 느티나무 높은 가지에 연둣빛 새싹.”(14)로, 여름을 “먹구름이 몰려들더니 바람이 거세게 불면서, 조용했던 수초섬은 흔들리는 갈대 소리로 술렁대기 시작”(48), “후드득 후드득 굵은 빗방울”(49), “‘우르르 쾅쾅’ 천둥소리”(49), “장마가 끝난 뒤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쑥부쟁이, 소리쟁이가 자라나면서 수초섬은 하루가 다르게 예전의 푸른 모습을 되찾아갔습니다.(54), “매미가 맴맴 시끄럽게 울어대고 물봉선화, 노랑어리연꽃 등 수많은 여름 들꽃이 만발하면서”(69)로, 가을을 “여름 내내 푸른빛을 뽐내던 수초들이 엷은 갈색옷을 갈아입고 갈대꽃은 은빛으로 반짝이며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였지만, 물새들의 노랫소리는 들리지 않고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소리만 맴돌 뿐”(136)으로, 겨울을 “물은 얼어붙고 들판은 눈으로 뒤덮”(176)이고, 새봄을 “땅과 맞닿아 있던 회색 하늘이 파란빛으로 느티나무 높은 가지에 걸리고, 붉은 해가 떠올라”(178), “얼었던 강물이 풀리면서 ‘쩍쩍’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178)로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책은 사계의 계절별 특징을 세심하게 잡아내지는 못한 듯하다. 계절을 표현한 ‘색깔과 소리’는 물론 ‘대표적’이긴 하지만, 계절의 다채로운 변화를 나타내지는 못한다. 여러 ‘주변적’ 색깔과 소리 또한 보여주고 들려주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여름에는 ‘수많은 여름 들꽃이 만발’하다고 했는데, 양수리의 여름 들꽃이 ‘물봉선화와 노랑어리연꽃’뿐이고, 나머지는 정말 ‘무명화’(無名花)들일까? 겨울은 특히 내용에서도 단 2쪽뿐이다. 책은 이처럼 계절의 변화를 ‘사전적’ 혹은 ‘관념적’으로 표현하여, 아이들에게 자연의 섭리를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아무래도 꼼꼼하고 세심한 ‘관찰력’이 부족한 탓이기 쉽다. 양수리의 ‘사계’(四季)를 ‘생태적’으로 살펴보면, 봄은 구애와 짝짓기, 둥지 틀기의 계절이며, 여름은 생명의 탄생과 성장, 생존에 필요한 교육의 기간이다. 가을은 방어벽과 갈대가 없어져 둥지와 새들의 먹이인 물고기가 없어진 삭막한 때이고, 겨울은 눈과 추위 때문에 새들에게 가장 힘든 계절이지만 내일을 위해 시련을 견뎌야 하는 시간이다. 따라서 새봄(‘여름’ 이전의 ‘봄’이 아닌 ‘겨울’ 후의 ‘새봄’)은 “수초섬에 사는 물새들의 희망찬 노랫소리”가 가득한 생명력의 시간이다. 그러나 새봄은 또한 완성형이 아닌 “앞으로도 많은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을 테지만 강물이 오염되지 않는 한(……)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이 평화를 지켜나”(200)가야 할 진행형의 시간으로 보아야 한다. 책은 사계의 생태면에서도 다소 아쉬움을 남긴다. 책은 사계의 생태적 특징도 지은이의 주관 없이 ‘자연의 질서’ 그대로 설명해야 한다. 책은 봄과 여름을 나는 물새들의 생태에 비해 ‘둥지와 새들의 먹이인 물고기가 없어진 삭막한’ 가을 ‘가장 힘든 계절’인 겨울을 겪고, ‘희망찬 노랫소리를 지켜나가야 하는’ 새봄을 맞는 물새들을 생태적으로 그려내지 못하고 있다. 이는 어쩌면 봄과 여름에 비해 나머지 계절들의 생태적 특징이 상대적으로 적은 탓일 수도 있다. 그러나 책은 방어벽이 무너지고 둥지를 잃고, 먹을 것을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가을과 겨울에 물새들이 어떻게 제 생명을 유지하는 지를 좀 더 자세히 알려줄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등장인물 파악의 중요성, '알면 사랑한다' 등장인물은 물새들이다. 생태와 관련된 글이니 만큼 작가는 등장인물의 특징을 자신의 주관대로 부여해서는 안 된다. 작가는 각각의 물새가 갖고 있는 모양 그대로를 그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각의 습성을 자연과학자(좁게는 동물학자)처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지은이가 별명을 부여한 대로 라두칸과 비비추는 ‘보안관’, 카얌은 ‘춤박사’, 루미 선생님은 ‘똑똑함’. 쿰바는 ‘우직함’, 싸보는 ‘싸움보’의 속성을 보편적으로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카얌의 개성은 뿔논병아리 중 개성이 강한 ‘특정의’ 뿔논병아리의 성질이 아니라, ‘뿔논병아리’ 자체의 특성이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생태 동화니 만큼 독자도 등장인물을 파악하는 데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알아야 사랑할 수 있다’고 했다. 책은 물닭 라두칸, 논병아리 쿰바, 뿔논병아리 카얌, 쇠물닭 싸보에 관해서는 겉모습이나 습성에 관해 잘 알려주고 있다. 물닭은 깃털은 까만데 부리와 이마판이 하얀 모습에, 잠수에도 능하고 동작이 빠른 물새로 짝짓기를 마친 후에 둥지를 튼다. 논병아리는 둥지를 먼저 튼 후에 짝짓기를 하며, 둥지도 같이 짓고 알 품기도 번갈아 하는 ‘일등 평등 부부’다. 또한 제 새끼를 등에 태우고 다니며 둥지는 항상 제 손으로 짓는다. 평소에는 “킷 킷 큐루루루!”, “키리리- 키리리리!”라고 노래하지만, 위험에 처했을 때는 “릿, 릿, 큇, 큇큇……”처럼 단음절 형태의 소리를 낸다. 뿔논병아리는 까만 뿔 깃털이 뾰족뾰족 솟아 있고, 기다란 목에는 검은 깃털이 나 있어 마치 나비 넥타이를 맨 신사 같으며, 날개를 활짝 편 채 제자리를 빙빙 돌기도 하고, 날개를 펄럭이며 펭귄처럼 뒤뚱뒤뚱 춤을 추는 ‘춤박사’로서 “삐유삐유삐유 삐요오~ 삐유삐유삐유 삐요오~ 삐요오”라고 노래한다. 쇠물닭은 날카로운 부리와 빨간 이마 판 때문에 사나운 인상을 풍기며, 작은 물새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싸움보’다. 그러나 흰빰검둥오리 루미 선생님, 꼬마 물떼새, 개개비 아줌마, 황조롱이 홀리몰리의 겉모습이나 습성에 관해서는 언급이 거의 없다. 역할(비중)에 따른 선택으로 보아야 할까? 황조롱이와 개개비의 세밀화가 있는 것을 보고, 아이들이 황조롱이나 개개비의 습성을 궁금해 할 수도 있을 듯하다. 아무래도 비비추와 함께 후반부 이야기의 중심축인 비또베또, 즉 ‘흰뺨검둥오리’의 겉모습이나 습성’에 관해서도 설명이 없는 것은 아무래도 아쉽다. 앞에서 ‘꽃이름’에서도 지적했듯, 저자가 “쇠물닭 싸보는 능청스럽게 물고기 한 마리를 잡아 삼키며”(23), “싸보가 작은 물고기를 잡아서 비비추의 관심을 끌었습니다.”(93), “그곳에는 이름 모를 새들”(118)처럼 동식물을 ‘이름 없는 불특정 다수’로 표현하는 것도 아쉽다. 아이들이 자신이 고등어나 꽁치를 좋아하듯, 싸보나 비비추가 어떤 물고기를 좋아하는지 알고 싶어할 지도 모를 일이니까. 문학비평가 유종호는 “한 작품을 읽을 때 우리는 우리가 읽은 책을 모두 겹쳐 놓는 것이다. 꼼꼼히 읽는다는 것은 그러므로 넓게 읽는 것이기도 하다.”라고 했다. 내가 그의 말 뜻을 제대로 파악했는지도 모르고, 내 능력이 턱없이 모자라지만 나 또한 책을 읽을 때마다 유종호의 독서법을 따르고자 한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세상 모든 것은 저마다 이름을 가지고 태어났다”며 주위의 물고기나 나무의 이름을 모두 고유명사로 불러주는 <우리들의 여름>이 자연스럽게 겹쳐졌다. 당연히 듣게 될 줄 알았던 각 물새들의 노랫소리도 ‘논병아리’나 ‘뿔논병아리’ 외에는 들리지 않는 것도 지적할 수 있겠다. ‘논병아리’의 경우처럼 평소 때와 위기(경계) 상황일 때 내는 소리, 어미새(아비새)와 새끼의 소리를 구별하여 알려주었으면 금상첨화였을 것이다. 책은 물새들의 습성과 함께 삶의 모습을 잘 알려주고 있다. 물새들의 춤은 구애의 춤이고(“험 뿔논병아리가 사랑을 고백하고 있었군”/20), 종족 유지의 치열함이 있고(“산란기가 가까워지면서 총각 물새들이 몇 안 되는 처녀 물새를 두고 사랑을 얻기 위해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습니다./22), 동물들도 영역 다툼을 한다(“싸움보 싸보와 라두칸의 대결”/22). 동물 세계에도 따돌림이 있고(“골칫덩어리 싸보에 대한 물새의 불만은 더 높아져서, 싸보는 점점 따돌림을 받았습니다.”/36), 먹이사슬의 관계와 새끼들에 대한 물새들의 사랑이 있으며(“물뱀 무자치가 나타났다!/37), 생존에 필요한 교육이 이루어진고(“얘들아, 아빠가 하는 걸 잘 봐! 이렇게 날개를 펴고 힘껏 날개를 치면서 뛰어내리는 거야.”/91), 동물세계에도 지도자가 있다(“꼬마 물새들의 골목 대장 뽑기”/100). 동물들의 공동체적 삶을 알아야 자연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책에 따르면 물새들의 새끼는 ‘흰빰검둥오리(루미 선생님)-뿔논병아리(카얌)-쇠물닭(싸보, 이상 48)-논병아리(쿰바)-물닭(라두칸, 이상 54)-개개비(55)-꼬마물떼새(69) 순으로 태어나고 있다. 예전 자연 타큐멘터리에서는 그 순서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확인해주면 고맙겠다. 뱀의 꼬리, 필요 없거나 엉뚱하거나 뜻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한번(한 번)’의 띄어쓰기가 일관성이 없는 듯하다. “한 번”(36), “한번도”(43), “한 번만”(45), “한번”(63), “한번도”(84) “한 번도”(131), “한 번도”(141), “한 번도”(161), “한 번도”(180), “한 번”(198), “한번”(200)의 경우를 살펴보기 바란다. “그 때”(17)는 다 띄어쓰기를 하고 있는데, “그때”(199)만 붙여 쓰고 있다. “친척 뻘 되는”(21)에서 ‘-뻘’은 접미사이기 때문에 “친척뻘 되는”으로 써야 하고, “탐 났던”(34)은 “탐났던”으로 써야 옳다. “의기소침해진 싸보”(37)와 소제목 “의기 소침해진 쇠물닭 싸보”(43)의 띄어쓰기 역시 서로 다르게 되어 있다. “승부가 나지 않고 이대로 싸움이 끝난다 해도 어쩌면 상처 때문에 둘 다 목숨이 위험해질 수가 있습니다.”(40)는 논리에 맞지 않는 문장이다. 무자치는 “꼬리를 움츠려 (라두칸의) 공격을 피”(39)했기 때문에 상처를 입지 않았다. 꼬마물떼세의 공격 또한 “왔다갔다 하며 약을 올리”는 것으로 그쳤다. 공격을 직접 당하지 않은 무자치가 “상처 때문”에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은 정황으로 보아 맞지 않다. “험험, 너, 무자치? 나, 라두칸이야!”(56쪽)는 어느 영화 대사인 듯하다. 아이들이 그 영화를 보았을 것은 전제로 했는지 무슨 효과를 노리고 썼는지 의문이다. “세밀화”로 유명한 그림작가”라는 말에 잔뜩 기대를 했지만, 세밀화는 물새들의 ‘증명 사진’ 뿐이었다. 더구나 꼬마물떼새의 그림은 없다. 2쪽에 걸쳐 봄-여름-가을-겨울의 정경을 그린 그림은 색깔의 변화를 통해 사계의 순환을 표현하고 있지만, 양수리를 나타내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또한 ‘네 번째 이야기’는 제목은 ‘겨울 그리고 새봄’임에 반해 그림은 겨울 정경이라 썩 어울려 보이지는 않는다. 겨울과 새봄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것이 쉽지 않았겠지만, 그림이 새봄(첫 번째 이야기의 ‘봄’과는 다른)의 희망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본문에서는 그림 작은 컷으로 해당 내용을 잘 설명하고 있다. 그림들만 보고도 이야기의 전개를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본문 내용을 잘 표현하고 있다. 구도가 다양하지 못한 것은 책의 판형 때문이라고 해도, 그림이 ‘자연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주지는 못한 듯하다. 알 낳는 장면, 둥지 짓는 장면, 새끼들이 태어나는 ‘스냅 사진’들도 세밀화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할 일이었을까? 부록인 노래 CD는 아이들이 책을 싫증나지 않고 끝까지 읽게 하는 효과를 준다. 때에 맞춰 노래를 듣다 보면, 아이들은 책 내용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고 느낄 것이다. 다만 노래 전체가 글의 전개와는 다소 다르게 밝은 노래뿐인 것이 아쉽다. 그중 슬프다고 할 수 있는 <꼬마 물닭 비비추>는 곡이 밝은 것은 아닌지? 노래를 아이들이 따라 부르기에는 다소 어려운 듯하다. 생태 동화를 찾아가는 길을 쉽지 않다, 우공이산의 교훈 ‘작가가 하고 싶은 말’에서 밝혔듯, “(인간의) 그런 욕심이 오늘 날 자연을 망치고 있”다. 그런데 책은 양수리가 망쳐지고 물새가 위기를 맞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 주범인 ‘인간’을 고발하지는 않는다. “난데없이 나타난 수상 보트”(75) 때문에 둥지가 위기에 처하고, “또다시 나타난 수상 보트”(113) 때문에 별난이가 죽지만, 물새들은 인간을 탓하지 않는 듯하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을 따르는 것일까? 때문에 애꿎은 ‘비또베또’만 속죄의 길을 떠나고 만다(이는 이후 생태동화에서 성장동화로 넘어가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고 만다). “통통배는 수초섬 방어벽 앞에 멈추더니, 수초 더미가 썩어서 물이 흐려진다며 긴 낫으로 수초며 갈대를 잘라 배에 가득 싣고 돌아갔습니다.”, “그 다음 날에는 사람들이 수초섬까지 몰려와서 갈대들마저 모조리 베었습니다.”(137) 소제목이 “방어벽 수초 더미를 거둬 가다니”이고, 정황으로 보아 사람들이 한 짓이 잘못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수초더미와 갈대를 제거한 것이 인간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일까? 아니면 탁상행정 식으로 혹은 자연 생태에 대한 적확한 지식 없이 ‘눈에 보이는 수초와 갈대’를 제거하는 사람들의 근시안적 환경책을 탓하는 것인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이곳마저 오염되어 버리면 물새들은 정말 갈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물새들은 수많은 고통을 겪으면서도 결코 양수리를 포기하지 않는 거랍니다.”(185) 책은 여전히 강물 오염으로 겪는 물새들이 고통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양수리의 오늘 날을 과거와 비교하여 물새의 종이 줄어들고 있다거나 하는 생태계 변화를 보여주는 것은 어땠을까? “앞으로도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테지만 강물이 오염되지 않는 한 비비추와 비또베또, 체리 그리고 양수리의 물새들은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이 평화를 지켜 나갈 것”(200) 양수리의 물새들에게 강물 오염, 즉 인간의 자연 파괴가 가장 심각한 일이다. 인간의 자연 파괴 행위는 ‘장마에 떠 내려온 쓰레기’(54), ‘수상 보트’, ‘어부지리’격으로 ‘그물에 걸린 쇠물닭 싸보를 별미로 먹는 통통배 사람’(127) ‘수초섬 뒤에서 울린 요란한 총성’(173), ‘밀렵꾼이 놓은 덫’(191) 등이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는 책에서 물새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은 아닌 듯하다. “새로운 시작, 새로 시작된 위험”(183)에서, 수초섬을 향해 점점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 는 ‘마기투로’다. 새롭게 시작하는 물새들에게 위험한 것을 ‘동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자연 파괴의 주범은 ‘자연의 법칙대로 살아가는 동물’이 아닌 ‘자연을 지배하려는 욕심 많은 인간’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의 지적과도 맞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설정으로 “별난아! 죽으면 안 돼, 죽으면 안 돼. 누가 내 새끼를 이렇게 했어? 누가, 누가! 별난이를 살려 내, 별난이를 살려 내란 말이야!”(117), “아빠의 깃털을 본 어린 카미로의 눈에서 증오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습니다.”(129)에서 보이는 분노는 결국 허망한 것이 되고 만다. 인간은 물새들의 도우미 역할까지 해낸다. “비비추! 밀렵꾼들이 놓은 덫이 있는 곳으로 유인해!”(191) 물론 이는 약자인 비또베또와 비비추가 강자인 마기투로를 물리치기 위한 지혜를 위한 소품이거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소품, 혹은 인간의 탐욕을 물새 자신들의 생존으로 승화하는 설정이긴 하지만 자칫하면 인간들에게 면죄부를 주게 될 지도 모른다. 이처럼 물새와 인간의 관계를 흐지부지하는 바람에, 책은 물새와 자연의 화해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책은 “이곳 양수리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서로를 그리워하며 흐르다가 마침내 만나서 한 몸을 이루는 곳이란다.”(176)라는 루미 선생님의 말에서 희망을 발견해야 하지 않았을까? 우리가 자연과 화해할 수 있는 길은 ‘인간도 자연의 일부’임을 깨닫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길이기도 하다(노인이 집 앞의 산을 대를 이어 옮기고자 했다는 이 고사에서 우리는 인간의 인내나 끈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개조하려는 인간의 어리석음(노인의 이름-우공-이 상징하듯)을 말하는 것이라 한다. 이말은 중국 문화를 전공한 한양대 안산 캠퍼스의 정석원 교수가 <동아일보>에 기고하는 ‘문화가 흐르는 한자’에서 본 것이니 믿어도 좋을 것이다.) 성장 동화, 호부호형의 가슴 아픔 앞에서도 지적했듯, 비또베또가 속죄의 길을 떠나고, 이후 비비추를 만나면서 책은 ‘생태 동화’가 아닌 ‘성장 동화’의 길을 가기 시작한다. 아쉬운 대목이기도 하다.. “넌 우리 식구가 아니야! 넌 쇠물닭이 아니라 물닭이라고!”(130), “네 친아버지는 양수리에 사는 라두칸 보안관이야.”(132), “하얀 이마는 빨갛게 칠하면 되잖아요. 제발 같이 살게 해주세요.”(132) 가족(공동체)의 소중함을 말하는 것이자 비비추가 자신의 태생을 알게 되는 대목이다.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호부호형을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길을 떠나는 홍길동과 닮아 있다. 비비추가 양수리로 아버지를 찾아가는 과정은 자신의 ‘정체성’(자아)를 찾는 과정이다. 책은 이제 성장 동화로 읽힌다. 비비추가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은 “거센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138)는 험난한 과정이다. 그 과정 중 “형들이 몰래 뒤따라오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비비추는 콩콩 뛰면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하고 휙 돌아보고, 다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하고 휙 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돌아다보아도 형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139)는 하루아침에 외톨이가 된 비비추의 마음을 절묘하게 나타낸 부분이다. “날아가는 산새(자신보다 작은 새)를 보니, 비비추는 아직도 날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가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다시 날기 시작했습니다.”(140) 비비추는 길에서 만나는 다른 새(타인)를 보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책은 성장 동화의 과정을 충실히 겪고 있다. 반면 “너처럼 외로운 새들과 친구가 되고 싶어서 바람이 들려주는 소리란다. 다시 메아리를 만나면 친절하게 대해 주거라. 그러면 외롭지 않은 거야.”, “좀 더 메아리와 친해지게 되면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거야.”(151)라는 두꺼비의 전언은 성숙을 위한 혼자만의 시간을 말하고 있다. 실체가 없는 메아리와의 대화, 다시 말해 혼잣말을 통한 성숙을 강조한 것이다. 혼잣말은 타인과의 대화가 아닌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성장이 깊어지고 있다. “다 알려고 하지 마라. 세상에는 알고 나서 후회하게 되는 일도 많으니까?”(158), “떨어질까 봐 날지 못했던 새들이 닭이야. 그들은 손쉽게 인간들에게 붙잡혀 모이의 단맛에 길들여졌지. 그 모이의 대가로 닭은 자신이 낳은 알을 인간들에게 바쳐야 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어”(162),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면 결코 날아오를 수 없다는 사실을.”(163) ‘비또베또의 전언’은 삶의 수수께끼를 알려주는 것이다. 이젠 얼추 다 성장했다. 성장 동화 중 “비비추와 마기투로의 혈투”에서 비또베또와 라두칸의 등장은 ‘타잔’의 출현처럼 절묘하고, ‘루미-비또베또’, ‘라두칸-비비추’ 두 부자 간의 만남은 감동적으로 읽힌다. “비비추의 눈이 점점 붉어졌습니다.”(191)와 “피투성이가 된 아들 비비추를 본 라두칸의 눈이 순식간에 붉게 변했습니다.”(192)라는 대목은 앞 장면에 숨겨 놓은 복선의 확인(라두칸이 싸보와 물뱀과 싸우는 장면에서 눈이 붉어지는 장면과 비비추가 마기투로와 싸울 때는 물새들은 아직 비비추의 정체를 모른다는 사실을 기억하자)이자, 부자 ‘영웅 이대’(英雄 二代)의 탄생을 알리는 것이다. 두 부자간의 만남은 또한 비또베또에게는 속죄의 길이 끝나는 것이고, 비비추에게는 정체성을 찾게 되는 것이니 만큼 훌륭한 성장 동화의 절정을 이루는 대목이기도 하다. 비또베또의 전언은 사실 (작가의) 의식의 과잉으로도 볼 수 있다. 삶의 수수께끼를 알기에 비또베또는 아직 세상을 덜 살았다. 책 어디에서도 비또베또가 삶의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과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러한 의식의 과잉과 생태 동화가 후반에 길을 잃은 것은 혹 책의 주인공인 물새들이 의인화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책이 후반부로 갈수록 작가의 의식 대로 지나치게 의인화되어 물새 본연의 생태적 삶에서 멀어졌던 탓은 아니었을까? 다신 누군가의 말을 빌어 본다면, “잃은 것은 생태 동화요, 얻은 것은 성장 동화”라 하겠다. 글을 마치는 순간에도, 동물이나 식물을 의인화하지 않고도 ‘제비가 풀밭을 걸어가는 사람을 계속 쫓아가는 이유’나 “방안의 따뜻한 공기도 겨울철의 자작나무를 구해주지 못한 이유’ 등 정중동(靜中動)의 자연을 그려내고,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이끌어낸 생태동화 <우리들의 여름>이 겹쳐진다. * 글에 나오는 각각의 책은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최재천 지음, 효형출판 간)와 <우리들의 여름>(콘스탄틴 파우스토프스키 글/유딘 그림/서미현 옮김, 소년한길 간>임을 밝혀둔다. * |
| 책을 읽기전에 먼저 차를 타고 오면서 CD을 먼저 들어 보았답니다. 테마곡의 주제음이 마음속에 남더군요. 한편으로, 어린이 뮤지컬이 부족한 우리나라 실정에 뮤지컬로 만들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캐릭터 만들기등등 CD곡이 좀 단조로운 것 같아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논병아리, 뿔논병아리, 쇠물닭, 물닭의 생김새를 글을 통해 잘 알 수 있게 묘사되었지만 각각의 생김새뿐만 아니라 원래 갖고 있는 물새들의 특징이나 성질을 인물에 직접 부여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군요. 전반부는 도입과 전개때문이라고 하지만 내용전개가 산만해서 다음에 나올 이야기가 상상을 할 수 없었습니다. 머리속으로 추리할 수 있게 하는 내용전개가 아쉽고 호기심도 다소 떨어지더군요. 후반부부터는 내용구성이 탄탄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쇠물닭 사보의 이사가 이야기의 중심축으로 연결되는 등 아쉬운 한가지는 카얌과 쿰바의 이야기에서 각자의 재능과 개성을 인정하는 쪽으로 이야기를 꾸며졌으면 하는 것-아이들에게 자기 자신의 성격과 그에 맞는 일을 찾을 수 있다는 긍정적인 가치관을 심었으면 합니다. 갈수록 환경보호의 소중함을 많이 깨닫는 지금, 몇몇 사람들은 자연보호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우리 사람들 곧 어른들의 모습이 아이들에게 너무 나쁜 모습으로만 보여지는 것 보다 다르게 자연를 사랑하고 아끼는 모습도 비추어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