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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애] 노동을 둘러싼 계몽의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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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애의 〈인간문제〉(1934)가 신문에 연재되었던 글 묶음집인 점이 에피소딕한 전개로 구성진데다, 주요 인물들의 온전하지 못한 파편적인 삶의 양태를 투영해 강점으로 작용한다. 〈인간문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로 정평이 난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보다 시기적으로 앞서, 넘치는 경작물에도 배를 곯는 사태가 빚어지면서 알알이 맺히는 하층민의 분노와 떠돎을 고발
"[강경애] 노동을 둘러싼 계몽의 순간들" 내용보기

 강경애의 인간문제(1934)가 신문에 연재되었던 글 묶음집인 점이 에피소딕한 전개로 구성진데다, 주요 인물들의 온전하지 못한 파편적인 삶의 양태를 투영해 강점으로 작용한다. 인간문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로 정평이 난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보다 시기적으로 앞서, 넘치는 경작물에도 배를 곯는 사태가 빚어지면서 알알이 맺히는 하층민의 분노와 떠돎을 고발했다. 세계대공황에 식민지 자본주의 지배까지 덮쳐 무산계급은 삼중고를 겪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의 농촌이 소설 전반부의 배경이며, 소설은 악덕 지주의 횡포로 인해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소작인들의 눈물이 모여 이뤘다는 원소의 전설 푸른 못에서 시작된다. 소작농들은 가슴이 찌르르하고 울울해도 한숨만 내쉴 뿐 땅주인 앞에서 가슴 속 뭉텅이를 풀어낼 방도가 없다. 빚더미에 앉아 야반도주하거나 몇몇이 뭉쳐 맞서보지만 돌아오는 건 순사의 매질과 주변의 원성이다.

 이에 등장인물 첫째는 최소한의 식량 분배도 보장하지 않아 매음과 동냥과 도둑질을 낳는 의 편중을 규탄하며 고향을 등진다. 선비는 아버지가 지주의 부림꾼으로 죽었다고 의심되지만 별수 없이 주인집 하녀로 들어간다. 한편 정덕호의 외동딸 옥점은 신교육을 받았음에도 사치를 부리며 탐욕스럽게 원하는 것을 얻으려든다. 자연풍경을 수놓는 옥점과 대조적으로 선비는 알을 낳는 닭을 수놓고 싶어 한다. 옥점에게 자연은 감상과 향유의 대상이나 선비에게는 ()생산하는 노동 현장이라서 가질 수 없는 솜과 달걀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선비는 욕망의 타깃이 되어, 겸손하게 내려뜬 눈등의 검은 사마귀와 아내 삼고 싶은 부지런한 손으로 물신화되다가 덕호의 아들을 잉태할 씨받이에 이른다. 덕호는 평소 일꾼들을 친자식같이 아는데라며 호통 칠 뿐 아니라 선비의 정조를 유린할 때도 아버지(보호자)로 위장한다. 이율배반을 통해 선비는 동무였음에도 덕호의 첩이 된 간난이를 이해하거나 위로하지 못했던 점을 깊이 뉘우친다.

 삶의 터전을 잃고 내쫓기는 이들과 달리, 옥점은 덕호의 면장 지위와 함께 유산계급을 세습할 것으로 보인다. 방문객이자 인텔리인 유신철은 옥점의 구애를 받는다는 이유에서 선비와 옥점을 끊임없이 저울질한다. 서울로 돌아온 그는 재력가에 아들을 넘기려는 아버지에게 환멸을 느껴 충동적으로 가출한다. 현실은 고리타분한냄새와 배고픔에 지쳐 옥점의 향내와 입에 밴 고급음식을 자주 떠올린다.

 대척점에서 선비는 첫째를 오해한 것을 반성하며 종종 그리워하는 것으로 그를 향한 믿음과 마음을 밝힌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집나온 이들 모두는 인천에서 집결한다. 부두노동자인 첫째는 프롤레타리아를 일깨우는 신철의 사상 교육을 받게 되고, 간난이는 여공들의 노동과 성 착취를 막고자 일본의 조선공업화 정책의 일환인 대규모 방적 공장에 위장 취업하여 상처 입은 치유자*로 거듭난다.

 파업 주모자로 투옥된 신철은 감방의 개미(우연히 흘러듦)에게서 자신을 보고, 고문을 견디지 못할 유약한 몸과 가계의 곤궁을 끔찍해하며 전향한다. 반면 선비는 성폭력과 원하지 않는 임신에 노출된 몸(‘생리혈’)을 딛고 일어나 공장의 담 너머로 간난이와 옛날의 선비를 떠나보낸다. 덕호/신철의 공부시켜주겠다는 꾐과 공장 감독의 식민화 교육을 넘어 노동운동의 주체로 깨어난다. ‘각혈을 하고 해고당하여 각성과 연대의 빛은 위태로워 보이나 이 장면은 소설 시작의 전설과 맞물리면서 푸른 못의 범람을 경고하는 흰 실 위 상징적 투서로 읽힌다.

 결국 첫째는 시커먼 주검으로 돌아온 선비 앞에 절규한다. 돌아갈 곳도,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 노동 당사자 첫째가, 오래 투쟁해온 인간 문제에 대해 거대한 성난 포효로 답할 적임자임이 분명해진다. “경제적 이익인격적 대우를 원했던 소망은 여전히 최하층 노동자 형태(프레카리아트*)와 미투 운동으로 이 시간에 흐르고 있다. 안전과 미래로의 전망을 보장하는 노동법 개혁을 향한 움직임은 그래서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로 물결쳐온다.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 칼 융의 개념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스러운 과거를 경험하였지만 상처를 치유하고 누군가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치료자 역할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프레카리아트precariat: precariousproletariat의 합성어로, 균열 일터에서 불안정한 고용과 열악한 노동 환경에 처한 비정규직, 파견직, 일용직, 이주 노동자들을 총칭한다.

이달의 사락 s********d 2022.02.10.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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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의 상실... 인간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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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맞물려 시작된 대한민국의 근대화.. 변화된 사회를 맞이한다는 것은 준비된 자에게만 허용되는 것일지도 모른다.준비되지 않은... 아니 못한 체 사회를 맞이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은 독으로 작용하는 것이다.이 소설은 크게 2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1부에서는 일제강점기의 조선의 농촌 2부에서는 근대화의 조선을 다룬다.주인공은 첫째와 선비라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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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맞물려 시작된 대한민국의 근대화.. 
변화된 사회를 맞이한다는 것은 준비된 자에게만 허용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준비되지 않은... 아니 못한 체 사회를 맞이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은 독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 소설은 크게 2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1부에서는 일제강점기의 조선의 농촌 
2부에서는 근대화의 조선을 다룬다.

주인공은 첫째와 선비라는 인물이다.
첫째는 지주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소작농이다. 언제나 수확을 거두면 반 이상을 
지주에게 줘야만 하는 평생 도돌이표 삶을 살아야만 하는 인생이다.
선비는 부모님을 여의고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마을 지주인 덕호의

식모로 살아간다.
이 역시 밝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

1부에서는 전형적인 농촌의 모습이다. 마을의 지주가 있고 마을 사람들은

이 사람의 땅에서 소작으로 살아간다.

지주는 온갖 이유로 소작농들의 생산물을 갈취한다. 
게다가 권력이라는 것에 편승하여 자신의 입지를 확실히 다져간다.
첫째와 신비는 이 사람의 핍박 아닌 핍박을 못 이겨 마을을 떠난다.
좀 더 나은 미래가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말이다.

1부의 모습은 농촌 사회의 역사를 가진 모든 나라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부익부와 빈익빈의 격차가 점점 심해져 마을을 이탈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이탈자들은 정착지를 정하지 못한다. 아무런 준비 없이 마을을 나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나은 삶을 살아가기 힘들다. 준비가 안되었기 때문이다.

2부는 첫째와 선비가 마을을 벗어나 근대화라는 사회 변화를 겪는 모습을 담는다.
이 둘은 근대화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공장으로 향한다.
그 안에는 지주가 존재하지 않으나 공장장 등 다른 권력의 형태가 존재한다.
어디를 가도 소작의 형태를 벗어날 수가 없다.
다른 점이 있다면 농촌과는 달리 근대화가 이루어지는 곳에서는 계몽이 존재한다.
타인과 정보와 지식을 주고받으며 점차 계급, 현실에 대해서 깨닫게 되고
그것을 부정하기 시작한다. 프롤레타리아가 되는 것이다.

이 소설은 여기서 다른 설정을 추가한다.
바로 죽음이다.
방적 공장을 다녔던 선비는 계몽으로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 이를 부정하는 운동을 준비하려 한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그녀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다. 바로 폐병이다.
비로소 자신의 삶을 자각했던 선비는 결국 병으로 숨지게 된다.

왜 작가는 이 시점에서 선비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것일까?
선비의 죽음으로 독자에게 사회적 반항의 상실감 그리고 분노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개인 하나하나의 노력으로는 큰 결실을 이룰 수 없다는 것,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다수의 같은 
공감대를 얻어야 하는 것이다.
작은 불씨 하나로는 방을 밝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선비였을까?
그것은 작가 자신의 모습을 투영시킨 것이 아니었을까?
작가는 당시에 보기 드문 여류작가였다. 
일제강점기 그리고 여성이었다. 남녀 차별이 심했으며

애국심의 상실 또한 컸던 시기다.
그런 시기에 이런 소설을 만들었다는 것은 작가 나름대로 계몽 의식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 한계도 말이다.
그렇기에 작가는 자신의 노력만으로 할 수 없는 현실의 무력함을 선비의 죽음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그 당시의 인간문제가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마냥 서글프다.
좀 더 시간이 흐른다면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작은 기대감을 가져본다. 

k*******n 2018.03.22.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