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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알을 깨고 나온 작은 새 - 최기숙, 『어린이, 넌 누구니 』 누구나 어린이 시절을 거쳐 어른이 된다. 어린이를 미성숙의 상징으로 보고 어른을 성숙의 상징으로 보는 논리는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이어지는 시간 논리를 전제로 한다. 실제 우리는 어린이를 어른이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한다. ‘보호’라는 말에는 성숙한 어른이 미성숙한 어린이를 이끌어야 한다(‘자연보호’라는 말과 비슷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어린이를 교육해야 할 대상으로 설정하는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어린이는 계몽의 대상이 되어 사회 규칙에 걸맞은 존재로 길러져야 한다고 우리(=어른들)는 생각한다. 최기숙은 『어린이, 넌 누구니?』(보림, 2006)에서 “‘어린이’는 ‘어른’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우리 혹은 내 안에 함께 있습니다.”(6쪽)라고 주장한다. 어른과 어린이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면 우리 안에 있는 어린이가 보이지 않는다. 어른들의 마음에는 과연 ‘어린이’가 없는 것일까? 어린이처럼(?) 행동하는 어른이 있고, 어른처럼(?) 행동하는 어른이 있다. 어른과 어린이는 두 존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거라는 얘기다.
조선시대에 ‘어린이’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이이가 지은 『격몽요결(擊蒙要訣)』에 나타나듯, 이 시대에 어린이는 어른들이 깨우침을 줘야 할 어리석은 사람=어른으로 인식되었다. 깨우침을 얻으면 군자가 되고 그러지 못하면 속인으로 남는다. 어린이는 곧 군자가 되지 못한 어른의 의미로도 쓰인 셈이다. 지금 우리가 쓰는 ‘어린이’란 말은 근대사회의 발명품이다. 동서를 가리지 않고 근대사회 이전에는 어린이를 ‘작은 어른’으로 보았다. 어른들도 먹고 살기 힘든 사회에서 ‘어린이’를 보호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까? 당시의 어른들에게 어린이는 빨리 자라 일을 해야 하는 일꾼이었다. 가난한 아이들은 일을 하고, 부자(귀족) 집안에 태어난 아이들은 그에 맞는 의무를 진다. 근대사회가 성립하면서 어린이는 어른과 분리되어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환경의 변화가 ‘어린이’에 대한 인식의 변화로 이어진 셈이다. 창간사를 쓴 방정환은 어린이를 새와 같이 자유롭고, 꽃과 같이 아름답고, 앵두같이 어린 존재로 보았습니다. 어린이가 부르는 노래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며 하늘의 소리라고 예찬했습니다. 어린이를 찬미하는 반면 어른들은 ‘욕심을 가진’ 존재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지난 시대에 어린이를 어리석고 어두운 존재로, 어른을 완성된 존재로 보는 것과는 매우 다릅니다. 방정환과 함께 『어린이』를 만든 사람들은 어린이를 미래의 희망이자, 평화롭고 즐거운 세상을 만드는 주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린이를 ‘꽃과 같이 아름답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어린이 여러분’이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하지만 어린이를 완성되지 못한 존재, 어두운 존재로 보지 않았다는 점은 긍정적이지만, 그렇지 못한 부분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점은 아쉽습니다. 어린이는 순진무구하기만 한 천사가 아니라, 부족한 점도 있는 존재이니까요. 하지만 『어린이』가 어린이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 대신 좋은 점을 밝히려 한 것, 어린이를 격려해서 좋은 쪽으로 이끌려 한 것은 상당히 의미가 깊습니다. (60쪽) 1923년 창간된 잡지 『어린이』에서 방정환은 어린이를 순수한 존재로 찬미하고 있다. 어린이 반대편에는 욕심이 많은 어른이 있다. 어린이를 어둠 속 존재로 보는 관점에서는 벗어났지만, 어린이를 우리가 사는 이 세계와 거리를 두는 존재로 꾸며낸 것이다. 지은이 말마따나 “어린이는 순진무구하기만 한 천사가 아니라, 부족한 점도 있는 존재”이다. 어린이를 긍정하는 입장이든, 부정하는 입장이든 현실 속 어린이가 지닌 한 단면만 강조하고 있다. 1908년 최남선 주도로 창간된 『소년』지에 나오는 ‘소년’의 이미지가 방정환의 ‘어린이’에도 스며들어 있다. 최남선이 ‘소년’이라는 이미지로 미래의 전망(최남선은 ‘소년’과 ‘청년’을 구분하지 않는다)을 강조했다면, 방정환은 순진무구한 어린이 이미지로 당대의 때 묻은 어른들을 비판했다. 둘 다 어린이와 어른을 구분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논리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어른들은 어린이를 통해 자기가 추구하는 세상을 상상한다. 이를테면 지은이는 박수근이 그린 그림에서 ‘시대의 표정’을 보고 있다. “박수근 그림의 어린이 얼굴에는 권정생 작가의 ‘몽실언니’처럼 슬프고도 강한 표정이 아로새겨져”(112쪽)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장욱진이 그린 그림에서 지은이는 “자연과 어우러진 다정한 세상을 꿈꾸는 화가의 마음속에 영원히 늙지 않는 천진한 아이”(115쪽)를 발견한다. 어른들의 마음에 여전히 살아있는 동심(童心)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시대의 표정이든, 아니면 천진한 아이의 모습이든 어른들의 내면에는 항상 어린이의 마음이 무의식처럼 숨어 있다. 무의식은 의식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가 의식이 분열되는 순간 전면으로 떠오른다. 어린이의 천진난만한 마음을 떠올리면서 어른들은 무엇을 생각할까? ‘어른’으로 살아가는 삶은 이렇게 어린이로 살아가는 삶과 뗄 수 없는 관계로 이어져 있다고 하겠다.
지은이는 어른 같은 아이나, 아이 같은 어른으로 ‘어린이’를 보려고 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어린이를 어른과 구분하는, 그래서 어른을 성숙한 존재로, 어린이를 미성숙한 존재로 보는 편견이 숨어 있다. 해리포터 시리즈를 분석하며 지은이는 자기 정체성을 지키며 성숙하는 주인공 ‘해리 포터’에 주목한다. “인간과 마법사 사이에서 태어난 해리 포터는 모험가의 길을 걸어갑니다. 진정한 모험가는 스스로 자기 인생의 길을 개척하는 사람입니다.”(165쪽)라는 대목에 드러난 대로, 지은이는 해리 포터라는 인물에서 스스로 자기 인생을 개척하는 어린이의 모습을 본다. 어린이는 어른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존재가 아니다. 주변 어른들의 도움을 받는 건 분명하지만, 자기 정체성을 버리고 어른들에게 순종하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판단하며 갈 길을 모색하는 어른들처럼 어린이 또한 스스로 상황을 판단하며 가야 할 길을 모색한다는 걸 지은이는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피터 팬』에 나오는 피터 팬도 해리 포터와 다르지 않다. 피터 팬의 적수인 후크 선장은 잘난 척하고 으스대길 좋아하는 피터 팬의 모습이 자기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고 이야기한다. 영원한 어린이를 선언한 피터 팬에게도 단점이 있음을 나타내는 대목이다. 피터 팬은 그러나 해리 포터처럼 용감한 모험가로서 삶을 선택한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그는 후크 선장과 맞서 싸운다. 지은이는 피터 팬 이야기에서 “알을 깨고 나온 작은 새”(185쪽)를 떠올린다. 지은이의 말마따나 “알은 하나의 세계”(185쪽)이다. 알 속에 갇혀 있으면 바깥 세계를 볼 수 없다. 지금까지 어른들은 알 속에 있는 어린이들을 억지로 바깥으로 끌어내려 했다. 성적으로 줄을 세우고, ‘성공’이라는 신화로 아이들을 옥죄었다. 지은이는 “알을 깨뜨리는 일은 스스로 해야 합니다.”(185쪽)라는 말로 피터 팬의 의의를 제시한다. 어린이는 숱한 상처와 고통을 스스로 극복하는 과정에서 성숙해진다는 진실을 다시 한 번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이를 규칙 속에 가두려는 트러치블 교장에 저항하는 마틸다(로알드 달이 지은 『마틸다』의 주인공)는 어떨까? 어른들은 항상 아이들을 규정된 틀 속에 가두려고 한다. 어린이를 틀에 가두어야 어른들은 안심을 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 틀을 자기들을 억압하는 것으로 생각할 뿐이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만든 세상을 벗어나는 상상을 끊임없이 한다. 황선미가 지은 『마당을 나온 암탉』에 나온 잎싹이 그렇지 않은가? ‘폐닭’에서 위대한 어머니로 성장하는 잎싹의 일대기를 읽으며 지은이는 자기 삶의 여정 속에서 스스로 성숙해가는 어린이를 본다. 어른들이 생각하는 틀 바깥에 ‘어린이’라는 존재가 있다. 그들에게는 분명 어른의 손길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손길이 지나치면 어린이의 성숙을 방해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어린이를 하나의 주체로서 인정하는 마음이 우리 어른들에게는 그래서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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