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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와 다이아몬드'
이 영화의 제목으로본 이야기
영화는 프로파간다로써 막강한 힘을 발휘 한다. 세르게이 에인젠슈타인이 그러했다. 부르주아의 타도와 프롤레타리아의 승리가 그의 영화에 주 내용이었다. 승리가 노동자를 위한 국민을 위한 것임을 강조하고 승리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우는 그리고 승리를 챙취하는 모습을 보여준 이 것들은 투쟁의 영화이며 행복을 그린 영화다. 모두들 그러한 역사를 그리고 축복을 영원히 간직하려 하지만 안제이 바이다는 달랐다. 영광의 날보다 그 밑에 숨겨진 어둡고 불편한 진실에 눈을 돌리려 했다. 이 영화는 2차대전이 끝나고 해방을 맞이하기 전날과 해방 첫날을 그린 영화다.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서 영웅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영광의 날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기 시작했던 12명의 내 전우들은 모두 이슬로 사라지고 살아남은 나는 행복하지 않다. 그들과 칼들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자며 축배를 들던 그때가 더 그립다. 누굴 위한 행복이고 누굴 위한 독립이었는지 그들의 모습은 혼돈과 절망뿐이다.
혼돈 속에 싹튼 새로운 관계 - 마체크와 크리스틴
이 영화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바로 사랑이다. 젊은이의 방황을 그린 영화에 등장하는 마약, 죽음, 섹스. 마치 알랑 드롱, 제임스 딘의 반항기적인 모습을 닮았지만 훨씬 더 동물적이고 유연하다. 시대에 오는 혼란의 책임을 단지 약물이나 죽음 여자에게 눈 돌리며 방황하려 하지 않는 점이 그렇다. 이 영화는 차라리 '타이타닉'과 비슷하다. 재난 영화로 끝났다면 이 영화는 그 이름처럼 밑으로 한없이 가라앉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음을 앞에 두고도 사랑을 하는 잭과 로즈가 있었기에 이 영화는 최고가 되었다. 이 영화에서도 마체크와 크리스틴의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공산당 간부를 죽여야 하는 임무를 맡게 된 마체크는 서서히 임무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있다. 첫 시도는 실패로 죄 없는 공장인부 2명을 죽였다. 그리고 그는 계속 갈등한다. 이렇게 해방이 다가왔는데 왜 내가 저 사람 -같은 폴란드인- 을 죽여야 하는지 이유도 분명하지 않은 채 명령을 수행해야하기 때문이다. 민족의 영광을 위해 재가 된 전우들을 떠올리며 술잔을 기울이는 그의 모습은 기이하면서 슬프다. 그에게 더욱 안정된 삶을 요구하게 하는 건 바로 호텔 웨이트리스 크리스틴이다. 그녀를 안고 있는 순간은 이 이데올로기의 혼란 속에서도 한 줌 재가 다이아몬드처럼 영원히 빛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랑도 결국 영원한 다이아몬드도 아닌 폴란드의 어두운 역사처럼 한 줌 재가 된다.
혼돈을 함께 겪는 캐릭터들 (불협화음)
첫번째로 시장의 비서, 마체크 일행을 몰래 도우며 살아가는 인물이기도 한 그는 사실 투사의 인물상도 아니다. 그저 살기 위해 살아가는 현대인일 뿐이다. 두번째 초대받지 못한 편집장, 시장의 파티에 초대받지 못한 늙은 편집장은 호텔바에 앉아 혼자 술을 퍼마신다. 외로운 인간이며 소외받는 현대인이다. 이 두 현대인이 만나면서 생기는 작은 에피소드는 복선과 전화위복이라는 깔끔한 센스를 발휘한다. 술취한 편집장은 자신을 마땅치않게 생각하는 비서에게 거짓이야기를 꾸민다. 시장이 의원이 되면 널 버리고 다른 비서를 구 할 것이다. 나도 곧 의원이 되니 내가 널 내 비서로 쓰겠다. 나만 믿어라. 그 말에 넘어간 비서는 그날 일도 모두 잊고 술을 마신다. 그때 다른 곳에서는 시장이 이런 말을 한다.
"그는 성실한 사람이다. 의원이 되어도 데려가겠다"
그것도 모르는 그는 술에 취해 파티를 엉망으로 만들고 결국 시장에게도 버림 받는다. 세번째 인물은 슈츠카이다. 공산당원이며 바로 마체크 일행이 죽일 인물이다. 슈츠카의 아들이 있었는데 아내가 죽자 아내의 언니가 그 아이를 데려가 키운다. 슈츠카는 아들을 찾으려 노력하나 언니는 절대 아이를 돌려주려 하지 않고 그 아이 소식 조차 모른다고한다. 그 아들은 자신의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른 채 독립을 위해 레지스탕스가 되었고 그는 아버지와는 반대파로 싸우고 있다. 정말 아이러니 아닌가! 이것이 바로 안제이 바이다 식의 비틀기다. 추가적으로 해방을 맞이하자 악사들에게 모르는 노래를 연주하라고 한다. 음악은 불협화음이고 그 음악 속에서 사람들은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며 춤을 춘다. 어울리나 어울리지 못하는 폴란드인의 모습을 이보다 더 잘 표현 할 수 있을까?
형이상학적 접근 또는 아이러니
안제이 바이다는 네오리얼리즘의 영향을 받은 대표 인물이다. 그의 영화들이 리얼리즘에서 떼어 놓을 수는 없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그의 거친 영상은 네오리얼리즘에서 온 영향이라 생각하지만 드라마투루기와 시각적인 표현은 오손웰즈의 형식과 비슷하며 세련되어 있다. 또 독일의 표현주의와 표현주의에서 파생된 르와느를 닮기도 했다. 교회씬을 보자면 거꾸로 들려진 십자가와 흔들릴때마다 들리는 삐걱거리는 소리 거꾸로 들려진 십자기는 가치의 전도로 방향을 잃은 주인공을 대변하는 시각적인 표현이자 은유의 상징이기도 하다. 삐걱거리는 소리는 브레송이 즐겨 사용하던 사운드 몽타주다. 귀에 거슬리는 그 소리가 십자가를 아니 마체크를 더욱 불안한 존재로 만든다. 이런 접근은 형이상학적이라 할 수 있겠다. 또 무엇보다 주인공 설정이나 주변인 설정 역시 아이러니라는 역설적 접근에서 오는 허무함을 표현하였다. 슈츠카를 죽이기 위해 얻은 호텔방 맞은 편에서는 한 여자 울고 있다. 그녀는 오늘 약혼자를 잃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약혼자는 오늘 오판하고 죽인 공장 인부인 것이다. 그런 그녀를 달래주는 남자는 누구인지는 모르나 그녀와 성관계를 맺는다. 이 역시 혼란이자 혼돈이다. 왜 하필 맞은 편에 그녀가 살고 있던 것일까 그리고 그녀의 옆에 있는 남자는 누구인 것인가! 마체크가 슈츠카를 죽이는 장면은 아이러니의 압권이라 할 수 있겠다. 해방 첫날을 맞아 모두 환호 할 때 마체크는 슈츠카를 죽인다. 아들을 만나기 위해 가는 슈츠카에게는 죽음이라는 어두움 그림자가 다가오고 그가 거리에 쓰러져 죽자 하늘에서는 폭죽이 터진다. 이 장면은 두고두고 많은 영화에서 쓰이고 있는 방식이다. 화려하게 터지는 불꽃놀이의 조각 아래 조용히 죽어가는 슈츠카의 모습은 더욱 가련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 또 주인공 마체크는 이데올리기라는 울타리를 스스로 정의하지도 못한 채 슈츠카를 죽여야 했고 공산당원이긴 하나 확고한 정치관을 가진 슈츠카는 죽음을 맞이 해야 했다. 이런 장치 하나하나가 이 영화의 수준을 말해 준다. 정말 최고가 아닌가!
즈비그뉴 치불스키
40세에 단명한 그는 정말 아까운 인물이다. 마체크를 연기하며 그의 동물적 본능을 맘껏 펼쳤고 그의 연기력은 '재와 다이아몬드'를 더욱 빛나게 했다. 안제예프스(소설의 원작자)는 치불스키를 보며 이렇게 이야기 했다
"영화를 보고서야 마체크라는 인물을 알게 되었다. 그는 치불스카가 연기한 바로 그 인물"
가끔 반항적인 이미지와 복합 이미지를 갖는 그를 제임스 딘과 비교를 하기도 한다. 제임스 딘은 반항아의 귀족이라면 즈비그뉴 치불스키는 표현주의 배우라는 느낌이 강하다. 아까도 이야기 했듯이 동물적이며 형이상학적인 느낌이 묻어나는 그의 연기는 마체크가 누구인지 왜 고통스러워하는지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가 죽음을 맞이 할 때 하는 연기를 봐라. 그럼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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