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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작품에서 여성 캐릭터는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어머니'가 나오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고, 많은 여성 캐릭터는 극중에 남장을 하고 등장하고는 한다. 이런 경향을 두고 셰익스피어가 차별적인 성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마 정답은 당시에는 여자 역을 변성기 전의 소년이 공연했기 때문이라는 것일 것이다. 셰익스피어 시대에는 여성이 극중에 출연하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부득이 소년을 여장시킬 수밖에 없었고, 이런 제약이 나이든 여성 캐릭터는 거의 없는 대신 남장한 여자 캐릭터는 많은 결과로 이어졌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꽤 자주 나오는 이야기지만, 셰익스피어 작품의 여성 인물들에 대한 언급은 이 이상 나가지 않는 경우가 보통이다. 셰익스피어 작품을 분석하고 연구한 책은 많고 특정 캐릭터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저술도 많지만, 등장 횟수가 적기 때문인지 여성 캐릭터는 뒷전으로 밀리고는 했던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여인들>은 셰익스피어 작품의 여성 등장인물들을 개별적으로 살펴보며 전체적으로 총괄하는 책이다. 이 책은 단순히 작품의 내용과 여성 인물의 언행을 개략적으로 소개하거나, 저자 개인의 견해를 늘어놓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저자는 수많은 여성인물들을 유형별, 작품별로 나누고 각각의 여성상을 정립한다. 특히 포샤는 그저 총명하다고만 하고, 오필리어는 그저 가엾다고만 하는 등 천편일률적이고 판에 박힌 묘사에서 탈피하여, 대사와 행동을 통해 많은 캐릭터를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저자는 비단 개인적인 평가뿐만 아니라, 특정 캐릭터에 대한 평가가 시대에 따라 달라진 경우나 비슷한 내용을 다른 작가가 다루었을 때 어떻게 묘사되었는지에 대해서도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전체적으로 작품의 대략적인 내용과 주요 장면의 대사를 인용한 후, 여성 인물의 캐릭터상을 정립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리고 독자에게 묻는다. 당신은 이 캐릭터의 이런 면을 보면서,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어떤 교훈을 얻습니까? 저는 이런 이유로 이렇게 생각하는데, 당신은 어떤가요? 작품 내용과 캐릭터의 요약이 굉장히 맵시 있고 깔끔하게 되어있어서, 셰익스피어 작품에 대한 다이제스트 소개서로도 손색없을 정도이고 읽는 재미도 뛰어나다.
전체적으로 굉장히 보편적인 기준을 내세우고 있고, 여성 캐릭터에 대한 평가나 서술도 무난하고 평이하다. 이 책은 1830년대에 쓰여진 책이지만, 책을 읽으면서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군데밖에 없었다. 바로 <베니스의 상인>에서 샤일록의 딸 제시카 이야기를 하면서, 제시카가 샤일록을 버린 것은 맞지만 샤일록이 딸보다 재산을 더 중히 여기는 위인이라는 점을 감안해 정삼참작을 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대목이었다. 희곡 완역본에서 '그 대사'가 어떻게 나오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나는 아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제시카의 이야기를 하면서 샤일록은 극악무도한 수전노로만 묘사하다니? 기독교도 애인과 결혼하겠다고 가출하면서 집안 패물을 잔뜩 훔쳐 나오고, 막상 훔친 아버지의 재산을 낭비하는 데 주력하던 그 딸 말인가? 딸이 자기가 힘써 모은 재산을 흥청망청 낭비한다는 소문을 듣자 샤일록은 차라리 딸이 죽는다면 그 재산이 고스란히 남아있기라도 할 테니 그나마 나을 거라고 탄식하는데, 이 장면에서는 샤일록에게 감정이입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죽하면, 오죽 속상하면 그런 말까지 했을까.
<베니스의 상인>은 반유대주의라는 세평이 납득되지 않을 정도로 샤일록이 받는 차별대우가 유난히 부각되고 샤일록이 동정적으로 묘사된다. 제시카 에피소드는 그 중에서도 정점에 있어서, 어린이용 축약본에서는 제시카의 이야기가 아예 삭제되거나 기독교도와의 교제에 분노한 샤일록이 무일푼으로 쫓아냈다는 식으로 개작되어 있다. 샤일록을 극악무도한 악역으로 묘사하려면 고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장면의 그 대사만 잘라놓고서, 명색이 아버지란 사람이 딸보다 돈을 중시한답시고 개탄하다니. 단장취의의 참뜻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화들짝 놀라서 원판의 출판년도를 훑어보았고, 19세기인 것을 보고 납득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다행히 이 대목 말고는 일부 대사만 인용하면서 대놓고 왜곡한 대목은 없지만, 그 때문에 이 대목의 아쉬움이 더욱 커진다. 아직 반유대주의가 만연하던 시절에는 샤일록을 동정적으로 묘사한 부분마저 그대로 내보낼 수는 없었던 것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