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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림은 언제나 내가 도달할 수 없는 영역에 있는 어떤 것이었다. 그림과 연관해서 내게 선명히 남아있는 두 개의 장면이 있다. 고등학교 때다. 미술실에서 이젤 위에 하얀 도화지를 올려놓고 연필로 길게 팔을 뻗어 석고상의 비례를 재는 모습 하나. - 그것은 화려한 조명 아래 한껏 멋을 낸 그 어떤 패션 모델의 포즈보다 강렬하게 각인 되어있다. 또 하나는경복궁의 경회루 수채화 풍경이다. 야외 수업으로 경복궁에 나가서 그림과 글쓰기 중 한가지를 택해서 하는 행사였다. 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별다른 도구가 필요없는 글쓰기를 마치고, 맛있는 김밥 도시락 보다 더 휘황찬란하게 갖춰진 나무로 된 화구 박스를 펼쳐 놓고 그림을 그려내던 아이들의 등뒤에서 나는 보았다. 나와 똑같은 눈으로 보는 풍경을 스케치북 속으로 옮겨 닮을 수 있는 손놀림. 그때부터였다. 미술이 내게 경이로움으로 못 박힌 것은. 하얀 백지 위에 오직 4B 연필 하나로 아그리빠나 예수상을, 아니 그때는 이름도 잘 몰랐던 석고상을 오직 선으로 웅장하게 명암과 양감을 표현해 내는 그것. 가지 각색 물감의 향연으로 막 물이 올라 뭐라 형용하기 힘든 노란, 연두빛 녹색 실버들 이파리나 화려한 단청을 옮겨내 놓은 수채화의 그 붓터치가 내게는 다만 신기로울 뿐이었다. 아직도 졸라맨 정도로 밖엔 사람도 잘 못 그리는 나는 그때이후 늘 그림 주변을 맴돌았던 것 같다. 미술 학원과 갤러리에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그림 그리는 아이들도 가르쳐보고, 살 것도 없이 화구상에 들러 온갖 미술 재료들을 구경하고, 인사동을 들락 거리고, 미술관에 가고, 화집을 하나씩 사들이고,....그림 그리는 친구들을 사귀고, 그림 그린 옆사람을 만나고. 언제나 그림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다. 내게는. 감탄과 경이, 부러움과 동경으로 바라보았던 그 세계. 선택 받은 자들만의 향연이거나, 영원히 나는 소유할 수 없는 알라딘의 요술램프 같은 생의 무한한 보물열쇠 같은. 어른이 되고 명품 핸드백보다도 더 가져 보고 싶은 이젤과 화구박스. - 지금도 나는 모든 색깔에 열광한다. 아이가 새로 가지게 된 크레용, 물감, 색연필, 온갖 그림이 가득 채워진 그림책들은 내가 더 흥분 했었고, 십자수나 퀼트를 할 때도 실은 그 색깔에 매료된 것이었다. 가끔 꿈을 꾼다. 시골에 가서 텃밭 일구고 그림을 그리는 생활을. 죽기전에 경복궁- 경회루와 주변 나무들을 그려보고 싶다. 연꽃과 꽃담과 그 밑에 앉아 향기에 취해 기절해도 좋을 라일락 나무를, 바람이 지나갈 때 제각각 종을 치듯 흔들려 우는 은 사시나무를.... 한 젬마의 책 두 권을 읽으면서 이제 정말 나도 그림을 배워볼까 생각했다. 무슨 거창한 작품을 남길 것도 아니고 그저 내가 꼭 그려보고 싶었던 그림 두장을 그릴 수 있고, 일기장 한 귀퉁이 풀포기 하나, 꽃 한송이 그려내는 나를 내게 보여줄 성의를 갖고서 말이다. 내 유년의 빈곤의 상징물이 되어버린 피아노와 화구상자를 선물할 때도 되었다. 이제는 당연히 언제고 가질 수 있는 것을 아껴 장만하고 싶어지는 인내심은 무엇일까. 지나고 보니 너무 갖고 싶었던 물건들은 소유하지 않아야 여전히 소중한 물건으로 남아있게 됨을 알아 버린 탓일까. '화가를 찾아서'는 기획이 참 돋보이는 책이다. 우리 근현대 주요 화가들의 생가와 작업실, 혹은 관련 장소들을 찾아보고 그들의 작품 세계의 이해를 도와주는 책이다. 아쉬운 점 하나, 작가의 그림들 몇 점씩만 더 보여 줬더라면 하는것과 찢어서 가지고 답사 갈 수 있을 지역 지도가 있었더라면. 하긴 너무 편하면 다신 책을 안 들춰 보겠지? 어디 지방으로 나갈 땐 그쪽에 뭐가 있나 또 한번씩 꺼내보며 적어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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