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을 잘 수 없었다. 잠이 들면 가본 적도 없는 바이칼 호수가 나에게 빠져들라고 유혹했다. 자살, 죽음에 반항하는 것? 그럴 수 없었다. 아득한 투명함 속에 난 꿈에서 몇 번이고 떨면서 혼절했다. 가본 적이 없는 그곳, 바이칼 호수. 그곳의 깊이는 1천6백여 미터. 수심 2백 미터의 물만이 새로이 바뀐다고 한다. 1천6백여 미터 호수 밑바닥의 물은 이미 수천 년전에 흘러든 거라고 한다. 그 밑바닥에는 낡은 자전거가 들어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한 남자와 한 남자가 사랑한 여자의 이야기, 사실은 그 이야기만으로 단정짓기에는 너무 부족한 삶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 불멸의 나라에는.
<사람의 몸 어딘가에는 그 모든 기억을 저장해 놓는 거대한 호수 같은 장소가 있어서, 그 바닥에는 잊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무수한 과거가 가라앉아 있다. 그리고 무언가를 떠올리고, 무언가를 시작하려 할 때, 아무 생각 없이 문을 뜬 아침, 아주 먼 옛날 잊어버렸던 기억이 그 호수의 바닥에서 불현듯 둥실 떠오르는 때가 있다.> -파일럿 피쉬 中, 오사키 요시오
바이칼 호수, 오사키 요시오란 작가는 바이칼 호수를 두고 인간에게도 그런 호수가 있다고 했다. 이 책을 읽고서 인간의 주름살이 그런 호수가 아닐까란 생각을 했다. 인간의 주름살을 시간의 흐름에 관한 흔적으로 정의한다면 주름살에는 시간이 담겨있다. 그 주름살 밑바닥에는 불멸의 시간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아기였을 때부터 우리는 주름살이 있었으니. 태어날 때 부터 인간에게는 불멸의 시간이 담겨있다고 한다면 대체 그 시간에는 무엇이 담겨 있는 걸까? 불멸의 삶을 살아가는 법? 태어났으니 죽음에 대항하는 법?
<주름>을 읽으며 삶과 죽음 그리고 생生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된다. 아니,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된다. 어떻게 살아야 겠다는 생각도, 어떻게 죽어야 겠다는 생각도 나를 충족시키지 못했고 나는 김진영과 천예린을 향해 이를 바득바득 갈다가도, 애처롭게 쓰다듬다가도 그들을 죽이지 못해 애처롭게 비명을 지르기까지 했다. 날 보고 어쩌란 말인가?
투명함이 깊어 무섭기까지한 바이칼 호수 앞에 서면 사람들은 죽음을 느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 책에 내게는 무섭다. 인간의 존재와 존재의 이유 그리고 의미에 대해 투명하리만치 보여주는 이 책 앞에서 나는 빠져들지 않기 위해 애를 쓰고 또 쓴다. 이마에 식은땀이 나고 가슴은 불편함을 기침으로 토로한다.
삶을 살다보면 뜻하지 않은 바람이 나를 휘감아 어딘가로 떠나게 만든다고 그 바람을 조심하라고 말하며 이모는 바람따라 인도로 떠나고 말았다. 인도에서 이모는 무엇을 찾으려 했던 걸까? 왜 바람은 이모를 가만히 두지 못했을까? 인도에서 살고 싶다던 이모는 인도를 등지며 돌아오던 날 울고 또 울었다고 한다. 가슴의 바람을 잠재우지 못해 가슴을 움켜쥐면서. 그 바람이 자신을 평생 유랑자로 만들어주길 바라면서도 무서웠다며 이모는 바람을 잠재우기 위해 결혼을 했다고 했다. 지금도 가끔 한밤중에 깨어나면 그 바람이 불어온다고 한다. 잠을 자지 못하는 바람이.
이모 말대로 살아가는 동안 내 존재를 뒤흔들 바람이 한 번쯤은 꼭 분다는 말에 나에게도 그런 바람이 부는 걸까라고 상상해 본다. 책의 주인공 김진영처럼 그런 바람이 나이 50이 넘어서 불면 어쩌나, 혹은 천예린처럼 살아가는 전부가 바람이면 어쩌나 라는 생각에 난 두려워진다. 분명 작가는 내게 강해지라고, 스스로를 찾아내기 위해,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흐르듯 죽지 않기 위해 가슴에 바람을 불어넣어 주는데 나는 그 바람을 자꾸만 손으로 막는다. 손으로 막는 바람이 얼마나 막아지겠는가.
바람을 등지면 될 것을 등지지도 못하면서 고스란히 바람을 맞는다. 나는 흔들리고 싶어한다. 내 몸 속에 새겨질 시간의 주름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싶어진다. 그래, 나는 삶 속에서 살고 싶다. 물 흐르듯이 아니라 물의 근원을 찾아 걷고 또 걸으며. 살고 싶다.
내게 이 책을 준 이는 나를 걱정했다. 선물하면서도 걱정했을 그녀. 그녀가 없었다면 책을 읽는동안 나는 너무 외로워 바이칼 호수로, 북극해로 가는 그들을 따라가지 못했으리라. 그녀가 책을 읽는동안 내게는 손난로였다. |
|
이 작품은 1999년에 문학동네를 통해 발표한 <침묵의 집>이라는 두 권짜리 작품을 2006년에 개작하여 랜덤에서 다시 출간한 소설이라고 합니다. 선생님이 그렇다고 하시네요. 그 과정에서 달라진 점은 일단 2600매 분량의 원고를 1500매 정도로, 약 1000매 이상의 분량을 도려낸 것이라고 합니다. 2600짜리 작품을 읽어보지 못해서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만, 만약 그 작품이 1500매 정도의 분위기로 계속 진행되었다면 잘라내기를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이 좀 들기는 해요. 더 길어서 좋을 건 없는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단지 이야기의 내용만 보자면 말이죠.
작품은, 저 개인적으로는 대단히 우수한, 여느 한국 소설들과 비교를 해봐도 한 단계 위에 있는 느낌의 수준 높은 소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명작 고전을 읽는 듯한 기분도 종종 느꼈고요. 문체가 좀 화려한 편이라 취향을 탈 수 있다는 점을 배제하고라도, 박범신 선생님이 <은교>에서 보여주었던 내면 심리 묘사의 절정이 결코 그 작품에서만 발휘되었던 공력이 아니었음을 이 작품에서 여실히 보여주거든요. 프롤로그와 비슷한 초반 서술을 넘기고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아버지의 독백 파트에 이르면서 작품은 가히 예술적인 경지의 흡인력을 보여주었습니다. 한 사오십 페이지를 그야말로 눈도 못 때고 읽었던 것 같습니다. 그 장면이 바로 발군의 내면 심리 묘사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는데요, 평생을 바른 생활 사나이로 살았던 50대 가장의 갑작스러운 심경 변화를 묘사해나가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묘사의 끝부분에서는 정말, 가슴이 울컥해지기까지 할 정도였으니 이야, 박범신 선생님의 공력이란 게 과연 이 정도였던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더랬습니다. 이런 것이야 말로 진정 작품이로구나, 하고 말이죠. 물론 그러한 장점으로 460 페이지를 모두 채웠다면 이보다 더한 소설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을 거라며 저의 특장기인 호들갑을 미친듯이 떨어댔겠지만, 아쉽게도, 그런 정도의 공력은 이 작품 내에서 약 두 번 정도-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핑 도는 듯한 느낌-로 만족해주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는 해도, 일단 여느 한국 소설가 님하들과 비교해봐도 일단 수준 자체가 좀 다른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한국 소설에서는 정말이지 가뭄에 콩나듯이 이런 게 정말 소설이지, 하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이 작품이 그런 가뭄에 콩이 되겠습니다. 한국 소설은 그저,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신변잡기적인 생각이나 너저분하게 늘어놓는 게 거의 대부분, 이라고 해도 큰 무리가 없다고 저는 생각하는 편이라서 말이죠.
이제까지 박범신 선생님의 소설을 다섯 편 읽었는데요, 과연 진정한 고수라는 생각이 드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큰 폭의 변화 없는 일정한 수준의 실력 때문이었습니다. 작품에 신뢰가 간달까요? 이제까지 제가 읽은 한국 소설가들의 작품이란 게, 한 사람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이게 과연 전에 그 작가 선생님의 작품이 맞나, 싶을 정도로 기복이 심한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네 권, 다섯 권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었죠. 대부분 두어 권이면 에이, 더 볼 필요 없겠네, 하고 결론이 내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경우, 외국 작가의 작품은 전작 케이스가 적지 않은데 한국 작가의 전작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럴만큼 신뢰가 가는 작가가 없었죠. 그런데 이번에 박범신 선생님의 <은교>를 통해 최초로 전작의 욕심이 좀 생겼고 이 작품을 내려놓자, 확신이 들었습니다. 다섯 편의 수준이 각각 이 정도라면 남은 이십 여편의 작품 또한 무리가 없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니까요. 모든 작가라는 직업이 확실히 그런 것 같습니다. 성실해야 실력이 생기는 것 같아요. 작품 하나 발표하고 하세월 있는지도 모르게 지내다가 잊을만 하면 또 발표하고 그러는 건 아무래도 프로라기보다는 아마추어에 가깝다고 보여지고 그런 작가의 작품을 읽어보면 여지없이 수준 이하인 경우가 정말 대다수입니다. 그러나 때되면 으레 작품을 발표하는 사람의 결과물은 확실히 그 레벨이 달라요. 물론 다 그렇다는 게 아니라 대체로 그런 것 같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을 남들에게 쉽게 권해주기에 살짝 문제가 없진 않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이야기의 내용 때문인데요, 일반적인 사람들이 읽어서는 그저 불쾌한 기분만 들 수도 있는 내용들을 다루고 있거든요. <은교>에서의 롤리타적인 부분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역겨운 정사 장면이 수차례 등장하는데요, 그런 변태적인 성행위를 묘사하며 인간의 광기를 예술의 한 단면으로 승화시키고 싶은 작가 선생님의 개인적인 욕심을 느낄 수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게 극단적으로 일반적이지는 않다는 얘기이지요. 나름대로 각종 장르의 소설을 다 읽으면서 그마나 수용 범위가 일반인보다는 넚다 할 수 있는 저 역시도 변태적인 성행위의 장면은 역겹기만 할 뿐, 문학적인 예술성 따위는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저, 그런 의도만 느껴질뿐이었지요. 인간의 광기를 묘사해서 예술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욕심은, 비단 소설가가 아니더라도 작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욕심을 가져볼만한 영역이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정도 납득되어지는 수준을 지키면서 표현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혼자 예술한답시고 달나라로 날아가버리는 건 글쎄요, 갸우뚱일 뿐이지요.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럼 앞으로는 혼자 놀아, 정도에 불과합니다. 이 작품의 종반부에 이르러 몰아치는 그런 광기는 그저 읽기 불편했을 뿐, 그 광기에 근본하는 인간의 마음을 공감하기엔 무리였습니다. 욕심이 과했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적지 않았어요.
어쨌거나 일단, 보통 소설가들과는 확연한 실력차를 보이는 선생님의 작품으로서는 손색이 없었고요, 전작 선택에 박차를 가하게 하는 소설이었습니다. 정말이지, 소설이란 이런 게 소설이잖아, 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작품이었다구요.
|
|
2006년에 박범신 님이 쓰신 장편소설이다. 1998년의 IMF가 오기전 겨울에 대기업의 자금이사로 있던 평생 한 직장에 몸담으며 가정의 가장으로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아버지가 갑자기 사라지고 2년여의 시간이 흐르면서 아버지의 소식이 전해지는데, 그 아버지 김진영씨에게 무슨일이 있었던 것일까? 50대 초반에 접어든 어느날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는 어떤 운명적 만남에 의해 주인공은 지금껏 50평생 살아온 일상을 파괴하고 새로운, 전혀 새로운 광포한 운명에 휩쓸리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예전에 일본 영화 한편이 히트를 친 경우가 있었다. 일상에 묻혀있던 평범한 한 회사원이 어느날 갑자기 춤을 배우게 되면서 새로운 활력을 찾아가는 영화,,, 그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첨에는 했다. 그런데 소설은 읽어 갈수록 그저 단순한, 어느날 갑자기 파격과 만나고 방황하고 고뇌하기만한 재미만 충분한 이야기가 아니다. 세계 곳곳을 헤집어 다니며 무언가 진한 삶의 이상향을 찾는다거나, 깊은 꿈같은 영혼의 자유를 갈구하며 끝을 알수 없는 파격속을 나아간다. 읽어 내려 가지만, 그리고 한순간 나도 모르게 소설속으로 빠져 들어 가지만 섬뜻섬뜻한 가공성에 주춤거리면서, 인간의 심성의 변화가 그토록 절절할 수가 있는지 의아스럽기도 하다. 어떻게 평범하기 짝이 없는 아버지는 그렇게 강열한 변화를 순식간에 겪을 수가 있을까? 아무리 사람이 치열한 열병에 노출된다 할 지언정 그토록 한 사람에게 완전하게 메여 버리고 빠져드는 상황을 맞을 수 있을까? 시인인 천예린 이라는 여자의 그 거부할수 없는 치명적 매력은 무엇인지...주인공에게 마치 신적인 존재처럼 그려지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시인이면, 너무 확고부동하게 매력적이면, 모든 평범을 넘어선 예술이면, 그렇게 사람위에 굴림할 수 있는가?? 단지 오십 평생 모르고 살았던 성적인 강한 자극 때문에 시발이 되고 미치듯 변화를 갖게 된다는 것이 어지럽다. 소설속에서는 오로지 사랑만을, 평생을 살아온 지난 세월도, 아내도, 자식도, 모두 부질 없기만 하고 평범속에, 일상속에 사는 것은 그저 허망일 뿐이라는 식으로 내내 그려지기에 내게 그건 아니라고 반박하게 만든다. 왜 그토록 저자는 오로지 꿈을 쫒찾아 일상을 탈출하는 것만이 이상인것처럼 그려 낼까 원망스런 마음이 저절로 든다. 흠미롭고 열열하게 사로 잡지만 결코 쉬운 책이 아닌것 같다. 텅빈 -----자유가 거기 있어 영원한 침묵의 방이----- 이것을 말하기 위해 박범신 님은 그토록 극도의 이상향을 이야기했을까? 그렇기에는 한남자의 치열한 사랑이 넘 강열했었다는 생각이 든다. |
|
나이가 들면 주름이 생긴다. 주름은 어떤 의미일까. 고된 삶의 흔적, 혹은 방탕함의 흔적인가. 대개 노동자들은 이마에 주름이 많고, 학자들은 미간과 팔자주름이 많다. 주름은 고뇌의 힘든 시간이 흐렸음을 표현하는 징표이기도 하고, 인간을 지구로 봤을때는 주름은 마치 화산자국, 혹은 지진자국으로 볼 수도 있겠다. 우리의 몸은 때때로 폭발한다. 찡그린다. 터진다. 쾌락으로 넘치고 파멸한다. 주름은 그 흔적중에 자유로운 쾌락의 흔적을 찾아간다.
화자는 주인공의 아들로, 남대문 의류시장에서 일하다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신참내기다. 그가 아버지의 행로를 예상하며 엮은 내용이다.
아버지는 시베리아 북극해에서 죽었다. 그곳이 침묵의 집일까. 가장 자유로운 곳? 아버지가 그곳에서 죽은 이유는 천예린이란 시인때문이다. 모든 것이 그 여자 때문이다.
아버지는 김진영이다. 회사에서 자금을 담당하는 이사다. 그는 전투하듯 imf때도 버텼다. 어느 날 노란 우산을 든 여자를 보고 이끌려 따라간다. 그녀가 들어간 곳은 미술학원이다. 그곳에서 천예린을 만난다. 그녀는 시인이다. 김진영은 학창시절에 잠깐 미술을 꿈꿨던 적이 있었다. 연상인 천예린의 외모에 빠진 김진영은 천예린을 만나기 위해 노력하고 둘은 사적인 사이로 발전한다. 천예린과 만나면서 김진영은 자신이 자본주의 사회의 노예로 갇혀 살아왔음을 깨닫는다. 그는 지끔껏 회사, 집만을 꾸역꾸역 돈을 벌기위해 개처럼 살아왔다. 천예린의 감수성이 그를 자유로운 인간으로 깨운다. 천예린의 가냘프고 몸매에 너그러운 젖가슴은 그의 본능, 그의 결핍을 채워준다. 그는 바람이 난 것이다.
아내와 대판 싸우고도 천예린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김진영. 회사의 자금을 천예린에게 꿔주는데, 나중에 천예린이 돈을 떼어먹고 사라진다. 천예린이 꿔간 돈은 가난한 어떤 남자 화가에게 흘러들어갔다. 천예린은 그를 두고 아프리카 케냐로 여행을 떠났다. 천예린을 잡으면 죽이기 위해 나이프와 머리핀을 갈아 온 김진영은 외국에서 고생을 하고 점점 늦어진다. 천예린을 다행히 만나지만 그녀를 죽이지 못하고 또 다시 사랑의 포로가 되고 만다. 천예린은 지병을 앓고 있다. 붉은 종기가 터지는데 김진영은 그 종기까지 다 빨아먹으며 그녀와 합일하려고 노력한다. 스페인을 거쳐 북극해로 가고 바이칼에서 천예린은 죽는다. 김진영은 자유는 공허라는 것을 깨닫는다. 빈집, 빈 공간, 지구의 중심. 텅빈 침묵의 방.
천예린은 죽기전에 대량의 시를 쓴다. 마치 니체의 영원회귀사상을 보는듯 했다. 김진영은 잦은 섹스로 인해 급늙었다. 급기야 다방 여자와 하면서 죽었다. 섹스와 사멸은 연결되어 있다. 그 중심에 자유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중독된 것일까. 천예린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자유를 위해 지구의 중심을 찾아나선 김진영은 그렇게 생을 마감한다.
|
|
역시 강렬하다. 박범신 작가의 책은 읽을 때마다 마치 뭔가에 취한 것처럼 묘한 흡입력이 있다. '은교'가 적나라한 심리 묘사로 충격을 주었던 것과는 달리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나 이 책 '주름'은 글의 내용 자체가 워낙에 강해서 쉽게 잊혀지지 않는 스타일이다. 평범한 50대 가장인 김진영, 어느 날 우연히 화가이자 시인인 천예린을 만나고서부터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경로를 걷게 된다.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어린 시절의 꿈을 포기하고, 낭만과 문화적인 소양과는 담을 쌓고 살아왔던 지난 세월을 천예린은 단 몇번의 만남으로 허물어 뜨리고 그에게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해 준다. 그녀에게 속수무책으로 빠져드는 김진영, 회사 자금 이사라는 직위를 남용하면서까지 그녀에게 돈을 빌려주는데 어느 날 그녀는 일언반구 말도 없이 그의 눈앞에서 사라진다. 그녀를 찾아 먼 길을 떠나는 그에게는 IMF를 맞아 가뜩이나 어려운 회사나 남겨진 가족들은 더 이상 중요한 대상이 아니다. 이미 천예린의 노예가 되버린 김진영의 마음엔 그들보단 천예린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 열망만이 있을 뿐이다. 적도 아래의 나이로비서부터 시작하여 그들이 함께 보았던 영화나 나누었던 대화에 등장한 각종 장소들을 김진영은 천예린의 자취를 따라 이동한다. 킬리만자로 산과 카사블랑카를 거쳐 마침내 페소에서 그녀의 모습을 발견한 김진영, 하지만 그녀는 놓치고 여행 자금이 든 돈가방은 날치기를 당한 상태에서 애꿎은 소년의 팔을 부러뜨린 그는 그 곳에서 가죽공장 일을 도우며 40여일을 보낸다. 온 몸의 허물이 벗겨지고 피부는 새까맣게 타고 살이 20키로나 빠지는 혹독한 시간을 보낸 끝에 그는 다시 천예린의 발길을 따라 그녀를 쫓아가고 마침내 외진 성당에서 그녀와 다시 만난다. 그녀에 대한 사랑, 집착, 원망중에 진짜 그가 가졌던 감정은 무엇일까. 그녀를 죽이려고 가져간 날카로운 나비 핀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찌른 김진영은 그날 이후 천예린과 같이 살면서 꿈같은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천예린은 불치의 병에 걸린 상태, 그녀의 병세가 심각해짐에 따라 그들의 관계도 위기를 맞게 된다. 하지만 김진영은 끝까지 그녀 곁에 남아서 임종을 지키고 그녀의 유해를 북극해 근처의 조그만 언덕에다 뿌려준 뒤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아들이 마련해준 고향의 작은 집에서 살게 된다. 아들의 시선에서 바라본 그의 죽음은 충격적이었다. 아니, 이 책의 곳곳에 등장하는 김진영과 천예린의 파괴적이고도 도착적인 성행위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무서울 정도로 집착하는 모습에선 소름이 돋고 솔직히 눈살이 찌푸려졌던 것도 사실이다. 보통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들이 20,30대인 것과는 달리 이 책의 주인공들은 50을 훌쩍 넘긴 나이라는 것도 거북스러움을 더했다. 내가 여자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천예린에게 그토록 집착하는 김진영의 심리가 잘 이해되지 않았고, 천예린이 아니꼽기도 했다. 그러나 평범하게 살아온 한 남자가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자신의 모든걸 불사르고 전혀 다른 사람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은 놀랍고도 경이로웠다. 박범신 작가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 책도 오랫동안 내 머리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기억될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