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난 그의 이름을 들으면 일종의 착잡함과 존경심이 양쪽 다 든다. 사실 상업적이니 천박하다느니 하는 세간의 비평은 이 양반에 대한 무지한 비평일 경우가 많다. 물론 카라얀을 무조건 편들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서구 고전음악 레파토리를 아주 최상급의 해석으로 음반에 실어서 온누리의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했던 그의 노력은 정말 가치있는 작업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가치있는 작업을 카라얀이 상업적으로 이용한 것은 좋은 일이 아니고 결국 카라얀이 죽고 난후의 클래식 음악시장의 운신의 폭을 좁혀버리는 호된 댓가를 가져왔다고 난 굳게 믿지만 말이다.. 물론 그 댓가로 그는 막대한 재산과 명성을 얻었지만..그것은 그가 당연히 받아야 할 상급이었다고 생각한다.
그중에 베토벤 해석은 가히 최고라고 생각한다.그의 베트호벤 교향곡과 서곡의 당당하고 치밀하고 강렬한 가락살리기를 들으면 과연 카라얀은 최고의 베토벤 해석자로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때가 많다. (70년대와 80년대의 베트호벤 해석은 정말 멋지고 아름답지 않은가 말이다..) 사실..독일고전음악의 주 레파토리들에서 카라얀은 정말 흠잡을 데 없는 좋은 해석들을 들려준다.
70년대의 브람스 교향곡 전집이나, 70년대의 브루크너 교향곡 음반들 그리고 차이코프스키 교향곡이나 관현악 소품집들을 한번 들어보라!! 얼마나 귀에 착 감기는 소리를 들려주는지를 말이다. 사실 그때문에 속물적 음향을 들려준다는 비난도 많이 받지만, 그래도 카라얀은 카라얀이다. 그런데 카라얀과 잘 걸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좀 뜨안한 레파토리가 바로 구스타프 말러가 아닐까 한다. 그렇지 않나? ^^ 1932년인가 34년부터 나찌당에 가입하여 활발하게 나찌당의 지휘자로 활약했으며 전혀 과거지사에 대한 반성과 참회가 없었던 그에게 있어서 (나도 이 점에 그를 경멸한다.. 솔직히 냉정하게 말하자면 카라얀에 대한 나의 지지심도 이 문제앞에서 사그러들었다. 솔직히 카라얀은 훌륭한 지휘자이지만, 최고의 음악적 해석을 모든 레파토리에서 들려주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기 세대 이전의 푸르트벵글러나 토스카니니를 능가하는 독창적인 개성과 광채를 소리에 실었던 사람도 아니라는 것이 나의 솔직한 생각이다)구스타프 말러라는 존재는 상당히 껄끄럽지 않았을까?
말러는 유대계 이면서 독일어권에서도 변방지역이었던 보헤미아에서 태어났고 작곡과 지휘활동은 주로 오스트리아 빈에서 했으며 그의 음악은 나찌 집권시절 연주자체가 금지되고 퇴폐예술의 전형으로 낙인이 찍히고 더러운 유대인의 음악이라고 해서 얼마나 심하게 박해를 받았는가 말이다....브루노 발터와 오토 클렘페러를 비롯하여 쇤베르크 알반 베르크 등등..말러를 좋아했던 사람들..모두 어처구니없이 고초와 박해를 겪어야 했던 것이 아닌가? 그런 나찌당에서 승승장구하려고 발버둥치고 헤르만 괴링에게 아부하여 나찌국방군의 징집을 피해갔던 비겁한 지휘자인 그가 무슨 자격으로 지휘봉을 들어서 말러의 음악..그것도 그의 내밀한 내면의 음성인 "이생의 노래"를 연주했단 말인가? 심정이 복잡하지 않았을까? 사실 그랬을 것 같지도 않지만..카라얀이 그런 인물이었으니 난 경멸스럽기까지 하다. 난 카라얀 매니아가 아니다. 그의 멍청하고 삿된 짓까지 긍정할 수는 없다. 일단...
사실...카라얀의 말러는 말러리안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분분한 것이 사실이다. 발터나 클렘페러 번스타인 아바도 샤이 텐슈테트등등의 발군의 말러리안들 사이에서 그의 말러는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그의 말년의 말러 교향곡 9번 연주는 최고의 명반으로 손꼽히지만, 그것도 내 생각에는 전혀 아니올시다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지나치게 매끈하고 일관되고 안정된 해석을 원하다 보니..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말러의 곡들을 끌고 가는 경우가 많다.
일단..예스24에서 내가 사들인 말러 교향곡 4번과 대지의 노래(사실은 이승의 노래 또는 이생지가라고 부르는 것이 다스 리트 폰 데르 에르데의 정확한 번역이겠지만...) 음반중 이 대지의 노래를 들어본 내 소감을 말하자면.."그의 해석을 존중하되 동의는 못하겠다"는 것이다.
1장.."대지의 애수를 노래하는 취객의 노래"의 첫 구절의 빵빠레부터 우리를 당혹하게 한다. 얼마나 가볍고 경쾌하고 이질적인 해석인가? 발터의 해석을 들어본 나로서는 참으로 황당할 수 밖에 없었다.. 전혀 심각하지 않은 빵빠레와 그 후의 곱디고운 현악...그리고 그 현악기들은 아주 프레이징이 엉망인 말러의 가락들을 들려준다. 관악과 현악이 더구나 따로 논다. 타악기는 또 어떤지..베를린 필의 소리가 따로 노는 것이 음반 감상시의 감상자의 집중력을 얼마나 무디게 하고 듣는 귀를 피곤케 하는지는 굳이 더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문제는 이 황당함이 작품을 무시하면서 얻어지는 황당함이라는 데 있다.
2악장 가을에 고독한 사람이나 3악장 젊음도 마찬가지다. 카라얀은 여기서도 말러의 이중적이 면모 (즉 간단히 말해서 아주 아름답고 고운 가락과 격렬하게 세상이 다 무너져 내릴 듯한 절망과 분노로 가득찬 노랫가락이 말러의 곡속에서 공존한다...그것이 바로 말러의 매력이다)를 철저하게 자기가 자신있게 다루던 독일 작곡가들처럼 연주하기 위해서 없애버렸다. 마치 브람스나 브루크너처럼 말러를 연주한다.더구나 리듬감은 어찌 그리 무디고 무겁기만 한지.. 당연히 베를린 필의 해석은 역동적이거나 리듬감이 살아넘치는 프레이징이 아닌 악보의 단순한 취주가 되어버렸다. 르네 콜로...르네 콜로와 크리스타 루트비히의 음성은 또 얼마나 뜨악하게 들리던지..미끄럽고 부드럽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평면적인 단순함이다.
콜로는 말러가 아니라 그냥 로엥그린이나 지크프리트에 어울리는 목소리이다. 여유있고 담백하면서도 강렬한 ..(디스카우가 딱이겠지..)소리가 말러의 곡에서는 요구된다. 이것을 무시하고 어떤 해석도 인정받을 수 없을 것이다.이런 이질감과 관현악의 말러의 "부르크너화"가 곡을 물결치지 못하게 만든다. 발터의 음반을 듣고서 이 음반을 들으면 엄청난 배신감이 카라얀에게 물결칠지도 모르겠다. 이런 속상함이 에비히 에비히를 부르는 6악장 고별까지 계속된다. 내가 솔직히 기대했던 5악장의 호쾌한 남성성악가의 " 봄에 취하는 자"를 르네콜로의 목소리는 율리우스 파착이나 프리츠 분덜리히의 발끝도 따라가지 못하는 감칠맛 없는소리를 들려준다.악보를 따라 읽고 있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드는 것이다.
그나마..베를린 필이 파괴적인 말러의 성향을 들려주는 경우가 한 번 있었다. 4악장 "아름다움에 대해서"에서 꽃을 따는 아름다운 샤오지에를 희롱하던 당나라의 귀공자들이 타고 다니던 말발굽소리를흉내낼때 요란 뻑쩍지근하게 울려대는 소리..그런데 그 야단스러움도 발터와 빈필이 들려주었던 그 모노음반의 요란함의 절반도 따라가지 못하는 철저하게 정제된 소리였다. 하긴..카라얀이라는 생각을 하니 그것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이런 모든 카라얀의 우둔한 해석들이 쌓이고 쌓여 있다. 말러 4번이라고 아바도를 능가하는 명연을 카라얀은 절대 들려주지 못한다. 사실 베를린 필은 말러와 그다지 친하지 않은 악단 아닌가? 실제로 푸르트벵글러 초기까지는 그나마 연주하던 말러 레파토리가 나찌시대와 독일 60-80년대까지 거의 오르지 못했다. 말러를 자주 접하지 못하니..뉘앙스가 몸에 배일리가 없다.왜 이 음반이 번스타인의 데카음반을 제압할 수 없었는지 정확하게 해답을 제시해주는 것 같았다. 루트비히의 목소리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카라얀 베를린 필과의 앙상블에서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한다는 말이 정확한 말이다. 빈필과 완전히 하나된 소리를 뽑아내면서 사람의 심금을 울려대던 전설의 콘트랄토 "캐슬린 페리어"와는 완전히 다르다. 사실 원래 페리어에게 루트비히는 적수가 될 수 없다. 솔직히 페리어만큼의 말러의 우울과 슬픔을 진솔하게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지금도 적수가 없다. 이 뿐만이 아니다..
녹음도 그렇게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지 못한다. 오히려 데카의 존 컬쇼가 정성을 다해 녹음해 놓은 발터 페리어 반의 소리가 하나로 소리가 몽쳐서 들린다. 득(DG)사가 녹음한 이 75년 연주는 말러에 대한 카라얀의 무지의 소산이 아닐까? 도이취 그라모폰사도 이 음반에 큰 정성을 기울인 것 같지는 않다. 이렇게 온갖 문제점을 다 노출시킨 "이생지가"는 말러의 이생의 슬픔을 노래하지 못했다. 오직 카라얀과 베를린 필만의 자기만족으로 끝나버리지 않았을까 한다..물론 카라얀이 진짜 만족했을까? 말러와 카라얀은..어째 궁합이 잘 맞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는 음반...
에비히 에비히...
크리스타 루트비히의 목소리가 왜 그렇게도 부박스럽게 들린단 말인가? 이것이 카라얀의 한계일까? 부드럽고 정제된 말러...말러의 대지의 노래가 브람스의 독일 진혼곡이라도 된다는 생각으로 혹시 연주한 것 아닐까? 그렇다면 카라얀은 정말 "바보"다. 카라얀의 지휘봉에 말러는 걸려들지 않는다. 이생지가라면 더더욱 그렇다.
솔직히 카라얀의 말러는 카라얀식 말러라고 불러야 정확하다. 그러나 문제는 카라얀식이 "비효율적이고 전달방식에 있어서도 설득력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말러가 얼마나 독일음악사에서 이질적이고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효과적으로 재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카라얀의 음반을 들으면서 도저히 지울길이 없었다. 물론 아도르노의 말처럼 카라얀은 "말러의 빵빠레가 가진 미메시스"를 체험하여 세상의 비극적 아름다움을 찬연하게 전달해주기에는 너무 닳고 닳은 지휘자가 아니었겠는가?
내 솔직한 생각은 카라얀의 해석이 듣고 싶다면 굳이 사서 들어도 무방하다. 다만..1악장부터 6악장까지의 해석이 다른 지휘자들 예를 들어 발터나 클렘페러 번스타인 아바도 시노폴리 샤이등등의 말러리안들과 절대비교가능하리라는 생각은 안하시는 것이 좋다.^^ 정말 듣고 이게 말러 맞나 하는 생각이 들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런 선입견이 없는 사람들이 카라얀의 이 이생지가 해석을 듣는다면 브라비시모 소리가 터져나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참고로 난 카라얀을 사랑한다.^^ 다만 말러만 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