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선 임옥희 선생님과 주디스 버틀러 샘은 56년 잔나비띠 동갑내기다. 원래 재주많기로 유명한 원숭이처럼, 두 잔나비띠 이론가와 해설가의 논의가 빛나는 작품이다 그래설까? 임쌤은 수사학과 교수단게 난해한 글쓰기로 정평난 버틀러쌤의 주요저작 7권을 우리의 구미에 맞게, 입안에 착착 달라붙게 해설해준다. 루틀리지에도 사라가 쓴 버틀러 해설서가 있고, 버틀러 리더도 나왔지만 이 책처럼 우리 시각에 맞게 재해석된 버틀러는 일찌기 본 일이 없다. <젠더 트러블>, <바디스 댓 매터>, <익사이터블 스피치>, <사이킥 라이프 오브 파워>라는 4대 저작에다 문학 비평서 <안티고네스 클레임>, 그리고 문화와 현장비평성이 강한 <프리케리어스 라이브>, <언두잉 젠더>라는 총 일곱권에 대한 탁월한, 내 몸으로 체화되어 걸러진 해설서가 여기에 있다. 이것은 단순한 발췌 번역도 아니요, 기존 해설서의 편집도 아니다. 이것은 바로 지난 수년간 여이연이라는 문화연구소에서 강좌와 세미나 활동을 통해 살아있는 퀴어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인 임옥희 선생님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바로 21세기 한국의 문화연구자가 복잡한 시대문화적 상황에서 바라보는, 동시대를 사는 미국 명문대 백인 레즈비언 교수에 대한 해법이라고 할 수 있다. 평론에 (잘 모르니까 불안해하면서) 괜히 한줄씩 버틀러를 인용하거나 , (제도권 학자인) 나는 (제도권에 있지만 비제도적 학문을 하는)가 버틀러가 참 좋아요(참 신기하고 웃겨요)라고 말하면서 버틀러 무시하지 말고, 한번 읽어보시라. 방탕한 딸 버틀러의 진지하고도 새로운 수사학에 감탄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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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의 최근작품들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마치 독자에게, 내가 여성인지 남성인지 너네들 궁금하지? 그런데 그게 왜 그렇게 궁금한 것인데? 그런 천박한 호기심을 가져서 어따 쓸래? 하고 강변하는 듯하다. 그녀 작품 속의 불완전하고 불확실하고 취약한 주체들, 구성적 외부의 사람들은 무엇을 꿈꾸며 어떤 포지션을 취하며 살아가는가? 그들은 거식과 위험한 유머와 신성모독과 유랑으로, 심지어는 언어에 있어서조차 정통 한국어 대신 불분명한 근친상간적 방언들로 ''한 철학''하는 자들이다. 배수아의 최근 작품들에서 주디스버틀러의 조롱과 모독, 그리고 가장무도회적 젠더철학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인상깊은구절] 거식으로 가벼워진 몸으로 이들은 비상을 꿈꾼다. 마지막 하늘이 끝난 뒤에도 새는 날아야 하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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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이론의 대가 주디스 버틀러의 이론은 난해하다는 평이 정설이다. 지도교수급 인사들이 [젠터 트러블]를 놓고 이해하기 어렵다고 투덜거릴 정도니 말이다. 프랑스에는 버틀러급의 난해한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이 다수 있지만 보수적인 영미 학계에서 버틀러식의 난해한 담론은 주류에 속하지 못한다. 상아탑의 페미니스트 가운데 프랑스 이론의 영향을 받은 이들을 제외하면 페미니즘 2세대의 이론은 결코 난해하지 않다. 버틀러의 이론은 전반적으로 난해하기로 악명이 높지만, 그녀의 퀴어 이론과 수행성 등의 핵심개념은 솔직히 모호할 뿐이지 어렵지는 않다. 그녀의 패러디, 수행성, 반복 복종, 우울증 같은 이론들의 최종적인 지향점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 지향점은 데리다의 해체주의의 지향점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바로 남근이성중심주의, 본질주의, 생물학적 환원주의의 해체다.
주디스 버틀러의 이론을 살피기 전에 1990년대 페미니즘의 맥락을 다소 이해하는 선행작업이 필요하다. 저자의 다음과 같은 말이 이를 잘 요약하고 있다.
"유물론적 페미니즘이 가부장제적 생산양식을규명하는데 집중했다면, 소위 포스트 페미니즘은 가부장제를 아예 섹스/젠더 체계로 교체하려고 한다. 전자가 가족, 모성, 가내생산양식, 재생산 등을 핵심의제로 삼았다면, 후자는 전자의 중심에 있는 이성애 결혼제도 자체를 비판하게 된다. 말하자면 후자는 이성애 결혼제도에 포획되지 않는 젠더, 섹슈얼리티, 주체성을 논의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된다. "(22-3쪽)
버틀러는 차이의 정치와 다양성의 정치의 대표적인 이론가다. 버틀러에게 보편적인 '여성'이란 집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성애 근본주의를 해체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퀴어와 성 정체성의 수행성 기제를 강조한다. 젠더 수행성이란 성적 정체성은 오랜 세월 남성되기, 여성되기의 반복적인 수행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수행성 이론에 따르면 '젠더 트러블'이란 표현대로 섹스와 젠더의 구분조차 부적절한 것이 된다. 반본질주의자인 버틀러에게 심리학자 로버트 스톨러가 구분한 섹스와 젠더의 경계선은 자연/문화, 본질/존재, 혹은 보부아르 식의 초월과 내재라는 실존주의적 이분법의 복사판에 다름 아니다.
"젠더 수행성은 젠더 트러블을 만들어냄으로써 정상성을 중심으로 한 배제의 원리를 공격한다는 점에서는 정치적이지만, 주변화되고 비체화된 젠더들 사이에서 사소한 차이를 가지고 자신들을 정체화하려는 '사소한 것에 대한 나르시시즘'에 빠져있다는 점에서 동시에 탈정치적이기도 하다."(79쪽)
버틀러가 섹스/젠더의 구분을 해체하고 젠더의 수행성을 강조하고 주체란 있을 수 없다는 관점을 피력하는 것은 페미니즘 진영 가운데에서도 그 정치적 함의를 놓고서 의견이 분분하다. 퀴어의 정치학이 오히려 페미니즘의 정치적 역동성을 약화시킨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다.
"여성을 변혁의 주체로 설정하지 않는 여성해방운동이 가능한가? 행위 주체없는 변혁이 어떻게 가능한가? 여성적 정체성의 정치를 거부하면서 버틀러가 말하는 주체 혹은 주체의 주체성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그녀에게 주체성은 어떻게 구성되는가?"(53쪽)
버틀러의 수행성 개념을 예술적인 공연이론에 적용할 수 없다. 비록 버틀러가 공연적 맥락의 은유를 많이 사용한다고 해도 말이다. 사실 가장무도회로 상징되는 버틀러의 '공연 은유'는 기존의 언어학적 수행성 이론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오스틴의 화용론적 맥락에 못미치는 이론적 허술함까지 보인다. 이는 언어의 수행성에 대한 버틀러식의 독법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동성애는 이성애라는 원본이 없는 모방이며 그것의 패러디가 된다. 또한 주체성과 고정된 정체성을 부정하고 연극적인 가장무도회와 지나치게 유동적인 정체성 이론으로 인해서 정치적 전복성과 연대성을 약화시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내가 보기에 버틀러의 가장 큰 문제점은 사회구성주의를 극단화하여 인간의 종으로서의 생물성을 완전히 무시한다는 것이다. 생물학적 기제를 인정하지 않은 성 정체성 이론은 싸구려 소설로 전락하기 쉽다. 젠더 수행성은 자칫하면 그저 문학평론과 영화평론을 위한 학술적인 뉘앙스의 잠꼬대로 전락할 수 있다.
저자는 버틀러의 이론으로 배수아의 텍스트를 시험적으로 독해한다. 배수아의 텍스트는 유랑하는 비체들의 유머로 평가된다. 비체는 마녀, 괴물여성, 미친여성, 히스테리아처럼 남성의 타자이고 이성의 타자이다.
"배수아 소설의 인물들은 폭식과 거식 사이를 떠돈다. 제도 교육을 거부한 독학자이거나 불면증자, 동성애자, 근찬상간자, 유랑민들이다. 그들은 최소한 일하고, 혹은 일하다 얻은 불면증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 단식기계가 되거나 방랑자가 된다. 그들에게 방랑은 자유와 동격이고 언어는 존재와 동일하다. 아이들은 성장을 멈추고 어른이 되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사회적 규범과 호명에 복종하는데 실패한 채 길 위를 떠돈다. 그들 자체가 빈 집이거나 혹은 길 위에 있는 집이다."(27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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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하다는 평 때문에 우선 번역서가 아닌 국내저자의 글을 통하여 버틀러를 만났다. 무엇보다 더 흥미를 끌었던 이유는 버틀러 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배수아의 텍스트를 분석한 글이 수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버틀러는 일반적인 한계를 지닌 페미니즘의 이론에서 벗어나, 섹슈얼리티와 젠더를 구분하여 젠더의 수행성을 강조하고 있다. 여성은 신체생물학적 여성이라는 것에 한해서가 아니라, 후천적인 젠더로 인해 여성, 혹은 남성을 수행하게 된다는 점을 말한다. 그를 바탕으로 기존의 남성과 여성에 대한 고정적 관념을 해체하고, 진정한 여성상이란 것이 과연 존재조차 할 수 있는 것인지 되묻는다. 이를 통해 동성애가 이성애의 모방이며, 이반이 일반의 모방일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들의 행위는 정상에 대한 동경이 아니며 오히려 그러한 애초부터 존재할 수 없는 위계와 질서를 조롱하는 가면무도회라고 보고 있다. 버틀러의 이론처럼 세상에서 젠더와 성, 일련화된 계급, 주체에 대한 믿음이 해체되면 페미니즘 운동이 생물학적으로 '여성'이어야만 이해할 수 있고 싸움의 진영에 설 수 있다는 관점을 벗어나게 되며, 이것은 '여성'이라는 젠더를 가진 비체들 모두의 싸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쉬이 상상할 수 있듯이 배수아의 텍스트는 자국어와 젠더, 섹스, 사회의 주체와 비체를 혼합하고 나아가 조롱하고 있다는 시도로서 분석되고 있다. 그러나 버틀러의 이론은 생물학적이자 사회적인 남녀성의 기본적 기능-즉, 사회의 유지와 인류의 재생산 기능-을 간과하는 측면이 있으며-이러한 지극히 생물학적인 시선은 '퇴행적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지만-, 또한 모든 것들이 사회에 의해 부여받게 되며 진정한 주체란 있을 수 없다는 관점때문에 다양한 성, 즉 트렌스젠더, 드랙킹/퀸, 동성애자, 양성애자들의 각각의 주체성을 설명하지 못하게 된다.
쉽게 설명하는 책이라고는 하나 애초에 관심이 없는 화두라면 난해하게 여길 수 있을 듯 하다. 개인적으로는 버틀러의 이론을 바탕으로 하나에 천착하는 것이 아니라 가지를 뻗어 분석해가는 과정이 흥미로웠고, 버틀러가 쓴 책들을 접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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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한 글을 쓰기 전에 먼저 노무현에 대한 평가를 몇 자 끄적이겠다. 감히 너 따위가 노무현 대통령님을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냐, 라고 꾸짖는다면 딱히 할 말은 없다. 다만 글에서 서두의 역할이 자연스런 화제 전환이듯 버틀러와 노무현을 사유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른 분야에 대해 잘 모르듯 정치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한국사에서 중요한 정치인 두 명을 꼽으라면 노무현과 조봉암이라고. 묘하게 둘은 정부에 의한 법살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두 명은 한쪽 날개로만 날아가던 한국사회의 균형을 맞추고자 노력한 인물이었다. 보수일변의 사회에서 보기에 두 명은 지극히 온건한 노선을 견지했음에도 극단으로 몰렸다. 묵념.
버틀러와 노무현. 한 명은 가부장제를 반대한 퀴어 이론의 주창자이고 한 명은 다소 무책임한 정치인이었다. 딱히 연결 고리가 떠오르지 않지만 이 둘은 '극단'이라는 수식어로 묶일 수 있다. 노무현은 지역주의에 반대했고 버틀러는 가부장제에 반대했다. 둘 다 지극히 상식적인 주장이지만 기존의 사회로부터 급진적이라고 비판받았다. 또한 둘은 대안의 부재, 혹은 실천의 실패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적어도 이들이 활약한 당시에는 말이다. 여전히 가부장제는 공고하고 노무현이 맞서 싸우려 한 지역주의는 여전하다. 특히 아프간, 이라크 파병이나 FTA 체결, 비정규직의 확산 등 노무현의 경우 기존의 보수세력보다 더 한 행동을 보임으로써 지지자를 실망시키기도 했다.
어쨌거나 여기서 줄이기로 하고 책에 대한 얘기로 넘어가자.
여이연에서 발간한 '주디스 버틀러 읽기'는 이 시대 가장 급진적인 여성주의(?) 이론가로 알려진 버틀러의 이론을 소개한다. 스피박과 마찬가지로 버틀러 역시 난해한 글쓰기와 생뚱맞은 이론을 자랑하기에 입문자가 그녀의 이론을 소화하기란 쉽지 않다. 나 역시 '안티고네'를 읽을 때 대략난감이었다. 선생은 제자에게 가급적 원전을 읽으라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단 말이지요. 따라서 이러한 입문서가 필요한 법입니다. 때로는 원전보다 더 어렵게 쓰여진 입문서도 있지만.
여이연의 책은 전반적으로 깔끔한 편이다. 이 책도 마찬가지. 그러나 이 책을 읽은 지 어언 한 달.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니 끝.
하려다 좀 아쉬운 느낌이 들어 좀만 더 끌고 가겠다. 하타시테소유데쇼카의 쿠로마 로쿠로 군의 33분 탐정처럼 말이다.
여성주의 이론을 간략히 정리하면 1.시몬 보부아르로부터 파생된 여성주의. 보부아르는 여성은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섹스와 젠더를 분리했다. 섹스는 선천적 젠더는 후천적이고 문화적으로 구성된 산물. 이후 페미니스트 사이에서 분기가 벌어지는데 그 다음은 잘 모르겠다. 2.생태주의와 여성주의를 결합한 에코페미니즘 3.여전히 경제력이 가부장제를 유지하는 근간이라 주장하는 맑시스트적 여성주의 4.서구페미니즘이 제3세계 억압에 협력한다는 탈식민주의적 여성주의 5.섹스조차 해체하려는 퀴어 이론.
여기서 5번에 해당하는 흐름이 버틀러다. 간단히 말해 퀴어이론은 이성애 중심주의를 해체하자는 급진적 주장이다. 인간은 인간이지, 여성이나 남자가 아니다. 사람에게 정해진 성 정체성 따위는 없다. 전형적인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유 방식이고 불교적 사유 방식이다. 그럼 왜 우리는 자아, 성정체성, 주체가 있다고 믿는가. 알튀세르는 호명 과정에 주목했고 푸코는 지식-권력 산물인 담론을 꼽았다. 이는 언어를 매개로 이루어진다. 버틀러 역시 마찬가지로 얘기한다.
주체가 언어와 담론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이며 언어에 선행하는 것은 아니다. 주체가 언어와 담론을 가지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언어와 담론이 주체를 구성해 낸다. 따라서 주체인 '나'는 언어 바깥에서 구성될 수 없다.(63쪽)
니체는 옳기 때문에 행하는 게 아니라 행하기 때문에 옳다는 식의 윤리관을 정립했을 때 서구 형이상학은 형장에 거꾸로 매달려졌다. 하나의 유행이 된 계보학적 탐구. 처음에는 와, 라고 느꼈는데 이제는 그래서 어쩌라고 정도의 반응밖에 없다. 뭐가 다른 건데. 난 무식해서 미묘한 차이를 못 느끼겠구나. 사족은 이쯤 하고 좀 더 버틀러의 이론을 살펴 보자.
그런데 귀찮다. 공부는 무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