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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의 뇌에 대한 인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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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어려운 질문이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 봤을 근원적 물음이다. 다소 철학적인 제목의 이 책은 일단 하나의 사례로 가볍게 해답에 다가선다.
마룻바닥에 빨간 얼룩이 있다. 아빠가 세 살배기 아기에게 “벽에 페인트칠하다 흘린 거란다. 뭐처럼 보이니?”라고 묻자 아이는 “페인트 얼룩”이라고 답했다. 똑같은 얼룩을 놓고, 다른 아이에게는 “심심해서 물감으로 그림을 그린 거란다”라고 말한 후 같은 질문을 던진다. 아이는 “사람”이라고 대답한다.
‘예술’이라는 개념을 배우지 않은 유아들이 ‘창작자의 의도’를 알고 대답했을 리 없다. 미국 예일대 심리학 교수인 저자는 “유아들이 우연으로 만들어진 것과, 의도를 갖고 만든 대상을 구분해 생각했기 때문에 대답에 차이가 생긴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요소를 이 같은 차이에서 찾는다. 아이들조차 자연적 세계와 인위적 세계를 구분할 줄 안다.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의 차이, 혐오스러운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해낸다. 여기서부터 영혼이, 종교와 예술이, 웃음과 유머가 생겨난다. 육체와 정신은 분리돼 있다고 이원론을 주장한 데카르트처럼 인간은 태생부터 정신세계와 물질세계를 분리해 생각하는 ‘선천적 이원론자’인 것이다.
저자는 바퀴벌레가 빠진 우유를 먹지 않는 세 살배기, 아이들이 산타크로스를 신으로 보는 과정, 죽은 생쥐로부터 영혼의 지속성을 감지하는 방식, 괴물과 마녀를 무서워하지만 상상 속의 가짜라고 인지하는 모습 등 다양한 실험과 사례로 ‘인간이 선천적 이원론자’임을 증명해 보인다.
발달심리학과 문화인류학의 연구성과를 인용한 만큼 이해가 힘든 대목도 많지만 ‘라이언 일병 구하기’ ‘레인맨’ 같은 대중영화와 앤디 워홀의 유명 미술작품 등을 예로 들어 독자들이 학술적 논의를 친근하게 접할 수 있도록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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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가 한말이란다. 인간이 혹은 ‘나’라는 사람이 실존 하는지에 대한 나름 명확한 대답이라고 느낀다. 책의 제목이 ‘데카르트의 아기’다. 뭔가 이 아기는 특별할 것 같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존재를 알고, 심지어 다른 아기들에게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하는지 가르쳐 들것 같다. 이 아기 나를 특별한 세계로 이끌 것 같다는 생각에 책을 들게 됐다. 데카르트가 유물론자 인지 유신론자 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내가 생각하기론 유신론자 인듯 싶다. 그는 책을 낼 당시만 해도 자신이 내는 책이 교회에서 파문당하길 원치 않았던 사람이다. 결과적으로 책은 기독교에서 금서가 되긴 했지만 말이다. 자기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신을 통해서 믿게 되었고 그 후에 그가 한말이 바로 위에서 언급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이다. 이만하면 유신론자 아닌가. 제목과 달리 저자는 독특한 입장을 취한다.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립되는 주장들을 중립적으로 잘 소개하는 듯 하면서 종국엔 진화론의 손을 들어 준다. 반드시 유신론자가 진화론을 거부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부분의 유신론자(특히 기독교)는 아직 창조론에 무게를 둔다. 저자는 아기(심지어 자신의 아기도 동원된다)라는 피 실험자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밝힌다. 혐오감, 본질에 대한 인지, 도덕성 등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듯 한 부분을 아기들을 대상으로 여러 가지 실험을 하고 결론을 내는 방식으로 글을 써내려간다. 부분적으로 실험 환경이 모순 없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나 싶기도 하고, 일부 반응을 일반적 견해 혹은 결론으로 가져가려는 것이 억지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하나 예를 들자면 혐오감 반응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다. 아기들이 생후 얼마 지나지 않은 아기들은 혐오감이란 거의 없단다.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학습하게 되어 혐오감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더러운 것, 위험한 것 등을 경험하고, 교육을 통해 인지하게 된단다. 그렇게 됨으로 꼭 일치하지 않은 것들이라도 비슷한 점 혹 패턴(냄새 혹은 생김새 등)을 통한 반응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렇다면 전혀 경험하지 못한 상황이나 유사하지 않는 것에는 혐오감이라는 반응은 나타날 수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내 조카는 어렸을 때부터 혐오감이란 찾을 수 없었다. 다르게 얘기 하자면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거부 반응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주변의 다른 아이 엄마들 얘기를 들어 보았다. 자신의 아기는 전혀 혐오감 반응 없이 자라 왔다는 분도 있었고, 또 한 분의 아이는 새로운 것에는 무조건 거부반응 만을 보여 왔고 지금 까지 그렇다고 한다(그 아이는 현재 5살이다). 나 또한 실험을 해보고자 했다. 갓 태어난 아이들 혹은 생후 24개월 이전의 아이들을 충분히 확보 하지 못한지라 보육원 교사와 산부인과 간호사들, 아이 엄마들과의 만남을 통해 간접적으로 나마 실험의 결론을 내고 싶었다. 내가 한 실험은 어떤 사물의 움직임을 처음 그리고 재 관찰 하였을 때 아이들의 반응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험 환경 자체가 완벽하게 구성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아기들은 주사기를 인지 할 수 있으며, 그 것은 혐오감의 대상이다.’첫 번째 실험은 이런 내용을 전제로 하여 진행 했다.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치는 것들이 나타났다. ‘예방접종은 항상 간호사만 하는가‘ 이게 왜 중요 했냐고? 내가 우려 한 부분은 간호사의 존재를 학습을 통해 고통을 주는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을까(의사도 예방접종은 가능하다) 이다. 누군가는 ‘혐오감을 주는 사람으로 학습되는 것 아니냐‘고 주장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간호사와 의사는 아기에게 고통도 주지만 보살펴 주는 행동도 같이 한다. 즉 아기는 고통과 보호를 함께 제공하는 누군가에게 늘 일관된 반응을 보일 수 없다. 주사기를 사용하기 전에 사람의 인지를 통해 주된 감정의 반응이 나와 버리면 주사기에 대한 반응을 충분히 살펴볼 수 없다 한다. 뭐 소아과 의사의 말이니 일단 믿고 실험은 포기 했다. ‘엄마가 손을 들어 아기 신체부분에 충격을 가할 때 아이들은 고통을 느낀다.’두 번째 실험의 전제 이다. 두 번째는 더욱 어처구니 없이 끝났다. 엄마들이 이렇게나 어린 아가에겐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결국 ‘완벽한 실험 환경은 구성되기 힘들거나 불가능하다‘는 결론만 도달했다. 책 내용 중 흥미로운 부분을 소개 한다. ‘착한 놈이 먼저 죽는다‘ 소주제가 달린 부분이다. 여기에선 동물들의 상호 이타성에 대해 설명한다. 자신의 배를 채우고 여분의 피를 나눠주는 박쥐, 사자들의 먹이 나눠 먹기 규율, 새끼를 보살피는 동물 등 인간과 비슷한 부분이 소개 된다. 재미있는 점은 동물이 이타성을 가진다는 것만 아니라 같은 종족에게만 동정심 또는 돕는 행위가 발휘된단다. 인간은 타 종족(집 짐승, 야생 동물과 상관없이)에도 이타성을 발휘 하는데 말이다. 이건 우월한 존재가 가지는 특권적 배려 일까? 뇌에 대한 언급도 있다. 마침 내가 듣고 있는 수업에서 소개한 전두엽이다. 전두엽은 사람을 인간답게 혹은 철들게 하는 부분이라고 알려진다고 한다.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그렇다면 전두엽이 발달되고 나서야 사람은 철이 드나 철이 들어가는 와중에 전두엽이 발달해 가는가. 책과 수업에서도 소개했던 뇌가 거의 없이도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었다는 사람은 철없는 인간 이었을까?
난 진화론의 대부분을 믿지 않는다. 때문에 이 책을 읽어 가면서 불편한 점이 많았다. 우연의 우연을 거듭한 인간의 탄생. 반응 혹은 현상을 관찰하고서야 왜 진화론적으로 이러이러 해서 이러한 결과가 나온다고 한다. 그리곤 빈틈없이 논리를 채우기 위해서 요리조리 가져다 붙이는 것 같은 사설들. 얼핏 보면 상당한 정당성과 명확성을 지니는 것 같지만 창조론자들도 대부분 같은 방식으로 주장(대표적 유신론자로 CS루이스) 한다. 그러니 수십 년간 평행선만 그려 오게 되는것이지... 이 책에선 인간의 물질 영역, 사회 영역, 정신 영역을 폭넓게 다룬다. 하지만 제목과 달리 아기에 대한 내용이 많지는 않다. 아기들에 대한 실험은 위의 세 가지 주제를 설명하기 위한 도입부 일뿐이다. 저자가 좀 비겁하다 싶을 정도로 자신의 주장을 거의 숨겨 가면서 내용의 결말 부분의 다른 인물을 통해 슬며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다. 그래서 좀 지루함이 있다. 시원 시원하게 쭉쭉 뻗어가는 저자의 주장이 없어서 김샌다. 저자의 이러한 성향을 보여주는 부분이 책 말미에 있어 적으며 감상을 마친다.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필요는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