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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사지 말 것'. 하지만 이 말은 애써 그와 같은 작업을 시도했던 저자 김치샐러드에게는 가혹한 말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정말 그렇다. 심심풀이로 번뜩이는 상상력으로 별다른 의도 없이 자신의 블로그에 연재하기 시작했던 명화와 이를 설명하는 '그림 보여주는 손가락'은 아무런 죄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절대 사지 말 것'이라는 욕을 먹어야 하는 이유는, 저자 김치샐러드가 아닌 출판사에 있다.
학고재. 꽤나 고전틱하고 고풍스럽기도 하고 뭔가 깊이있는 냄새가 나는 이 출판사는 그간 꽤나 묵직한 책들을 펴냈다. <완당평전>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서서> <미술이 걸어온 길> <미의 사색가들>이란 제목을 달고 나온 책들이 이를 보란듯이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의 출판 행보와는 전혀 동떨어져보이는 이 가벼운 책이 나온 것은 어떤 이유일까.
<그림 보여주는 손가락>에 실려있는 내용들은 개인 블로그에 심심풀이(?) 삼아 올린 것치고는 꽤나 정성스럽고 공을 들인 흔적이 보인다. 그리고 또한 이런 시도는 매우 신선했다. 그러나. 블로그에 올라와서 인기를 끌 수 있는 콘텐츠라 하더라도 그것이 책으로 내어지는 것은 또다른 문제다. 블로그에 연재되어 주목을 받는 것이 있는가 하면 책으로 출판되어 많은 사람들의 손에서 읽혀야 하는 것이 있다. 자격의 문제라고나 할까. 누가 책으로 낼 수 있는 콘텐츠의 질을 따지고 자격을 부여하는가 하는 문제를 떠나서, '종이책'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가 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런 '자격'의 문제가 아닌 '예의'의 문제가 된다. 그래도 이 정도는 되어야 책이라 할 수 있지, 라는 엄격히 정해놓은 기준이 아닌 대략적으로 '책'이라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감이 있고 최소한의 그것을 충족시켜줘야할진대, <그림 보여주는 손가락>은 결코 그렇지 못했다.
또 다른 한편에서 반대의 긍정적인 시각으로 볼 수도 있다. 기존의 책에 대한 접근하기 어려운 이미지를 깨자는 시각이 그것이다.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뭔가 오~ 하는 감탄사와 함께 존중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책을 읽는다는 행위 그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뭔가 대단해보이는 이미지, 일단 이것은 책이 뭔가 아무나 쉽게 접해서는 안되는, 대해서는 안되는, 고급문화쯤으로 분류되는 시각이라고나 할까. 인터넷에 연재되던 귀여니 소설이 처음 나왔을 때 이게 무슨 소설이냐 이런 정도라면 나도 쓰겠다, 라는 비판은 "기존 소설은 적어도 어느 정도의 질이라는 것이 있었다"를 전제한다. 그러나 당시 논쟁에서 한편으로는 이건 소설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것이다 등의 찬사 또한 반대에 위치해 있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라면 <그림 보여주는 손가락> 역시도 기존의 그림에 대한, 특히나 명화에 대한 고급스러운 이미지와 아무나 접해서는 안되는 접근불가능성의 장벽을 허물어주었다고 평가해도 될까. 또 김치샐러드가 블로그에 명화에 낙서(?)를 하며 연재했던 것도 이런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과 긍정적인 시각은 이런 식으로 가능할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는 책읽는 행위를 티비 오락프로그램이나 드라마를 보는 것보다 상위의 문화방식으로 존중(?)하는 나로서는 이는 책에 대한 모욕이다 라고 밖에 말 할 수 없다. 위에서 밝혔듯 이와 같은 가벼운 책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시각이 존재하고 있음을, 또 생각할 수 있음을 알고 있지만, 나는 아직 책이 어느 정도의 최소한의 독자에 대한 예의로서 질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이다. 나는 저자 김치샐러드를 욕하진 않는다. 그것은 블로거로서 꽤나 대단한 일을 했으므로. 하지만 학고재에 대해선 욕을 할 수 밖에 없겠다. 심심풀이 작업으로 책까지 쓰게 된 저자에게는 책이 나온 기쁨을 억누를 길이 없겠지만 이 책은 그다지 그다지 별로 결코 누군가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리고 다시 읽을 생각도 없다. 솔직히 읽다 말았다. 그 시간이면 다른 더 좋은 책을 한 권 더 볼 수 있겠다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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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이것저것 스크랩하다가 네이버 메인 페이지에 녹차 1만 2천 개로 만든 사람에 대한 얘기가 나와 블로그로 가 포스트를 보고, 스크랩했던 적이 있었다. 참 정서가 신기하기도 하고, 노력이 가상하기도 했으며, 녹차로 만들어진 사람이 징그럽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실험정신이 무지 강하다는 생각이 들어 어쨌든 기억하고 있었는데, 글쎄 이 책이 바로 그 사람, ''김치 샐러드''가 만든 것이었다. 처음에 펼쳐보면서 난감한 구석이 있었는데, 구면이라는 생각에 상쇄되는 구석이 좀 생겼다고나 할까. 일단 김치샐러드의 <그림 보여주는="" 손가락="">은 매우 쉽다. 우울해에 빠져있는 손가락과 불이 꺼진 아귀를 등장시켜 대화 형식을 통해 그림에 관한 이야기, 삶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방식에 있어 매우 신선하고, 기존의 틀을 파괴하는 참신함이 있다. 그림은 자주 온전하지 않은 채로 잘리기도 하고, 말풍선이 붙어있으며, 디씨인사이드나 미디어몹에서 볼 수 있는 유머스러운 글귀나 사진 등을 그림 옆에 마음대로 차용한다. 물론, 미술이 신성하고 고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나, 나이드신 분들인 경우, 이런 불경스러움에 어쩌면 눈살을 찌푸릴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은 기획에서부터 충분히 그 점을 활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새로움을 외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꽤 자극적인 맛의 별미임이 분명하다. 작가가 블로그를 오래 운영한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작가는 네티즌들이 원하는 코드를 잘 잡고 있다. 소통의 공간이지만, 동시에 소외의 공간이기도 한 가상의 공간에서 네티즌들은 덧글을 통해 소통하고, 소통이 끝난 순간 외로워한다. 실제로 ''죽고 싶다''라고 검색창에 쳤을 때 나오는 우울한 글들이며, 작가가 작성한 우울한 글에 덧글을 다는 우울한 글의 수준은 때로는 도를 넘어서는구나하는 느낌도 들었다. 우울하기 위해 살고, 우울하기 위해 그 우울함을 소통하는 아이러니다. 저작물씩이나 내는 작가를 보면서 작가는 어쩌면 우울해(海)에 빠지고 싶어 외치는 사람일 뿐, 정말 우울함의 나락에 떨어져있는 사람과는 거리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왜, 우울해하다보면 계속 우울해지고, 우울해(海)에 침잠해 계속 우울하고 우울 안에 오래 갖혀 헤어나오고 싶어도 절대 헤어나올 수 없는 그런 양상. 확대해석일 지도 모르겠지만, 자의식이 덜 형성된 학생들 중에 끔찍하게 민감한 성정과 염세 혹은 비관주의적 성향으로 인해 우울이나 죽음을 신비화한다거나, 막연히 동경하게 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블로그를 통한 소통이라 할 지라도, 정말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든 골라먹는 시대에 우울이 취향이자 입맛에 맞는 코드라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이유도 정체도 없는 우울함을 스스로 만들어 헤어나오지 못하는 영혼의 나약함을 잊지 않게 위해 복습한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 책은 사실, 그림보다 삶이다. 그림을 ''해석''했다라는 느낌보다는 그림을 ''이용''했다라는 측면이 강하게 느껴진다. 또한, 이 책은 초반과 중후반의 스토리가 완전히 다르다. 오랫동안 블로그에 연재하다보니 심리상태도 연재방식도 바뀔 수도 있겠지만, 흐름에 있어 전체적인 일관성을 따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반부는 제목처럼 그림을 읽어주는 데 치중하는 면이 큰데, 중후반부로 갈수록 그림을 읽는다기 보다는 자신의 우울함을 표출한다던가, 우울한 삶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보는 것 같아 연민도 잘 느낄 수 없었고,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눈먼 소녀에 대한 해석의 다양성을 막은 점이나 오필리아를 미친년코드로 다룬 무리수는 견해라기 보다는 ''공감하는 사람이 많기를 바라는 지극히 주관적 견해의 토로''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걸 겨냥한 거라면 성공이겠지만. 오히려 뒤에 덧글달린 부분이나, 해설부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했던 책이었다. 물론 책을 다 읽는 데 걸린 시간은 얼마되지 않지만. 읽으면서 흥흥, 거리면서 넘어갔었던 부분도 있었고, 고개를 갸우뚱했던 부분도 있었다. 요새 ''프로 블로거''니 ''와이프로거''니 해서 블로그 활동을 통해 방송에 데뷔하거나 저작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김치샐러드 역시 그 중 한 사람일 것이다. 나는 이 책을 계기로 그가 자신을 좀 더 정확히 보아, 외치고 있는 우울함에서 슬쩍 비껴가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함께하는 아귀 역시 불이 반짝 켜졌으면 하는 바람이다.그림> |
| 언제부터인지 우리 출판가에는 ‘~ ~ 읽어주는 남(여)자’ 란 제목의 책들이 나오고 있으며 잘 팔리고 있다고 한다. 읽어줄 대상은 주로 예술 방면으로 그림이나 클래식 음악 등이 그것인데.. 그렇다면 왜 이런 부분을 읽어주는 사람이 필요한지 생각해보자. 즉 미술이나 음악 등은 작가들은 극히 주관적인 의미를 그 대상인 작품에 담아낸다. 그렇기에 그 작품을 쓸(그릴) 당시에 그 작가의 개인적인 성향, 성격이나 정치적인 환경 등을 알고, 그 시대의 예술 사조에 대해서 안다면 그 작품에 담긴 의미를 알아내기에 쉬울터인데. 일반인들이 그런 부분까지 알기는 힘들다. 그렇기에 그런 부분을 잘 알고 있는 전문가의 설명을 들으면 나와 같은 비전문가들은 작품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림에서 의미를 읽어내는 전통은 도상학(iconography)에서 시작이 되었을 것이다. 그림의 주인공인 가지고 있는 활을 보고 ‘에로스’구나, 혹은 투구를 보고 ‘헤르메스’구나 라고 읽는 것이 바로 도상학이다. 하지만 미술이 구상화에서 추상화로 변하면서 일반인들은 작품을 이해하기에 더욱 어려워졌다. 그림을 읽어줄 전문가가 필요해지는 부분이다. 그러나 꼭 읽어줄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고도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일본의 미술평론가이자 전위미술가인 오카모토 타로는 <오늘의 예술="">이란 책에서 미술을 그리는 것도 주관적인 것이지만 읽어 내는 것도 주관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미술을 비전문가에게 설명을 해주는 사람들의 책을 보면 그 내용에 있어서 흐르는 일반적인 정형화된 성향을 느낄 수가 있다. 그런데 이 책을 전혀 그렇지가 않다. 뭔가 파격적인 부분이 있다. 또 보통의 미술을 읽어주는 책에서는 해당 작품에 대해서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표현하고 있는데 반해 이 책은 어찌 보면 해당 작품에 낙서를 하며 설명하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감히 대가들의 작품에 누를 끼치고 있다’라는 느낌도 들을 만큼 파격적이다. 이 책에 실린 그림들의 주제와 저가가 그림을 읽어 내고 있는 주제는 모두 죽음이나 미친, 악몽 등 슬프고 또 음습하다. 이런 주제로 블로그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는 것이 내가 보기에는 파격적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학고재’라는 출판사는 주로 정통 예술서적을 발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런 책을 출판했다는 것이 내겐 놀랍다.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와 같은 책을 출간하는 근엄한 표정의 회사가 이런 가벼운 느낌의 책을 발간했다는 것이 내겐 파격적으로 느껴진다. 아무튼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이런 파격적인 미술 읽어주기도 미술의 감정에 지평을 넓혀 줄 수도 있는데 필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고, 이 책을 보고 독자들이 이런 그림을 보고 색다르게 해석하고 있는 저자의 솜씨에 찬사를 보낼 수도 있다. 그림 읽기는 결코 귀족들의 유희가 아니고 누구나가 공유할 수 있는 편한 상대로 보여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독자들이 그림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혀졌고 또한 미술과 가까이 하는 계기가 되었다면 이 또한 좋은 일이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떤 작품을 보고 ‘좋다’고 느끼는 것은, 그 사람이 ‘생각한 만큼’ 이해했다는 소리이다” 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오카모토 타로의 예술관이 맞는 말인 것 같다.무량수전>오늘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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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좋은 글이나 그림이라면 악에서 선으로 마무리 짖는 당당함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지은이가 말하듯 결론을 보여주지 않는다. 읽은이에게 마무리를 맡기고 있다.
인생, 우울, 슬픔, 고통 나아가서 죽음을 생각해보지 않은 이들이라면 이 책을 보고 욕을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삶의 나락에서 죽음까지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눈 먼 소녀가 동생의 손을 통해서 느끼고 있는 밝은 빛을 조금이라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순대같은 인생이라고 누가 감히 책을 통해 넋두리 할 수 있을까?
남들이 마음 속에 간직한 흔히 말하는 불결한 언어들을 거침없이 쏟아내며 감히 사춘기 시절 일기장에나 그렸을 법한 선혈이 낭자한 것들을 마구잡이로 그려댈 수 있던가?
그로인해 마치 내가 나를 내어놓듯 부끄러워졌으나 또 다른 카타르시스를 느꼈다면 나는 퇴락한, 낙오한 인간인가? [인상깊은구절] 차라리 불빛 하나 없는 캄캄한 어둠 속이었다면 삶을 쉽게 포기할 수 있었을 텐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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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 대한 책을 얼마나 읽고 싶었는지 논문 수정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마구 달리고 있다. 글씨가 적고 그림이 많음을 확인하며 빌려온 책, 젊은 '블로거'가 손가락으로 그림을 설명해준다고 해서 명랑한 도슨트를 기대했건만. 우울함이 땅을 파고 들어간다. 이 내용을 포스팅하던 당시 달렸던 댓글도 소개하고 있는데 우울증 아니냐, 정신과 치료를 받아보는 것이 어떻냐는 댓글도 종종 보인다. 반대로 생각하면 이런 포스팅이 인기를 끌었던 것은 요즘 시트콤 "하이킥"에서 청년백수, 고시생 이야기가 88만원 세대의 공감을 살 수 있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 아니었을까.
서울예대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하다가 그만두고 그림을 시작했다는 저자는 책 처음부터 끝까지 (아마도 자신이 투영된) 손가락이 진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그리고 독자에게 아무런 희망도 주지 않고 컴컴한 페이지로 책을 마무리해버린다. 사실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당신의 꿈이었으며, 그것에 만족하고 있느냐?'고 물으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렇다고 대답할까? 그러므로 이 책의 내용들은 나만 이런 고민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어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었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의 마음은 뻔한 빈말일지언정 은연 중에 해피엔딩을 원하기도 한다. 요 며칠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었는데 이 책도 우울함을 보태주었다. 어둡디 어두운 결말을 보며, 2006년으로부터 몇 년 지난 지금 '김치샐러드'님은 잘 살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이 또한 나만 그런 것은 아닌 듯, 그의 근황을 궁금해하는 글들이 보인다. 산다는 건 무의미한 건지, 아니면 살아있어야 의미있는 건지... 이런 저런 생각이 들어 괴로운 하루 하루다.
저자는 특별히 낭만주의 화가들을 좋아하는 것 같아보인다. 잡지 "페이퍼"에서 황경신님이 읽어주시곤하는 그런 그림들을 이 책에서도 만나게 된다. 신화, 이야기, 판타지, 상상, 아름답기는 한데 어딘지 모르게 어둡고 우울한 느낌의 그림들. 하필 새를 먹는 소녀 그림이었지만 마그리트 그림도 나와서 반가웠다. 하여튼 언급된 그림들이 대중 일반이 쉽게 선호하는 그런 그림은 아닌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좋았다, 유명하니까 좋은 그림이라고 강요하는 듯한 천편일률적인 해석이 아니어서. 조금은 과도하고 우울할지라도 누군가의 마음을 만져주고 공감할 수 있게 하는 해석이 들어있다는 점이 이 책의 강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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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 책을 읽는 사람이 그림에 어느정도 관심을 가져왔고 미술에 대한 책, 미술전시를 많이 봐온 사람이라면 성에 차지 않을 것 같다.
쌩초보, 관심을 갖기 시작한 나같은 사람이라야 만족스러울 것 같다. 그림을 해석하는 방법을 쉽게 배울 수 있었다.
그림해석, 아니 그림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을 해석하고 설명하는데는 여러 의견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나만 사는 세상이 아니니까.
김치샐러드님이 그림에 대해 설명을 한다. 쭉, 페이지가 나오고 댓글들이 함께 나온다. 여러 의견이 있다. 나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았다는 사람, 인정한다는 사람, 비판하는 사람.
댓글을 함께 보여줌으로서 소통하는 해설이 되었고, 나는 그래서 이 책이 맘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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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망과 희망의 이중주 독일의 철학자 슬롯다이크가 말하길, 인간은 글쓰기를 통해서 그 자신의 동물성을 극복하고, 또한 더욱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중요한 과정을 터득한다고 했다. 아마 글쓰기와 텍스트를 통해서만이 인간다운 사색이 가능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매체가 문자를 억압하고 아날로그가 디지털로 대체되면서 문자가 그 설득력을 잃어버렸다. 더이상 사람들은 텍스트에서 감동을 받고 감화되기보다는, 전자매체속 영상과 이미지와 놀기를 바라게 된 것이다. 얕게 보면, 독서를 통한 인간의 성숙을 바라는것은 다소 회의적이라는 것이고, 길게 보면 인문학적 위기와 더불어 사람들이 더이상 깊게 사고하고 삶에 대해 통찰하는 법을 잊어간다는 것이리라. 이런 일련의 상황을 맞이해서, 학계에서는 인문학의 새로운 나아갈길을 영상(또는 이미지)매체와의 합일에서 찾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동안 나는 이런 새로운 모색에는 상당한 거부감이 있었다. 새로이 등장한 디지털혁명은 20세기까지 전 문화를 지배했던 아날로그식의 매체가 가진 개념을 뿌리째 흔들었다. 종이를 사용한 신문이나 잡지 등 각종 인쇄물과, 필름으로 유지되던 카메라, 비디오를 포함한 영상매체까지 모든 생활 영역이 디지털화 된것이다. 심지어 종이와 활자로 대표되던 책도 e-book의 등장으로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런 디지털화로 인해 사람들은 영상을 통한 감각의 동시성, 탈공간, 탈시간성등 그야말로 속도전의 영향아래 종속되었고, 이런 즉각적이고 감각적인 문화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더이상 활자를 통해서 느리게 음미하는 인문학적 사색은 시대에 뒤쳐지는 것이 되버리고 말았다. 이런 양 극단을 달리고 있는 두 문화가 (텍스트로 대표되는 인문학과 이미지매체로 대표되는 디지털) 어떻게 공존될 수 있으며, 또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인문학 고유 영역의 파괴를 어느정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 평소 내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책 ‘그림 보여주는 손가락''을 읽고서는 생각이 조금 바뀌게 되었다. 텍스트가 아닌 이미지만으로도 충분히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사색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놀라웠고, 덧글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따뜻하기까지 했다. 이 책은 여타의 그림책들과 달리, 상당히 삶의 어두운 일면들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 일부러 어둡고 칙칙한 이야기만 했다는 저자의 말이 참 와닿았는데, 이 책을 통해서 무의식에 잠재해 있는 슬픔이나 드러낼 수 없었던 외로움같은 것들을 끄집어 내고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리고 책이 출간되기전 인기 블로거 였던 저자의 이력에 맞게, 책에는 그 당시 덧글들도 상당히 수록되어 있다. 덧글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위로받는 다는 것, 같은 감정을 소통한다는 것, 이 얼마나 위대하고 치유적인 일인가. 우리는 문득 문득 이유없이 외로움을 느낄때가 있다. 그리고 주위에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역시 세상에서 슬픈 인간은 나밖에 없어'' 하는 더 깊은 절망감을 느낀다. 군중속의 지독한 고독과 소외. 인간은 타자에 기대어 존재가 규정되는, 어쩔수 밖에 없는 사회적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덧글을 통한 수많은 사람들의 토로처럼, 세상에는 우울한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고, 어쩌면 외로움과 우울함은 인간의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도 최소한 너만큼은 힘들어. 다들 제 몫을 견디며 사는 거야"(공선옥,「머뭇거리지 말고 시작해」) 모두가 힘들다, 힘들이지 않고 살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게 쉽지가 않고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면 조금은 위로가 되지 않을까. 우울해의 바다에서 다같이 한숨 쉬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더이상 우울하지 않다. 글쓴이도 그럴 것이고, 이 책을 읽은 모든 사람들도 한시름은 덜 수 있었으리라. 이제 더이상 좌절과 슬픔, 외로움을 감추지 말자. "겉으로는 웃으면서 속으로는 울고 있는 모습, 속으로는 많은 생각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남에게 마음껏 눈길 주는 것조차 어렵고 불편한 모습" 이런 이중적인 반응에 너무나 익숙해진 현대인들은 점점 속부터 곪아들어 가고 있다. 오히려 절망의 표출이 자기파괴에서 자기생성의 몸짓으로 몸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삶이 어쩔 수 없는 절망과 희망의 이중주라면, 내 속의 슬픔까지 올곧게 직시하고 그것마저 안고 갈 수 있는 대담함을 기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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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이 [그림 보여주는 손가락]이라고 해서 그림에 대한 해설이나 미술 입문서로 오해하기 쉬울 것 같아. 나도 그런 생각으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으니 말이야.
사실은 그냥 푸념거리.. 소소한 개인의 감상을 그림이나 사진을 활용해서 풀어놓은 책이더라고. 그 이야기 안애 인용된 그림들도 '소재'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볍고 그 의미도 지극히 주관적으로 해석(? 이라고 하기에 조금 민망하지만)되고 있어서 그냥 '소품'정도라고 보는게 더 정확할 것 같더라.
한 권을 꼼꼼하게 다 읽어보는데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내용이 적었어. 양적으로도 적은 분량이었고 담고있는 내용으로는 더 그랬어. 책에서 얘기하고 있는 저자의 생각은 다음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거야.
'사회속에 개인은 고독하고 그것이 슬픔의 근원이다. 현실을 벗어나려는 희망은 불확실하고 꿈은 덧없다'
이 이상의 어떤 생각의 여지도 찾아 볼 수 없더라. 그냥 같은 얘기를 모호하게 계속 반복하고 있으니 말이야. 밑도끝도 없이 그냥 사는게 울적하고 덧없는 사람의 넋두리.
책에서 가장 많은 지면을 차지하는 '미친년' 이야기만 봐도 그래. '미침'의 3단계를 [어떤일에 몰두하고 집중하는 '미침' -> 폭력과 분노로 나타나는 흥분의 '미침' -> 정신이상이나 실성한 상태로의 '미침']이라 하면서 3단계의 실성한 상태를 최상위의 '미침'으로 보고있어.
저자는 이 3단계야 말로 인간 사회의 문화나 사회적 가치를 초월한 자연으로 회귀한 상태라고 여기는데.. 이런걸 '순진한 자연주의'라고 해야할지 뭐라해야 할지..
인간사회와 문화조차 그저 특화된 자연의 일부임에도, 인간의 문제는 사회를 떠나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임에도 이 책에서는 인간이 만든 문화나 사회를 자연과 배치되는 개념으로 여기고 있거든. 그러다보니 모든 문제에 해답이 없고 꿈과 희망도 막연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지. 게다가 '탈사회' '자연회귀' '반문화'의 방향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다가 갑자기 '너는 어딘가 미쳐본 일이 있는가?'라는 1단계의 질문으로 결론을 내 버리네. 3단계의 '미침'은 사회에서의 일탈의 미침이고, 1단계의 미침은 사회로의 '집중과 노력'의 미침이었는데.. 서로 의미의 범주가 전혀 다른 '집중'과 '흥분'과 '일탈'을 단지 '미쳤다'는 단어 하나의 통용만으로 관련지어 단계화한 것이 글 전체의 구조를 부실하게 만들고 있는것 같아. - 인기 블로그의 내용을 가지고 만든 책이라던데... 블로그 포스트 정도라면 죽죽 스크롤하면서 나름의 재미로 가볍게 읽을 만한 내용일지도 모르겠다. 굳이 책으로 만들 가치가 있을까? 드러나지도 않고 인기도 없겠지만 블로그 글 가운데에는 자신과 삶을 진지하게 얘기하고 성찰하는 보석같은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진지한 이야기들은 상업성이 없을지 모르지. 이 책의 가치는 뭘까? 어떤 면이 미술 서적을 나름대로 진지하게 출간하던 '학고재'에서 이런 내용으로 책을 만들게끔 했을까? 독특함? 재기? 온라인에서의 인기? 블로그에 인기는 정말 물거품같은 것인데.. 이왕이면 복잡하지 않고 재밌는게 좋겠지만.. 불특정 다수에게 읽히는 책이라면 최소한 진지함은 있어야 할 것 같네.
요즘엔 너무 가벼운 책이 많이 나와서 책 고르기가 더 힘들어져. 비추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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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교지 <고대문화>에 실린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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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를 읽고 난 후 미술과 예술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약 1년전에 서점에서 책을 이것저것 들춰보다가 미술작품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한 책이 있어서 눈여겨 봐두었는데 그 동안 생각 못하고 있다가 '달과 6펜스' 소설을 읽고 다시 흥미가 생겨서 찾아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림을 보는 법을 가르쳐 주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 동안 그림을 볼 기회도 많지 않았거니와 그런 기회가 되면 머리가 '멍-' 해지곤 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 그림이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것을 인식한 것도 이 책을 읽은 후 부터이다. 그림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면 얼마나 내 감수성이 풍부해질까. 세상에 한 가지 색이 추가되어 더욱 다채로운 색채로 다가오지 않을까.
나름대로 이 책을 읽고 터득한 거라면... 목적과 아이콘이랄까... 캔버스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작가의 의도가 녹아있다. 아무리 사소한 것 하나라도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이건 무엇인가요? 왜 여기 있나요? 이 질문에 가장 기초적인 해답이 될 수 있는 것이 아이콘이다. 다른 말로는 상징이라고 할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나름의 특징으로 독특한 의미를 갖게 된다. 비가 온 후 뜨는 무지개를 보고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만약 그림에 무지개가 있다면 희망을 말하고자 했구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이해하고 나니 문학을 읽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문학과 마찬가지로 깊은 이해를 위해서는 자신에게 질문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라는 것까지도.
이 책을 이루고 있는 주제는 '꿈' 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그림을 설명하는 책처럼 보이지만 그림의 선정과 해설에서 글쓴이의 화두가 드러난다.
이 책에서 글쓴이는 어느 날 물음을 만나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20대라면 누구나 하는 질문이 아닐까? 사실 누구나 하는 질문이겠지만 20대만이 소리높여 이런 고민을 한다고 말할 만한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태양과 바다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라 말하지만 글쓴이는 끝없이 떠오르는 질문에 너무 높이 날아 추락한 이카루스 처럼 추락하고 만다. 글쓴이가 끝없이 물었던 물음에는 '순대'와 '물통'의 대답이 기다리고 있다. 이제까지의 그리고 앞으로의 삶에 대해 그녀는 물통과 순대와 같지 않느냐고 우리에게 질문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단면이 모두 같은 순대. 인생이라는 긴 돼지창자에 무의미하게 당면들을 넣으며 똑같은 나날만을 재생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작 30%의 불순물로 물과는 다른 '인간'이 되어버린 우리는 물통과 다른 것이 무엇일까.
그녀는 세상에 희망을 잃고 낙담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림 보여주는 손가락이 되었다. 인터넷 속 모든 정보를 가르쳐 줄 수 있는 손가락(클릭모양) 이 아니라 그림이라는 실마리를 가진 조금은 다른 손가락이다.
그림 보여주는 손가락 옆에는 아귀가 있다. 아귀는 상상속의 동물로 초롱불로 먹이를 유인해 사냥한다. 그러나 그림 보여주는 손가락 옆의 아귀는 그 초롱불이 꺼졌다. 그래서 그 아귀는 끊임없이 그림을 보여 달라고 한다. 살기 위해.
그녀가 그림이라는 사소한 선택을 했고 이제는 아귀에 초롱불을 밝히려 한다.
나 또한 이런 고민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는데 이 책을 통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도 분명 이런 생각을 하던 때가 있었다. 인생은 순대고 우리는 물통이다. 허무로만 보이던 인생과 상처만 주는 인간관계에 환멸해 보지 않은 자가 누구리.
하지만 지금의 나의 논리는 간단하다. 그렇게 고통스러워 해 봐야 해결되는 일 아무것도 없다.
쓰디쓴 재수생활이 나에게 가르쳐 준 교훈이랄까. 움직이지 않으면 얻어지는 것은 없다. 이것이 내가 본 세상의 모습이다. 원하지도 않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야 사는 것이 내가 느낀 세상은 아니다. 세상은 단지 공으로 무엇을 주지는 않을 뿐이니까.
나는 그래서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움직일 뿐이다. 가끔 고민하면서. 어쨌든 바쁜 나의 생활에 강한 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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