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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와 하버마스를 통해 본 서구 근대성 탐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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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 '근대', '근대성'이라는 말처럼 남발되는 말도 없지만, 그 담론들이-남발되는 만큼-충분한 이해에 기반하여 언급되고 있느냐는 물음에는 글쎄, 부정적인 답변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본서는 지금까지 내가 읽어 본 '근대'에 관한 저술 중 그야말로 '최고'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저자인 윤평중 교수는'서구적 합리성의 문제와 관계된 사회비판의 전략을 메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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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 '근대', '근대성'이라는 말처럼 남발되는 말도 없지만, 그 담론들이-남발되는 만큼-충분한 이해에 기반하여 언급되고 있느냐는 물음에는 글쎄, 부정적인 답변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본서는 지금까지 내가 읽어 본 '근대'에 관한 저술 중 그야말로 '최고'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저자인 윤평중 교수는'서구적 합리성의 문제와 관계된 사회비판의 전략을 메타이론적으로 천착'해 보고자 본서를 집필했다고 하는데, 그 집필의도는 내용과 명확히 부합한 것으로 보이며, 개인적으로는 난이도로 보나 내용의 적정성 측면으로 보나 이런 분야의 책 중에서 이 책보다 나은 책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저자는 우선 베버와 호르크하이머, 그리고 아도르노의 근대성에 대한 분석을 소개하며 서양 근대성에 대한 초기의 논의를 설명하고 있다.  이들의 근대에 대한 이해는 날카로웠지만 너무 일면적이었기 때문에 근대성이 무엇을 구체적으로 침식하는지 알지 못했고,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대책없는 비관론과 주의주의로 수렴되게 되었는데, 하버마스는 여기에 '생활세계'라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세계를 상정하여 선배 학자들의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어 근대성에 대해 보다 포괄적이고 균형잡힌 논의를 해내게 된다. 책은 하버마스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하기 전에 하버마스의 이론 전체를 조금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카를 포퍼의 신실증주의(물론 포퍼 본인은 이를 '비판적 합리주의'라 명명했다지만, 사실 따지고보면 실증주의의 조금 더 발전적인 변형에 불과해 보이기는 한다)와 하버마스의 논쟁, 포퍼와 쿤의 논쟁, 뿐만아니라 해석학적 통찰을 재구성하고자 한 하버마스와 가다머 사이의 유명한 논쟁을 소개 한 후 합리성의 개념을 확립하고 그 토대 위에 사회 합리화를 위한 설득력있는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 하버마스의 사상에 대한 본격적인 소개를 한다.

서양 근대성에 있어 도구적 합리성과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상호보완적 측면에 천착하여 앞으로의 사회 비판을 후자의 영역을 광역화 시키는 작업으로 파악한 하버마스와는 달리 푸코는 이러한 합리성의 범형을 몇 개의 주요 형태로 나누는 작업을 '쓸데없는 짓'으로 파악한다. 외려 푸코는 하버마스의 이러한 보편주의적 접근 방법의 뒷전에 자리잡은 숨은 의도에 강력한 의심의 눈길을 보낸다. 푸코의 계보학은 하버마스의 비판이론과는 달리 서구의 합리성 자체를 의심하고, 어떠한 규범적 토대 위에 비판적 담론이 근거해야 한다는 하버마스 식의 사고 자체가 비판적 담론의 가능성을 제한한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서양사람들의 경험과 인식 체계에서 이성과 비이성의 구별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면밀히 추적함으로써 서양의 근, 현대를 지배하고 있는 이성과 합리성의 이념을 해체하려 하는데 저자는 푸코의 이러한 작업을 '해체주의'로 명명한다. 이러한 흐름은 라캉, 데리다, 리오타르에 의해 조금더 극단적으로(?) 계승되는데, 푸코를 위시한 해체주의의 합리성에 대한 급진적 시각과 그에 기반한 작업은 하버마스의 작업과 언틋 화해될 수 없는 것으로 보일 정도로 동떨어져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저자는 하버마스와 해체주의 양자의 차이와 단점 속에서 공통으로 합의할 수 있는 지평을 탐색하여, 이를 훌륭히 상호보완적으로 소화해내어 결론을 제시하고 있다. 푸코의 급진적인 계보학적 분석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의 불안한 인식론적 토대를 하버마스의 사상을 통해 좀 더 명확히 정초하는 형식으로 말이다.(푸코도 말년에 조악(?)하게나마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해체주의는 하버마스를 의심했고, 하버마스는 해체주의를 '그저 도피하려는 것일 뿐'이라 치부해버렸지만, 저자는 이러한 서로간의 오해를 불식시켜 사상적 화해를 추동하여 조금 더 실천적이면서도, 조금 더 풍부한 사상적 기반을 지닌 근대에 대한 분석을 제시하고 있다.

책을 읽던 내내 '노작'이라는 단어가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윤평중 교수의 정말이지 '노작'이라고 할만한 본서를 읽으며, 개인적으로는 '근대'나 '탈근대'에 대한 나의 이해가 너무 일면적이었고, 단순하지 않았나라는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보면 결국 서양 철학자들의 논의이기에, 책의 내용이 우리 사회의 현실과 다소 거리가 있다라고 느낄 사람도 없지 않겠지만, 저자 말마따나 60년대 이후 산업화=근대화=서양적 합리화라는 단순 도식이 우리를 지배, 억압해 온 것이 사실이고 보면, 근대성에 대한 철학적 성찰은 다른 누구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제목은 '푸코'와 '하버마스'만을 강조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책은 사실상 오늘날 서양 철학의 '모든'문제를 다루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근대'에 대한 관심이 있다면 놓쳐서는 안될 명저라는 생각이 든다. 일독을 권한다.

ps.책 말미에는 부록으로 다섯개의 논문이 엮여져 있는데, 특별히 언급할만한 것은 세번째 논문일 것이다.(첫번째 두번째 논문은 결국 본문에 다 있는 내용이다) 저자는 본문에서 푸코보다는 아무래도 하버마스 쪽에 치우친 듯한 결론(사실 푸코에 치우칠 경우 결론을 낸다는것 자체가 어불성설인 면도 없지않기에 저자의 결론이 어쩔수없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을 내는데, 이러한 결론을 도출하느라 본문에서는 다소 미진한 구석이 없지 않았던 하버마스 사상의 한계에 대해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하버마스의 담화이론의 근본적인 난점을 해소하기 위해 유물론적 담화이론과의 결합을 도모하는데 개인적으로는 본문과는 달리 다소 어려웠다. 네번째 다섯번째 논문은 하버마스와 푸코의 논문을 번역한 것인데, 개인적으로 하버마스 논문은 살짝 어려웠지만 푸코꺼는 읽을 만 했다.
j***8 2006.07.15. 신고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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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하나 현학적이지 않은 자상한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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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에서 푸코를 다루는 관계로, 푸코에 관한 2차 텍스트(논문등)들을 웬만한 건 들여다보았으나, 이 책만큼 퀄리티가 높은 것은 찾기 힘들다. (사실 하나 정도가 더 있긴 하다) 어쨌든 나는 푸코의 철자도 제대로 모르는 푸코바보였으나 저자의 세심한 해설을 접하고 그 전모를 조금아니마 파악하게 되었다. (특히 푸코의 권력 이론에 관해서는 많은 참고를 받았다) 하버마스는 더욱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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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에서 푸코를 다루는 관계로, 푸코에 관한 2차 텍스트(논문등)들을 웬만한 건 들여다보았으나, 이 책만큼 퀄리티가 높은 것은 찾기 힘들다. (사실 하나 정도가 더 있긴 하다) 어쨌든 나는 푸코의 철자도 제대로 모르는 푸코바보였으나 저자의 세심한 해설을 접하고 그 전모를 조금아니마 파악하게 되었다. (특히 푸코의 권력 이론에 관해서는 많은 참고를 받았다) 하버마스는 더욱 모르지만,(나는 사실 이런 식의 공부엔 처음인 초짜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확실하게 말할 수있는 것은 필자는 상당히 논리적인 어조로 세심하고 완벽하게, 그리고 균형잡힌 공정한 어조로 글을 쓰고있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기에 수월하다는 것이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특히 이론서들은 번역본이 많고 번역이 참 중요한데, 읽을 때마다 채워지지 않는 역의 한계 때문에 마음아픈 경우가 많았다. 시간은 촉박하고, 원서를 놓고 씨름하는 짓은 엄두를 못 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가 국내 사람일 경우에는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는)저자가 세심하게 공들여 글을 쓰면 그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므로, 공부하기에 수월하다는 이점이 있는데, 그러한 예가 바로 이 책 같은 경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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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의 합리성과 비합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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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기 시대가 가장 어렵고 자기 처지가 가장 힘겹다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요즘 우리네 삶은 유난히 고달픈 듯하다. 어디를 봐도 무엇 하나 녹록한 것이 없다. 도대체 여유롭고 편안한 것이 없는 것이다. 다들 쪼들리고 바쁘고 불안하고 지쳐 있다. 다들 쪼들리고 불안한 삶. 이와 같은 고단함의 이면에는 우리 사회의 속도 경쟁이 떡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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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기 시대가 가장 어렵고 자기 처지가 가장 힘겹다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요즘 우리네 삶은 유난히 고달픈 듯하다.

어디를 봐도 무엇 하나 녹록한 것이 없다.

도대체 여유롭고 편안한 것이 없는 것이다.

다들 쪼들리고 바쁘고 불안하고 지쳐 있다.


다들 쪼들리고 불안한 삶.

이와 같은 고단함의 이면에는 우리 사회의 속도 경쟁이 떡하니 자리잡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점점 더 '속도' 가 중요한 덕목으로 돼가고 있다.

빠른 것, 더 빠른 것에 환호하고 조금이라도 느리고 뒤처진 것에 대해선 일고의 가치도 허락하지 않는 것이 우리다.


생각해 보시라!!!

요즘의 오락실에서 ‘겔러그’와 ‘너구리’를 갖다 논다면...... 참 볼만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빠른 사회를 쫓아가다 보니 삶이 바쁘고 몸이 지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나마 속도에 발맞추지 못할까봐 마음은 늘 불안하고 자칫 속도의 대열에서

낙오라도 하면 실제로 이것저것 생활이 쪼들린다.

그러니 누군들 이 속도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사실 우리 사회의 '빨리빨리' 문화는 어제 오늘 지적된 문제가 아니다.

이런저런 부실사고를 경험할 때마다 숱하게 비난을 받아온 터다.

하지만 전혀 나아지지 않고 있다.

그것은 이 문제가 한 개인의 반성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개인적 일탈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구조적 병리이자 모순임을 말해준다.


너나없이 빠름에 매달리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일종의 집단 광기로까지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이 시대. 이 사회의 합리성의 내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빨리, 먼저, 앞서서'의 합리성이다.

그리고 이는 당연하다는 듯이 '느리게, 나중에, 뒤서서'를 비합리성으로 규정해 배척한다.


속도와 합리성은 그 자체로서 비난받을 대상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간단히 거부할 수 있는 천박하거나 만만한 삶의 이데올로기만도 아닐 것이다.

오히려 주지하는 바대로 합리성의 원칙은 근대 서구 문명을 경유해 오늘날의 전세계를 잉태한 역동적이고 생산적인 기원이며 시원이다.


불확실한 구원의 불안을 해소하고자 초인적인 의지로 철저하게 자신의 삶을 금욕화한 기독교 개신의 원동력이 바로 이 합리성이었기 때문(서구 문명과 기독교의 동거 생활은 가분하고 싶으나 가분할 도리가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이다.

이런 점에서 그들의 합리성은 경제적이기 이전에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것이었다.

오늘날의 합리성은 적어도 그 기원에서만은 도덕성과 분리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속도로 대변되는 우리 사회의 합리성이 긍정적으로 기여한 부분도 분명 크고 많다. 생존조차 빠듯한 세계 최빈국의 위치에서 그나마 앞선 나라들을 쫓아가려니 속도의 논리가 첩경일 수밖에 없었을 게다.

그리고 그 속도의 힘으로 우리는 이나마 발전된 오늘을 이룰 수 있었다. '빨리, 먼저, 앞서서' 의 합리성이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것이다.


문제는 이 속도의 합리성이 작금에 와 그 한계치를 넘고 있다는 데 있다.

시속 1백㎞의 자동차는 우리를 목적지에 데려다 주지만 시속 2백㎞의 자동차는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 지 아무도 모른다.

전자의 자동차는 '이동'을 하지만 후자의 자동차는 '질주'를 한다.

전자에서는 생각과 대화, 이해와 공감, 음악 한 소절과 담배 한 개비의 여유가 있지만 후자에서는 주관만이 있다. 전자는 목적을 지향하고 있지만 후자는 목적에서 이탈하고 있다.


한계치를 넘은 우리 사회의 합리성은 많은 것을 상실케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의미와 도덕성의 상실이다.

속도의 합리성이 목적을 향한 이동이 아니라 목적을 이탈한 질주가 될 때 그것은 도덕성과 의미로부터 분리된다.


원래 의미와 도덕성은 찬찬한 고려와 이해, 동감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속도의 합리성은 이런 느린 감정의 작용들에 대해 비합리성이라는 낙인을 찍는다. 빨리 앞서서 먼저 가는데 의미와 도덕성은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지금 그곳이라는 목적지를 남보다 빨리 가는 것이 유일한 삶의 목표인 사람에게 그게 어떤 의미인지 도덕적으로 정당한지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편지가 사라져가는 세상이다.

돈도 들지 않고, 우표를 살 귀찮음도 없으며, 보내면 바로 배송까지 되는 이메일이 있기 때문이다.

참, 요즘은 보낸 메일을 상대가 확인했는지 여부까지 친절히 가르쳐준다.


그러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사랑하는 연인에게 자신의 사랑과 추억을 담는 주인공은 그 편지 한 장을 쓰기 위해 만년필을 세척하고 말린다.

누가 그의 느림을 비합리성이라 칭할 수 있겠는가?

 

 

h*****k 2010.04.22. 신고 공감 0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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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행위와 담론의 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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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와 하버마스의 비교 분석은 어찌보면 무모한 일일지도 모른다. 비판적 이성과 계몽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차 보이는 하버마스와 배제되고 소외된 원리와 세계들을 논의의 중심으로 끌어오는 푸코가 서로 비교될 수 있는 지점을 공유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생기는 건 어찌보면 당연하다 하겠다. 그러나, 저자는 매우 체계적으로 푸코와 하버마스가 지니고 있는 논의의 출발점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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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와 하버마스의 비교 분석은 어찌보면 무모한 일일지도 모른다. 비판적 이성과 계몽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차 보이는 하버마스와 배제되고 소외된 원리와 세계들을 논의의 중심으로 끌어오는 푸코가 서로 비교될 수 있는 지점을 공유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생기는 건 어찌보면 당연하다 하겠다. 그러나, 저자는 매우 체계적으로 푸코와 하버마스가 지니고 있는 논의의 출발점 그들의 철학적 배경을 설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두 거장의 철학내용까지 상세하고 명쾌하게 설명해 주고 있어 푸코와 하버마스의 저작들로 인해 잘 정리가 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 두사람의 논의의 핵심은 무엇이고 어떤 점들이 쟁점이 되었는가 숙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특히나 책 후반부에 미셀 푸코의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글까지 수록되어 있어 풍족감을 느낄 수 있다. 미셀 푸코와 하버마스에 대한 비교, 현대철학의 흐름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필독서라 하겠다.

[인상깊은구절]
비판적 담론은 규범적 토대 위에 근거해야만 하는가? 아니면 근거가 필요하다는 생각 자체가 비판적 담론의 무한한 가능성을 제한하고 있는 것일까? 적절한 규범이 비판을 뒷받침해주어야 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그보다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얘기하자면, 무엇 때문에 우리가 담론이라는 행위를 수행하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들은 하버마스와 푸코의 작업 모두의 핵심을 건드리는 논제들이다.
r****a 2001.07.16.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