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덥고 탈도 많고 일도 많았던 여름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고 여름이 지나간 자리에 가을이 자리를 잡았다. 매일 아침 선선한 바람과 파란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구름 뭉텅이를 보면 ‘벌써 가을이구나’ 하는 혼잣말이 절로 나온다. 가을을 ‘천고마비의 계절’ 혹은 ‘독서의 계절’ 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여러모로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결실을 맺는 이 시기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말이다. 물론 가을의 거창한 수식어에 기가 죽어 사는 나 같은 사람들은 가을이 그다지 반갑지는 않다. 자취생이라 제대로 된 영향섭취를 못하는데 오는 상대적 박탈감과 읽고 싶은 책은 많으나 발 앞에 떨어진 리포트를 처리하기 위해 절대 과제가 아니면 찾지 아니하는 두꺼운 책들과 씨름하고 있노라면 도대체 가을의 선선한 바람과 멋찌구리한 풍치에 오히려 반박하기 일쑤다. 어쨌든 서두가 너무 길었다. 그런 내게 그나마 짧은 시간 내에 즐길 수 있는 만화는 나의 소중한 여가활동임에 틀림이 없다. 가을을 피하고 싶은 자취생의 위로품 그런 중에 에미코 야치의 [스구리의 계절]은 가을에게 당한 배신감을 일부 해소시켜 줄 정도의 내공의 지닌 작품이다. 컷트 머리에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소녀, 스구리의 포즈는 사진 속 어느 장면을 보는 것 같다. 스구리는 정적인 포즈를 하고 있지만 그녀의 깊은 눈망울 보고 있노라면 뭔가 내게 말을 할 듯하다. 결국 그녀의 최면에 걸려 든 것인가. 나는 스구리의 계절에 동참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내게는 가을이 큰 의미를 못 가지니, 스구리의 계절로 대리만족이나 하자는 심보에서이다. 수수한 일상을 잘 표현하는 작가 에미코 야치 작가 에미코 야치의 작품 중 본 것은 [내일의 왕님]과 [네가 사는 꿈의 도시]가 전부이다. 처음으로 접한 [내일의 왕님]의 경우 배우를 꿈꾸는 여자 주인공이 아마추어 극단에 들어가서 연기력을 향상시킨다는 내용이던가...[유리가면]과는 달리 수수한 여주인공의 극단 생활과 평범한 사랑이 화려한 사랑을 하는 여타 순정만화 주인공과는 다른 행보를 걷기에 그 점에 오히려 신선했다. 그러나 기억에 남는 작품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커다란 사건이나 반전 혹은 비밀이 전무했기에 오는 심심함이라 할까. [네가 사는 꿈의 도시]는 평범하게 살던 소녀로 어느 날 노부인인 찾아와 자신의 손녀라고 밝힌다. 노부인은 역시나 부자로 대저택으로 이사를 오게 된다. 하지만 소녀는 나름대로의 뚝심으로 할머니에게 반항을 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간다. 신데렐라의 길을 포기하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위해 열심히 나아가는 소녀의 스토리는 그야말로 소설 속 빨간 머리 앤을 연상시킬 정도로 굳세고 맑았다. 에미코 야치는 스토리 전개에 있어서 극적인 요소보다는 멜로드라마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전개가 빠르지 않지만 여운을 주는 대사, 주인공의 심리적 고민 장면으로 주인공의 속 내음을 독자에게 아련하게 흘린다. 주인공의 일상적인 생활과 추억을 소재로 하는 에미코 야치의 [스구리의 계절]은 어떠할까. 추억의 그늘을 깨고 진정한 인형 조각가의 길로 첫발을 디디다. 스구리는 어릴 적 친하게 지내던 이웃집 센이 남긴 목각인형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더욱이 센이 준 이별선물인 목각인형을 계기로 목각인형 조각을 배우고 있는 대학생이다. 스구리에게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소년 센과 지냈던 나날들이었다. 그녀의 현재 일상은 학교에서 수업을 하고 집에서 운영하고 있는 음식점을 도와주는 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착하고 불평 불만도 안하는 이 천사 같은 스구리를 보고 있자면 답답하기까지 한다. 만화 속 주인공인데 뭔가 특별한 것이 있어야지 하고 되레 애꿎은 만화책에 불평을 토한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스구리야말로 대단한 주인공이다. 왜? 그건 직업에 관해 갖고 있는 편견들을 벗어버리면 간단하다. 스구리는 센이 준 목가인형을 계기로 자신의 진로를 정했다. 그리고 그녀는 20살이 지금까지 열심히 목각인형조각을 배우고 있다. 자신의 길을 홀로 외롭게 걸어가지만 그녀에게는 목각인형을 조각하면 센을 만날 수 있다는 아름다운 소망을 가지고 있다. 목각인형을 만들면서 많은 생각을 해가는 스구리의 혼잣말은 그녀의 순수함과 작품에 대한 열정을 느낄 수 있다. 우연한 계기로 다시 만나게 된 센, 그리고 센을 생각하며 만든 목각인형을 계기로 추억에서 벗어나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가게 된 스구리. 하지만 그는 스구리가 그렇게 만나고 싶어 하던 센이 아닌데...벌써부터 2권 소식이 기대되는 작품 [스구리의 계절]이다. 이 작품을 읽고 나면 만화라기보다는 좋은 소설을 읽은 느낌이 드는 건 무엇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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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선생님께서 읽으라고 하는 책들은 죽어라고 읽지 않으면서도 만화책은 죽어라 읽었던 학창시절, 친구와 가방 속에서 만화책을 꺼내 교환하는 것이 아침 일과였다. 그렇게 좋아했던 만화책을 대학교에 가면서 멀리하게 되었던 것은 왜일까? 어쩌면 만화책을 함께 볼 친구를 갖지 못한 것일까? 하긴, 만화책보다 더 흥미로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 더 설득력 있겠다.
대학 생활에도 신선함보다 익숙함 혹은 지루함이 커가던 무렵 룸메이트와 만화책을 자주 빌려 보거나 만화방에 가고는 했다. 만화책이라는 것이 그렇듯 손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중독이 강한지라 그 해 그 친구와 같인 살던 일년은 만화책을 본 시간이 텔레비젼을 보던 시간보다 많았을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만화 속 세상을 보고 또 보며 상상하고 또 상상하며 우리는 더이상 행복할 수 없을만큼의 행복을 느꼈다고 말하고는 했다. 아마 우리는 만화가 어린이의 전유물이라고 여기는 사람을 만난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도 우기고 또 우겼으리라.
그랬던 적도 있는데 이십대 후반이 되면서는 만화 곁에 갈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함께 갈 친구가 없다는 것, 함께 빌려 볼 친구가 곁에 없다는 것, 키득 거리며 혹은 비명을 지르며 같이 볼 사람이 없다는 것이 서러워지던 때도 있었다. 혼자 가서 보기에는 무언가 어색한 나이. 그럼에도 만화가 주는 행복이나 즐거움은 그대로라 만화방 앞에 서서 밍기적 거리기를 여러 번이다.
만화가 보고프나 볼 수 없는 내 맘을 그녀가 알았을까? 내게 만화책을 보내 준 그녀 역시 나와 같은 감정을 느꼈던 것은 아닐까? 그녀의 맘이 너무 예뻐서, 만화책 내용이 좋아서 이 책을 받은 후부터 종종 펼쳐보게 된다. 만화책 리뷰를 할려고 했는데 쓰면서 보니 이건 이 책을 선물해 준 그녀가 내게 준 만화책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말하는 것 같다. 참 고마운 그녀가 내게 건네 준 만화 이야기를 해야겠다.
'언젠가' '나도 할아버지처럼 인형을 만들 거야.' '센'이라는 이름밖에 모르는 남자애.
주인공 스구리는 어렸을 때 이웃집에 할아버지와 살던 센이라는 남자애를 대학을 졸업한 지금까지도 기억하며 마음에 방을 내주고 있다. 센이 주고 간 인형과 함께. 센이 인형 깍는 소리를 좋아했던 스구리 역시 목각인형 조각을 배우고 있다.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이사를 간 센이 스구리 앞에 나타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장편이 될 거란 내 예상과는 달리 2 권으로 마무리 되었다.
예쁘지 않은 주인공, 이게 이 작가의 특징이다. 예쁘지 않은 주인공이 만화가 끝나가면서 예뻐 보이는 것은 그 아이가 지닌 마음 때문이다. 여리면서도 곧은 심성을 가졌으며, 약하면서도 강인한 정신은 가진 아이. 남자가 인생을 바꿔주는 요즘 십대들이 보는 만화와 달리 혼자의 힘으로 꿋꿋하게 일과 사랑에 한 걸음 다가서는 모습이 마음을 울린다.
책이건 만화책이건 어쩌면 이리도 마음을 울리는 것은 사랑스러워 보이는 걸까? 혼자 방에서 우울하게 뒹굴다 이 책을 보면은 창문을 활짝 열고 차가운 공기에 인사라도 하며 나도 어디론가 힘찬 발걸음을 내딛어야 할 것 같다. 이것만으로 된 것 아닐까? 책은. 독자의 마음을 움직였으니.
내게 이 책을 준 그녀가 내게 선물한 것은 만화책 이상이었다. 그건 만화책에 담긴 마음. 그 만화책을 읽으며 받은 감동. 또 다시 펼쳤을 때의 불어오는 추억과 미래에 대한 기대. 그리고 다시 내딛고 싶어지는 발걸음. 고마워요, 정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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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야치 에미코님의 만화는 ''내일의 왕님''에 이어 이번이 두번째입니다. 소란한 연극의 뒷무대처럼 밝고 경쾌했던 왕님에 비해 ''스구리의 계절''은 차분한 분위기로 진행됩니다.
계모와 동생의 제멋대로인 행동에도 불평불만 없이 살아가는 스구리는 딱히 예쁜 외모도, 뛰어난 특기도 없지만, 어릴적 추억으로 인해 좋아하게 된 목각인형에 대한 애정은 남다릅니다. 어느날 우연히 추억속의 그리운 친구였던 센을 만나게 된 스구리. 단조로운 일상에 던져진 옛추억은 새로운 바람을 불러옵니다.
스구리를 함부로 대하는 계모와 동생, 답답할 정도로 착한 스구리를 보고 있으면 신데렐라 이야기가 절로 떠오릅니다. 그리고 ''잘 생긴 남자는 착한 여자에게 끌린다''는 순정만화의 법칙에 충실하게 센은 왕자님이 되어 나타납니다. 야치 에미코님의 만화는 사실 순정만화의 장르규칙에 충실한 익숙한 느낌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센과 스구리, 동생 유카리가 삼각관계가 될거란 것도 어렵지 않게 예상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식상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함으로 다가오는 점이 이 작가의 진면목이랄까요. 서글서글한 눈매를 가진 주인공의 성격만큼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끌어갑니다. 오랫동안 독자의 사랑을 받아왔던 작가의 연륜이 느껴지죠.
''내일의 왕님''에선 연극을 통해 작품에 활기를 불어넣었다면 이번엔 목각인형입니다. 요즘의 아이들에겐 익숙하지않은 것이지만 나무로 조각한 인형의 소박함이 작품의 단아한 분위기와 잘 어울립니다.
어릴적 아름다운 추억은 이제 스구리를 지탱해주는 꿈이 되었습니다. 겉으론 유약해보여도 누구보다도 강한 마음을 가진 스구리가 걸어나갈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사뭇 궁금해집니다. [인상깊은구절] "단단한 나무가 큰 손 안에서 따사로운 형태를 띄어간다. 그 감동은 거짓이 아냐. 이 마음은 거짓이 아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