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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평생같이 산 제국의 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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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의 소설은 마치 러시아 인형같다. 열면 열수록 뭔가를 기대케하고, 허망하면서도 또 다른 인형을 열게끔 하는 사람. 그의 취향과 관심을 당최 종잡기 힘들다. 20대 청춘의 므흣한 성장기를 퀴즈쇼에 담아내더니, 이번에 남파 간첩이다. 1984년 22살의 나이로 남한에 흘러든 스파이, 김기영. 그에게 어느날 갑자기 귀환명령이 떨어진다. 10년이나 끈이 떨어진 채 남한에 순응하며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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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의 소설은 마치 러시아 인형같다. 열면 열수록 뭔가를 기대케하고, 허망하면서도 또 다른 인형을 열게끔 하는 사람. 그의 취향과 관심을 당최 종잡기 힘들다. 20대 청춘의 므흣한 성장기를 퀴즈쇼에 담아내더니, 이번에 남파 간첩이다. 1984년 22살의 나이로 남한에 흘러든 스파이, 김기영. 그에게 어느날 갑자기 귀환명령이 떨어진다. 10년이나 끈이 떨어진 채 남한에 순응하며 살던 그에게 왜?

 

김기영은 대학시절 학생운동을 함께 했던 장마리와 결혼했고, 머리 굵고 똑똑한 딸 현미와 함께 산다. 평범한 일상을 사는 대한민국의 가장. 하지만 두통처럼 불쑥 찾아온 귀환명령에 당황한다. 영화수입업을 하며 완벽한 남한의 중년으로 살고 있는 그에게 제국의 호출은 난감하기만 하다. 소설은 귀환명령을 받은 김기영이 하루동안, 번민하며 살아온 인생을 반추하는 시간으로 채워진다.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했던 엘리트 소년에게 남파 명령이 떨어지고,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1984년 연세대에 입학한다. 뛰어난 두뇌로 당당히 대입을 치루고 들어간 대학교. 북의 지령처럼 남한 사회에 스며든 그는 10여 년 동안 남파 간첩들의 포스트 역할을 하며 크게 튀지도 않고, 그렇다고 뒤떨어지지도 않는 임무 수행을 해나간다. 이후 기영의 대학시절이 펼쳐진다. 이 부분에서 김영하가 '이젠 후일담소설 혹은 분단소설이란 층위에서 새로운 글쓰기를 보여주는구나. 이 친구 별걸 다하네'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읽었던 그의 소설과는 층위가 너무나 다른 이야기에 서둘러 책장을 넘겼다.

 

이야기는 잘읽힌다. 허나 뒷부분으로 갈수록 이야기하는 바가 뭔지, 그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다. 1980~90년대 대학 학생운동과 주사파 등 다양한 이념과 체제 관련 담론들이 쏟아지는가 하면, 그의 아내인 장마리는 20살이나 어린 서울대 법대생 애인과 쓰리섬을 즐기기까지 한다. 바둑에 소질있는 그의 딸 현미는 친구를 배신하고 아마추어 무선통신을 하는 진구와 딥키스를 한다. 집안의 가장은 온 인생을 걸고 절체절명의 살얼음을 걷고 있는데, 식구들은 그 모양이다. 이 무슨 부조리소설인가?

 

한때 통일의 꽃이었던 임수경의 평양행을 부러워했을만큼 열렬한 주사파였던 장마리의 일탈은 무엇을 의미할까? 나이 마흔에 20살 연하의 애인을 거느린, 제법 잘나가는 수입차 영업사원인 그녀의 삶이 펼쳐진다. 전라도 광주 출신. 주류업을 했던 프로레슬러 역도산과 같은 날 태어난 아버지를 닮아 늘 적극적이었던 그녀다. 오빠는 교통사고로 지체장애를 앓고, 엄마는 우울증을 앓다가 삶을 마감한다. 상경 후 서울이란 새로운 환경 속에서 점차 자신감을 잃어가는 그녀는,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던 기영을 만나 결혼을 한다. 어느 정도 인생을 체념하며 살았던 것이다. 기영의 고백에 왜 자신의 불륜을 얘기하며, 가증스럽게도 딸의 미래를 걱정하는 척 했을까? 자신의 딸은 스스로 계모의 딸이라 여기는데 말이다.

 

그의 가족들은 "끔찍했던 어떤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여겨지는 것, 그런 일이 반복되는 것, 혹시 그런 게 인생이 아닐까."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기영만 표지에 실린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 연작의 부조리처럼, 혼자만 어둠 속에 혹은 혼자만 환한 낮에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사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더라도 내 아내가 15년 동안 자신의 존재를, 그것도 간첩이란 신분을 숨기고 살았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결국 기영은 국정원 요원에게 검거되지만, 전자팔찌(GPS)만 채운 채 다시 가정으로 복귀한다.

 

빛의 제국은 그렇게 스러졌다. 400페이지에 걸쳐, 기영의 하루가 순차적으로 정리된다. 남파 간첩이고, 일탈을 즐기는 아내가 있고, 명민한 딸이 있는 평범한 대한민국 가장에게 어느날 문득 찾아든 귀환명령은 어떤 의미일까? 흑이냐 백이냐를 묻는 유치한 질문이 아니라, 생을 걸고 현재의 김기영은 누구냐에 맞춰져 있다. 그는 누구일까? 그리고, 그래서? 이 소설에서 말하고 싶은 게 뭘까? 책장을 덮으면서도 마치 러시아 인형을 마지막까지 열어보고 그 속에 아무 것도 없음을 확인한 느낌이다. 허무하면서도 안도감이 들었다. 한편으론 작가가 괘씸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재밌게 책장을 넘겼던 난 뭘까?란 생각이 든다. 이래저래 종잡을 수 없는 작가의 낚시에 기꺼이 걸려든 걸까? 



t******2 2010.03.28. 신고 공감 8 댓글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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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이상 벗을 수 없는 가면을 쓴 자의 슬픔
"더이상 벗을 수 없는 가면을 쓴 자의 슬픔" 내용보기
어느날 남파간첩 기영에게는 남파된지 20년 만에 귀환하라는 메시지가 전달된다. 4번 명령, “모든 것을 청산하고 즉시 귀환하라. 이 명령은 반복되지 않는다.” 기영은 그의 중간 책임자 이상혁의 행방이 모연해진 10년 전부터, 더 이상 북으로부터 어떠한 지시나 명령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모든 것을 뒤로하고 귀환하라는 메시지를 받게 된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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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남파간첩 기영에게는 남파된지 20년 만에 귀환하라는 메시지가 전달된다. 4번 명령, “모든 것을 청산하고 즉시 귀환하라. 이 명령은 반복되지 않는다.” 기영은 그의 중간 책임자 이상혁의 행방이 모연해진 10년 전부터, 더 이상 북으로부터 어떠한 지시나 명령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모든 것을 뒤로하고 귀환하라는 메시지를 받게 된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소설은 끝날 때 까지 그 메시지가 어떤 이유에서 그에게 전달되었는지는, 그간 어떤 사정이 생겼는지 밝히지 않는다. 아니 굳이 밝히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상황의 아이러니에 빠진 인물의 내면에 있기 때문이다. 기영은 남한 사람보다 더 남한 사람 같은 남파간첩이다. 21살에 남파된 그는 그 전까지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남한의 흐름에 대해 누구보다 예민하게 적응하며 살아왔다. 그랬기에 그는 누구보다 더 남한 사람같이 되었다. 그는 대학에 진학해 학생운동에 참가했고, NL이되어 혁명을 논의했다. 이후 그는 칸영화제 등에서 예술영화를 수입하는 일을 업으로 삼아, ''자본주의의 속물들의 허세''(p.101)에 기생하면서 살고 있다. ‘어쩌면 평균적인 남한의 사십대보다도 더 잘 적응해왔는지도 몰랐다. 그는 옮겨다 심은 사람이었으므로 적응이야말로 최우선의 과제였다. 변화를 거부하거나 방기할 자신감과 배짱이 있을 리 없었다. 그것은 이곳에서 태어나 살아온, 원주민들의 특권이었다.’(pp.77-8) 그런데 그것은 적응으로 끝나지 않았다. 남한에서 그의 모습은 일종의 가면일 수도 있지만, 21년이 지난 지금 그 가면은 그의 인격이 되었다. 사실 ‘가면’을 뜻하는 희랍어 ‘프로소폰’(πρόσωπον)은 로마 사람들에 의해 라틴어 ‘페르조나’(persona), 즉 인격이라는 뜻으로 번역되었다. 때문에 인격이라는 개념에는 ‘가면’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들 모두는 한명의 배우가 무대 위에서 여러 개의 가면을 바꿔 쓰며 그 가면에 맞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맡겨진 역할을 충실해 해가는 존재 아니던가. 기영 역시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갔고, 오랜 세월 동안 이행해온 그 역할은 이제 그의 인격이 되어버렸다. 기영의 옛 친구 소지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왜 있잖아, 아주 오래, 십 년 혹은 심지어 이십 년씩 장기 공연하는 연극들 있잖아. 형은 그런 연극을 너무 오래 출연해서 자기가 원래 누구였는지를 잊어버린 사람 같아. 낮에는 어떻게 살든지 간에, 밤에는 그 배역으로 사는 사람. 그러다보니 낮의 삶보다 밤의 삶이 더 일관성이 있는 거야. 왜 오스카 와일들의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 보면 주인공 대신 늙어가는 그림 있잖아? 원래 형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난 모르겠어. 그렇지만 형은 이 배역을 너무 잘 소화한 나머지, 이제 배역과 구별이 안되는 지경에 이르렀어. 그 초상화가 진짜고 도리언 그레이가 가짜인 것처럼 형도 이 세계의 형이 진자 형일 거야. 원래의 자기는 잊어버려.”(p.290) 결국 기영은 남한의 자신을 버리지 못한다. 그것은 단순히 경제적 풍요로움을 맞본 자가 그 달콤함을 잊지 못해 부리는 응석이나, 망설임이 아니다. 그는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지금의 자신에서 예전의 그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의 가면은 더 이상 벗을 수 없는 그의 얼굴/인격이 되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아내에게 북으로 돌아가기 싫다고 고백하는 기영의 모습 속에는 분단 조국의 아이러니가 담겨있다. 기영은 그의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조국의 선택에 의해 착출되어 남파간첩이 되었고, 남의 눈에 띠지 않는 정상적인 남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다, 어느새 남한 사람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남파간첩이기에 진정 남한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북도, 남도 정확히 그의 조국이 아닌, 그의 인격 속에 내포되어 있는 이런 아이러니는 바로 우리 조국의 슬픔이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h**l 2006.09.13. 신고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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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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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의 소설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먼저 어려운 어휘나 난해한 문장을 사용하지 않는다. 어떤 독자라도 쉽게 읽어 내려갈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다. 소설의 소재도 특별하지 않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평범한 사건은 그의 손을 통해 소설로 태어난다. 하지만 그의 소설이 쉽고 재미있기 때문에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쉽고,  재미있는 소재를 가지고 현대사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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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의 소설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먼저 어려운 어휘나 난해한 문장을 사용하지 않는다. 어떤 독자라도 쉽게 읽어 내려갈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다. 소설의 소재도 특별하지 않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평범한 사건은 그의 손을 통해 소설로 태어난다. 하지만 그의 소설이 쉽고 재미있기 때문에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쉽고,  재미있는 소재를 가지고 현대사회의 가족문제,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 소외 문제 등 그 누구보다 진지한 주제를 이끌어내는 것은 그의 소설이 가지는 진정한 가치이다.   그의 신작 소설은 남북 분단에 기인한 간첩문제를 소재로 했다. 북한출신의 김성환은 대학을 졸업하고 간첩교육을 받은 후 남한에 김기영이라는 이름으로 침투한다. 얼마간 그는 간첩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한다. 하지만 북한에 있는 그의 상사가 사라짐에 따라 그도 더 이상 명령을 받지 못하는 '끈 떨어진'스파이로 살아가게 된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그는 남한에서 부인과 딸이 있으며 자그마한 회사도 운영하고 있는 평범한 중년남성으로 살아간다. 더 이상 북한에서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던 어느 날 그는 갑작스럽게 귀환명령을 받는다. 남은 시간은 하루, 그는 많은 고민과 선택을 요구받으며 단 하루 동안 그가 살아온 수십 년을 인생을 뒤돌아본다.   소설이 하루 만에 일어나는 일을 다룬다는 점에서 먼저 독자의 눈길을 끈다. 시간 단위로 나뉘어 있는 구성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독자 자신도 화자의 움직임을 바짝 따라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시간이 굉장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하나의 움직임과 생각도 놓칠 수 없다. 게다가 주인공은 쫓기는 것인지 아닌지 모를 극단의 불안상태에 있기 때문에 긴장감은 극에 달한다. 주인공의 불안정한 상태는 소설의 막바지까지 유지되기 때문에 독자는 책을 읽으며 추리소설에서나 느낄 만한 궁금증과 긴장을 느끼게 된다. 과연 그가 받은 지령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는 어떤 선택을 할까. 독자는 김기영과 함께 고민하고 선택하며 소설에 빠져들게 된다. 김영하 소설의 커다란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적 재미'는 <빛의 제국>에서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빛의 제국>이 독자에게 긴장감과 재미를 가져다주는 이유는 비단 구성과 문체가 훌륭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주인공 김기영이 겪고 있는 문제가 한반도에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해보았을 분단된 조국의 문제와 그에 따른 혼란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은 많은 부분 분단 상황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 북한은 우리를 적화통일하려고 하는 주적이라는 교육을 끊임없이 받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같은 얼굴과 언어를 사용하는 도와주어야 할 '한민족'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 경우에 따라 '의식화'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북한은 한때는 대한민국을 대신할 유일한 대안이었으며 이상향이었다. 지금도 그런 허상은 사라졌지만 북한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반이성적인 북한에 대한 이해와 갈등을 벌이며 살아가고 있다. 김기영이라는 인물은 북한으로 돌아갈 것인가, 이곳에 남을 것인가, 그곳에서 찾을 수 있는 가치는 무엇인가,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로 환원시켜 독자들의 갈등을 대신 표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 있잖아, 아주 오래, 십 년 혹은 심지어 이십 년씩 장기 공연하는 연극들 있잖아. 형은 그런 연극에 너무 오래 출연해서 자기가 원래 누구였는지를 잊어버린 사람 같아. 낮에는 어떻게 살든지 간에, 밤에는 그 배역으로 사는 사람. 그러다보니 낮의 삶보다 밤의 삶이 더 일관성이 있는 거야. 왜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 보면 주인공 대신 늙어가는 그림 있잖아? 원래 형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난 모르겠어. 그렇지만 형은 이 배역을 너무 잘 소화한 나머지, 이제 배역과 구별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어. 그 초상화가 진짜면 도리언 그레이가 가짜인 것처럼 형도 이세계의 형이 진짜 형일 거야. 원래의 자기는 잊어버려." - p. 290.    북한과 남한사이에서 갈등하는 김기영의 고민은 결국 어느 쪽에서의 삶이 진짜 삶이었는가하는 문제로 돌아간다. 북한은 자신의 학창시절과 궁극적으로 남한에 온 이유를 제공한 곳이다. 그곳에는 그의 고향이 있고, 친구들이 있고 무엇보다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는 곳이다. 남한은 공작을 위해 내려왔지만 이미 부인과 사랑스런 딸이 있으며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힌 회사가 있는 곳이다. 인생의 전반기를 북한에서 살았다면 남한은 인생의 후반을 살아온 곳이다. 인간을 구성하는 것은 그가 가진 기억일 것이다. 그렇다면 가짜로 살았다고 생각한 남한에서의 삶도 그의 기억이 되어 김기영이라는 인간을 구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후회가 있을 것이고,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빛의 제국>은 한국 현대사의 가장 가슴 아픈 부분인 분단과 그에 따른 한 인간의 상처를 건드리고 있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작가는 분단이라는 한반도의 특수한 상황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인간의 정체성 문제와 삶을 구성하는 인생의 기억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c******3 2006.08.19. 신고 공감 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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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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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나온 김영하의 장편 <빛의 제국> 속 기영은 평양 출신으로 평양외국어대 영어과에 다니던 중 차출되어 김정일정치군사대학 공작원반에서 4년간 교육받은 뒤 서울에 왔다. 여느날과 다름없는 날 아침, 그에게 뜻밖의 참을 수 없는 두통이 밀려온다. 그는 현재 열다섯살 된 딸 현미의 아빠이며, 자동차 세일즈업을 하는 장마리의 남편이다. 또한 그는 영화수입업을 하며, 자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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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나온 김영하의 장편 <빛의 제국> 속 기영은 평양 출신으로 평양외국어대 영어과에 다니던 중 차출되어 김정일정치군사대학 공작원반에서 4년간 교육받은 뒤 서울에 왔다. 여느날과 다름없는 날 아침, 그에게 뜻밖의 참을 수 없는 두통이 밀려온다. 그는 현재 열다섯살 된 딸 현미의 아빠이며, 자동차 세일즈업을 하는 장마리의 남편이다. 또한 그는 영화수입업을 하며, 자수성가한 타입으로는 제법 그럴듯하게 성공한 편에 속하고 있다. 그와 장마리는 공작원반의 뜻에 따른 그의 남한에 있는 대학 입학과 함께 철저히 계획적으로 ''주사(주체사상을 신봉하는 모임)클럽''에 가입한 그에 의해 우연 아닌 우연으로 만났고, 결혼했다. 그의 가족은 지극히 자신의 삶에 각자 충실하고 살아가는, 겉으로 별 문제가 없는 전형적인 남한 자본주의 가정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장마리는 대학 시절 자신의 날카로운 체제전복의 꿈 끝에 찾아온 삶의 무료함을 그대로 받아들인 중년의 여성인 동시에 스무살이나 어린 남자 둘과 모텔에서 스리섬을 벌이기도 하는 아이러니한 그의 말로만 아내다. 한편 그의 딸 현미는 그 시절 누구나 그렇듯 친구를 사랑하고 이성에게 눈뜨기 시작하는 평범하지만 똑똑한 중학교 2학년생의 반장이다. 현미는 엄마와 아빠에게 소중하고 귀여운 딸의 역할을 무리없이 해내고 있다. 여느날과 같은 아침, 각자 서로의 하루를 위해 출근한 후 사무실에 도착한 그는 한통의 전화와 함께 암호로 꽁꽁 숨겨진 메일에서 내일까지 귀환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의 고민은 장난인지 무엇일지 모를 한마디의 명령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가 고민하는 이유는 이미 그에게 연결된 선이 10년전에 끊어져 철저히 독립된 자기만의 삶을 살아온 시간 때문이다. 이미 다 헤집어졌다고 생각해 철저히 남한 사람이 되가는 그에게 명령은 생소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대학때부터 알던 후배와 자신과 처지가 같을 동지들을 찾아가 고민을 터놓고 그 명령의 근원에 대해 묻는다. 하지만 결국 결정해야 할 사람은 자신일 뿐 누구도 대신해주지 않는다. 그는 선택하지 못한다. 이미 평탄한 삶을 구축해 가정을 꾸리며 살아왔고 더 중요한 것은 명령의 뿌리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빛의 제국>은 이 쪽도, 저 쪽도 속할 수 없는 자기만의 고립된 장소에 살아야만 하는 그의 인생을 그리고 있다. 결국 이야기는 지극히 현실적인 반전을 맞이하여 막을 내린다.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이미 오래전부터 남한 국가정보원에 감시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결심이 이미 현재 생활에 더 기울어져 있는 만큼 그는 그들의 뜻에 따른다. 결말에서 무언가 좀 더 큰 정치적 음모와 상황을 기대한 나는 실망스러웠다. 그의 모든 회상과 고민, 가족들의 일과가 하루동안에 일어나는 일로서 시간대별로 기록되는데 어제 새벽부터 내일 새벽까지 죽을만큼의 속도로 질주하다 갑자기 절벽 아래로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 느낌을 굳이 표현하자면 ''허무'' 정도 될까. 사실 <빛의 제국>의 목적은 한 명의 스파이를 두고 벌이는 남과 북의 싸움과 작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출신, 성분을 모두 간직한 채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할 위험한 직업인 스파이가 되어 철저히 다른 사회에서 다른 사람이 되어 살아가야만 하는 기영을 통해 인간의 근본적인 존재 목적을 탐구하려는 것이다. 우린 모두 <빛의 제국>을 읽으며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내가 그였다면 어떻게 할까, 어떻게 했을까?'' 그 문제는 그가 북에서 특명을 받고 내려온 스파이든 뭐든 아무런 상관없는, 그저 인간 존재의 목적과 살아가다 만나게 되는 삶의 선택에 대한 탐구일 뿐인 것이다. 결국 기영은 자신의 뜻에 따른 한 쪽의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어딘지 모를 타의의 명령에 의해 시작된 고민을 타의의 또다른 명령으로 인해 마무리 짓고 만다. 어쩌면 작가는 특정한 현실과 상황에 적응하는 인간의 모습을 실감나게 그려보고자 했던 것일수도 있겠다. 처음에도 말했지만 <빛의 제국>에서 ''그''가 스파이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가 실제로 김성환이든 김기영이든 어느쪽 삶을 어떻게 살아갔으며 그에 따라 그가 접하게 된 사회 속의 모습과 체제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 더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소설 속에서 그는 실제로 북과 80년대의 남한 그리고 현재의 남한을 모두 살아보고 있는 그야말로 다국적, 다시대의 인물로 표현되고 있다. "기억하라,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폴 발레리의 시구이자 기영이라는 인물을 생각한 후 작가가 떠올렸다는 이 말은 자신의 삶을 둔 채,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삶을 구축하여야만 했던 기영의 삶에 꼭 맞물리고 있다. 그는 한 순간도 이 세상에서 어깨에 힘을 푼 채 살아갈 수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극 중 그의 후배 ''소지''가 말하는 "선배는 꼭 어느 구멍에서 나와서 어디론가 휭 빨려 가버릴 것 같은 사람이었다" 비슷한 대사는 그의 삶을 잘 뒷받침해줄 목격자에 의한 증언이 아니겠는가. 결말을 말하면 허무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국정원(국가정보원)의 명령에 복종하는 댓가로 자신에게 떨어진 귀환 명령을 소환한 채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어 버렸기에 아내를 대하기가 예전같지 않을지도 모른다. 마리 또한 그의 사연을 듣고 그를 북으로 보내려 자신의 낯선 불륜을 속속들이 다 고하였으니 어쩌면 그들의 관계는 회복 불가능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토끼같이 귀엽고 똑똑하며 눈치빠른 그들의 딸 현미를 위해 그들은 새로 시작해야만 할 것을. 실제로도 이미 그의 팔에는 여전히 국정원이 채워준 시계를 가장한 수갑이 채워져 있고, 그와 그녀와 그들의 딸은 또 새로운 하루를 위해 아침을 맞이하고 있다.

[인상깊은구절]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
s*****d 2006.08.16. 신고 공감 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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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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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지니 언니가 질주본능을 억누르고 나를 ‘곱게’ 차에 실어 파주 출판단지까지 마실 나갔던 날, 헌책방에서 만난 책이다. 초판이었고 2,000원이었다. 그다지 초판에 목숨 거는 인생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순서는 깊은 슬픔에, 당신의 조각들에, 엄마를 부탁해에 밀렸다. 그래서였는지(읽고 싶은 다른 책들도 있었지만 무조건), 이번에 갑자기 부모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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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지니 언니가 질주본능을 억누르고 나를 ‘곱게’ 차에 실어 파주 출판단지까지 마실 나갔던 날, 헌책방에서 만난 책이다. 초판이었고 2,000원이었다. 그다지 초판에 목숨 거는 인생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순서는 깊은 슬픔에, 당신의 조각들에, 엄마를 부탁해에 밀렸다. 그래서였는지(읽고 싶은 다른 책들도 있었지만 무조건), 이번에 갑자기 부모님을 따라 나섰던 1박 2일 여행의 동반자로 채택되었다.

 

처음에는 뭔가 제목에서 풍기는 것이 김영하가 일제 시대의 이야기를 풀었나 했다. 그런데 책을 열어 순서를 보아하니 하루 동안에 일어난 일들을 묘사했는지 시간들이 쫙 타이틀로 등장하더군. 그리고 앞의 몇 장을 읽어보아도 일제시대의 냄새는 그다지 풍겨오지 않았다. 뭔가 하며 읽다 보니 오호라, 남파 간첩에 대한 이야기인 거라!

 

대학생 운동이 극렬하던 시절에 파견되어 내려온 간첩이 아랫배가 두둑하게 나온 중년이 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아가다가 갑자기 귀환 명령을 하달 받게 되고, 그 날짜는 바로 다음날로 정해진다. 아아, 이런 충격은 도무지 어쩌라는 말이냐! 이야기의 출발이 주인공 기영의 집에서였기에 기영은 물론 자신의 인생이 어디에서부터 꼬였나를 고민하며 마치 개미가 기어다니는 것 같은, 그러나 긁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마리, 어느 정도 약아빠진 곳이 있고 또래보다 성숙한 중학생 현미, 이 셋의 하루가 아주 세밀하게 묘사된다.

 

언젠가 기막힌 하루에 대해서 세밀히 묘사하는 소설을 써보자는 생각을 막연하게 해왔던 나로서는 이렇게 극적인 이야기를 꺼낸 김영하라는 소설가가 참 위대해 보였다.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으로서 역시 그의 소설가적 면모는 장편에서 훨씬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선택의 기로에 선 21년을 북에서, 21년은 남에서 살아온 한 남자와 그의 21년의 진실을 모르는 가족의 하루라니 이보다 더 극적이고 자극적인 소재가 있을까 싶다.

 

김영하가 묘사해내는 간첩 훈련장이라든지 북한 주민의 일상 같은 이야기들로 깊숙이 빠져들어가며 최근에 뉴스위크에서 본 서양의 여류 사진가가 찍어왔다는 북한 주민들의 일상 사진과 함께 디스커버리 체널에서 가끔 다뤄주는 북한에 대한 다큐멘터리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남과 북의 관계는 이대로 옳은 것인가, 하는 생각과 과연 지금은 어떨까, 여전히 북에서 잘 훈련된 남파간첩을 보내오는 것일까, 해외로 유입되는 고위층 자녀들도 많을 텐데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내 주변에 혹은 내가 스쳐 지나간 사람 중에도 그런 임무를 띄고 살아가는 사람은 혹시 없었던 걸까? 따위의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굉장히 막연하고 어이 없는 감상적인 생각의 부스러기 같다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마지막에 기영이 보게 된 것은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이었다.

 

우리가 세상과 또 다른 세상의 여러 사물에 대하여 갖고 있는 평범한 지식은
회화에서 그 표현방식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사물의 꾸밈없는 신비는 현실에서 그러하듯이
그림에서도 주목 받지 못한 채 간과될 수도 있다 ···
만약 감상자가 내 그림이 '상식'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분명한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렇지만 내게 있어서 세상은
상식에 대한 도전이라고 덧붙이고 싶다.

 - 마그리트 -

 

하늘은 한없이 푸르고 맑은데, 심지어 하얀 구름이 두둥실 여유롭게 떠다니는데, 막상 세상의 주택가는 어둡고 커다란 나무가 있고 가로등이 약하게 빛을 밝히고 있을 뿐이다.

 

기영, 마리, 현미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하루도, 인생도 다 그런 것이 아닐까, 푸른 하늘을 보며 환한 낮을 기대하지만 각자의 내면의 한 구석은 가로등이라도 밝히지 않으면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 어둠을 동시에 품고 있다는 사실.

 

s******y 2008.11.18. 신고 공감 3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어차피 사람이 사는 세상, 김영하 작가의 「빛의 제국」
"어차피 사람이 사는 세상, 김영하 작가의 「빛의 제국」" 내용보기
자본주의는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몇몇 예언자의 말처럼 정말 미국의 달러는 휴지가 되고국가는 없어지고 공동체 생활을 할 것인가? 몇년후의 미래도 내다보기 힘들만큼우리의 삶은 각박하고 여유가 없다. 그러고 보면 GNP는 많이 높아졌지만 딱히 80년대보다지금이 나은 것 같지도 않다. 물론 나는 그 때는 어린아이여서 그 어려움을 모르는 것이겠지만,80년 대는 경제가 한창 성장할
"어차피 사람이 사는 세상, 김영하 작가의 「빛의 제국」" 내용보기

자본주의는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몇몇 예언자의 말처럼 정말 미국의 달러는 휴지가 되고
국가는 없어지고 공동체 생활을 할 것인가? 몇년후의 미래도 내다보기 힘들만큼
우리의 삶은 각박하고 여유가 없다. 그러고 보면 GNP는 많이 높아졌지만 딱히 80년대보다
지금이 나은 것 같지도 않다. 물론 나는 그 때는 어린아이여서 그 어려움을 모르는 것이겠지만,
80년 대는 경제가 한창 성장할 때라 건설붐이 일고 땅값과 주식은 연일 오르고
직장은 한번 근무하면 평생 일자리를 보장했지만... 지금은 눈만 높아진 것 같다.
뭔가 다양한 것을 먹고, 즐기고, 향유할 줄 알지만.. 그래서 더 공허함은 커지는 것 같다.
누군가 항상 나보다 더 나아보이고, 더 즐거워 보인다. 높히 올라가는 것의 한계는 무엇일까?
대학 진학률이 80% 쯤 되는 인플레의 나라에서 평균만큼만 되어도 잘하는 거겠지.
그 높디 높은 사람들의 기준. 인품을 자로 잴 수 있자면, 성격을 무게로 달 수 있다면,
어땠을까? 보이는 것이 기준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모두들 증거물을 내놓아야 한다.
적자생존의 원칙이 지배하는 세상. 여기는 자본주의 국가.
Welcome to the Republic of Korea.


한 남자가 있다. 이름은 김기영. 나이는 42세. 시시하고 장사되지 않는 예술영화를 수입해다가
파는 작은 회사를 소유하고 있으며 아내와 중학교에 다니는 딸이 있는 핵가족의 가장이다.
여기까지는 아주 평범하다. 그런데, 그 사람의 진짜 직업은 간첩이다. 빛의 제국은 다름 아닌
바로 북한을 의미한다. 왠지 꺼려진다. 그렇다. 본인은 초등학교 때 받은 반공교육의 잔재가
남아있는 30대인 것이다. 그보다 어리다면 아마도 영화 <실미도>와 <쉬리>가 생각날테지.
이 책이 나온 뒤 나름 김영하 작가님의 팬이라고 자부함에도 불구하고 읽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제 책을 들자마다 역시나 그렇듯 다 읽어버렸다.
뻔한 재료를 가지고 얼마나 맛깔나게 음식을 하느냐가 최고의 요리사의 기준이라면,
역시나 김영하 작가는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슴슴하다가, 톡쏘기도 하고, 달짝지근하면서도 들큰하지 않고 향긋하다.


어차피 '간첩'이라는 것도 하나의 직업일 뿐이다. 다른 직업과 차이점이 있다면
다른 직업과는 달리 그 직업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 않아야 한다. 간첩은
연극배우와 닮았다. 그는 우리나라에 사는 21년 동안 아주 길고 긴 연기를 해온 셈이 된다.
자본주의를 '학습'하고, 우리말을 '연습'한 이 간첩의 삶에 복귀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이 책은 그 24시간의 기록이다. 하지만 김영하 작가님의 책들이 그렇듯
인간 군상을 관찰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가늘고 얇아서 잘못하면 놓칠법한 팩트들을
적절히 배치한, 공감하는 언어로 셋팅된 사건들.

 

p. 68
파사트를 시승하겠다는 남자는 10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매장 문을 열고
들어섰다. 구두가게 종업원들이 지나가는 사람들 신발을 바라보듯 마리는
거대한 통유리를 통해 그가 몰고 온 차를 살폈다. 2003년형 은색 그랜저다.
남의 월급을 받는 사람은 아니고 작으나마 자기 사업을 하는 사람이며,
남한테 감각 있어 보니다는 소리도 듣고 싶으나 모험심은 별로 없는
작자로군. 폭스바겐으로 갈아타기엔 적당한 고객이었다. 폭스바겐 고객들은
메르세데스 벤츠나 BMW 같은 다른 독일 완성차 고객과는 좀 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과시와는 좀 거리가 있는 꼼꼼한 자영업자들, 조폭이나
사기꾼은 아니었지만 수컷으로의 매력은 좀 떨어지는 치들. 그렇지만 차에
대해서는 좀 안다고 생각하는 부류였다.

(음.. 공교롭게도 본인도 폭스바겐 파샤트, 골프같은 네모진 차들 좋아하는...-.-a)


p. 87
운전을 잘하는 남자들에게선 과시욕이랄까, 그런 것이 풍기지만
주차를 잘하는 남자에게는 섬세함, 집중력이 있다. 그는 차에서 내려
인사를 했다.


p. 174
경찰관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산타페 운전자도
무슨 일인가 싶어 차창 밖으로 고개를 빼 돌아보았다. 젊고 거친 근육질의
남자를 예상했지만 의외로 운전자는 이십대 초반의 젊은 여자였다.
가슴이 깊게 파인 프라다 풍의 근사한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고,
세심하게 층을 내 커트한 머리카락이 작고 앙증맞은 얼굴을 감싸며
찰랑거렸다. 그녀는 다가오는 마리에게는 적의를 드러내면서, 경찰관에게는
애교를 떨고 있었다.
"아니, 제가 너무 바쁜 일이 있어서 그랬거든요. 면허 딴 지도 얼마 안
됐구요. 보세요."
그녀는 눈웃음을 치면서 면허증을 내밀었다.


p. 177
리듬이 흐트러지고 다시 피가 역류하는 느낌이었다. 여자가 화를 내면
거기에는 비정상적이고 감정적인 무언가가 숨어있다는 식의 인식은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교통법규를 위반한 건 저 빌어먹을 산타페이지
내가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경찰관은 시민의 정당한 항의를 무시하고
위반자를 그냥 보내주었다. 나는 단지 그 사실에 분노하는 것이다.
그녀는 지점장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이런 말을 퍼부어주려다가 문득,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어 그만두었다. 그리고, 그리고 말이다.
자신에게는 분명 '무슨 일'이 있지 아니한가.


p. 266
그녀는 씩씩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놀란 얼굴로 마리를 따라
매장 앞으로 나왔다. 경비아저씨가 달려와 열쇠를 건네주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 내가 차 빼놨어."
지하에 있던 골프는 어느새 지상으로 올라와 있었다. 경비는 언제부터인가
의사도 묻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그녀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지금처럼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해놓거나 오지랖 넓게 이런저런 문제에
참견을 하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그녀는 인사를 하고 골프에 올라탔다. 김이엽은 조수석에 탔다. 막
시동을 걸고 예열을 하는데 문득 뒤에서 불편한 얼굴로 골프의 뒤꽁무늬를
노려보고 있는 경비의 얼굴이 백미러에 잡혔다. 질투하는 거야, 뭐야?
그녀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오늘 왜 이러지. 왜 모든 표정이,
모든 어조가 이런 식으로 해석되는 걸까. 내가 너무 민감해진 건가.
아니면 원래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이랬던 걸까. 마리는 혀로 입술을
축였다.
그때 경비아저씨가 다가와 창문을 두드렸다.
"매장 불 끄고 문 잠가야지? 내가 할까?"
"아뇨, 지금 퇴근하는 게 아니구요. 김이엽씨 차가 배터리가 방전돼서
그거 좀 점프해주려구요."
"아아."
경비는 그제야 안심한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옆으로 물러나 마리가 차를
빼는 것을 뒤에서 봐주었다.


p. 275
오랜만에 수영을 하거나 테니스를 치면 굳어버린 근육과 잦은 실수에
실망하면서도 기본적인 원리를 잊어버리지 않은몸에 새삼 놀라게 된다.
지금의 기영이 그랬다. 불과 몇 시간 만에 그는 쓰지 않았던 정신적 근육을
다시 사용하고 있었다. 오감은 예민해지고 시야는 넓어졌다. 망막으로
들어오는 이미지들은 즉각 언어화되어 저장되었다. 양복을 입은 건장한
남자 셋, 선글라스를 낀 여자 하나, 차에 앉아 있는 운전자 둘, 벨보이 둘,
갑자기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차량은 없음. 이런 식이다.



c******t 2010.03.21. 신고 공감 2 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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찐한 감동과 가슴속의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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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의 불황기라고들 한다. 그 원인을 치열하지 못한 작가에서 찾기도 하고, 가볍디 가벼운 독자에게 두기도 한다. 과연 불황기일까, 맞다면 그 원인을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한국소설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지 않기에 한국소설의 위기라는 말에 찬성도 하지 않는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특히나 그러한 생각을 했다. 이 같은 문제의식에 이같은 소설인 존재하는데 한국소설위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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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의 불황기라고들 한다. 그 원인을 치열하지 못한 작가에서 찾기도 하고, 가볍디 가벼운 독자에게 두기도 한다. 과연 불황기일까, 맞다면 그 원인을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한국소설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지 않기에 한국소설의 위기라는 말에 찬성도 하지 않는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특히나 그러한 생각을 했다. 이 같은 문제의식에 이같은 소설인 존재하는데 한국소설위 위기라니. 무조건 읽히지 않는다고, 독자들에게 팔리지 않는다고 한국 소설의 위기는 아닐 것이다. 오랜만에 읽은 소설이 원인이었는지, 아니면 너무나 선명한 주제의식과 잘 짜여진 줄거리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책을 덮는 그 순간부터 꽤 오랫동안 긴 여운이 남는 소설이다. 책의 제목은 ‘빛의 제국’이지만, 내 마음속에는 ‘어둠의 제국’으로 남아 있다.
s********k 2006.09.07.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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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초상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초상화 " 내용보기
이미 김영하의 <빛의 제국>을 읽기 전에 이번 책이 그의 다른 책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는 얘기를 들었다. 누군가는 실망스럽다고 했고, 누군가는 생각보다 괜찮았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간 <오빠가 돌아왔다>에서 보여줬던 우회하면서 찌르는 방식도, <검은 꽃>에서 그들의 비극적인 삶을 바라보는 방식도 아닌 근 20년 동안 남한에 내려와 살고 있는 공작원이 북으로 돌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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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김영하의 <빛의 제국>을 읽기 전에 이번 책이 그의 다른 책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는 얘기를 들었다. 누군가는 실망스럽다고 했고, 누군가는 생각보다 괜찮았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간 <오빠가 돌아왔다>에서 보여줬던 우회하면서 찌르는 방식도, <검은 꽃>에서 그들의 비극적인 삶을 바라보는 방식도 아닌 근 20년 동안 남한에 내려와 살고 있는 공작원이 북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고 24시간동안 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그 하루동안에 그를 둘러싼 사람들이 겪는 이야기들을 한발짝 물러서서 그냥 담담하게 서술해나가고 있다.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우리가 살고 있는 2000년대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종말이 올 것이라고 떠들었던 1999년의 모습에서부터 지하철에 서로 마주보고 앉아 의미없는 시선을 흘리는 모습, 무인텔에 들어가 두 젊은 사내와 몸을 섞는 중년의 여자의 모습, 미행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분주한 거리를 빠르게 지나쳐가는 사람들의 모습. 이런 모습들은 그저 우리가 고개만 돌리면 바라볼 수 있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전형적인 '남한'의 모습 속에서 이제는 그 곳의 생활에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김기영이라는 공작원이 4번 명령, 즉 북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게 되고 일상이라 여겼던 그런 모습들을 '마지막으로 본다'는 느낌으로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게 되고 그 모습들을 되새기며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남한을 떠나고 싶지 않아한다. 하지만 북의 복수가 두려웠던지라 그는 이리저리 고민에 빠지게 되는데...   북에서 내려온 공작원의 이야기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어떤 비밀스러운 임무를 하는 인물을 떠올렸다. 하지만 김기영은 너무도 뛰어난 스파이였는지 그냥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사람이다. (단, 다른 사람에게 비교적 존재감을 덜하지만.) 남파 공작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자신의 임무에 대한 이야기나 성찰, 혹은 이념적인 내용은 거의 없는 편이다. 그저 아내와 중학생 딸을 둔 평범한 가장의 고뇌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공작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결국 '소통'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서로 같은 공간에 있지만 소통할 수 없는 사람, 서로를 잘 알고 있다고 여겼지만 실상은 커다란 비밀을 갖고 있는 사람들. 우리는 그렇게 개별화된 사회 속에서 개별화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일까?   우리 사회의 실상을 다루고 있지만 이야기는 무겁지 않고, 분단이라는 소재를 이용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문제로 자리한다. 개별화된 사회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 우리는 어쩌면 밝은 빛때문에 그 뒤에 숨어있는 것들을 못 보고 지나쳐버리는지도 모르겠다. 김영하에게는 사회를 보는 눈은 마련되어있는 것 같다. 다만 그의 연배때문인지 아직 숙성되지 않은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가 어서 그의 경험치와 내면을 숙성시켜 좀 더 멋진 작품으로 다가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소 아쉬움은 남았지만 그런대로 괜찮았던 작품.
l*****2 2006.10.03.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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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비추는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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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읽어온 김영하의 책 중에서 가장 두꺼운 분량이었다. 허나 절대 "야, 이거 언제 다 읽나? 아직 이것 밖에 안읽었나.." 등의 생각보다는 오히려 자꾸 얇아져가는 뒷장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전체적으로 작가 특유의 단문과 기발한 직유와 은유가 여전했다. 북에서의 21년과 남에서 21년을 산 남자의 이야기는 역시 작가만이 만들 수 있는 독특한 소재다. 게다가 미국 드라마
"빛이 비추는 제국" 내용보기
이제까지 읽어온 김영하의 책 중에서 가장 두꺼운 분량이었다. 허나 절대 "야, 이거 언제 다 읽나? 아직 이것 밖에 안읽었나.." 등의 생각보다는 오히려 자꾸 얇아져가는 뒷장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전체적으로 작가 특유의 단문과 기발한 직유와 은유가 여전했다. 북에서의 21년과 남에서 21년을 산 남자의 이야기는 역시 작가만이 만들 수 있는 독특한 소재다. 게다가 미국 드라마 <24>의 느낌의 구성은 새로웠으나 뭔가 시간이 주는 긴박감을 느낄 수는 없었다.-그건 나만의 바람이었는지도- 3섬이 나오고 10대들의 자세한 묘사는 다소 충격이었으나 이 시대의 분명한 현상이기에 담담히 받아들여야 했다. 물론 작가의 절제력이 나를 안도케 했다. 진국이가 가진 또 다른 자아는 뭔가 나오려다 만 느낌이 들었다. 기영이 마지막으로 기대기위해 전화한 통화에서 소지는 언제 그런말을 했냐는 듯 말을 한다. 작가 특유의 허무와 냉소를 느꼈다. 이런 경험은 우리에게도 왕왕 있는 일이라 더 와닿는다. 하루가 지나고 모든 것은 그래로, 기영은 멋진 시계를 하나 얻었다. 알마나 더 기다려야할까? 마약 중독자의 심정으로 그의 차기작을 기다린다.

[인상깊은구절]
"넌 이해 못 하는구나. 나랑 걔랑 같이 환경미화를 하면 말야. 걔는 그 기억을 무슨 트로피처럼 간직할 거야. 난 걔 추억 속에 남아 있고 싶지 않단 말야. 걔 머릿속에 내가 남아 있는 게 끔찍하단 말야, 무슨 말인지 알아?" 현미와 현미 친구와의 대화.
r***g 2006.09.03.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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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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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제국은 하루동안 일어나는 남파간첩 이야기다 이제는 간첩이라기 보다는 평범한 중년 가장으로 바꿰버린 주인공에게 내려오지 않았으면 하는 명령이 떨어지고 혼란스러워하는 주인공 책은 두툼한 편이지만 한번 잡으면 금방 읽혀나간다 결말이 좀더 강력해더라면 좋았을 책이다 하지만 김영하라는 작가를 알았다는 점이 소득이라면 소득이다 집중력이 약한 나에게는 일기 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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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제국은 하루동안 일어나는 남파간첩 이야기다

이제는 간첩이라기 보다는 평범한 중년 가장으로 바꿰버린 주인공에게 내려오지 않았으면 하는 명령이 떨어지고 혼란스러워하는 주인공

책은 두툼한 편이지만 한번 잡으면 금방 읽혀나간다

결말이 좀더 강력해더라면 좋았을 책이다

하지만 김영하라는 작가를 알았다는 점이 소득이라면 소득이다

집중력이 약한 나에게는 일기 편한 책이었으니까

s******8 2009.03.24.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