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며칠 전 딸애한테서 책을 한 권 선물받았습니다. 여담이지만 우선 그 두께에 한 번 놀라고, 그 가격에 두 번 놀랐지요. 고등학생으로서는 큰 지출이었을 텐데도, 제 엄마가 좋아하는 시인의 책을 사들고 온 딸애의 고운 마음이 제일루 놀라웠지만요.
이름만으로도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시인 박인환, 그의 전집이었습니다.
책의 첫장을 넘기는 순간, 아련한 추억들이 앞다투어 밀려듭니다.
거기, 조그마한 서점 한 모퉁이에 서서 박인환의 시집을 넘겨보던, 지금 제 딸 또래의 제가 있습니다. <목마와 숙녀="">의 시구를 코팅해서 책갈피로 갖고 다니던 시절이었지요. 이제는 어느새 희끗희끗한 흰머리 아줌마가 되어버렸지만 말입니다.
조금쯤은 헛헛해진 마음으로 시인의 빛바랜 사진들을 들여다보다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습니다. 까맣게 잊고 있던 풋풋한 시절의 자신을 만나는 건, 나이든 사람만의 소박한 즐거움입니다.
한때는 동경했던 시인의 시대를 엿보면서, 그를 통해 지난 시절의 전쟁을 보고 사회를 보고 영화를 보고 미국을 봤습니다. 가끔씩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입니다.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본다는 건 그와 더불어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닐까요.
며칠 동안 품에 끼고 살았던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박인희가 불렀던 그의 시 <세월이 가면="">을 흥얼거려봅니다.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꼼꼼하게도 편집된 이 책은 적어도 제게는 책 이상의 기쁨을 주었습니다.
잠시나마 추억의 정거장에 앉아, 제 지난 날을 돌아보게 해주었으니까요.
제게 이렇듯 큰 선물을 준 딸아이를 힐끔거려 봅니다.
저 아이 또한 시 한 편만으로도 감동받을 수 있는 촉촉한 아이로 자라기를 빌면서 말입니다. [인상깊은구절] 사랑하는 나의 정숙이에게 오늘 저녁 나는 당신에게 또 다시 붓을 들었습니다. 나는 오늘처럼 우울했던 날이 없었습니다. 당신을 대구에 두고 나만 이 부산의 거리(당신도 이 거리를 나와 함께 걸은 일이 있겠으나)를 헤매고 있는 것이 슬펐습니다. 나는 행운의 사람인데도 어째서 이다지도 쓸쓸한 것일까? 나는 나 혼자 여기 와서 우울한 것이 어디 있는가? 자문자답하여도 속이 시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과 떨어져 있는 것이 한없이 서럽습니다. 당신이 있는 곳에서 나는 살고, 나는 죽어야 합니다. 당신이 지금 내 옆에 없으니 울고 싶고, 웬일인지 죽을 것 같습니다..... 박인환 시인이 아내 이정숙 씨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입니다. "당신이 있는 곳에서 나는 살고, 나는 죽어야 합니다." 그 시대만의 낭만이 느껴집니다.세월이>목마와> |
|
어느 만큼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제법 날이 지난 신문이었다
아니 구문 ..,
누군가 밥상보로 사용하였던 것인지 말라붙은 밥알이 쌀알보다 더 딱딱하였다
구겨지고 낡은 신문이나마 가끔 기분좋게 마음으로 탈탈 털어서 가지런히 펴놓은 채 읽게될 때가 있다
그 신문 어느 한귀퉁이 ..,
박인환의 전집 출간에 대한 기사가 나와있었다
박인환 ..,
많은 이들에게는 木馬와 淑女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는 시인
고등학생 때였나 보다
그 때 당시에는 코팅을 하는 것이 인기였던 시절이었을까?
누군가 수작업으로 글씨를 적고 파스텔로 색칠을 하여 책사이의 갈피표로 사용하던 시절
어느 여고생이 썼을까 싶은 어여쁜 글씨로 또박 또박 써내려간 그 곳엔 목마와 숙녀가 있거나
세월이 가면이 있곤 하였다
내 처음 박인환 시인과의 만남은 그 갈피표에서가 아닌가 싶으다
그러다 어느 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시낭송 ..,
박인희라는 사람의 이름과 박인환이란 이름이 마치 하나가 되어버렸을 시절 ..,
어쩌면 그 둘은 남매가 아니었을까?
라디오에 귀를 바짝 담으며 그 몰깡한 시어들에 가슴이 벅차게 느껴지곤 하였다
버지니아 울프라는 외국 여류 작가의 이름만으로도 알싸함을 느꼈던 십대 후반 시절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 며 나는 표절까지 하였던 기억이 .
학창 시절 국어 책에서 접해왔던 시들의 시어들과는 달리 보다 현대적이라 느꼈나 보다
도회적이고 가을날의 외로움이 진득허니 달라 붙어있어 보이는,
어딘지 한껏 멋을 부린 듯이 외국어도 점점이 사용을 하고
박인희의 낭송으로 더 귀에 달짝지끈하게 감겨 돌았던 ..,
떠남도, 작별도, 술병에 별이 떨어지고 술병이 쓰러짐도 모두 멋스럽게만 보였던 ..,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십대 시절 시세계를 절대 평정을 한 이는 어쩌면
윤동주 시인과 박인환 시인이 아니었나 싶으다
그런데 윤동주 시인의 시집은 읽어보고 간직도 하고 있지만
박인환 시인의 그것은 ..,
그의 시집을 사려한 적도 없었고, 읽어보려 도서관의 책곰팡내 속을 뒤진 적도 없다
단지 박인희라는 이름 아래 읽혀지고 불리워진 목마와 숙녀 그리고 세월이 가면이 다였던 ..,
하지만 딱 그만큼의 시어들이 가슴에서는 늘 물빛을 차고 오르는 물고기의 은빛비늘 같았음에.
그의 전집이 한 권의 책으로 나왔다는 신문 기사를 읽고 모처럼 책을 주문하였다
녹록치 않은 가격만큼이나 두터운 면모를 보이는 책 ..,
600 페이지를 넘기는 분량의 책 안에 그의 현재까지의 모든 것들이 다 담겨있다고 한다
시 뿐만 아니라 영화와 연극에도 많은 관심이 많았다는 시인은 외모도 출중하였다
가을빛을 닮은 시인의 시어들이 가슴에 담겨오기도 전에
이미 십대 후반의 탐미적이고 다분히 염세적인 그 시절의 우울을 한번 다시 맛보게 될까
가슴이 다 흥분이 되어 온다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
이만큼의 시어를 퍼 올리려면 어떤 가슴으로 하늘을 보고, 어떤 가슴으로 사랑을 하고
어떤 가슴으로 창밖을 거닐어야 할까?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 으로 시작하는 세월이 가면은
명동의 어느 허름한 술집에서 즉석으로 씌여진 시이고
동석했던 작곡가가 곡을 붙였다는 말은 전설이 됨직도 한 에피소드일까?
그의 시어들이 풍겨주는 멋스러움에 흠뻑 빠져 이 가을날을 허우적대듯이 살아갈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단지 겉멋에 불과할지라도 ..,
명멸하는 이 도시의 밤 안에서 가을을 느낄 수만 있다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