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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책 소개글의 한 문장에 혹!!! 해서, 또는 리뷰에 혹!!! 해서 책을 구매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 책은 두 번이나 신뢰하는 사람의 추천(?)을 받았다. 그 첫 번째는 진주 작가님으로 ‘바람이 바다를 지날 때’에 소개된 문구를 통해서였는데, ‘외로움, 그것을 전부 받아들일 만한 내장은 없다.’ 라는 문장이 그랬고, 그 두 번째는 평소에 주로 자기계발서를 읽는 지인의 ‘책을 읽고서 이렇게 울어본 적이 있었던가’하는 말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는 소녀 알마를 향한 소년 레오의 사랑에 대한 글이다. 소녀 알마를 사랑하는 소년 레오는 그녀를 위해 이 사랑의 역사를 썼지만 친구 즈비에게 맡겨진 이 책은 그녀의 손에 닿지 않았다. 알마는 아버지에 의해 미국으로 보내지고, 남겨진 레오는 얼마 후 발발한 전쟁으로 인해 알마에게 갈 수가 없었다. 겨우 목숨을 건지고 오랜 시간이 걸린 후에야 미국에 도착한 레오는 알마를 찾아간다. 하지만… 그녀는 그와 함께 갈 수 없었다. 그리고 시작된 레오의 오랜 외로움… 레오는 열쇠쟁이가 되어 다른 사람들의 닫힌 문을 열어주지만 정작 자신의 외로움의 문은 열 수 없었다. 사실 이 책은 이 레오라는 소년의 사랑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이 책 속 주인공 알마라는 소녀의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소녀 알마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친구 즈비에게 맡겨진 이 책은 즈비의 이름으로 출간이 되지만 책은 잘 팔리지 않고 창고와 헌책방을 전전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다비드 싱어라는 청년에게 한 권이 팔렸고, 이 소설 속 주인공 알마라는 소녀의 이름은 그의 딸의 이름이 되었다. 아빠(다비드 싱어)가 병으로 돌아가신 후 어머니와 남동생과 함께 살아가는 소녀 알마는 엄마가 누군가의 요청으로 영어로 번역하게 된 이 책의 실제 소녀 알마를 찾아 나서기로 한다. 그렇게 시작된 알마 찾기, 하지만 그 끝에는 생각지도 못한 만남이 기다리고 있고, 소설 속 알마는 아니지만 그 맘때의 또 다른 알마는 누군가의 외로움을 치유하게 된다.. 솔직히 지인이 말했던 것처럼 눈물을 펑펑 쏟지는 않았다. 하지만 말할 수 없는 아쉬움과 허탈함과 레오폴드 거스키(레오)에 대한 동정과 연민으로 꽤 오랫동안 가슴이 아팠다. 제목인 사랑의 역사는 분명 그녀 알마에 대한 것이었지만 현실 속 사랑의 역사는 레오와 알마의 아들 아이작에 대한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스페인어로 된 사랑의 역사를 가지고 있던 아이작은 온통 어머니의 이름으로 된 그 책 속에서 알지 못하는 생부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을 느끼고는 알마의 엄마에게 번역을 요청하게 되고, 알마는 그 책 속의 알마를 찾다가 마지막에 레오를 만나게 된다. 그렇게 사랑의 역사는 이어지고 알마를 사랑했던 레오는 노인이 되어 또 다른 알마로부터 치유를 받게 된다. 자신이 헤어지던 순간과 비슷한 시절의 알마로부터… 유일한 삶의 목적이었던 아들을 떠나 보내고 이제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그 시간에, 자신이 사랑했던 그녀는 아니지만 또 다른 소녀 알마를 통해 위로를 받고 안식을 느끼는 레오의 모습엔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외롭고 고독했을 그의 인생에 그래도 낙이고 빛이고 희망이었던 아이작. 그의 글 ‘사랑의 역사’가 아이작을 통해 새로운 알마에게 연결되는 것은 진정 감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작 책 읽기를 마치고는 나오지 않았던 울컥함이 내용을 곱씹으면서는 몇 번이나 표출되고 말았다. 내가 격한 감정에 빠져들 수 없었던 것은 아마도 시간의 흐름을 따르지 않는 이야기의 순서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소녀 알마의 이야기에는 일기처럼 각각의 부분에 대해 제목이 정해져 있지만 그 남자 레오의 이야기에는 그런 부분이 없었다. 부족한 이해력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힘겹게 이야기의 흐름을 쫓았다. 작가는 젊은 여자이면서 어떻게 고독하고 외로운 노인의 생각과 상념과 시선과 세상에 흘려놓은 자욱들을 풀어놓을 수 있었을까? 이 이야기를 쓴 사람이 여자라는 점은 상당히 놀랄 일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분명 남자 노인의 이야기이고, 책을 읽는 동안 ‘노년의 생각들은 저렇구나’ 내지는 ‘저런 생각들은 저 나이가 되어서나 떠오르는 것이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모르게 쓸쓸히 죽기는 싫어 자꾸만 실수를 가장한 흔적을 남기는 레오의 생각들과 행동들에 연민을 느꼈던 것도 그 나이대의 무상함에 대한 연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 상태를 작가가 너무나도 잘 풀어놓은 것 같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작가는 어떻게 이런 표현들을 쓸 수가 있었을까? 책을 읽을수록 책 속에 살아있는 문장들에 한숨이 나왔다. 책 소개 글이 무엇을 뜻하는지 완벽히 이해한 것 같다.
이 노인을 살게 한 것은 결국은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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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이웃분이 봄날에 읽으면 좋겠다는 말씀에 올 봄날을 이 책으로 열었다. 그분이 말한 시점에서는 2년이 지난 봄이지만 봄은 봄이고, 사랑은 사랑이니, 변하지 않는 것들끼리는 언제든지 어울리는 모양이다.
생각해 보니 내가 꽤 오랜 시간을 '사랑'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매이지 않고 지내온 것 같다. 그게 뭐라고 지구 위 모든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동안 꿈꾸고 매달리고 시달리는 것인지, 마치 나는 그 감정에 한번도 빠져 본 적 없던 것처럼 냉담하게 무심하게 그렇게. 그것도 젊은 날 한때인 것이지 그런 건방진 생각마저 굴리면서. 이 책, 나를 꽤 깊이 있게 흔들어 놓았다. 오래 모른 척 했던 사랑에게 살짝 미안해진다.
일생을 하나의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건, 글쎄, 소설에서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 현실에서도 있다면서 그 증거로 다큐멘터리를 보여 주기도 하는 세상인데. 나는 아직 사랑이 그 정도로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는 감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좋기야 하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부드럽고 황홀하게 해 주기도 하고, 인류와 인류 사이를 폭넓게 품어 안아 주게 하기도 하니. 어디 사람 사이뿐이랴. 동물과도 식물과도 심지어는 사소한 취미 활동 하나에까지도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몰입해 들어가면 이룰 수 없는 일이 없을 것만 같으니 마법 같은 힘을 발휘하는 감정임에는 틀림이 없겠으나 내가 좀 인색하게 굴고 있다는 뜻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직접 빠져들기에는 나이도 체력도 관심도 호기심도 열정도 어느 것 하나 갖추고 있는 게 없으니.
그런데 이 소설의 첫 화자인 레오는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일생에 걸쳐 하나의 사랑을 한다. 그럴 수 있을까? 그럴 수 있겠지? 소설은 친절하지 않았다. 자칫 나는 발을 뺄 뻔했다. 레오의 한결같은 사랑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사랑을 찾겠노라고 일생을 거는 일도 무모해 보였고, 알마가 이 알마인지 그 알마인지 헷갈리기 시작했고, 알마의 엄마가 남편을 그리는 일편단심도 헛헛해 보였고. 그러다가 '사랑의 역사'라는 소설책이 이리저리 사람들 사이로 우연인 듯 우연이 아닌 듯 떠도는 과정에 빠져들기 시작하면서 내 마음이 바뀌기 시작했다. 어라? 미셀 뷔시의 <검은 수련>이 떠오르는데? 이름으로 엮어 내는 유사한 구성 방법에다가 어떻게 결말로 이어갈지 긴장감의 강도가 비슷하게 느껴졌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은 한쪽이 죽었다고 해서 사라지는 건 아닌 모양이다. 혹은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고 해서 결혼하지 않은 이와의 사랑이 없어지는 것도 아닌 모양이다. 한 사람을 사랑하고 그를 잃고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 각각의 것도 사랑일까? 사랑은 곧 결혼이라고, 결혼이어야 한다고 믿어 왔던 내 편견은 이 대목에서 또 어찌 하나. 내가 알고 경계지웠던 사랑의 크기가 작고 좁아서 이제까지 내가 사랑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었던 건 아닐지.
간절하면 언젠가는 가 닿는다는 말도 같은 맥락에서 나는 믿지 않았다. 그런데 이 소설을 보니 닿을 것 같다. 심지어는 한쪽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더라도 전해질 것 같다. 또다른 간절함이 이전의 간절함을 이어줄 것 같다. 마치 이 책이 내게 이 간절함의 힘을 깨닫게 해 주는 것처럼. 내가 소설을, 소설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다. 내가 이전의 내가 아니도록 해 주는 글, 스스로 조금 나아졌다고 격려하도록 해 주는 글, 결코 현실이 아니라면서 현실보다 더 생생하게 와 닿아 마침내 깨우쳐 주는 글.
서점에는 절판이었으나 도서관에서 빌려 볼 수 있어 다행이었고, 봄을 넘기지 않아 더욱 다행이다. 레오의 늙고 지친 눈이 알마를 보고 빛나는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너무 가여웠으나 이 또한 너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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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질문을 던진다. 그녀를 왜 사랑하느냐고.. 그 질문을 받은 누군가가 대답한다. 그냥.. 그리고 얘기해 준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녀를 정말 사랑하는 것이라고.. 누군가의 사랑을 보게 되면 그것부터 궁금해진다. 왜? 뭘? 사랑하는거지?..하는 이유가.. 이 책을 읽고나서 이런 생각이 떠 오른 것은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사랑의 역사>를 썼던 레오의 알마를 향한 사랑이 바로 이런게 아니었을까.. 하는 맘에서였다. 레오는 이 책을 썼다기보다 알마에 대한 사랑을 기억했고 가슴에 새겨 놓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새김은 세월이 지나도 마모되지 않고 오히려 더욱 또렷해지는 것 같아 레오를 만날때 마다 웬지 먹먹함을 느끼게 했다.
이 책의 중심에는 <사랑의 역사>라고 하는 한 권의 책이 있다. 그리고 그 책속의 인물인 레오와 알마는 그 책이 흘러가게 되는 곳곳에 존재한다. 즈비와 로사 , 다비드와 샬럿 그리고 또 다른 알마.. 알마를 향한 레오의 사랑기록인 그 기록은 우연한 기회에 즈비를 통해 출간이 되고 그렇게 출간이 된 책 중 한 권은 허름한 헌책방으로 옮겨져 한 이스라엘 청년에게 발견되어 또 다른 이들의 운명을 결정짓게 된다. 많은 길을 돌아온 듯 하지만 그 책과 관련이 있던 이들은 이렇게 그 책을 축으로 주위를 배회한다.결국 레오는 알마를 다시 만난다. 책속의 알마가 아닌 그 책을 통해 이름을 얻은 열 다섯 소녀 알마를.. 그러나 그 열 다섯 알마는 헤여졌을 당시 알마와 같은 또래의 소녀였고 그 소녀를 통해 행복했던 그 순간을 떠 올리며 자신의 생을 정리할 수 있었다.
책의 구성은 3명의 화자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해 주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세 명의 화법은 그들 특유의 성향이 확연히 들어나는 듯 차별이 되어 그들만의 이야기를 모아 놓는다면 3권의 단편을 읽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을 것 같았다. 알마를 위한 <사랑의 역사>와 아들을 위한 <모든 것을 뜻하는 단어들>를 쓴 레오의 이야기 레오는 홀로코스트속에서 홀로 살아 남아 알마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온다. 우여곡절 끝에 그녀를 찾았지만 그녀는 이미 다른 이의 아내가 되어있었고 자신과의 아이인 아이작을 낳은 후 였다. 알마도 임신 사실을 알고는 그를 찾기 위해 수소문을 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아 살아 남지 못했다는 생각을 했고 너무도 힘들었던 시간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던 이의 손을 잡게 된 것이었다. 멀리서 알마와 아이작을 지켜보며 없는 사람처럼 삶을 살아낸 레오.. 그래도 그들이 존재했기에 그의 고독은 그렇게 우울한 잿빛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던 그에게 아이작의 죽음과 자신을 알고 있는 알마의 등장이라는 사건이 일어난다.
아빠가 선물로 준 <사랑의 역사>라는 책속의 여자아이 이름을 따서 엄마가 지어준 이름 알마.. 열 다섯 소녀 알마의 이야기.. 알마의 이야기는 작은 부재들과 함께 서술된다. 엄마와 아빠가 만나 사랑을 나누고 자신과 동생 버드가 태어나고 아빠가 병으로 먼저 돌아가시고 그 빈 공백을 어찌할 줄 모르는 엄마가 안타깝고.. 엄마와 아빠에게 중요한 책인 <사랑의 역사>를 누군가가 번역을 해 달라고 의뢰가 들어오고.. 소녀는 엄마의 행복을 번역을 의뢰한 이를 찾아 나서고 그 과정속에서 소설속의 알마는 실존인물일것이라는 생각에 알마를 찾아 나선다. 결국 동생 버드의 활약(?)으로 알마가 아닌 레오를 만나게 된다.
이 책의 마지막은 이렇게 레오와 알마의 대화를 한 페이지씩 할애하여 주고 받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웬지 이야기가 더 극적이고 더 맘에 와 닿는 것 같았다. 마치 그 장면은 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레오에게 원고를 잠깐 맡아달라고 부탁을 받은 후 칠레로 건너온 즈비 의 이야기.. 로사를 만나고 그녀를 위해 레오의 원고를 다시 옯겨 적어 책으로 출간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즈비가 저자로된 <사랑의 역사>였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모두 바꾸었지만 알마만큼은 바꿀 수가 없었던 즈비.. 아마 그도 레오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들로 몹시 괴로웠던 것 같다.
중간 중간에 삽입되어 있는 레오의 <사랑의 역사>만 따로 읽어 본다. 자신을 유리의 시대를 살아가는 유리로 된 남자로 표현을 하고 언어가 아닌 몸짓으로도 사랑을 표현할 수 있다는 침묵의 시대를 이야기하고 감정이라는 것이 생겨나고 한 가닥의 줄을 이용해 단어들을 인도하는 줄의 시대를 이야기한다.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 무척 원초적이면서 철학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이 책은 그저 한번 읽고 심쿵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읽으면 읽을수록 그리고 그것에 젖어들면 젖어들수록 사랑의 원초적인 근원을 느끼게 되는 그런 책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사랑을 이야기하는 많은 책들이 있지만 니콜 클라우스의 <사랑의 역사>는 특이한 구성으로 사랑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 준다. 이제는 죽음만을 기다리는 한 노인이 자신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 이렇듯 애뜻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랑을 알아봐주고 각각의 사랑에 대입을 시켜 사랑을 이루어 나가는 다양한 이들이 있다는 것들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책이었다. 즈비는 맨 마지막장을 나중에 번역을 해서 출판사로 보낸다. 그 마지막 장에서는 이름을 바꾸지 않고 레오의 이름을 그대로 썼다. 아마 즈비의 레오에 대한 마음을 보여주는 짧지만 뭉클한 장면이었다. 그 마지막 장과 함께 나의 책읽기에 대한 여운 또한 함께 남겨 두고 싶다.
레오폴드 거스키의 죽음
레오폴드 거스키는 1920년 8월 18일에 죽기 시작했다. 그는 걷는 것을 배우며 죽었다. 그는 칠판에 서며 죽었다. 한 번은 무거운 쟁반을 들면서, 그는 이름을 사인하는 새로운 방법을 연습하며 죽었다. 창문을 열면서, 욕조에서 성기를 닦으며.
그는 누구에게 전화 거는 게 너무 당혹스러워 혼자 죽었다. 아니면 알마에 대해 생각하다가 죽었다. 아니면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죽었다.
실제로 할 말이 많지 않다. 그는 위대한 작가였다. 그는 사랑에 빠졌다. 그것이 그의 삶이었다... (p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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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역사>는 책의 제목이면서 동시에 소설 속의 주된 모티브가 되는 또 다른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중적 구조는 약간의 미스터리 성격을 띠고 있는 이 작품과 잘 어울리는 듯 보인다. 폴란드 유대인인 레오는 알마라는 한 여자아이를 좋아하게 되는데 그녀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된다. 레오는 그녀를 생각하며 <사랑의 역사>라는 책을 쓰게 되는데, 물론 책 속 주인공은 알마이다. 그러던 중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알마는 레오의 아이를 임신한 것을 모르고 미국에 가게 되고 레오에게 당신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소식을 여러차례 보내지만 레오는 소식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알마는 레오가 나치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된다.
한편 레오는 자신의 작품인 <사랑의 역사>를 친구 즈비에게 맡기게 되는데 즈비는 자신의 사랑을 위해 친구의 작품을 자신의 작품으로 둔갑시키고 즈비의 사랑이었던 로사는 그의 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되지만 출판까지 하게 되고 레오에게는 즈비인척 편지를 보내 그의 작품은 집이 물에 잠기면서 없어졌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즈비의 이름으로 출간되고 이 책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헌책방에서 발견한 다비드 싱어라는 사람은 또 다시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인 샬롯에게 이 소설을 선물하고 그 둘은 결혼하여 딸을 낳게 되는데 딸의 이름을 알마로 짓게 된다.
이게 전부가 아니라 여기에 또 레오와 알마의 아들인 아이작이 등장하고 꼬마 알마가 <사랑의 역사> 속 진짜 알마를 찾아나서면서 얽히고 섥힌 여러 에피소드들이 나오면서 이야기는 점점 어지럽게 진행된다.
이야기는 레오가 화자로 등장하는 부분과 꼬마 알마가 화자로 등장하는 부분이 번갈아가며 교차되는 형식인데, 책을 다 읽은 지금 이렇게 정리를 하다보니 줄거리가 이해될 뿐이지 사실 실제 소설을 읽을 때에는 마치 내가 난독증에 걸렸다는 자각이 들 정도로 읽기 힘든 이야기였다. 책이 결말에 가까와오다보면 인물들의 특이한 특성들도 좀 이해가 되고 어떤 사건들의 실타래도 술술 풀리는 맛도 있어야 할텐데, 실타래가 풀리기는 풀리지만 매듭을 푼 것이 아니라 잘라버린 듯한 결말로 이어진다. 특히 나이든 레오의 심리적 불안정에 따른 횡설수설 부분과 친구 브루노와의 대화랄지 그리고 알마의 동생 버드가 자신을 예언자라고 생각하는 부분 등은 이야기의 진도가 나가는데 상당한 악영향을 주었다. <사랑의 역사>라는 소설 속 책이 왜 그렇게 등장인물들에게 사랑에 관한 영감을 불러일으켰는지에 대한 공감대 역시 부족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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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 클라우스의 '사랑의 역사'는 내가 좋아하는 폴 오스터식의 이야기 스타일 및 전개가 마음에 들고 또 무엇보다도 소설 제목대로 '사랑의 역사'를 다루고 있기에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기 있어 좋았다. 그리고 동명인 소설속의 '사랑의 역사'도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 놓는다는 점에서 작가의 신선한 재치가 보인다.
책을 읽는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면,세상으로부터 고독에 있으면서도 세상과 소통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작가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책으로 인해 사람과 연결되고 소통하는 이야기가 참으로 신선하고 또 나에게도 그러한 믿을수 없는 기적이 일어나길 소망해본다.
그의 남편 조나단 사프런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수 없게 가까운'은 이 책을 읽고 나중에 읽었는데 '상처와 슬픔' 다르게 다룬 이 귀여운 두사람을 비교하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괜찮은 경험이었다.
부부라는 단순한 이유에서이기도 하지만,같은 생활을 하나 다른 생각을 하며 다른 소설을 쓰는 그들의 관계가 참으로 특별해 보인다.
실과 바늘과 같은 이 책과 '엄청나게~'를 두권다 읽어보길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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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글 잘 쓰는 사람들 보면 질투의 감정이 느껴지기까지 할 때가 있어요.
그 명석함과 재주에 대해서...
작가, 니콜 크라우스는 20세에 벌써 문학신동인 분더킨트 (wunderkind) 란 칭호를 들었으니...
벌써 이런 성과를 올리는 것이 아주 놀랄만한 일은 아니겠지요...
이 책에 대한 이미지를 정리하라.. 고 하면,
다채로운 색상을 아주 잘 이용한 멋진 한 폭의 유채화를
조각조각 퍼즐로 잘라서 만든 3차원 퍼즐을 투명한 볼에다가 딱 담아서
탁자위에 탁 하고 올려 놓은 것 같아요.
어때? 한번 맞춰보고 싶지 않아? 이렇게 유혹이라도 하는 것 처럼.
음 처음에는 그 색상이 예뻐서 (사랑에 대한 이야기)
이건 뭘까? 하고 손대기 시작했다가
퍼즐 맞추기에 또 매혹되어 퍼즐 맞추기에 정신없이 빠져 들었다가 (책의 구성)
퍼즐을 맞추어 완성하고 나면 그 그림 자체의 매력(책 속에 담겨 있는 여러가지 문학 철학적 깊이. 관계에 대한 고찰이나 글쓰기에 대한 작가의 생각들)에서
어라 이게 원래 이런 책이었어? 이렇게 다른 눈으로 책을 한 번 더 보게 되는 그런 거요.
나의 흔적을 남기고 싶다.. 혹은 내 유일한 피붙이에게 내 존재를 알리고 싶다... 는
레오 거스키의 글쓰기에 대한 절절한 이유가 너무 가슴이 아팠구요,
사랑을 가장 소중하고 귀하게 표현하는 것 또한 글쓰기 라는 것 역시 너무 절절하게 다가 왔어요.
반면 책의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이름을 가진 주인공 알마는
전체적인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지지 않게 아주 적절하게 등장해서
분위기를 화사하게 만들어 주었구요.
홀로코스트며, 미국에 정착해서 힘이 들었을,
또 혼자서 평생을 외롭게 지내야 했을 레오의 이야기가
알마의 환한 분위기와 중화되지 않았다면
아마 전체적인 책이 너무 무거워서 읽기 지루했을 것 같아요.
어떤 책을 보면
아.. 이 책에서 작가가 전달할려고 하는 것이 더 많은것 같은데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다 소화할 수가 없어...
이런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이 책이 그랬어요.
독자들과 함께 지적인 게임을 하는 것 처럼 퍼즐 맞추기를 하면서도
균형을 잃지 않는 구성력도 돋보이고,
원래 이야기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매력도 있구요,
또 중간 중간 번뜩이는 작가의 성찰... 그런 면도 보이구요.
씹으면 씹을 수록
색다른 맛이 날 것 같은 그런 책이었습니다. [인상깊은구절] 한 때 한 가닥 줄을 이용해서 단어들을 인도하던 때도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단어들은 주머니에 작은 줄 뭉치를 넣고 다녔다. 큰 소리로 지껄여대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런 줄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남들이 자기 말을 귓결에 듣는 데 익숙 한 사람들도 타인에게 어떻게 자기를 이해시켜야 할지 모를 때가 있기 때문이다. 줄을 사용하는 두 사람 간의 물리적인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다. 거리가 좁을 수록 줄이 더 필요하기도 했다. ...중간생략 ...어떤 사람들은 또 말한다. 미국으로 떠난 한 소녀가 대양을 가로질러 풀어놓은 줄의 끄트머리를 움켜쥔 한 남자로부터 시작되었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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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가 있다면 매일 네 사진을 찍을 거야. 그러면 너의 생에서 네가 매일 어떻게 보이는지 기억할 수 있잖아.” “나는 늘 똑같은데.” “아니, 달라. 넌 늘 변하고 있어. 매일 조금씩. 할 수 있다면 그걸 모두 기록하고 싶어.” “네가 그렇게 잘 안다니 말인데, 오늘은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데?” “너는 0.001밀리미터 정도 키가 더 컸어. 머리도 0.001밀리미터 정도 더 커졌어. 그리고 네 가슴은……” “아니야!” “아니, 맞아.” “아니야.” “맞다니까.” “또 뭔데? 이 돼지 같은 녀석아?” “넌 아주 조금 행복해지고 또 아주 조금 슬퍼졌어.” “그럼 행복과 슬픔이 상쇄해서 달라진 게 없겠네.” “천만에. 오늘 조금 더 행복해졌다고 해서 조금 더 슬퍼졌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아. 넌 매일 둘 다 조금씩 더해져.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이 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또 가장 슬프다는 거지.” “네가 어떻게 아는데?” “생각해 봐. 지금 여기 풀밭에 누운 것보다 더 행복한 적이 있었어?” “아니.” “그럼 더 슬퍼본 적이 있었어?” “아니.” “너도 알겠지만 다들 그런 건 아니야. 베일라 애쉬 같은 사람은 매일 더 슬퍼져. 그리고 너 같은 사람은 둘 다야.” “넌 어떤데? 너도 지금이 평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가장 슬퍼?” “물론 나도 그렇지.” “왜?” “너보다 날 더 행복하게 하거나 더 슬프게 하는 건 없으니까.”) –p130~131
사랑은 다시 돌아오는 거야.
김연수 작가의 추천 책 목록에 있어서, 골라본 책이다.
폴란드인 레오폴드 거스키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랑하는 연인 알마와 헤어진다. 드라마가 그렇듯, 연인을 향한 편지는 누군가의 착오로 전해지지 않고, 그 연인은 절망에 빠진 나머지 너무 쉽게 다른 사람을 선택해버린 것이다. 레오폴드가 알마를 위해 쓴 소설은 그 소설을 잠시 맡아둔 친구가 칠레로 가지고 가서, 친구 자신의 이름으로 출간해버린다. 그리고 그 칠레에서 출간된 소설을 읽은 또 다른 연인은 딸의 이름을 ‘알마’라고 짓는다. 그리고 알마는 레오폴드의 아들, 아이작의 흔적을 찾아간다.
시공을 넘나드는 이 몽환적인 스토리는 꿈인 듯, 현실인 듯 맴돈다. 우리가 세상에 남긴 작은 흔적은 또 다른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은 돌고 돌아 자신에게 돌아온다. 부메랑처럼.
이런 소설을 읽고나면, 언제나 주변의 작은 것들에 감사하게 된다. 쓸쓸하지만, 또 그 쓸쓸함도 헛되지 않은 것. 그것이 인생이기를. 내 인생의 말년에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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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에 들르신 분들이 적어놓은 것처럼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겨놓은 애잔한 사랑의 소설이었습니다.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마치 곁에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어요. 조금은 인생을 포기한 듯한 레오 거스키 아저씨, 가끔가끔 묻어나는 유대인 문화, 유대인 협동농장(키부츠)에서 만난 싱어부부, 아이들...... 처음에 매우 까다롭다가 2장으로 넘어가며 싱어 가족이야기가 나오면서 부터, 책 속의 책이 든 구조가 이해하기가 쉽진 않았지만 각각의 이야기가 조각이 맞춰지며 더욱 흥미진진해진다. 화자가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고, 시점이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갔다가 헷갈리지만 그냥 마음을 비우고, 마음을 따라 이끌려가면 된다. 나를 감격시킨 건, 니콜 크라우스의 생생한 인물 묘사였다. 어쩜 그리 인물 하나하나가 다 살아 있는 지. 레오 거스키 아저씨의 못 이룬 사랑을 위해 쓴 ''사랑의 역사''가 싱어부부를 잇는 단초가 되고, 아이들 이름 ''알마와 레드''도 거기에 인연한 것이고, 한 사람의 연연한 사랑은 그렇게 이루진 못했어요 이어지고 있었고, 그의 피를 이어받은 아들은 제가 누구의 아들인지도 속 사정도 모르지만 천상 이야기꾼 아버지를 따라 유명한 작가가 되어 있었는데 사인회에 갔던 그 아저씨는 아들 앞에서 입이 떨어지지 않아 ''내가 네 애비다''를 못하고는 개 끌려나오듯 질질 끌려 나오고 마는데.... 어쩌면 불쌍하다. 사랑이 이뤄졌으면 좋으련만, 그런데 사랑이란 게 이상해서 -소설이라서 그럴까?-다른 이들에게 사랑을 이어주고 펌프역할을 해주었다. 마치 이스라엘 사막에 스프링 쿨러가 제시간에 목마른 과실수들에게 물을 주어 세상에서 가장 달고 시원한 과실을 만들어 내듯. 소설이라서 가능한 일이냐고 다시 외쳐보는 나.. 사랑이 아름다왔다. 다들 추억을 지켜가고 있었다. 약간은 인문학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100% 즐기기 어려운 소설이라는 생각도 잠시 들다가 다소 여러 가지 묘사가 한꺼번에 이뤄지고 있어서 템포가 느리다고 느꼈지만 역시 어두운 도시에 한 줄기 외로운 가로등 불빛처럼. 어두움이 있으면 밝음이 도드라져 보이기 마련, 레오 거스키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도시의 어둠을 작게 나마 사랑의 역사라는 등불이 가늘게 가늘게 사랑의 명목을 이어가는 가을인 것 같다. 좋은 책이다. 반신욕을 하면서도 읽었는데, 땀이 다 빠져 나가도록 책을 놓고 싶지 않아 나중엔 현기증에 혼이 났다. 차에 기름 넣듯 감성을 충전해보시는 일독을 권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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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歷史라는 단어를 대할 때 우리는 무심코 어떤 큰 것을 생각하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역사라는 말을 처음으로 대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 학교에서 교과서를 대할 때이기 때문이다. 역사라는 제목을 달고 학생들의 손에 돌려지는 이 책들에는 한 나라의 혹은 지역의 역사가 실려있다. 그런 전차로 우리가 생각하는 역사는 대부분 일종의 거대 담론으로서의 이야기다. 그러나 이 history라는 단어는 원래 단순히 이야기라는 뜻을 담고 있는,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진행된 이야기를 뜻하는 말일 뿐이다. 이 책의 제목, <사랑의 역사>에 기입되어 있는 이 역사 - 혹은 보다 분명하게 말해서 이력 - 라는 단어는 후자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한 남자의 한 여자에 대한 사랑 이야기, 너무나 오랫동안 가슴 속에 담고 있지만, 그저 멀리서 생각하기만 해야했던 (미완성의) 사랑의 역사,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제목이 전달하는 의미일 것이다. 유사한 의미에서, 사람들은 대개 필연에 대해 믿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무엇이건 어떤 이유 또는 근거, 그리고 이미 정해져 있는 행로 위에서 이미 정해져 있는 행동을 한다는 그런 생각을 말이다. 과연 사랑도 그런 것일까. 흔히들 하는 시간 떼우기 식 질문으로 이런 것이 있다. 어떤 운명적인 사랑을 믿는가? 과연 어떤 두 사람의 사랑은 어떤 초월적인 힘에 의해, 혹은 예정에 의해 - 마치 구원이 예정되어 있다는 그런 믿음과 같은 의미에서 - 정해지는 것인가? 이전에 읽은 소설들 중에 이런 필연적인 만남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 놓은 것이 있었다. 일본의 순수 문학에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해변의 카프카>, 그리고 코맥 맥카시가 쓴 <핏 빛 자오선>이 그 두 작품이다. 아버지를 찌른 '세상에서 가장 터프한 열 다섯살 소년' 카프카와 고양이와 대화하는 노인 나카타의 만남, 그리고 비록 삶의 여정에서 거친 삶을 살았을지언정 미국적인 서부의 가치를 간직하고 있는 이름 없는 소년과 마치 세상의 모든 악을 채현하고 있는 듯한 능력자 홀든 판사의 만남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둘의 만남이 마치 어떤 필연과 같은 신비한 여정에 이끌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둘의 만남은 둘 중 하나의 소멸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둘의 만남이 종국에는 둘 중 하나의 필연적인 소멸로 이어지는 그러한 만남. 하지만 사랑의 만남은 결코 둘 중 하나의 소멸이나 통합으로 이어지지 않는, 함께 하는 둘을 이루어 내는 그러한 만남이다. 하나와 하나가 만나 '둘'이 되는, 결코 성서의 말씀과 같이 '두 사람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과 같은 저 어딘가에 있는 신이 정해주는 어떤 것이 아니다. <사랑의 역사>에서 그려지는, 그리고 드러나는 두 차례에 걸친 둘의 만남은 한 번은 그저 환경과 같이, 타고난 조건과 같이 주어진 것이었고, 다른 한 번은 결코 생각할 수도 없는 우연의 우연과 같이 이어져 어떤 지연된 약속의 형식으로, 또는 늦게 도착한 우편물과 같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작품에는 모든 이야기의 발단이 된 레오폴트 거스키와 관련하여 둘로 설정된 것들이 추가적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애초에 소설 자체가 두 사람의 이야기를 각각 이어 나가다가 종국에야 그 두 개의 선을 교차시키고 있기도 하다. 그러니 먼저 이 소설 <사랑의 역사>를 구성하는 이 두 이야기들에 대해, 그리고 레오 거스키와 관련된 이중적인 둘의 설정과 그의 죽음에 관해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철저하게 분리된 듯이 보이는 두 사람의 시점이 있다. 마치 이미 죽은 사람과 같이 무시당하는, 그러나 결코 없는 사람 취급 당하고 싶어하지 않는, 열쇠공 레오폴트 거스키와 아버지를 잃은 지 얼마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빈 자리를 느끼며, 자신의 어머니를 재혼 시키고 싶어하는 알마 싱어의 시점. 그들은 서로를 알지 못한 채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는 기묘한, 어쩌면 필연일지도 모르는, 연결고리가 있다. 레오 거스키와 알마 싱어의 약한, 그러나 모든 것을 바꿀 힘을 가진 '사랑의 역사'라는 이름의 연결고리. 바로 여기에서 두 명의 알마 - 그의 아들을 낳았지만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버린 알마(메레민스키), 그리고 스페인어로 쓰여진 <사랑의 역사>를 번역하는 어머니에게 새로운 남자를 구해주려는 사명감에 불타던, 그러나 매우 우연한 기회에 다 늙어버린 거스키를 (다시) 만나게 된 소녀 알마(싱어) - 가 제시된다. 거스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그가 책을 쓰게 했던 알마(메리민스키)의 이름을 딴 또 다른 알마(싱어)가 말이다. 하지만 거스키에게는 이 둘이 다가 아니다. 두 자식이, 두 잃어버리 자식이 있다. 물론, 여기에서, 두 자식 중 하나는 사람이 아니라, 그가 오래 전에 친구(리트비노프)에게 맡기고 파기하기를 부탁했으나, 그 친구가 스페인어로 번역하여 출간했던 (그래서 남의 자식이 된) 그의 작품이며,* 다른 하나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알마는 임신 사실을 알렸으나 그는 편지를 받지 못했고, 아무런 소식이 없는 상황에서 알마는 레오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되었던) 남의 자식이 되었고, 평생 만난 적도 없이 살아 있다는 것만 알고 있던 아들이다. * 영어 식 표현에서는 누군가가 만들어 낸 창작물을 아이(baby)라고 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한 아이는 육체적으로 낳은 자식이 아니라, 그가 써낸 작품, '사랑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쓰여진 작품을 지칭한다. 어떤 계기에서인지는 모르나 레오폴트의 아들이며,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작가로서의 영예를 얻은 아이작 모리츠는 자신에게 생면부지의 생부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가 '사랑의 역사'라는 책을 썼다는 것을 말이다. 아이작은 죽어가고 있었다. 그 전에 아버지의 책을 읽고 싶었기에, 그는 책의 번역을 맡기게 된다. 일종의 우연. 그 책은 딸에게 알마라는 이름을 준, 리프비노프가 이디시어로부터 스페인어로 번역해 놓은 책을 사랑했기에 그 이름을 '다시' 살려 낸 다비드 싱어의 아내, 그러니까 알마 싱어의 어머니에게 던져진다. 어린 알마가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알마의, 그러니까 마치 유령과도 같이 없어지지 않고 그녀의 이름 속에 남아 있는 알마의 기억에 다가가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마치 필연과도 같은 우연을 통해서다. 괴물을 쫓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괴물과 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그리고 유령을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유령의 생각을 이어받는 것이다. 어린 소녀 알마는 그녀의 아버지 데이비드 싱어가 지어준, 혹은 물려준, 그녀의 이름의 흔적을 따라 알마 메레민스키의 삶의 궤적을 뒤쫓는다. 어머니가 번역하고 있는 스페인어 판 '사랑의 역사'를 단초를 따라 추적한 그 궤적의 끝에는 레오 거스키가 있었다. 이로부터 우리는 한 가지 흥미로운 결론에 다다른다. 두 자식 모두 알마(메리민스키)를 통해 태어나고, 알마(싱어)를 통해 레오에게 돌아온다는 것. 그러나 소설 속의 더블(짝패)이 언제나 그렇듯 둘은 공존하지 못한다. 아이작 모리츠는 그의 아버지의 작품의 영어판 번역을 의뢰한 그 순간에 이미 죽어가고 있었고, 읽는 동안에도 이미 죽어가고 있었고, 그리고 완전히 번역되기도 전에 죽었다. 리트비노프가 옮겨 놓은 아버지 레오폴트 거스키의 부고, 고인 또는 장차 죽게 될 사람의 부고를 보기도 전에 말이다. 레오의 아들에게 아버지는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그 부고를 읽기 전에는... 아버지의 다른 아들, 그와 동일하게 아버지에게서 빼앗긴 다른 아들을 대한 그의 삶은 더 이상 계속될 수 없는 것이다. 유령과 함께, 이미 오래 전에 죽어버린 브루노와 함께, 살아가는 레오 거스키의 삶은 어쩌면 이미 스스로 부고를 작성했다는 의미에서 그 자신이 유령인지도 모를, 스스로의 말처럼 알마에 대한 사랑 속에 소진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새로운 만남이, 하지만 이것을 과연 사랑의 만남이라 부를 수 있을지 의아해지는, 어떤 위로의 만남이 주어진다. 마치 어떤 지연된 우편물과 같은, 이미 오래 전에 성취되었어야 했지만 이루지지 않은, 그러나 마치 어떤 언젠가는 꼭 성취되어야 할 약속과 같은 만남, 바로 같지만 결코 같을 수 없는 알마와의 만남이 말이다. 그리고 분명히 이 만남은 일종의 위로의 만남이며, 사랑의 만남이다.(그것이 아무리 부적절하고, 추문을 일을킬 수 있는, 모든 상식에서 벗어난 만남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애초에 사랑이란 것이 그런 것이 아니던가?) 이 만남은 과연 필연일까? 모든 것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일까? 마치 필연 속에 설정되어 있던 모든 것인 듯한 이 이야기의 전개는 어떤 신비한 무엇인가를 상정하고 있는 듯한 니콜 크라우스의 이야기 방식 속에서 펼쳐지고 있다. 하지만 모든 회고적인 방식의 서사는, 이미 겪은 것을 되돌아보는 역사의 서술은 어떤 다른 가능성들을 모두 배제할 수 밖에 없는 그러한 것이다. 말하자면 일관적인 서사의 방식을 위해 다른 가능적인 경로들을 잘라내는 것, 일종의 서사적 재현이 필요하다는 말이다.(역사가들은 이러한 유일한 경로에 대해 꽤 잘 알려진 말을 하곤 한다. 역사에는 그럴 수도 있었다는 것은 없다.) 어떤 기억과 유산/상속의 문제에 천착하는 이 작가의 역량은 분명 최고의 것이다. 소설의 전개와 문체, 어디에도 나무랄 것이 없고 오히려 칭찬을 받아 마땅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일종의 귀향서사로서의 이 소설 - 자식이,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쓴 작품이 아버지에게 돌아온다는, 그리고 떠나간 여인이 차이(differance)**를 통해 사랑하는 사람에게 돌아온다는 의미에서의 귀향서사 - 에서, 작가는 지나치게 어떤 필연에, 신비한 분위기에 의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다음 작품 <그레이트 하우스>는 이런 측면에서 진일보한 작품이라 생각된다. 물론 여전히 유대인의 유산/상속의 문제에 집착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는 적어도 이러한 필연성이나 서사의 일자적 재현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바라는 것은 - 그녀의 작품을 높이 사는 독자로서 - 이제 다음 작품에서는 이런 문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제를 붙잡고 씨름하는 작가를 보고 싶다는 것이다. 어쩌면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 differance, 차이(差移) 혹은 차연(差延)은 다르다와 연기하다를 합해 놓은 데리다가 만들어낸 일종의 말장난이다. 영어에서는 differ(다르다)와 defer(연기하다)가 별개로 되어 있지만 프랑스어에서는 differer로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는데, 데리다는 말의 전달에서 시간적인 지연으로 인해 어떤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설명하는 말이다. 이 소설의 내용에서 적용해 보자면, 알마에 대한 사랑은 시간의 지연을 통해 같은 것이지만 다른 것으로 레오에게 돌아온다. |
| 장편소설을 읽은 다음의 기분이란 왠지 긴여정에서 돌아와 짐을 풀때의 기분이랄까 허전하기도 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아서 후련하기도 하다. 레오와 알마의 이야기. 초반의 갸웃거리게 만드는 플롯이랄까. 멍청한 독자인 나는 그때부터 헷갈렸다. 중후반에 가서야 아하! 이런 관계구나라는걸 알았으니까. 처음 이소설에 호기심이 일었던건 수전 손택이 극찬을 한 이유가 뭘까. 이렇게 훌륭한 작가를 난 왜 몰랐던거지? 하는 무지함에서부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서 왜 수전 손택이 극찬을 했으며 미국에서 그렇게 이슈가 될만한 이유를 잘 모르겠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사랑의 역사도 약간은 진부함을 주는 듯했고 이야기 형식도 지은이와 지은이의 딸과 부인으로 이어지는 가족관계. 자신의 이야기를 아닌 것처럼 하는 것이 소설의 묘미이듯 두리뭉술 엮어 만든 것이아닌가 생각하게 됐다. <사랑의 역사="">의 진가를 모르는것일 수도 있다. 나와는 달리 극찬을 하고 하도 재미있어서 한번 잡으면 내려놓치 못할정도로 스피디하게 읽혀진다고 하는 독자도 있으니 말이다. 한인물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예상과 맞게 풀어낸건 식상한 이야기 방식아닐까. 시점과 캐릭터 그리고 화자의 변화에 조금의 흥미를 느낄지도 모르겠다. 허구의 인물인지 진짜 딸인지 모호하게 만들어 놓은 캐릭터와 책속의 주인공과 이소설의 지은이. 너무 진부하게 여겨진다. 나중에 영화화 할때 한번 다시 보고 싶을까. 그렇지 않을 것 같다. 도대체 작가는 무얼 말하려고 한것일까. 자신의 사랑에 대한 추억?! 가슴 따뜻한 이야기? 안정감 행복감? 글쎄 그냥 작가의 자기 만족 때문에 소설한편이 나온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사랑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