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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의미에서 저자의 지식에 대한 문제 인식은 실존주의자들의 연장 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근대에 유럽에 지배하던 사상은 이성주의였다. 사람들은 인간 이성의 가능성에 열렬히 환호했고, 이성의 계발은 인류를 유토피아로 안내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세계 양차 대전으로 말미암아 이런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는 산산조각났다. 덕분에 유럽은 실존주의가 지배하게 되었다.
저자의 문제인식은 실존주의적인 입장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지식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에서 볼 때는 공통분모가 있다. 팔머는 보다 근본적으로 지식이 가지는 폭력에 주의하고 있다. 팔머는 지식은 하나의 작의적 과정이고 문화 게임에서 이기기 위한 전략적 수단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입장은 포스트모던적인 접근이다. 하지만 현실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기도 하다.
팔머는 지식이 가치 중립적이라는 믿음은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지식은 인간 영혼 내부의 열정에서 시작되기 떄문에, 만약 그 영혼 내부의 동기가잘못되었다면 결과도 필연적으로 잘못될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오늘날 사회가 이토록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저자가 지식의 영성에 관심을 기울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올바른 동기로 지식을 취득하고 지식이 전수되어질 때에도 올바른 동기가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번역자의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이라는 제목은 참으로 저자의 의도를 바르게 파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전혀 다른 종류으지식이 있는데, 그것은 사랑의 동기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말한다.현대 지식의 실패는 윤리적 문제가 아니라 지식이 우리와 세계와의과녜 속에 사랑이 거하도록 하지 못한것에서 기인한 말하자면 앎 그 자체의 실패라고 지적한다.
저자가 제시하는 지식은 관계성에 근거한 지식이다. 그는 이것을 기도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하나님과 이웃과 자연 만물에 대한 사랑과 친밀한 관계를 염두에 두고 이것을 지향하는 지식이 참된 지식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지식의 가르침과 배움의 모델로서 수도원과 초대 교회의 광야 구도자를 들고 있다. 여기에 조금은 염려스러운 신비주의적인 형태가 엿보인다. 저자는 동양의 신비주의, 동양의 구도적인 자세에 대해서 너무나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사실 그는 이것이 가지는 위험성에 대해서 조금도 모르는 듯하다. 아마 서양적인 시각에서 보았을 때, 이러한 방법론이 가지는 유익과 장점만을 보았기 떄문일 것이다. 하지만 동양적 신비주의에 익숙한 내가 보기에는 조금은 위험하기 때문에 한 번 걸러줄 필요가 있을 듯하다.
무엇보다도 저자의 탁월한 점은 지식을 인격과 결부시키고 있다는 거이다. 지식은 우리와 객관적이고 동떨어진 그 무엇이 아니다. 인격과 인격간의 상호 대화와 상호 관계이다.
서구 사회는 바로 이 점에서 크나큰 실수를 범한 것이다. 서구 사회는 진리를 나와 결부시키는 것을 포기하고 저쪽 바깥에 있는 실재에만 관심을 두게 함으로 자아를 고립시키고 공동체와도 격리시켰다.
저자의 지식에 대한 견해는 통찰력있고 탁월하다. 그러나 언제나 문제는 실천이다. 그럼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저자는 그저 원론적인 방법론만을 제시한다. 물질주의와 객관주의에 찌들려서, 배우는 자나 가르치는 자나 다 생소한 이 방법론을 교실 속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을까? 우리가 진정으로 고민해야할 부분은 바로 이것이다. 공교육이 도입되기 전에는 이런 일들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런바 도제수업은 바로 저자가 말하고 있는 그런류의 가르침이 행해질 수 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오늘날은 불가능하지 않는가?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스스로가 더욱 하나님과 가까이 관계를 맺으며 통합된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일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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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 만큼 가르친다
한 쪽 눈을 감고 운전해본 적이 있는가? 아마 매우 답답하고 불편할 것이다. 시력이 좋지 않은 나는 안경을 벗으면 온 세상이 뿌옇게 보인다. 거기에다 한 쪽 눈까지 감아버리면 세상의 절반만을, 그것도 흐리게 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눈의 상태에 따라 볼 수 있는 양과 질이 결정된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아는 만큼만 가르칠 수 있다. 이 책은 우리가 알고 있던 교육 방법에 또 다른 날개를 달아준다.
교육에 있어서 핵심은 주체와 대상과의 관계성이다. 기존의 교육방식은 주체와 대 상을 객관적인 사이로 인식했다. 교사는 학생을 객관적인 권위로 통제하고 지배하는 것, 그것이 교육이다. 이러한 관계는 교육의 주체인 교사와 교육 대상인 학생과의 소외, 단절, 결별을 야기한다. 여기에는 주체자의 일방적인 교육만 있을 뿐이다. 물론 상황에 따라 일방적인 지식전달의 교육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사람의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아마도 팔머는 이러한 교육의 한계를 느끼고 기독교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새로운 교육방식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영성’이다. 영성은 관계성이다. 자신의 자아보다 더 큰 진리와 연결하여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 그것이 영성이다. 이러한 출발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영성을 추구하는 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주체와 대상의 상호 관계에 대해 주목해야한다. 부버의 말대로 주체와 객체는 1인칭과 3인칭의 관계가 아니다. 나와 너의 인격의 관계이다. 팔머는 이것을 돌봄과 책임성의 관계망이라고 했다(p.130). 하지만 이러한 돌봄과 책임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은 아쉬움이 든다. 아마도 번역의 한계에서 나오는 개념이해의 부족이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머는 교사와 학생의 인격적 관계를 어떻게 맺을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관계성은 곧 타자에 대한 이해인데, 이해의 방식에는 주체자의 내적역량에 따라 결정된다. 내적역량은 논리라는 객관성과 감각과 경험이라는 주관성이다. 이것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유기적인 도구(adequate)이다. 다시 말해 인간 자체가 타자를 포함한 다른 피조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이다.
먼저 우리 자신이 유용한 도구가 되기 위해서 영성훈련이 필요하다. 영성훈련의 핵심은 겸손과 용기다. 겸손은 타자에 대한 인격적 반응이며 수용성이다. 하지만 이것만 있어서는 상호 관계가 성립될 수 없다. 나 또한 타인에게 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러한 훈련은 고독과 침묵,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훈련할 수 있다. 이제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교육하는 방법을 알고 싶다면 5,6장을 정독하길 바란다.
우리는 설교를 통해 성도들을 가르칠 것이고 앞으로도 누군가를 교육할 것이다. 무엇을 가르치는가? 삼위 하나님이다. 하나님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객관적 방법이다. 우리가 신학교에서 배워왔던 서방 신학의 방식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가르쳐야한다. 하나님을 가르친다는 것은 하나님과 내가 인격적인 관계, 사랑의 원리로 하나님이 내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머무르는 것이다. 이 비밀은 기도에 있다. 이것은 또한 동방신학의 가르침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만큼 가르칠 수 있다. 하나님을 아는 비밀 통로의 열쇠는 ‘관계’이다. 더 나아가 인간과 인간, 인간과 피조물을 이해하는 방식도 관계이다. 관계는 지배, 소유가 아닌 사랑의 관계이다. “나는 관계한다. 고로 존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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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4학년 때 c.c.c. 훈련 받을 때 필독서 완독하면 책을 한 권씩 선물해주셨는데 그때 받아 앞부분만 읽었던 책이다. 재미있었지만 IVP 책들이 어려워서 혼자 끝까지 읽으려면 의지를 요하는지라 다 못 읽고 책장에 꽂아두었다가 올해 TIM 스터디 서적을 정할 때 추천했다. 1년 동안 우리는 모임 때마다 '좋긴 하지만 어렵다'를 연발하며 그래도 어떻게 어떻게 공부를 끝냈다. 다 읽을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좋았다.
지금 3학년 아이들을 1학년 때부터 데리고 올라왔다. 길게는 3년 내내 나에게 도덕을 배운 학생들도 많다. 어느날 실수로 복도에서 내 이름을 부르며 대화를 나누던 남학생을 접하고 충격을 받아 수업 시간에 아바펠릭스의 예화를 들려주며 '실천해야 진짜 아는 것'임을 이야기했고 그 후로 왠지 모르게 더욱 열심히 인사하는 아이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학교에서 종종 교사는 열심히 가르치고 학생들은 많은 것들을 배우는데 왜 변화되지 않는지 의문이 들 때가 많다. 가르침과 배움이 무엇인가 잘못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르침이란 진리에 대한 순종이 실천되는 공간을 창조하는 일이다". 이 책은 근대 이후 가르침과 배움에 나타난 근본적인 문제점을 고찰한다. 배워야할 것들을 대상으로 보는 객관주의는 진리를 깨닫기 위한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학문을 대상화했다. 진리는 배우는 이와 관계된 것이 아니라 배우는 이 바깥에 떨어져있는 것이기에 배우는 이가 진리를 깨달아 변화되기도 영향을 받기도 어려워졌다. 진리(타인, 그리고 학문 등)와 내가 공동체가 되고 배운 것을 실천하는 것이 제대로 된 가르침이고 배움이다.
어쩌면 이렇게 추상적이고 원론적인 이야기들은 너무 이상적인 것이어서 실제 학교 현장에서 실천하기엔 난점이 많아 우리에게 좌절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러나 수업 시간 혼자 떠들다가 '내가 뭘하고 있는 거지?' 한숨을 쉬어본 교사라면 이 책을 읽으면서 적어도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행위의 근본부터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