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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새벽녘 초당에서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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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과 성호(星湖)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은 당대의 학자였습니다. 실학사實學史에서도 반계 유형원을 1조祖, 성호를 2조祖, 다산을 3조祖로 거명하듯이, 성호는 반계의 실학사상을 이어받아 다산에게 연결시켜 주었던 실학의 우뚝 솟은 학자였습니다.   다산이 태어난 다음 해에 성호가 세상을 떠나 성호의 가르침을 직접 받을 수는 없었지만 다산은 16세에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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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과 성호(星湖)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은 당대의 학자였습니다. 실학사實學史에서도

반계 유형원 1조祖, 성호를 2조祖, 다산을 3조祖로 거명하듯이, 성호는 반계의

실학사상을 이어받아 다산에게 연결시켜 주었던 실학의 우뚝 솟은 학자였습니다.

 

다산이 태어난 다음 해에 성호가 세상을 떠나 성호의 가르침을 직접 받을 수는

없었지만 다산은 16세에 성호의 유저遺著를 읽은 뒤, 큰 충격을 받고 성호처럼

학문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기록을 남겼습니다.

 

“성호선생의 유고를 처음으로 보았다. 당시에 온 세상의 후학들이 성호선생의

학문을 이어가려고 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다산도 성호의 학문을 준칙으로

삼았다. 다산이 자식이나 조카들에게 항상 말하기를 ‘나의 큰 꿈은 대부분 성호

선생을 따라 사숙私淑했던 데서 깨달음을 얻었다’라고 했다.(<사암연보 16세조>)

 

다산은 유저를 통해 성호의 실학사상을 터득하면서 때로는 성호에게 직접 글을

배운 성호의 종손從孫이자 다산의 대선배였던 이가환李家煥을 통해서 성호의 학문을

듣기도 했습니다.

 

다산이 22세 때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자 선조들의 묘소에 성묘를 갔는데,

안산安山의 선산을 참배한 뒤 그곳에 있던 성호선생의 옛집을 찾아가 성호의 옛

자취를 돌아보며 숭앙의 뜻을 표했습니다. 그리고 숭모의 정을 시로 읊기도 했습니다.

 

뒷날 성호의 유상遺像을 보고 다음과 같이 찬양하는 글을 지었습니다.

 

저 덕성스러운 얼굴을 바라보노라면

윤기 흐르고 함치르르함이여

도가 저 몸속에 가득 쌓인 데다

뛰어나고 빼어난 아름다움으로 흠뻑 적셔 있구려

(……)

누가 이분을

저 깊이 묻힌 땅 속에서 일으켜 세울 수 있어

끝내 억센 물결을 밀쳐버리고

수사洙泗의 물줄기로 돌려보낼 것인가.

슬픈지고

星翁畵像贊

 

이 글에서 다산이 가장 존중하고 가장 큰 영향을 받았던 실학자는 성호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깊이 묻힌 성호학을 일으켜 세울 뜻을 지녔던 다산. 이제 우리는

깊이 묻힌 다산학을 일으켜 세워야 할 것입니다. 쉬운 일은 아니나 노력은 해야 하지

않을까요.

 

 

새벽녘 초당에서 온 편지(풀어쓰는 다산이야기)(2)[문학수첩/박석무] 217

 

 

 

 

화평하였던 조선시대가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국가가 문란해지자 주자학의 대안으로

실학사상이 싹을 트기 시작한다. 반계선생은 부친 유흠의 광해군 복위사건 관련으로

사망하자 부안 땅에 묻혀 정치에 문을 닫고 학문에 정진하게 된다. ‘반계’는

‘우반동 계곡’이라는 뜻으로 재야에 묻혀 ‘반계수록’이라는 실학의 대저서를

구상하고 조선의 개혁 실천방안을 써내려간다. 과거시험이나 성리학에 얽매이기

보다는 실제 현실에 필요한 정책을 제시하고 이를 반영하여 국민이 잘살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반계수록’은 반계선생이 손가는 대로 써내려간 실학사상의

원류가 되는 것이다.

 

성호 이익선생도 당쟁의 피해자로 경신환국으로 남인이었던 이익의 부친 이하진

유배되어 사망한다. 성호선생도 고향인 안산 첨성리로 묻혀 재야의 길을 걷는다.

반계선생을 모범삼아 실제로 농사를 지으며 ‘성호사설’을 저술한다. ‘성호사설’에는

노비법 폐지, 토지의 균등분배 등 혁신적인 내용이 담아 있어 실학 사상의 실천서가

되었던 것이다.

 

다산은 강진의 유배기간 동안에 수 많은 책과의 대화를 통해 ‘여유당전서’라는

명저를 완성해 간다. 특히 경세학을 통하여 조선사회를 운영하고 세상을 경영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나타낸다. 또한 자신을 수양하기 위해 경학을,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경세학을 논하였다. 다산이 실학을 집대성한 근본에는 반계 선생과 성호 선생의

큰 흐름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사암연보’에 잘 나타나 있다. 두 분의

실학사상은 19세기 동아시아에서 가장 훌륭한 유학 사상가로 탄생하게 된 동기가 되는

것이다.

 

  큰 깨달음은 옛 성현들의 저서를 통하여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도

다산의 수 많은 저서를 통하여 나라가 부강해지고 국민이 잘 살수 있기위해 모두가

노력하고 있다. 다산학을 통해 사회를 건전하게 개혁하고 깨끗한 사회가 되는 것이

다산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아닌가 한다

 

YES마니아 : 로얄 h****i 2009.04.25.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