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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채색 풍경 속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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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하림 시인의 시집을 처음으로 읽는다. 이전에 펴낸 다섯 권의 시집들은 건너뛰고 가장 최근 시집인 『풍경 뒤의 풍경』을 읽는다. 한 편 한 편의 시들을 읽으면서 시행이 잘 넘어가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구절 위에 나의 눈길이 오래도록 머물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시들의 전개에 따르는 전후 맥락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하는 나의 노력이 자주 좌절되기 때문이다. 나의 상상력은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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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하림 시인의 시집을 처음으로 읽는다. 이전에 펴낸 다섯 권의 시집들은 건너뛰고 가장 최근 시집인 『풍경 뒤의 풍경』을 읽는다. 한 편 한 편의 시들을 읽으면서 시행이 잘 넘어가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구절 위에 나의 눈길이 오래도록 머물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시들의 전개에 따르는 전후 맥락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하는 나의 노력이 자주 좌절되기 때문이다. 나의 상상력은 그의 시행을 따라 부지런히 쫓아가지만 마침내 닿은 길 끝에서 나는 여기가 어딘지를 몰라 자주 두리번거린다. 내 상상력이 닿지 않는 곳으로 그는 이미 숨어버리고, 그 풍경 속에서 나는 길을 잃는다. 그의 시들은 내 상상력보다 앞서가고 있다. 이 시집에 수록된 대부분의 시들은 자연 풍경을 그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쉽게 읽히지 않는다. 그것은 그의 시들이 단순히 자연 풍경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제목처럼 ‘풍경 뒤의 풍경’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전면에 드러난 풍경 뒤에 숨어 있는 시인의 내면 풍경은 그의 시들을 오래도록 찬찬히 들여다보고 음미하고 사유할 것을 요구한다. 시인이 그려내고 있는 풍경은 늦가을에서 한겨울까지의 풍경이 압도적이다(예순을 넘은 그의 나이 탓일까?). 가랑잎이 비명을 지르며 떨어지고, 풀들은 말라 바스락거리고, 벌판에는 눈이 하염없이 내리고, 강물은 잦아들어 살얼음 밑을 적막하게 흐른다. 흑백사진을 보는 듯한 이 무채색 풍경을 살아있게 만드는 것은 색채가 아니라 소리이다. 시인이 그려내고 있는 풍경 속에서는 끊임없이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들은 사과밭에서 사과 떨어지는 소리, 초저녁 눈발 뿌리는 소리, 바람이 쇠북에 걸려 오래도록 내는 쉰 소리 등 실제로 자연 풍경 속에서 들리는 소리이다. 그러나 시인의 귀는 그보다 더 예민해서 붉은 황혼이 성큼성큼 내려오는 소리도 듣고 시간들이 구멍으로 빠져나가는 소리도 듣는다(이것이 예순의 나이를 耳順이라고 부르는 또 다른 이유가 아닐까?). 이처럼 시인이 시간의 소리를 들을 때 그가 바라보는 자연 풍경은 시인의 내면 풍경과 겹쳐진다. 시인의 내면 풍경은 그가 바라보고 있는 자연 풍경처럼 어둡다. 아니, 그의 내면 풍경이 어둡기 때문에 그가 바라보고 있는 자연 풍경이 어두운 것인지도 모른다. 생생하고 화려한 원색의 봄, 여름 및 초가을이 아니라 어둡고 무거운 무채색의 늦가을과 한겨울에 집중되어 있는 그의 풍경 바라보기는 그가 이제 인생의 황혼이라는 나이에 도달하였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사실 이 시집에서 시간은 풍경 뒤의 풍경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배후다. 그 시간은 검은 새처럼 검고, 그림자처럼 어둡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의 시는 탈색된 이러한 풍경을 매우 투명하게 보여준다. 그의 시들이 점묘하고 있는 무채색 풍경은 결코 탁하지 않다. 그것은 그가 그려내고 있는 풍경 속에서 어두운 시간이 집적되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유화가 아니라 수묵 담채화처럼 시간은 얇은 흔적만을 풍경의 표면에 남긴 채 사라지는 것이다. 그 흔적은 어두워 보이지만 두께가 없기 때문에 탁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시간의 흔적이 묻어있는 사물들의 표면은 시간의 흔적을 통하여 오히려 더 뚜렷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최하림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풍경 뒤의 풍경』에 실린 시들은 무채색 풍경 속에서 채집한 어두운 시간들의 투명한 흔적들이다. 자연 풍경 속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소리들이 멈추고 난 자리에서 시인은 자신의 내면 풍경에서 들리는 고요한 시간의 침묵 소리를 듣는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시간의 소리를 듣기에는 아직 나는 너무 젊은 것인가?

[인상깊은구절]
겨울 내소사로 하늬바람이 내소사 길 나무들을 날립니다 아직도 햇빛은 찬란하고 수은주가 내려가는지 12월의 시간들은 조금씩 조금씩 마르고 하늘 가운데로 소리들은 투명하게 솟아올라 우리가 우리 그림자를 물속으로 들여다보듯이 지상에 어린 내소사 길을 내려다봅니다 나는 천천히 천천히 걷습니다 언 돌이 발부리에 채입니다 얼음의 여울이 미광처럼 흐르고, 여전히 내소사 길은 덜덜 떨면서 산 밑으로 뻗어나가고, 점점 날은 어두워가고 바람이 쇠북에 걸려 오래도록 쉰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c*****t 2002.09.05.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