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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에 설치된 전광판 시계를 보니 밤 아홉 시였다. 사방이 조용했고 인적도 드물었다. 집 현관으로 들어섰다. 이제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평번한 사람들에게 산다는 것은 그저 무료한 일일뿐이고, 유희 또한 그들의 몫이 아니다. 여기에도 자갈은 굴러다닌다(5쪽). 밤이다. 부엌. 어둠. 전기가 나가서 캄캄하다. 어둠 속에서 펭귄 미샤의 느릿느릿한 발검음 소리가 들려왔다. 일 년 전 가을, 동물원에서 먹이를 주며 돌봐줄 여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굶주린 동물들을 분양했었다. 빅토르도 그때 동물원에서 황제 펭귄을 데려왔다. 펭귄을 데려오기 바로 일주일 전 여자 친구가 그를 떠났다. 그는 외로웠고 미샤 역시 고독을 물씬 풍기며 다가왔다. 이제 고독한 둘은 우정이라기보다 피차 의지하려는 인상이 더 짙다(5쪽).
영화도 그렇지만 소설도 도입부가 참 중요한 것 같다. 첫 장면의 인상이 작품 전체를 좌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소설의 도입부는 매우 강렬하다.
남자 주인공인 빅토르는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듯하다. 그걸 의식하고 있지 않는 것처럼 뛰지 않고 천천히 집에 온다. 밤 아홉 시. 전기가 나가 캄캄한 집에는 미샤라는 이름의 황제 펭귄이 살고 있다. 이 둘은 서로를 의지하는 사이.
그 자체로 매우 독특한 분위기 설정이다. 더군다나 사람도 아닌 펭귄의 등장이라니.
쫓기는 듯 보이고 불안해하는 듯한 남자 주인공을 통해 사회가 정치적으로 불안정하다는 걸 보여주고, 동물원을 더 이상 꾸려나가기 힘들어 동물들을 분양했다는 서술을 통해 경제적으로 매우 피폐한 상황이라는 것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겨우 한 쪽 분량의 내용만으로 구소련 붕괴 이후, 우크라이나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전달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 작품 전체의 분위기와 연관된다. 정말 대단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꿈은 컸으나 별볼일 없는 글로 하루하루를 살던 이 남자는 신문사로부터 매우 비밀스러운 제안을 받게 된다. 조문 쓰기. 그런데 이 조문 쓰기는 목숨을 담보로 한 것이고 서서히 그를 파멸로 이끈다. 정치적으로 불안하고 경제적으로 피폐한 이 도시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이 소설은 형식적으로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추리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 본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펭귄'이라는 동물을 소설의 전면에 등장시키다니... 매우 파격적으로 보이지만, 기실 따지고 보면 '펭귄'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낯설게 보고 객관적으로 보기 위한 절묘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우울증에 걸린 데다 심장병까지 걸린 펭귄!
외로움. 소통의 문제.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이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 중 하나는 외로움일 것이다. 개개인으로 분자화된 인간들은 '스스로' 외로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자기 스스로도 타인에게 그다지 큰 관심이 없다. 타인도 자기처럼 외로울 텐데 말이다. 외로운 섬들인 개개인은 그 자체로 존재할 뿐이다. 왜 그들은 소통할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혹은 소통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일까?
그는 문득 니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어디에서 왔고, 과연 누구인가? 물론 세르게이의 조카딸이긴 하지만, 사실 쉽게 친해진 세르게이에 대해서도 아는 게 별로 없었다(224쪽).
삶의 본질을 변화시키려 들지 않으며, 어떤 비밀을 숨기기 위해 걸음을 멈추지도 않으며 오직 앞으로만 전진해야 도달할 수 있는 자신의 미래. 긴 여로, 이것이 인생이다. 과정이 결과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지만 결국 삶의 최종 결과는 언제나 같다. 바로 죽음이다(309-310쪽).
가족이란 무엇일까? 유사가족은 가능할까?
외로운 사람들은 가족을 꿈꾼다. 따뜻함, 정, 남들에게 그럴 듯해 보이는 것. 적막했던 공간에 소리를 입히는 것, 차디찬 침대에 체온을 입히는 것. 외로운 사람들은 그렇게 누군가를 꿈꾼다. 그런데 누군가가 있다면, 그 타인의 존재로 인해 더 이상 외로워지지 않을 수 있을까?그렇다면 자신이 철저히 외로웠던 것은 전적으로 타인에게서만 기인한 것이었을까? 자기 자신에게도 원인이 있었다는 간 아닐까? 그걸 막연하게 깨닫는 순간, 꿈은 깨어지는 것일까?
펭귄이 아침 먹는 소리만 간간이 들리는 이 조용한 적막은 미샤와 단둘이 살던 시절로 돌아가게 했다. 시끄럽지도 않았고, 평온한 시절이었다. 강한 애착도 없었고 혈연관계도 아니었지만 그들은 서로 의지가 됐었다. 사랑까진 아니지만 서로에 대한 염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친척이라 해서 반드시 서로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일이 생기면 그저 발을 동동거리며 걱정할 뿐이다. 게다가 이런 느낌과 감정은 부차적인 것이고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다. 단지 서로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만 가질 뿐......(186-187쪽)
"그렇지, 우리가 아무래도 너를 외면한 것 같구나...... 미안하다. 소냐가 너를 내버려두고 처음에는 텔레비전에, 다음에는 니나에게 가버렸지. 여태 소냐가 너와 함께 잘 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미안해."(187쪽)
새벽에 몸이 너무 달아올라 잠에서 깼다. 그리고 타인의 온기, 옆자리에 누운 니나의 온기를 느꼈다. 니나는 등을 돌린 채 자고 있었다. 빅토르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다시 잠을 청했다. 모든 게 만족스러웠고, 불편함은 이제 사라졌다. 지금 그녀의 어깨에 올려놓은 손이 그녀와 자기 사이를 살아 있는 온기로 꽁꽁 묶어놓았다. 온기는 더 이상 그의 잠을 방해하지 않았을 뿐더러 소중하게 여겨지기까지 했다(225-226쪽).
(내적, 외적) 갈등, 당혹스러움
사람들은 참 이상한 동물이다. 외로움을 느끼고 그래서 누군가와 함께 하길 바라면서도 누군가가 자신의 영역, 공간에 들어오는 그 순간부터 '구속'을 느끼니 말이다. 이런 이중적인 감정은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더욱이 너무나도 다른 사람들이 만나 쉽게 가족을 이룰 것이라는 건 순진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누구나 행복한 가족을 꿈꾸지만, 가족이 된다는 건 그렇게 만만하고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럴 듯한 가족만 생기면 행복할 것 같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고, 좋은 집이, 멋진 식사가, 사람들의 떠들썩한 웃음이 행복을 가져다 줄 것 같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뭇 사람들 속에서도, 자기가 애써 만든 그 가정 속에서도 외로움과 고독을 느끼게 될 때 말이다.
태평스럽게 잠든 모습에 빅토르는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순간 그녀가 완전히 낯선 사람처럼 여겨졌고, 소냐와 자기를 얕보는 것 같았다. 반면에 소냐는 더 가깝고 피를 나눈 사이 같았다. 미샤를 염려하면서 둘은 더 친밀해진 듯했다(288쪽).
이상하긴 해도 그 모든 것들이 자신이 총애하는 미샤와 간접적이나마 관련되어 있었다. 비록 미샤는 아무것도 안 한 듯 보이지만 미샤야말로 고의가 아닐지언정 그의 삶을 꼬이게 만든 장본인인 셈이다. (중략) 미샤는 이제 사라져야 한다(310-311쪽).
빅토르는 생각했다.
물론 니나와 소냐가 곁에 있지만 그것은 그들 스스로가 결정할 일이고 같이 있다고 해서 미샤를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니나와 소냐에게 애착을 기대하지 않았다. 물론 자신도 둘에게 애착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한낱 가족놀이에 불과했던가? 그랬을지도 모른다(318쪽).
기본적으로 이런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추리소설의 외형을 가진 만큼 지나치게 무겁게 접근하지는 않는다. 이야기는 심오하면서도 아주 경쾌하고 빠르게 전개된다.
그러면서 주인공이 살아가는 세상을 스케치해보이는데, 그렇게 만나는 인간 군상들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주인공이 살아가는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보여준다.
창밖으로 겨울 저녁의 짙은 어둠이 내렸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라디오에서는 체첸 사태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다. 그는 타자기가 놓인 부엌 식탁에 앉았다. 외로운 기분이 들었고, 어떤 이야기나 소설이 쓰고 싶었고, 하다못해 소냐를 위한 동화라도 쓰고 싶었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미완성인 '십자가'의 슬픈 곡조가 울려 퍼졌다(58쪽).
"아니 그 사람들이 약도 안 준단 말이에요?"
그리고 이런 식의 촌철살인도 날려주니 글 읽는 재미가 있다. 물론 배를 잡고 낄낄 웃는 웃음이 아니라 입꼬리가 내려가는 씁쓸한 웃음이지만 말이다.
"아무도 자넬 방해하지 않을 걸세."
"내가 볼 땐 말이지, 즐거운 펭귄은 만화영화에만 있는 것 같아...... ."
빅토르와 소냐는 레옹과 마틸다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빅토르와 미샤의 조합이나 빅토르와 니나의 조합만큼이나 사랑스러운 관계.
소냐. 사랑스런 소냐. 세상이 아무리 암울하다 해도 웃을 수 있는 건 어린아이들이 있기 때문 아닐까?
"펭귄은 추위를 좋아하는데, 여기는 따뜻하잖니...... ."
"남극은 어디에 있어요?"
흥분한 소냐가 발코니 문 앞에 서서 외쳤다.
그나저나 미샤는 어떻게 되는 걸까? 고향 남극을 떠나 우울증에 걸리고 심장병에 걸려 이식할 어린 아이의 심장이 필요한 우리 미샤 말이다. 그리고... 위기에 처한 빅토르는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야기는 특급열차를 탄 듯 박진감 있게 진행된다. 멋진 추리 영화와 같은 나름의 반전도 있다. (브라보!)
소설의 맛을 제대로 느껴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권한다. 풍자와 블랙유머의 진수를 보여줄 것이다. 암울하지만 사랑스럽고 시크하지만 귀엽다.
[덧붙임] 1. 소설을 읽고 나면 코냑 섞은 커피와 보드카에 후추를 넣은 술을 마시고 싶어질 지도 모르겠다. 나도 그랬으니깐. (나는 아직 시도를 못 해봤다. 누군가 마셔봤다면 어떤 맛인지 꼭 알려주면 좋겠다.)
2. 이 책은 작년 7월 경에 읽었던 책이다. 『하늘이 내린 곰』 리뷰를 쓰다가 생각이 미쳐 책을 찾아봤다. 개인적으로는 참 유의미한 작품인게, 이 책 자체도 무척 재미나게 읽었지만, 이 책을 통해 아주 소중한 인연도 만들게 됐다. 2010년을 열면서 제일 먼저 선물을 해준 친구 말이다. 그 친구는 작년 12월 말에 『내가 없는 세월』이란 작품을 선보였다. 이 소설도 좋다. 아직 못 읽어보신 분이 있다면 일독을 권한다. 신진 작가군 중에서 나름의 영역과 색깔을 구축하고 있는 멋진 작가이다. 오늘보다 미래가 더 기대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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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상식적인 인과관계가 완전히 뒤집혀 있습니다. 애완동물이 뜬금 없이 생기고, 딸 같은 아이를 맡게되고, 아내 같은 사람도 들어서고... 그가 맡은 일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자세히 쓰면 스포일러가 되어 버려서... ^^) 마지막까지 주인공이 주변 인물들과 관계를 맺어가는 방식 역시 상당히 독특합니다. 너무 단순한 계기로, 너무 친해진다는 느낌이랄까요? 어쩌면 이건 시대/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체적으로 주인공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부분에 대해서만 집중하고 있고, 문체 자체도 단순 명료합니다. (번역 과정에서 이루어진 작업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따라서 다른 장편소설들과는 달리 주절주절 무언가의 묘사를 심각하게 하지도 않습니다만, 공감대 생성이나 이야기 진행에는 충분합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군더더기 없이 담백한 느낌을 주고, 결과적으로 읽는 속도감도 향상된 느낌입니다. 물론 사건의 발생도 이와 보조가 잘 맞아들어가서 어색함이 덜 한 것이 사실이구요. 이런게 잘 안 맞으면 설명이 부실하거나 지나친 묘사로 소화/공감하기 힘든 소설이 되어버리기 마련인데 말이죠... 어쨌든 속도감 있는 소설은 열린 결말로 마무리 됩니다. 엄청 아쉽게 말이죠... (제가 느낀 최고의 아쉬움은 소설 "동의보감"입니다. 작가가 명을 달리하는 바람에...) 아쉬움 만큼 후속편 "펭귄의 실종"을 보게 만듭니다. 작가가 의도를 했던 안했던 간에... 생각보다, 기대보다 괜찮았던 소설. 가벼운 느낌으로 접하기 괜찮을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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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색 커튼을 장만하고, 냉동실에는 얼음을 항상 가득 얼릴것이며,
욕실에는 아주 커다라 하늘색 욕조를 들릴것이다.
그리고 검은 연미복을 입은 미샤를 초청해햐지..
하얀색의 집에, 욕실문을 열어놓고, 파아란 욕조는 찬물로 가득 채우고, 그 위해 얼음을 동동 띄우자.
그리고 실컷 우울을 즐기라지.
펭귄의 우울은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진 이후, 작은 도시 키예프의 처절한 삶과 마치 동화속에나 나올 법한 펭귄 마사와의 동거를 그린 책이다.
그 이상 더 환상적일 수 없고, 그 이상 지극히 현실적이고, 자본주의 적일수 없다.
사람은 탄생과 더불어 한 시대의 일부로 살아가야 한다. 그 시대가/그 사회가 본인의 취향이든 아니든, 혹인 본인의 종족이든 아니든.. 그 속에서 자신만을 삶을 살아 가야 한다.
그리고 남극의 펭귄도 북극에 가깐운 우크라이나의 도시 키예프라는 도시에서 사람과 함꼐 살아야 한다.
그것이 삶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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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 적자로 허덕이는 동물원으로부터 분양받은 펭귄 마샤와 함께 살고 있는 빅토르는 딱히 내세울 것 없는서른 중반의 소설가다.마지막 애인이 떠나간 뒤 펭귄과 쓸쓸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그에게 거절하기 힘든 멋진 제의가 들어온다.바로 신문의 부고난을 맡아 달라는 청탁이 들어온 것,당신보다 잘 쓸 작가는 없다는 편집장의 말에 우쭐해진 그는 덥썩 제의를 받아들인다.하지만 그가 써야 하는 부고엔 이상한 점이 있었으니 바로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것라는 것,어차피 우리 모두 죽는거 아니겠느냐며 미리 조문을 써둔다고 생각하자던 빅토르는 그 고객들이 진짜로 줄줄이 <고인>이 되버리자 당황하고 만다.더군다나 자료 수집을 위해 간 지방에선 안내인이 살해되지 않나,편집장은 위험이 사라지면 돌아올거라며 외국으로 갑작스럽게 떠나질 않나,조문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는 한 독자는 돈과 함께 딸 소냐를 맡기고 사라지지 않나,연이어 수상한 일들이 벌어지면서 그의 인생도 복잡해지기 시작한다.그렇게 설명하기 힘든 일들 몇번에 펭귄과 고즈넉히 살아왔던 빅토르는 난데없이 어린 소녀를 거둬야 하는 가장에 생명의 위협에 무방비로 노출된 신세가 되고,그런 소동 끝에 늘 그를 위로하던 펭귄마저 죽을 병에 걸리자 빅토르는 그를 남극으로 데려갈 이벤트를 준비하는데...
이야기가 저절로 술술 풀려나가듯 펼쳐지던 매력적인 블랙 코메디다.소련 붕괴후 이어진 우크라이나의 절망적이고 암울한 현실을 어쩜 이렇게 맛깔나게 그려내던지...부패한 정치가,사업가,그리고 그의 정부들과 무소불위의 갱단과 그의친구들...평생 타락을 향해 내달리던 사람들의 일생을 몇줄의 부고문으로 작성해내던 그는 그것이 어떤 모종의 음모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된다.하지만 펭귄을 분양받아 살고 있던 빅토르,그의 엉뚱함과 낙천성은 어려운 일 앞에서 진짜 힘을 발휘하게 된다.그는 그것들을 "뭐,그게 어때서?"라고 어깨를 으쓱하는 선에서 받아 들이고 넘기고 마는 것이었다.다른 영화나 책에서라면 음모론을 들이밀면서 편집증에 걸린 사람들처럼 행동하고도 남을 만한 상황임에도,될되로 되라는 심정으로 지극히 낙척적으로 대처하고 마는 그의 모습은 정말로 포복절도하게 귀여웠다.모르는 사람이 딸을 맡겨도 그만,갱단들이 펭귄을 장례절차에 동원해도 그만,귀찮을법한 펭귄학자의 임종도 그만,그는 자신에게 다가온 일들을 한번도 외면하지 않는다.어떻게 해서든 상황에 대처하려는 그의 인간미가 한없이 따스하게 느껴졌는데,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건 간에 여전히 인간적인 온기를 지닌 동유럽인들의 느긋한 매력을 발견한 기분이 들어 흐믓했다.참신한 상상력과 짜낸 흔적 없이 자연스러운 전개,앙징맞고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등장 인물들,그들이 나누는 매력적인 대화들로 지루할 새 없이 읽은 책이었지만,무엇보다 심장병에 걸린 펭귄이라던지,늘 우울한 펭귄이라던지,부고문을 쓰면 당사자가 죽는다든지 하는 말도 안 되는 설정들을 너무도 그럴 듯하게 그려냈다는 점이 멋졌다.작가의 으뭉스런 필력에 정신없이 빠져들어 봤던 책,얼마 전에 후속작 <펭귄의 실종>도 번역되어 나왔다는데 어떤 내용일지 자못 기대된다.빅토르는 무사할지,그리고 어쩌다 펭귄을 잃어버린 것일지 읽어봐야 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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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펭귄의 실종"("펭귄의 우울"의 후편)을 먼저 읽기 시작했는데, 처음부터 등장인물들이 이해가 되질 않아서 책 뒤에 있는 역자 후기를 읽고서야 "펭귄의 실종"의 전편으로 "펭귄의 우울"이 있다는 걸 알고 읽게 됐다.
소설의 무대는 우크라이나 키예프이고 시간은 1995년 12월부터 1996년 2월까지이다. 1996년에 출간됐는데 10년이나 지나고서 번역이 됐다니 저 러시아나 그 근방 소설들(작가는 우크라이나 사람이지만 러시아어로 썼다고 한다)도 어지간히 인기가 없는가보다.
그렇지만 "펭귄의 우울"은 아주 재밌다. 군더더기 없는 도입부와 담백하고 정갈한 문장으로 읽자마자 바로 이야기에 빠져들게 한다. 좋은 소설이 대개 그렇듯이 이 소설 역시 마지막 장면까지 긴장감이 줄곧 유지된다. 그리고 재미있는 추리소설이 대개 그렇듯이 마지막까지 섣부른 추측을 농락하고 사건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문을 독자에게 쉽게 열어주지 않는다.
소설의 저자인 안드레이 쿠르코프는 유럽에서 유명한 작가라는데 이제 처음으로 맛을 봤으니 기회가 있을 때마가 찾아서 읽어야겠다. 물론 몇 쪽 읽다가 잠시 미뤄둔 "펭귄의 실종"에 대한 기대감은 이미 읽기 전보다 훨씬 커진 상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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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빅토르는 동물원에서 동물을 분양해준다는 소리에 펭귄인 미샤를 한 마리 분양받아 키우고 있다. 함께 지내던 여자 친구도 떠나버리고 작가로서 성공도 못하고 있던 차였다. 거리에서는 가끔 총소리가 들리고 날은 춥고 커피를 끓이고 보드카를 마시고... 소련이 붕괴된 뒤,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빅토르가 펭귄인 미샤랑 그럭저럭 지내는 모습은 정겨우면서도 한편 불안하다. 말도 없이 방, 부엌, 욕실을 왔다 갔다 하며 창가나 문가에 서 있기도 하는 펭귄은 마치 조용히 애정을 갈구하는 애완용 동물 같기도 하다가 집에 돌아왔을 때 또는 잠에서 깨었을 때, 누군가 옆에 있다는 안도감 같은 걸 느끼게 해주는 친구 이상 가족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어디서나 둑음이 쉽게 느껴지는 사회적인 분위기도 느껴져서인지 불안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시끄럽지도 않았고 평온한 시절, ‘강한 애착도 없었고 혈연관계도 아니었지만 그들은 서로 의지가 됐었다.’
거기에 빅토르는 언제 둑을지 모르는 미지의 인물들에 대해 ‘십자가’라고 명명된 조문 쓰기를 청탁받고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런 조문이 결국 신문에 차츰 실리게 되는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고 주변 인물들도 사라지거나 둑는다. 그 사이 아는 이의 딸인 소냐와 소냐의 유모로 고용된 니니와 함께 빅토르는 살게 된다. 작가로서 성공은 못해도 그럭저럭 생활을 할 수 있고 특이하게 구성된 가족이지만 안정감도 느끼게 되면서 그런 ‘가족놀이’가 진짜 가족이 될 수 있음을 꿈꾼다. 하지만 빅토르와 미샤는 장례식까지 초대받기 시작하면서 일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편안하고 평온한 삶을 이어가기 위해 어떤 위험을 감지했으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척 했던 사실이 서서히 드러난다. 결말의 반전 아닌 반전은 그래서 정말 흥미롭다.
이 책은 일단 독자가 읽기 쉽고 특이하다고 느끼면서도 편안하게 느끼게 해주는 분위기가 있다. 잔잔하게 내재되어 있는 유머와 무관심을 가장한 따스함, 사랑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사랑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는 인물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위험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특이한 환경 속에서도 인간들은 평범한 일상을 이어가고 또 인연을 맺어간다. 불안정기에 있는 사회에서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가족이 아닌 그렇게 특이한 구성으로 이루어진 ‘가족놀이’가 더 맞을지도 모른다. 부정과 부패의 냄새 가운데에서도 정겨운 인간관계의 향기가 피어오르고 자연스럽게 구성되고 이루어진 ‘가족놀이’에서 진한 커피 향과 보드카 맛이 함께 난다. 펭귄이 우울한 건 어쩌면 그렇게 불안하고 위험이 잠재해 있는 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되는 감정이 아닐까. 펭귄까지도 말이다.
“미샤는 우울증에 걸려 있고 또 심장이 아프다오.” 펭귄학자가 말하는 이 같은 병은 어쩌면 그 불안한 사회에서는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병인지도 모른다. “물론, 펭귄은 사람이나 다른 동물들의 기분을 쉽게 구분해내요. 게다가 원한을 아주 오래 품어요. 물론 친절을 베풀면 그것도 오랫동안 기억하지요. 당신은 모르겠지만 펭귄의 심리상태는 개나 고양이보다 훨씬 복잡하다고 할 수 있소. 더 영리하고,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아 비밀이 많고... 펭귄은 자신의 감정과 애착을 숨길 수 있는 능력이 있소.” 펭귄이 그렇댄다. 그 귀여운 모습으로 뒤뚱대는 펭귄이 말이지.
빅토르는 어떻게 될까, 펭귄 미샤는 어떻게 될까... 궁금해진다.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
| 러시아 문학이라면 환장을 한다. 도스또예프스끼를 통해 러시아 문학에 빠지게 된 후로 미친듯이 러시아 문학만 찾아서 구입한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관심을 갖게 된 러시아 문학은 19세기의 문학이였고 그 이후의 문학도 만나긴 했지만 19세기의 매력에 듬뿍 빠져서 많은 기대를 할 수가 없었다. 무조건 러시아 문학만 찾다가 접한 20세기의 러시아 문학은 19세기의 문학을 논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기때문이다. 결국 19세기에만 머물러야 하는 건가 하며 구입해놓은 러시아 문학을 읽고 있을때 ''펭귄의 우울''을 만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러시아 문학이긴 하나 우크라이나 태생의 작가로 러시아로 씌여진 문학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소련의 해체 이후 그렇게 분류가 되었으니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영향하에 씌여진 ''펭귄의 우울''은 나의 예상을 뛰어 넘었다. 19세기는 지나 갔다고 20세기, 21세기의 러시아 문학에서는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없다는 억측스러운 비교에도 이 책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내가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좋아했던 이유중의 하나는 책을 통해 그 시대의 많은 것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탓이였다. ''펭귄의 우울''은 90년대 러시아를 어느정도 잘 반영하고 있는 소설 같았다. 이런 분위기의 소설이 계속 나오고 진보된다면 사람들은 21세기 혹은 19세기를 잊는 러시아 문학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겠다. 펭귄의 등장, 미리 씌여진 조문이 주류가 되는 내용이 시대를 잘 반영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겠으나 그 안에 풍자된 의미를 알아간다면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자연스레 등장하는 펭귄이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자연스러웠다. 러시아가 추운 나라이긴 하지만 동물원에서 분양한 펭귄을 집에서 키울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펭귄과 함께 살아가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는 엉뚱하면서도 의미를 담고 있었다. 펭귄의 검은색과 흰색 때문에 양복을 입은 것으로 많이 비유를 하게 된다. 양복의 의미 중에서 펭귄과 같은 색이라면 장례식에서의 검은 양복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 빅토르는 우연한 계기로 유명 인사들의 예정된 조문을 쓰는 일을 맡게 된다. 장례식하면 검은 양복, 즉 펭귄의 등장은 드러나는 암시라는걸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빅토르는 단순한 조문을 쓰는 ''십자가'' 기자가 아니였다. 편집장에게서 받은 정보로 씌여지는 빅토르의 조문은 미리 씌여진다는 특징 외에 그 조문이 통과되면 그 유명인사는 살인을 당하거나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단순히 과거의 깨끗치 못한 행동 때문이라고 하기엔 무언가 미심쩍다. 그러나 그로 인해 위험도 겪고 회의를 느끼면서도(빅토르는 글을 쓰고 싶었다.) 두둑한 보수를 받고 소냐와 나나를 만나게 되는 과정에서는 순간 평범한 행복을 꿈꿔보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이 기르는 펭귄 미샤와 소냐의 아버지 미샤를 만나면서 복선은 깔리기 시작한다. 그게 앞으로 다가올 위험일수도 있고 이름이 같은 펭귄과 사람의 운명일수도 있다. 저자는 괜히 이름을 같이 넣진 않았을 것이다. 사람 미샤가 살해된후 빅토르는 소냐를 떠안게 되고 유모 나나를 만나는 과정까지 순조롭지만 빅토르를 둘러싸고 있는 음모는 훨씬 컸다. 빅토르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속시원히 드러내놓진 않지만 소설속에 나오는 암시만으로도 커다란 음모의 심각성은 충분했다. 오히려 빅토르가 평상시에 워낙 차분했기에 아무렇지 않은 듯이 느껴졌을지는 모르지만 그래서 예견치 못한 반전 앞에서도 태연한 빅토르를 보며 ''펭귄의 우울'' 속편을 기대하기에 충분했다. 마지막에 드러나는 반전은 추리소설에 버금가는 맛이였고 열려 있는 결말은 그래서 더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소련의 붕괴이후 혼란을 담고 있는 90년대의 러시아는 빅토르르 통해 그렇게 비춰지고 있었다. 고독과 불안정 태연함. 또 우울증이 걸린 펭귄, 심장이 좋지 않은 펭귄의 등장이 그래서 낯설지가 않았을 것이다. 빅토르 또한 고독햇고 미래를 예견할 수 없는 불안 가운데서도 안정하고자 하는 노력 속에서도 불안을 뗄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이 어떻게 90년대만의 특징이라고만 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도 그런 고민과 불안으로 그득한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 오히려 미샤 같은 펭귄의 등장이 새로운 활력소가 될지도 모르겠다. 머나먼 남극에서 온 낯선 펭귄. 그에 비견되듯 엉뚱한 세계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그래서 빅토르의 주변을 돌아다니던 펭귄 미샤의 우울한 눈빛이 오히려 위로가 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독후감을 쓰는 가운데 고개를 돌리면 펭귄 미샤가 서 있을 것 같은 기분. 낯설지가 않다. 내게도 미샤가 필요한 것 같다. p.s: 오타 발견 p. 198 칠백오심 달러만큼 -> 칠백오십 달러만큼 으로 바꿔야 할듯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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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사람에 따라서 이 책은 맨 밑바닥에 심오한 철학을 깔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철학을 잘 알지 못하고, 포스트 소비에트든 페미니즘이든 뭐든 그런 철학을 기준으로 이 소설에 접근하지 않았기에 느낀 대로만 말할게요. 일단 소설로서 이 책은 아주 흥미진진했어요. 한 남자와 펭귄이 동거를 하고, 글을 쓰는 이 남자가 본인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휘말리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듯 손에 땀을 쥐고 읽을 수 있는 소설이에요. 그리고 책 전반에 흐르는 느와르적인 분위기. 분명 펭귄이 아니었다면, 이런 환상 소설과 같은 느낌을 주지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펭귄은 객관적인 상징물로 소설 속에 존재합니다. 펭귄은 주인공을 계속 지켜보지요. 하지만, 정말 펭귄이 존재하는 걸까요? 마지막엔 그런 생각도 들더군요. ‘펭귄이 주인공 그 자체일지도, 어쩌면 신적 존재일지도 모른다’라는. 그냥 제 맘대로 생각해 본 것이지만요. 소설은 소련방이 해체되고 자본주의가 유입되면서 급속히 변해가는 역사적 순간에 우리를 이끌고 갑니다. 추천의 글을 쓰신 양민종 교수는 이렇게 얘기해요. 이 이야기는 한 시대의 전형적인 자화상이라고 말이에요. 그 시대를 살았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읽으며 그 시대의 향기를 진하게 느낄 것이라고 얘기하지요. 분명 그 시대의 거대한 물결 속에 주인공은 휘말렸어요. 이 책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그 시대를 엿볼 수 있지요. 하지만 그 뿐일까요? 우리의 현재는 그 시대적 상황과는 분명히 다르지만, 우리 또한 같지 않을까요? 사회의 거대한 흐름 속에 몸을 맡긴 우리는 거대한 신적 존재의 냉철한 눈빛 아래, 멋도 모른 채 이리저리 발버둥치고, 혹은 발버둥치길 포기하고, 그렇게 그저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지. 우리의 삶의 계획은 진정한 삶의 목표일까요? 주인공과 우리는 다르지 않고, 주인공의 시대와 우리의 현재 또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해 봤어요.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주는 소설이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안드레이 쿠르코프의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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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전에 책을 다 읽었지만 아직도 뭐랄까 머리속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책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것 같다. 이 상황에서 리뷰를 쓴다는게 찜찜하긴 하지만 이런 기분을 가진 채 글을 쓴다.
책 제목부터 이미 줄거리를 암시하듯 독특했다. 여러번 중장편의 소설을 쓰려고 시도했지만 번번히 개인사정이나 주위 환경 때문에 실패한 빅토르는 작년 겨울에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동물원에서 무상으로 분양받은 펭귄 미샤와 기묘한 동거를 하고 있다. 그러던 중 <수도뉴스> 편집장 이고르에게 '십자가'라는 위험한 게임을 제안 받는다. 그 게임은 사망 가능성이 있어보이는 유명인들의 리스트 '십자가 카트 목록'을 편집장에게 받은뒤 미리 조문을 쓰는 것이었다. 그런데 빅토르가 미리 써 놓은 조문대로 사람들이 죽기 시작했다. 우연 치곤 너무나 기묘한 사건에 빅토르는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십자가' 게임에 관련된 이들은 죽음 또는 위험에 처하게 되고, 그 게임 내면에 숨겨진 음모를 외면하던 빅토르는 결국 진상을 알게된다. 마지막에 누군가가 쓴 빅토르 자신의 조문을 보게 됨으로써...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았고 앞으로 어떻게 죽을지 너무나 상세하게 적힌 조문을 보며 (더불어 '십자가'게임의 진상까지 소상히 적혀 있었다.)그는 삶의 의욕을 상실했다. 절대 시간이 지나지 않으면 직접 때가 다가와 직면하지 않으면 모를 미래와 결말까지 안다는건 어찌보면 허무하다. 한 치 앞도 모르는 미래에 대한 무지가 우리를 계속 살고 싶게 만들고 인생을 즐겁게 하는 것 같다. 그런 점을 보면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되면 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며, 그렇기에 적어도 빅토르가 죽기 직전 내지 사망 한 후 진실을 알려주겠다는 편집장의 말이 비로소 납득이 됬다.
남극에서 살아야 할 펭귄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러시아 땅에 있는 평범한 가정에 사는 이상함과 부자연스러움은 빅토르에게서도 느낄 수 있었다. 자유롭게 의사를 표명하고 행동 할 수 있었지만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던 빅토르는 그의 애완동물 미샤와 똑같다.
정치계와 그로 인해 이익을 얻을 집단에게 사주받았다고 할 수 있는 '십자가 게임'의 리스트는 비리와 탐욕으로 물든 이들이 채워져 있었다. 본의아니게 그는 '동지자들의 모임'이라는 필명으로 은폐된 정치가들과 군장의 비리를 폭로하고 응징을 내렸다. 그와 동시에 빅토르 역시 다른이에게 심판을 받았다. 모든 진실을 알게 된 대가는 그에게 치명적이었다. 미샤 대신 남극행 수송기를 탄 그를 보며 그곳에서 펭귄이 얻을 자유를 그도 얻지 않을까 생각한다. 현재까지의 삶지 자유롭지 않았다해도 그는 조문에 나온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다. 적어도 생의 마지막을 어떤식으로 장식할지 결정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과거 자신이 했고 지금은 타인이 계속 바통을 이어 받은 '십자가 게임'에 통쾌하게 복수했다. 결국 남을 심판하고 나중에 본인까지 심판 받았던 그 게임앞에서 그는 완전히 억압된 삶을 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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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지극정성으로 보살핀 유일한 존재는 바로 펭귄이었다. 빅토르 졸로 따례프는 자신의 펭귄을 너무도 애지중지했기에 심각한 병에 걸리자 급기야 어린아이의 심장을 이식하는 수술까지 하게 된다.
윤리와 도덕문제는 완전히 덮어두고 교통사고로 치명상을 입은 아이의 부모에게 말 그대로 심장을 산 것이다. 펭귄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범죄집단의 수장과 맺은 관계 또한 수수께끼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자신의 손을 거쳐 죽게 된 사람들의 장례식에 참여 함으로서 자기 작업의 끝을 보았다는 것, 즉 보고서를 통해 미래의 고인과 인연을 맺고 마지막으로 고인의 친구들과 친척들 사이에 섞여 추도식까지 참석함으로써 그 대미를 장식했다는 것은 심히 가공할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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