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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책 모으기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다. 대학교를 졸업할 때 까지는 무협소설과 추리소설, 그리고 달달한 연애소설 외에는 거의 책에 손을 대지 않았으니까. 전공 분야인 도시계획 쪽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도시계획연구실을 들어가고도 3년이 지난 후였다. '박사과정'이라는 뭔가 있어보이는 수식어가 붙으면서, 그에 어울리지 않는 너무도 얄팍한 지식에 부끄러움을 느꼈고 전공 책을 구입해 밑줄 치며 읽기 시작했다. 더 이상 소설을 읽지 않게 된 건 아마 그 무렵부터였던 것 같다.
지금도 갖고 있는 책이 많지는 않다. 그래도 정기적으로 서점에 들러 신간서적을 둘러보고 맘에 드는 책을 구입하는 일은 꾸준히 하고 있다. 뭐든 시작하면 년 단위로 해 본 적이 없는 녀석인데도 말이다. 앞으로도 서점 투어를 계속한다면 중년이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은 시기에는 책읽기를 좋아하던 어느 선배처럼 벽 한 면을 전공책으로 가득 채울 수 있겠지.
책을 사다보면, 빈약한 내용에 비해 터무니 없이 책값이 비싸기도 하고(이런 책일수록 겉표지는 화려하고 두껍다), 럭키~라고 흥겹게 소리칠 정도로 저렴한 값에 알찬 내용을 감상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오늘 소개할 책, "프랑스 주거복지정책 100년의 교훈"은 내겐 후자에 해당하는 책이었다.
책값부터 알려두자. 단돈 5000원. 책 한 권이 영화한편 보는 비용보다 싸다. SERI 연구에세이집 형태의 얇은 책자로 발간되어 150페이지에 못미치기는 하지만, 국내에 프랑스 공공임대주택 정책 체계를 상세하게 소개한 책이 (적어도 내가 아는 한에서는) 없다는 점에서 책의 가치는 5000원 이상이라 할 수 있다. 서점에서 책을 발견하고 책값을 확인하는 순간, 럭키~라고 속으로 외쳤으니까.
책의 저자는 건교부 공무원. 국비로 프랑스에서 6년간 유학하면서 프랑스 공공임대주택 체계를 연구한 모양이다. 프랑스 주거복지 정책의 발전과정, 프랑스 공공임대주택 현황, 공공임대주택 공급 체계 등을 소개한 본문을 보면, 확실히 한두 달 동안 뚝딱뚝딱 써 내려간 허접한 글은 아닌 듯하다. 꽤 많은 자료를 조사하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는 느낌이니까.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독자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프랑스의 공공임대주택 정책 중 몇 가지 인상적인 내용만 기술하겠다.
1. "공공임대주택정책의 무게가 임대주택 건설 지원에서 임대료 보조제도로 전환되면서 당초 예상보다 수혜자가 늘어나 정부의 재정 부담이 증가했다." 현재 한국에서도 임대료 보조제도의 도입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이 제도를 도입했을 때 정부의 재정부담이 어느 정도인지(감당할 수 있는 수준인지), 재정부담이 과다할 경우 이를 어떻게 여러 관련기관에 분산시킬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나오지 않고 있다. 프랑스 사례에 비추어볼 때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2. "공공임대주택의 담당부서가 건교부에서 고용 및 사회연대 부처로 바뀌었다." 이는 공공임대주택을 점차 '주택정책'이 아닌 '사회복지정책'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다른 말로는, 임대주택정책의 목표가 저소득층을 저렴한 주택에 입주시키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입주한 계층이 경제적/사회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돌보는 데 까지 확대되었다는 뜻이다.
3. 중앙정부와 주택공사 위주로 공공임대주택정책을 전개하고 있는 한국과 달리 프랑스에서는 지방정부의 역할이 상당히 강조되고 있다. 우선 주택건설사업별로 공공임대주택 건설물량(전체 건설주택의 20%)을 할당하고 있는 한국과 달리, 프랑스에서는 각 기초지자체별로 전체 주택재고의 20%를 공공임대주택으로 확보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기초자치단체에서는 5년 단위의 '지역주거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저렴한 주택재고를 확보하고 사회적 혼합(social mix)을 증진시키기 위한 전략을 수립한다. 또한 임대주택 입주자를 선정할 때도, 기초자치단체가 전체 입주자의 20%를 결정하도록 하고 있다.
중앙정부가 국민임대주택 단지 건설계획을 발표할 때마다 단지가 소속된 기초단체가 강하게 반발하는 한국과 비교해보면, 프랑스에서는 공공임대주택 정책에서 기초자치단의 역할이 어느 정도 자리잡은 듯한 느낌이다. 기초자치단체가 도시계획 관련 권한을 상당 부분 보유하고 있고, 주택재고의 20%를 임대주택으로 확보해야 하는 등, 법적 의무가 기초자치단체에 부여되고 있기 때문인 듯 하다. 따라서 한국도 중앙정부/공사 위주의 임대주택 프로그램을 지방정부로 이관하려면 (기초단체로의) 도시계획 권한 이양, 임대주택 재고 확보 의무 부과, 재정지원 체계 구축 등이 병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책의 내용은 이 외에도 다양하지만, 아직 머리속에서는 조각난 '정보' 형태로만 남아 있어서 '의미'가 되지는 못하고 있다. 뭐...수용력의 한계겠지. 한 가지 책의 내용에서 아쉬운 부분은 책 말미에 프랑스 공공임대주택체계의 시사점, 즉 프랑스의 선진 제도를 한국에 어떻게 써먹을 것이냐를 다루는 부분에서 저자가 너무 원론적인 이야기들만 나열하고 말았다는 점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환상의 빈티지 샤토 몽페라를 마신 감상이 "맛있네~"인 정도랄까...주택정책을 총괄하는 정부 부서에서 근무하는만큼 논점을 좀 더 핀포인트로 집어내고 연구할 내용이나 한국 제도의 개선점을 콕 찝어내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머...5000원 짜리 책에 바라는 점이 너무 많은 것 같기는 하다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