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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책을 고를 때 계절의 영향을 받는 편이다. 겨울에는 따뜻한 방에 누워 태백산맥같은 장편소설이 제맛이 나고 봄에는 가네시로 가즈키처럼 통통 튀는 책에 손이 가고 여름에는 아무래도 간담을 서늘하게 하거나 손끝에 땀을 나게 하는 추리소설을 좋아한다. 가을에는 눈물 한 방울 흘릴만한 연애소설을 찾게 된다. 누군가의 입소문으로 듣는 책도 좋고 좋아하는 작가의 책도 좋지만 제목이나 표지가 맘에 들어 손에 들었는데 그것이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면 고민할 일도 없이 그 책을 고르게 된다. 이 가을과 잘 어울리는 책을 만났다. 그것도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다. 거기에 연애소설이다. 연애소설이라는 통속적인 말로 이 책을 설명하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 이상의 것이 이 책에 담겨있다.
오사키 요시오를 만난지는 얼마되지 않았다. 석달남짓이란 시간이 이 작가를 알게 된 시간이다. 그의 책과 인사를 한 건 이 책을 포함하여 세번이다. <파일럿 피쉬>와 <아디안텀 블루>가 이 책보다 먼저 인사를 건넨 책이다. 따스한 인사였다. 그의 책은 단 세권을 만났지만 첫인사를 나누었던 <파일럿 피쉬>는 손때로 흔적이 남을만큼 여러번 읽어보았다. 첫인상을 기억에서 지울 수 없어 잠이 들 때면, 차를 마실 때면 그의 책이 떠올라 가방 한 편에 그의 책을 들고 다니기도 했다. 여름 내내 내 가방이 제 집인양 살았던 파일럿 피쉬는 이제 <9월의 4분의 1>이란 책에게 자리를 양보해주어야 할 것 같다.
<9월의 4분의 1>은 요시오의 첫 단편집이라고 한다. 단편집인지도 모르고 책을 읽던 나는 책의 첫 이야기인 ''보상받지 못한 엘리시오를 위해 ''가 끝나고 다른 제목의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주인공을 확인하며 그제서야 책이 단편집인 줄 알았다. 첫 이야기는 뒤에 이야기가 더 많이 펼쳐지리란 기대에 생각을 접고 책장을 넘겼는데 그 이야기가 끝이었다는 생각에 책을 덮고 커피 한잔을 마셔야했다. 책의 내용들이, 주인공이 타고는 했던 열차를, 체스판을, 미술관을 머리로 쫓았다. 차가운 가을 바람을 커피로 녹이며 요시오의 책은 내 손에 있는 커피의 온도만큼 따뜻한 책이라는 생각을 한다.
책은 네가지의 단편으로 되어있다. 네 가지 이야기의 공통점은 오래전에 읽었던 책에 꽂아두었던 마른 낙엽을 만난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그 낙엽에는 분명 그 낙엽을 줍고 책에 놓아두었던 그 해의 가을이 들어있다. 낙엽에 스며든 그 시간들은 잊고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우연히 손을 댄 책에서 발견했을 때 바로 어제였던 것처럼 생생하게 그 시간을 기억나게 한다. 그리고 그 시절의 상처를 바라보게 된다. 그 시절에는 어찌할 수 없을 만큼 아프고 힘들어서 덮어버린 기억이 시간이 흐른 후에 매마른 낙엽처럼 아픔은 얇아지고 기억의 줄기들은 더욱 선명해진다. 마른 잎의 줄기들이 더욱 선명해지듯.
선명해진 기억은 그 시절의 나를 바라보게 하고, 내가 놓친 것 혹은 내가 외면했던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준다. 그 조각을 맞추는 것은 나의 몫이다. 요시오작가는 독자에게 매번 이렇게 퍼즐 한판을 준다. 나를 이루는 기억들을 맞추는 퍼즐을 선물한다. 기억의 조각들을 불러내는 것은 요시오의 몫이었지만 퍼즐을 맞추는 것은 나의 몫이다. 그 퍼즐을 맞춤으로써 나는 온전한 기억을 갖게 된다. 하지만 퍼즐을 맞추기 위해서는 아픔이나 상실감등을 다시금 떠올려야하는 용기를 내야한다. 아직은 상처를 들쳐낼,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린 상실감을 떠올릴 용기가 없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책을 읽다보면 나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며 위로해주는 손길이 있다. 이것이 오사키 요시오란 작가의 마법이 아닐까?! 그 손길만 있으면 아프더라도, 힘들더라도 내 기억의 퍼즐을 완성할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든다.
네가지 이야기 중 가장 많은 시간을 하늘을 올려다보게 만든 것은 세번째 이야기 <슬퍼서 날개도 없어서>이다. 주인공이 사랑했던 마미의 노래가 내 귀에도 울리는 것 같았다. 읽는내내, 읽고 난 후 지미 페이지의 노래를 들어야했다. 세번째 이야기를 읽을 때 나도 모르게 마미처럼 "우--왕"하고 소리를 질러보았다. 과거에 죽어간 공룡을 위해, 저항없이 사라지고 만 것들을 위해, 내 안에서 사라져 갔을지도 모를 기억들을 위해, 열정을 위해 소리를 질렀다. 울음만이 사람을 치료하는게 아니라는 것, 소리내어 말하는 것도, 노래를 부르는 것도 치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마미를 통해배웠다.
체스와 장기 그리고 노래와 글쓰기 이 네가지는 각각의 단편들에서 주인공들의 삶에 대한 애착으로 나타난다. 이것으로 인해 삶의 의미를 갖기도 하지만 이것으로 인해 고통을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것을 포기하기 보다는 그 속에서 의미를 찾았다. 그 속에서 삶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위에서 사랑을 한다. 물러나지 않고 당당히 맞서는 것. 스스로는 도망친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쫓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꿈을 향해, 사랑을 향해서 그들은 달리고 있는 것이다. 제대로 달리기 위해서는 앞만 보고 달려서는 안된다. 과거를 돌아보며 달렸던 기억을 떠올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타인은 어떻게 달리고 있는지 살펴보기도 해야하고, 앞으로 달릴 길을 잊지 말아야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혼자 달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했던, 사랑받았던 이들의 추억과 함께 달리고 있음을 잊으면 안된다.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더라도 그들은 어디선가 분명히 내게 영향을 주고 있음을 잊으면 안된다. [인상깊은구절] 가끔 책의 구절만 보고 책을 구입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아마 오사키 요시오의 책도 그럴 경우가 많을거라 생각한다. 내가 오사키 요시오의 문체에 반한 것이 이유일지도 모르지만 그의 책에서 좋은 구절을 옮겨적을 때면 노트는 몇 페이가 넘어간다. 아름답다는 생각이 드는 문장들을 만날 때면 가슴이 울린다. 의미가 없는 글자들이 그의 손에 들어가면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아름다운 보석이 된다. 책 속에 들어있는 네가지 이야기들은 다음에 읽을 독자를 위해 좋은 구절들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마쳐야겠다. -보상받지 못한 엘리시오를 위해 <나는 지금까지보다도 훨씬 선명하게 네가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고 있을지 느낄 수 있다. 온몸으로 너의 존재를 느끼고 있어. 이 세상 끝 어딘가의 미술관에서 말 못하는 청동상 옆 잔디에 누워, 너는 하늘의 별을 향해서 우주의 확장이 멈추길 기도하고, 그리고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테지? 퀸이 오로지 킹을 지키듯이, 어쩌면 나는 지금의 너를 지킬 수 있는 단 하나의 말일지도 몰라. 그리고 퀸이 모든 것을 걸고 그렇게 하듯 나도 전력을 다해 너를 찾아내서 구해내겠다. 그것이 만약 의미업는 그저 하나의 구덩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지금 내가 파야만하는 구덩이다.> p.59~60 -켄싱턴에 바치는 꽃다발 <우리들은 분명 그저 지식으로써 명왕성의 존재를 알고 있는 거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본 적도 없으며, 또 앞으로도 눈으로 직접 확인할 날은 오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걸 ''존재''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러나''라고 나는 다시 생각한다. 나 자신에게 있어서 분명히 존재하지 않았을 요시다 소하치는 ''그러나''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었고, 죽은 지금도 내 마음속에 지금까지 없었던 작지만 밝은 빛을 뿌려주고 있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존재의 불확실함을 상징하고 있는 듯한 명왕성과 마찬가지로 보지도 만나지도 못했지만, 소하치는 나의 요 10년 간의 존재이유를 설명해주고, 크나큰 용기마저 주고 있다. 내 마음의 어딘가를 선회하는 작고 과묵한 별이 되어서> p.111-112 -슬퍼서 날개도 없어서 <"우--왕--." (중략) 그것은 내가 들어왔던 어떤 노래보다도 슬픈 외침이었다. 마미는 사랑하는 것을 지키지도 못하고 그저 사라져가야만 했던 공룡들의 우울함을 표현하려고 했던 것일까? 급격하게 기온이 떨어져 몸이 굳어가는 괴로움을 견디며, 이윽고 대지 위에 쓰러져 발버둥치는 고통, 그리고 죽음 직전에 토하는 분노와 슬픔의 외침.(중략) 나는 차가운 방바닥 위에 지친 몸을 누이고, 선잠 속에서 마미의 외침을 떠올리며 반복해서, 반복해서 이렇게 생각했다. 그것이야말로 로큰롤이다, 라고.> p.138~139 -9월의 4분의 1 <어떤 의미에서는, 그 순간 내가 느낀 것을 실존주의적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에는 목적도, 용도도, 물론 설계도도 없었다. 그저 정신을 차리자 사랑의 감정만이 턱하니 존재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지우기 위해 만들어진 지우개가 아닌 것처럼. 무언가 목적을 가진 사랑이 아니었다. 단지 막연하면서도 돌연한, 그러나 확실히 실존하고 있는 것이다.> p.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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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있으면," 하고 마미가 말했다. 공룡의 울음소리가 들려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환경의 변화에 괴로워하며, 배를 주린 채 갓 태어난 새끼에게 줄 먹이도 없이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는 티라노사우루스라든지. 아무튼 그런 이름을 가진 공룡들의.
모든 것이 우울하고, 모든 것이 사라지려 하고 있다. 그저 목적도 없이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고 있는 공룡들의 단말마가, 어디에도 닿지 않고 누구를 위해서도 아닌 그저 괴로움에서 나오는 찢어지는 외침이, 그런 소리가 들려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마미는 말했다.
"결국은 한 마리씩 쓰러져서 모두 사라져 버려. 아무리 소리쳐도, 그것을 멈출 수는 없는데도." "그 소리가 들려?" "그런 느낌이 들어."
- 본문 중에서 -
독서법 얘기 좀 하자. 나는 좀 유별난 독서법을 갖고 있어서 한권의 책을 갖게 되면 아마 세번쯤은 읽게 되는 것 같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책을 읽을 때 정독하는 버릇을 들이지 못해서이다.
그래도 나는 나의 독서법이 싫지 않은 것이, 한번 읽었던 책을 두번, 세번 다시 볼 때 처음 읽었을 때와 또 다른 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처음 책을 쥐었을 때 꼼꼼하게, 한줄, 한단어도 놓치지 않고 읽어버린다면 두번째, 세번째의 맛은 반감 되어버리지 않을까? 이건 도자기를 구울 때도, 아니 핫도그를 튀길 때 조차도 초벌구이, 애벌구이, 삼벌구이를 하는 이유와 비슷하다고.... 한번 우겨본다. 좀 멋스럽게 꾸며 말하자면, 한번 읽고 나서 책에서 느꼈던 감정들이 내 안으로 녹아나는 시간을 주는 것이라고나 할까?
심하게 재미 없는 책이 아닌 다음에야 두번, 혹은 세번 정도 읽는 것 같다. 하지만 진짜 마음에 드는 책은 네번, 다섯번, 열번도 다시 꺼내 읽는다. 그리고 열번, 스무번을 읽어도 언제나 처음처럼 내 가슴에 저며든다.
이젠 내 사랑 얘기 좀 하자 내가 좋아한, 아니 좋아하는, 아니 사랑하는 여인이 있다. 그녀는 일본인이다. 이름은 사와키 마미. 나이는 스물 아홉. 예전에 스물 아홉이나 여전히 스물 아홉이다. 그녀의 나이는 스물 아홉에서 멈췄다. 위장에 갖고 있던 병이 일으킨 것으로 보이는 폐수종이 사인이었다. 그녀는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 레드 제플린의 노래를. 시한부로 언도 받았던 스물 다섯살 까지 그녀는 노래와 살았다. 그리고 그녀의 말로 계획에 없었던 '연장전' 같은 스물아홉까지는 술과 두려움으로 지냈다. 그리고 떠나갔다.
어제 퇴근길에서, 그리고 오늘 출근하며 그녀를 만났다. 이번에 그녀를 만난게 아마도.... 여섯? 혹은 일곱번째 정도 되는듯 하다.
다시 책 얘기 좀 하자. <9월과 4분의 1> 요오사키 요시오 지음. 황매출판사. 그렇다. 마미는 이 책에 담긴 4개의 단편 중에서 세번째 - 슬퍼서, 날개가 없어서 - 에 나오는 아이다. 이 책 안에 담겨 있는 4개의 이야기 모두 폐부가 아릴만큼 좋지만, 나는 그 중에도 세번째 이야기가 가장 좋다. 사와키 마미가 좋다.
출근길 전철 안에서 꺼내 읽은 이야기는, 금정에서 차를 갈아 타고, 구로역 쯤 도착했을 때 마지막 줄을 읽어내렸다.
내 안에 눈물이 돌았다. 눈물은 내 몇십센티 두께의 흉곽 안, 그러나 수심 일만오천미터 이상의 깊은 곳에서 밀려올라왔다. 그리고 눈자위를 맴돈다. 흐르거나 넘치지 않는다. 눈동자를 살짝 적신다. 왜냐하면 내 눈물은 기쁨의 눈물이거나 슬픔의 눈물이 아니다. 감동의 눈물은 더더욱 아니다. 그냥 눈물이다. 굳이 이름 짓자면 '감성'이라고 붙이면 엇비슷하려나? 그렇다. 이 책은, 이 책 안의 이야기들은, 사와키 마미는 그렇다. 내 안전하게 여며둔 감성에, 높지 않은 헤르쯔의 신호를 발신하여 딱 시리고 아릴 만큼의 진폭으로 가슴 떨게 만들어 버린다.
아마도 그건? 마흔을 넘은, 나이 때문일까? 나와 비슷한 나이.
마흔 셋이라는 나이가 어떤 것인지 나는 알 수 없다. 그저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20대, 30대를 지나고, 그곳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선명하게 보이는 과거가 존재 한다는 것이다. 30대에는 안개가 낀 듯이 흐리던, 어쩌면 의식적으로 흐리게 했던 과거의 일들이 더러워진 유리를 닦은 것처럼 선명하게 보일 때가 있다. 그리고 어째서일까? 요즘에는 뿌연 유리를 닦아내면 거기엔 언제나 네가 홀로 턱하 니 서 있다 --본문 중에서
다 시 사랑 얘기 좀 더 하자.아니 이건 책 얘기, 아니아니 책에 담긴 사랑 얘기다.
이 책에 나오는 사랑은 딱 마흔 즈음의 사랑이다. 하지만 마흔 즈음에 겪게 되는 사랑이 아니다. 그것보다 폭 넓은 의미의 마흔 즈음의 사랑이다. 마흔의 눈으로 돌아보는, 혹은 마흔의 눈에 다시 보이는, 마흔 즈음의 눈이 되어서야 읽혀지는 사랑. 그런거다.
나는 사랑했고, 사랑한다. 사와키 마미 말고. 책 밖의 사람. 책 밖의 여인. 돌이켜 보면, 그 때는 몰랐던 것들이 내 안에, 그리고 그녀 안에, 그녀와 나의 사이에 존재했다. 그땐 보지도, 느끼지도 못했던 것들이 이젠 다 사라져버렸을지라도, 그때 그 시간, 그 공간에 분명히 존재했음을 느낀다.
사랑은 내가 아는 것, 느끼는 것 보다 훨씬 크고 깊고 넓고. 사랑은 그런 것이다.
잃어버린 사랑은 남겨진 건물보다도 -- 본문 중에서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자. <9월의 4분의1> 내가 아는 한, 이 책은 가장 멋진 '연애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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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키 요시오 작가의 책을 읽은 것은 이 책이 처음이다.
하지만 첫 문장을 읽어 가기 시작했을때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문장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 챘다. 서정적인 묘사와 섬세한 문체는 읽는 이로 하여금 금방 책속에 빠져 들게 만든다.그 탁월한 묘사는1인칭시점이 주는 장점을 극대화시켜 주인공의 마음과 사랑에 대한 감정의 묘사가 매우 탁월하게 전개 된다.
젊었었던 우리들에게 그것은 살작 긁힌 상처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생각한다. 팽팽하고 탈력잇는 피부가 작은 상처쯤은 어느덧 흔적없이 지워 버리듯이,내가 한 말은 각자의 몸 속 어딘가에 파묻혔고, 그리고 사라졌다.
이 책은 4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있다. 그러니까 단편집인 샘이다.4가지의 이야기는 각각 사랑이 밑바탕이 되어 이루어져있다. 세번째 이야기인 '켄싱턴에 바치는 꽃다발'은 다른 이야기들과 약간 다른 전개를 보이지만 하지만 그 바탕 또한 사랑의 이야기 인 것이다.
이렇듯 짧은 4편의 이야기로 이 책이 구성되어있지만 이런 책이 주는 매력은 아무래도 한편 한편 끝났을때 책을 덮고 생각에 잠길 수있는 것이다.작가의 문체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의 전달에 있어서 매우 좋은 기분이 들게 만들어 그 뒷이야기를 상상하게 한다던지 아니면 책 속의 장면을다시 연상해 보게 만든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 잠들면 첫사랑을 다시 꿈 속에서 만날지도 모를일이다.아니 적어도 아침에 좋은 기분으로 일어 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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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4분의 1 / 오오사키 요시오 / 황매]
일찍 데뷔한, 인기있는 작가들의 글쓰기를 보면, 처음엔 참신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참신성은 급속도로 떨어지고, 소재와 내용도 비슷비슷해진다. 심하게 말해서 작품들이 거기서 거기 같을 때가 있다. 금방 진을 빼버려서 그런가... 금방 바닥을 들어내보이는 것 같아서 급부상하는 젊은 신예작가들을 보면 한편으론 걱정이 앞선다. 그에 비해서 늦게 데뷔를 하는 작가는 젊은 작가와 비교해서 소재의 깊이도 있고, 적절한 느림의 맛, 차분하고 잘 숙성된 맛이 있다.
불혹을 넘긴 나이에 데뷔한 작가 오오사키 요시오의 작품은 알맞은 속도로 진행이 되는 참 편안한 소설이다. 평범할 만한 이야기를 마음 속에 오래 묵혀두었다가 조심조심 꺼내어 놓은 듯하다. 잘 숙성된 이야기는 화려하고 자극적인 이야기보다 사람들의 마음을 촉촉하게 적시며 감동시킨다.
모처럼 격조있는 고품격 소설을 접하게 되었다. [9월의 4분의 1]은 오오사키 요시오의 첫 소설집이다. 네 편의 단편이 실려있는데, [9월의 4분의 1]은 그 중 한 작품이다. 네 편의 작품 속에서 말하는 이(주인공)은 모두 마흔을 넘긴 중년의 남성들이다. 주인공의 모습(성격, 취향, 직업, 지역 등등)은 네 편에 걸쳐 모두 일정한 범위의 공통분모(일관성)를 지니고 있는데 작가의 실제 모습이 많이 엿보인다. 그래서 이 소설집은 연작소설의 성격도 있고, 작가의 수필을 읽는 것 같기도 하다.
각각의 단편은 중년의 주인공이 청춘의 시절에 만났던 여인을 추억하는 이야기다. 지나가버린 젊은 날들,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는 여인과의 추억, 한번쯤 돌아가고 싶지만 되돌아 갈 수 없는 과거의 이야기들이어서 책을 읽는 내내 애잔함과 아쉬움이 짙게 묻어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소설이 이렇게 품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일반 통속소설의 가벼움과 문학소설의 지루함을 날려버릴 만큼 아름답고 격조가 있다. 잘 짜여진 구성도 한몫을 한다. 특히 열차의 스위치백, 동물원의 기린 이야기, 9월의 4분의 1이 뜻하는 것 등은 작품을 읽으면서 마음 속에 담아두고 싶은 부분이다.
사랑에 대해서 여전히 설레고 풋풋함을 담고 있으며, 애잔하고 안타까움에 가슴 먹먹함도 느낄 수 있다. 이 소설집의 마지막 부분까지 읽으면 [9월의 4분의 1]이 뜻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을 아는 순간, 읽는 독자는 또 한번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낄 것이다.
사랑에 대한 기억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다. 지나간 사랑을 추억하는 것으로도 옛사랑은 언제나 아름답고 오래오래 마음 속에 남아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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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사키 요시오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한다.
그의 작품으로 "9월의 4분의 1"을 처음 만났다.
내가 알고 있는 그에 대한 정보라고는 그의 장편 소설 <파일럿 피쉬>와
다년간 <장기세계>의 편집장을 한 출판인 출신의 소설가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다.
<파일럿 피쉬>는 가끔 들르는 "황매출판사"의 블로그를 통해 반짝거리는 비늘을 가진
물고기가 그려진 책 표지를 보고 ''참 이쁘게 생긴 물고기구나!''라는 생각에 머릿속에 꽤 오래 남아있다. 물론 그 책을 읽어보지는 못했다.
그의 소설 9월의 4분의 1은 2002년 한해 동안 문예지에 실린 그의 단편을 엮은 책이다.
이 책은 총 네편의 단편 <보상받지 못한 엘리시오를 위해><켄싱턴에 바치는 꽃다발>, <슬퍼서 날개도 없어서> <9월의 4분의 1>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의 글을 Bittersweet Lovestory라고 소개한 글을 본 적이 있다.
달콤쌉싸름한 사랑이야기. 라고 표현해야 할까?
그의 글을 읽으면 사랑이 그리 달콤하지만은 않은 것이라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그 사랑이 쓰디쓴 것만도 아니다.
사랑은 그런것 같다.
불투명한 주인공들의 미래만큼이나 사랑또한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뿌연 안개처럼
알 수 없는 것은 아닐까?
9월의 4분의1 의 나왔던 주인공들과 똑같은 나이의 27살.
그리고 현재 9월의 마지막주. 왠지 나와 아주 딱 떨어지는 소설이었다.
물론 실연당한 현재 상태까지도...
''잃어버린 사랑은, 철거된 건물처럼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저 잔상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잔상이기 때문에 보다 더 선명하게 마음에 계속 투사되는 면도 있다.
남겨진 건물보다도 철거된 건물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되듯이...''
사랑의 기억이라는 것은
쓰디쓴 상처만을 주는 것이 아니다.
달콤한 때로는, 매케한 연기처럼 아른거리는 추억속에 잠기게 한다.
또한 매케한 연기를 들어마셨을때와 마찬가지로 눈물을 동반하지만...
사랑이란?
이러한 질문에 아직도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하는 청춘이지만.
9월의 4분의 1을 남긴 시점에서 읽은 이 책을 통해 많은 여운을 남기게된다. [인상깊은구절] 잃어버린 사랑은, 철거된 건물처럼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저 잔상이 남아 있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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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일본소설, 단편소설, 가을에 어울리는 책
-예상독자: 연애 소설을 좋아하는 이, 삶과 죽음, 존재와 실존에 대해 생각하고자 하는 이
1. 들어가며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의 바이오 리듬은 다음과 같았다. -94의 신체지수와 +78의 감성지수 그리고 -100의 지성. 바이오 리듬을 100% 신뢰하지는 않지만, 내 경우에 있어서는 꽤나 잘 들어맞기 때문에 뭔가 시작하려는 시점에서 한번쯤 확인을 해보곤 한다. 그리고 내게 있어서 오사키 요시오의 첫작품인 [9월의 4분의 1]은 감성이 이렇게 고조로 치닿고 있을 때 다가왔다. 더욱이나 상당히 감성적인 그의 소설이, 가을의 시작인 9월에...
2. ‘오사키 요시오와 친구가 되어 전화를 해서 물어보고 싶다. ’라고 생각하다.
사실 단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 세계에 나를 들여 놓고 빠져들어 가는 순간에 어느덧 그 세계가 닫혀버리는 느낌이랄까. 좀 더 푹 빠져서 읽고 싶은데 단편들은 내 바램을 비웃듯이 그 세계에 나만 남겨두고 저 멀리 달아나 버리니 얌체같단 느낌이 들어버린다. 그래서 조금은 거리감을 갖고 이번엔 배반당하지 않으리라는 마음의 방어벽을 살며시 쳐놓고 첫작품인 [보상받지 못한 엘리시오를 위해]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난 이 가을과 감성 +78인 바이오리듬의 작용으로, 혹은 나와 같은 주파수를 가진 사람을 발견했다는 사실에 흥분해서 그의 작품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호밀밭의 파수꾼]에 보면 콜필드가 이런 말을 한다. ‘정말로 나를 황홀하게 만드는 책은 그 책을 다 읽었을 때 작가와 친한 친구가 되어 언제라도 전화를 걸어, 자기가 받은 느낌을 이야기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라고. 이 세상엔 작가와 친구가 되고 싶은 책과 그냥 읽고 마는 두 종류의 책이 있다. 내게 있어, [보상받지 못한 엘리시오를 위해]는 전자와 같은 기분을 생기게 했다. 그에게 전화를 해서 물어보고 싶다. 정말 엘리시오 전설이 있는 거냐고, 그런 조각상이 있는 거냐고, 있다면 현재는 어디서 만날 수 있는 거냐고?
그의 작품에서는 늘 음악이 흐른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이야기의 테두리 안에는 존재와 삶의 의미와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장기세계’ 편집자로서의 그의 삶, 건축, 미술, 방황, 여행, 우주와 하늘과 별과 같은 소재와 융합되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냥 표면만 읽으면 특이하고 슬픈 사랑 얘기지만, 이 작가는 두 겹으로 소설을 싸 놓았다. 양파 껍질처럼 벗기면 그 속에 진짜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숨겨 놓은 느낌. 그리고 그 속에 느낄 수 있는 사람만 느껴라고 희미하게 미소짓고 있는 얼굴을 내비치는 것이다. 그가 글을 쓰고 있는 이유와 지금까지 살아온 이유를 얘기하고 읽는 이에게 묻고 있다. ‘그러니까 너는 왜 살아? 네 존재 목적은 뭐야? 아니, 인간은 태어나기 전에 존재의 의미가 정해지는 게 아니라 살아가면서 생기는 게 아닐까, 넌 어떻게 생각해? 실존의 끝은 뭐야?’라고 묻고 있다. ‘나는 이렇게 소설로서 답하고 묻고 있어. 그러니까 너도 생각해서 내게 답해줘.’라고 묻고 있기에 그에게 전화를 하고 싶은 것이다. ‘난 당신이 보낸 주파수를 이해했어요.’라고 질문들로 이루어진 소설을 바라보며 대꾸해 주고 싶어진다.
모든 이들이 사랑을 하며-그것이 취미이건, 사물이건, 일이던, 사람이던- 삶의 의미를 묻게 되고 답을 알아가고, 그 답이 같은 사람이 서로 사랑에 빠져가는 게 아닐까? 나와 같은 주파수를 가진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 나의 ‘9월의 4분의 1’역에서 기다려줄 사람은 누구일까? 기능도 설계도도 정해지지 않은 내 실존을 밝혀주고 내게 노란 빛깔의 깃털을 줄 사람은?
3. 나가며
이 단편집은 사람을 움직이게 만든다. 이 책을 읽고나면 반드시 다음 것들 중에 하나 이상을 하게 될 것이다. 뭔가 더 알려고 책이나 인터넷을 뒤적이거나, 여행을 가거나, 미술관에 가거나, 사랑이 하고 싶다거나, 글을 쓰고 싶다거나... 목록은 읽는 사람마다 다르게 작성될 것이다. 왜냐면, 이 책은 ‘괴물’같으니까, 사람마다 다르게 읽히는 카멜레온으로 변신하니까.
written at 2006/09/23-09/24 [인상깊은구절] p.163 노래는 결국 그것을 듣는 사람의 마음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노래는 무언가의 출발점에 지나지 않고, 결국 그것을 완성시키는 것은 그 노래를 듣는 사람의 감수성이 아닐까? 그것이 완전한 노래이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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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4분의 1. 숫자로 가득한 이 책은, 전에 <아디안텀 블루>라는 꽤 아름다운 감성의 연애소설의 작가. ‘오사키 요시오’의 다른 작품이다. 아디안텀 블루는 책 한권에 하나의 이야기가 담긴 장편소설이었다면. 이 9월의 4분의 1에는 단편소설 4개가 실린 소설집이라는 것이 차이점이다.
그리고 복잡하고 끝이 없는 이 모든 것을 포함한 작업이 ‘생각한다’는 것이다. - 20p
첫 단편 ‘보상받지 못한 엘리시오를 위해’는 독특한 삼각관계가 특징인 단편이다. 주인공과, 그의 친구 다케이, 그리고 다케이의 여자 친구이자 묘한 삼각관계의 주범인 여성 요리코. 주인공은 체스에 빠져서 산다. 그게 무의미하고 인생에 있어 그가 체스에 허비한 시간을 보상받지 못하는 것을 알지만, 그는 무엇인가에 홀린 듯 체스를 연구하고 집착한다. 스포일러를 좋아하지 않아서 결말을 말하진 않겠지만, 뒷맛이 썩 씁쓸한 단편이었다고 기억한다. 모든 삼각관계가 그렇듯. 인간의 마음들이 만나서 꼬이게 되면 좋은 꼴을 보는 경우는 드물다.
“사람이나 거리는 세월에 따라 변해간다.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멈출 수도 없이 변해간다. 그러나 노래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는다.” - 122p
세 번째 단편, ‘슬퍼서 날개도 없어서’는 밴드 이야기가 특징인 단편이다. 기타를 사랑하는 청년 마쓰자키와 음악에 재능이 있는 소녀 마미가, 우연히 알게 되어 감정을 나누고, 음악에 대해 토론하며, 같이 노래를 부르는 그런 얘기다. 상당히 소설스러워서 좋았다고 해야 할까. 현실에선 일어나기 힘든 일이다 보니 더욱 즐겁게 읽을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최근엔 단순이 웃고 즐길 수 있는 소설보단, 왠지 현실이 애매하게 반영되어 쌉쌀한 기분이 책을 다 읽은 후에도 깊게 남아있는 작품이 많은데, 이렇게 즐길 수 있는 소설도 가끔은 좋지 않나 싶다.
마미는 내면에서 넘쳐흐르는 감정을 숨김없이 노래하고 있었다. 어째서 슬픈 것일까? 무엇에 화내고 있는 것일까? 왜 노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일까? 마미는 차례차례 넘쳐흐르는 감정을 넘쳐흐르는 대로, 노래에 담아 실을 자아내고 있었다. - 145p
작중, 마미가 부르는 노래의 표현을 듣고 국내 인디밴드인 ‘쏜 애플’이 떠올랐다. 지난여름 홍대에서 라이브를 봤을 때, 보컬 윤성현은 정말 자신의 감정을 미친 듯이 내지르는 모습을 보여 전율을 일게 했었다. 노래란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가장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수단으로 작용되는 것 같다. 마미의 노래를 들은 주인공, 마쓰자키는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나처럼 노래를 듣고 전율이 일지는 않았을지.
틀림없이 좌절이나 후회를 느끼지 않기 위해 내 신경의 어딘가가 괴사해버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확실히, 내 어떤 부분은 죽어 있다. 돌로 된 광장 한가운데 누워, 나는 비에 몸을 내맡겼다. 별도, 달도, 아무런 빛도 없는 캄캄한 하늘과 낡은 8밀리 영상처럼 어색하게 돌아가는, 광장이라는 세계 한가운데에서. - 194p
벨기에의 그랑 플라스. 거기에서 우연히 운명처럼 만난 일본인 2명. 오사키 요시오는 상당히 운명적인 만남과 사랑, 헌신적인 관계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게 참 드라마틱하고 우연에 우연을 만나 우연에 겹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해도. 그는 그 현상을 너무나 아름답고 일상적으로 풀어낸다. 제목인 9월의 4분의 1은 마지막 단편을 다 읽으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결말을 알고 내가 느낀 점은 사랑엔 노력이 필요하구나. 중요한 말은 애매하게 하면 안 되겠구나. 그 정도 뭐랄까. 결말에 대한 아쉬움이 상당했다 책으로써 가치에 대한 아쉬움이 아닌, 주인공 멍청이가 좀 더 현명하게 행동하지 못한 아쉬움이다. 아쉬웠지만 재밌었다. 결론은 재밌는 책이었다.
요사키는 상당히 괴짜처럼 생겼는데 그의 문장은 정말로 아름답다. 사랑에 푹 빠졌을 때와 같은 눈부신 문장으로 소설 군데군데를 꽉 채워놓은 상당한 문장가라고 생각한다. 그의 괴짜 같은 외모 때문에 사랑을 많이 해보진 못했을 것이란 외모 지상 주의적 생각도 들지만. 그래서 이런 아름다운 문장을 쓸 수 있게 된 것이라면 꽤 괜찮은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아름답고 의심 없는 사랑이야기가 문득 읽고 싶어지는 쌀쌀한 계절에 추천하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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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반환점이란 대체 언제쯤 찾아오는 것일까? 살아가는 것은 마라톤 레이스와 갈라서 반환점을 알려주는 표식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다. 한번은 진지하게 과거를 돌아보고 정리하지 않으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123p- <9월의 4분의 1>의 저자 오사키 요시오는 인생의 반환점을 찾는 작업은 과거를 돌아봄으로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동시에 그의 반환점 찾기는 책 속에 담긴 네 가지 짧은 이야기에서 시도된다. 그런데 그의 반환점 찾기는 우리들로 하여금 새로운 깨달음 하나를 알려준다. 예를 들면 지우개라고 하는 것은 미리 그 기능을 예상해서, 그렇게 되도록 설계해서 만들어진다. 그것은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와 달리 예상되는 기능도 설계도로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런 존재를 실존이라 부르기로 한다. -216p- 그 깨달음이란 바로 이야기들 속에 등장하는 모든 단어들은 이미 정해져 있는 목적을 가진 존재(지우개)가 아니라 이 책의 등장인물 각각에게는 전혀 새로운 의미를 가짐으로서 실존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것들의 의미를 어렵지 않게 추리해봄으로써 이야기 속에 몰래 침입한 쾌감을 맛본다. <보상받지 못하는 엘리시오를 위해>의 체스와 엘리시오 조각상, <켄싱턴에 바치는 꽃다발>의 장기와 명왕성. 그리고 동물들의 화폐단위 기린, <슬퍼서 날개도 없어서>의 레드 제플린의 음악들. 그리고 <9월의 4분의 1>에서의 quatre septembre. 그것은 그들에게 어떤 존재일까? 30페이지 정도에서 느꼈던, ‘쳇! 또 그 흔한 하루키식의 뻔한 사랑타령인가?’ 라는 실망감이 책장을 덮는 동시에 ‘실존에 대한 답은 이것인가?’ 라는 만족감. 그리고 ‘나에게 실존하는 것, 실존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무엇일까? 그렇다면 나에게 반환점이란 언제가 될까?’ 라는 궁금증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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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사키 요시오의 3번째 책. 불투명한 표지를 기대했었다. 파일럿 피쉬나 아디안텀 블루를 읽었을 때, 처음 느낀 불투명한 표지 종이. 그 표지가 가장 먼저 내 가슴을 아련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3번째 이 책에는 눈부실 만큼 이쁜 하늘색 종이표지다. 불투명하진 않지만, 분위기 있어보이는. 첫 장을 넘기고 차례를 보면서 생각했다. 앗. 4가지의 이야기가. 그랬다. 지난 두번의 책과는 달리 중단편 정도 되는 이야기4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첫번째 작품 파일럿 피쉬에서 요시오는 살아가는 것에 대한 사랑에 대해 이야기 했었다. 두번째 작품 아디안텀 블루에서 그는 사별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 했었다. 과연 세번째 작품에서는 무엇을 이야기할것인가. 4가지의 이야기가 모두 제각각 이지만, 작가의 분위기를 너무 잘 표현하고 있고, 예전 작품들과의 공통점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니 즉, 이번 작품에선 어떤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동시에 여러이야기를 함으로써, 사랑에 관한 전반적인 고찰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전 작품에서 보던 편집장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야기도 있고, 역시 주인공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도 있고, 갑자기 사라지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현재 사랑을 유지하려는 사랑이야기도 있다. 오사키 요시오만의 분위기 있는 사랑이야기에는 언제나 물음이 많이 제시되지만, 그 이야기에 깊게깊게 빠져들게 되기 마련이다. 이번 책 역시 읽는동안 마치 장편의 소설을 읽는것처럼 너무 편안하게 볼 수 있었다. 작가만의 매력인것 같다. 책을 읽고 난 뒤에도 계속 작가의 늪에 빠져서 한동안 허우적 거려서야 책을 덮었다. 다시 앞에 읽었던 부분들을 보고, 좋은 글귀들을 다시 한번 읽어보는 행동을 몇차례나 했는지 모른다. 만나고 싶어질 때도 있습니다. 사랑스러워질 때도 절실할 때도 슬퍼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 저에게는 날개가 없습니다. -슬퍼서 날개도 없어서 중 마미의 편지 일부 - 분명 이런 감정을 예전에 경험해 본 적이 있었다. 지금도 가끔 남편이 집에 늦게 오거나 하면 그리워서 슬퍼질 때도 있고. 이런 감정을 글로서 쉽게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 이 작가의 진정한 감성인 듯 하다. 실력이자 매력. 모두 마음에 들고, 예전작품처럼 더할 나위 없이 재미있는 책이었지만, 3번째 작품이라는 데서 앞 책들과 너무 비슷한 듯 하여 별점을 살짝 하나 빼버렸다. 이 작가의 글로 조금은 다른 이야기를 기대해보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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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마지막 날 공교롭게도 9월이 들어간 작품을 읽었더랬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과 헤어짐에도 모두 정해진 인연이 있듯이 사람과 책도 그런 모양이다.
모두 4편으로 이루어진 작가의 초기 단편집이다. 이 작가는 완성된 사랑을 이야기하는 작가가 아니다. 이 작가는 이루지 못한 사랑의 기억을 이야기하는 작가다. 그것을 담담하게 약간의 거리감을 두고. 그래서 그런 못 이룬 사람이 애절하기 보다는 그런 사랑이 있었음을 인정하게 만든다. 그리고 자신의 이루지 못한 사랑의 기억을 다시 꺼내게 만든다.
누구에게나 가슴 속에 묻어둔, 깊이 침전시킨 사랑이 있을 것이다. 스쳐 지나간 사랑, 먼발치에서만 보던 가슴 설레던 짝사랑, 어쩌면 이룰 수도 있었는데 이루지 못한 안타까운 사랑 등등...
그 사랑들이 읽는 내내 아련하게 코끝을 스쳐갔다. 흔들리는 코스모스의 모습처럼, 가을 하늘에 떠 있는 하얀 구름처럼. 간직한 기억의 잔상이 하나의 깃털이 되어 둥실 떠올랐다. 어떤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점점 잊혀 지는데 어떤 기억은 더욱 새로워지듯 가라앉은 수많은 깃털들 중에 더 깊이 가라앉는 깃털이 있고 자꾸만 떠올라 마음 설레게 하는 깃털이 있다.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못 이룬 사랑을 늦게나마 이루려는 엘리시오가 있다. 보상받지 못할지라도 그는 엘리시오가 되어 기꺼이 사랑을 찾고자 한다.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무에서 유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인식하고 그때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므로 그는 이제 그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자신의 잡지를 타국에서 사랑해준 독자를 사후에 만나러 간 직장을 그만 둔 편집자는 그곳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닫는다. 사랑을 하는 사람이 바라는 것은 사랑 그 자체일 뿐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은 자신이었음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자신이었음을. 가끔 인간은 가장 쉬운 것을 늦게 깨닫는 경우가 있다.
소년과 소녀의 사랑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기억이다. 한 줄기 소나기처럼 언제나 맑고 아름답다. 아마도 이 작품이 모티브가 되어 작가는 <아디안텀 블루>를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슷한 느낌의 작품이다.
9월의 4분의 1이라는 말이 참 이상했다. 남자는 9월의 4분의 1이라고 읽었다. 하지만 여자는 9월 4일을 말한 거였다. 이런 착각이 사랑을 비켜가게 만드는 것이다. 작은 것 같지만 이 안에 얼마나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사는 지가 담겨있다. 사랑은 서로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이라는데 이런 작은 말 조차도 알지 못한다는 거... 하지만 뒤늦게 알고 찾아간다는 건 그래도 항상 반쯤 사랑을 담고 있었다는 뜻일 것이다.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작품들이다. 그래서 더욱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들이다. 이제 시월도 한 주가 지나갔다. 달력은 벌써 다음 달로 넘어갔고 우린 잊었다. 우리가 넘긴 것이 단지 달력뿐이었을까. 그때 우리는 우리의 사랑도 무심코 넘기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남겨야 할 기억을 넘기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하게 만드는 쓸쓸하고 시원한 가을바람 같은 작품이었다. [인상깊은구절] 58p 엘리시오는 어째서 구덩이를 끊임없이 파는 것을 생애의 목적으로 했던 것일까? 그것은 살아가는 것이 구덩이를 끊임없이 파고 묻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미가 없다고 하는 가르침일까? 의미 없은 작업을 계속한 엘리시오야말로 사실은 살아가는 것의 진실한 의미를 알고 있었다는 우화일까? 158p 노래란 무엇인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들은 어디를 향해서 굴러가는 것인가? 누가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인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우리들은 무엇을 향해서 계속 굴러가고 있는가? 240p 잃어버린 사랑은, 철거된 건물처럼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저 잔상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잔상이기 때문에 보다 더 선명하게 마음에 계속 투사되는 면도 있다. 남겨진 건물보다도 철거된 건물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되듯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