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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삭은 공간에 대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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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걷다> 소설을 통해 보는 부산 속 어제와 오늘의 풍경이 무척 흥미진진했습니다. 서른 즈음에 서울이라는 낯선 땅에 정착하기 전까지 전 부산에서 살았습니다. 부산에 대한 기억은 서서히 시간이 지나면서 흐릿해지더군요. 30여년을 살았으면서도.   책머리 글처럼 “기억할 공간이 없다면 지나간 시간도 무화”되는 법이겠죠. 부산에 그리 오래 살았으면서도 기껏 해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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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를 걷다> 소설을 통해 보는 부산 속 어제와 오늘의 풍경이 무척 흥미진진했습니다. 서른 즈음에 서울이라는 낯선 땅에 정착하기 전까지 전 부산에서 살았습니다. 부산에 대한 기억은 서서히 시간이 지나면서 흐릿해지더군요. 30여년을 살았으면서도.

 


책머리 글처럼 “기억할 공간이 없다면 지나간 시간도 무화”되는 법이겠죠. 부산에 그리 오래 살았으면서도 기껏 해운대니 태종대니 자갈치 시장 정도 말하는 걸 보면, 저도 외지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느꼈습니다. 기억할 공간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이 부족하기 때문이겠죠. 제가 오래 살았던 곳은 온천장이란 동네였습니다.

 


부산을 동서로 구분해 예전의 중심(동래, 온천장)이 일제시대를 거쳐 남포동, 중앙동으로 변모해 간 얘기가 흥미롭더군요. 전차와 온천장, 동물원, 시장 등등. 곰삭은 부산의 묘미를, 살면서도 이후에도 잘 몰랐던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스파쇼핑이 있던 자리가 해방직후 경남건국준비위원회 발족모임이 열린 역사적 장소라니. 참 가까이 있으면서도 몰랐던 사실이었습니다.

 


해운대에 관한 소설 속 얘기도 흥미로웠습니다. 특히, <문장강화>란 책으로 유명한 월북작가 이태준 선생의 해운대와의 관계는 좀 의외였습니다. 아! 그랬구나. <경성트로이카>나 <이관술> 등에서 간간이 등장하는 남로당 계열의 잊혀진 혁명가의 발자취가 이곳에도 묻혀 있었구나.

 


책을 읽으며 중간 중간 저도 머릿속 추억여행을 떠나는 유쾌한 경험이었습니다. 부전역에서 해운대로 동해남부선에 몸을 맡긴 기억들. 철로가에 살면서 ‘칙칙폭폭’ 내달리던 증기기관차(관광용이었지만)의 추억들도 떠올랐습니다. 해운대 신도시를 건설할 때 질통을 매고, 시멘트를 져 나르던 막노동의 아픔도.

 


‘옛날 한시를 읽는 맛’을 불러일으킨 해운대 백사장의 풍경은 어느새 거대한 고층건물들로 채워졌습니다. 과거의 운치가 속절없이 변하는 삭막한 도시의 풍경. 시간은 흘러도 공간은 남는다지만 추억할 사람이 없다면 이 공간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조만간 부산 행 기차에 몸을 실을 때 <이야기를 걷다>란 책은 훌륭한 길동무가 되어줄 것입니다.

 

* whitecow38 님의 서평입니다.

l******n 2009.09.11.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