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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모티브가 그렇듯, 책의 첫머리는 그 책의 톤을 결정하게 마련이다. 논어 역시 예외가 아니다. 얼핏 보면 논어는 두서없이 되는대로 그러모은 잡탕 어록으로 보인다. 그러나 엄연히 논어에도 편집자가 있고 편집자의 의도가 있다. 논어의 첫머리에 학이시습지로 시작하는 구절을 놓은 것은 되는대로 하다보니 그런 것이 아니다. 그 첫장이 책 전체를 드러내기 때문에 편집자는 그 장을 머리에 놓은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학이편 1장을 어떻게 주석하는가를 보면 주석자의 의중을 읽을 수 있다. 학이 1장에 대한 주석으로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리쩌허우와 박재희의 해석이다. 그중에서 박재희의 해석은 1장을 논어에 대한 선언적 의미로 읽는다. 박재희는 공자의 생애에서 보거나 중국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을 세운 목적에서 보거나 그리고 그에게 배우려 한 제자들의 목적으로 보나 1장은 공자학당의 정치적 선언서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학이시습지에서 학의 대상은 당연히 정치학이 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방법이 학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다음 구절 '유붕이자원방래'에서 붕은 불알친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뜻을 같이 하는 정치적 동지를 말한다. 곳곳에서 정치적으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오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세번째 인부지이불온 은 그 정치적 뜻의 좌절을 말한다. 남들이 우리의 정치적 뜻을 알아보고 써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해도 우리는 분노하고 좌절하지 않는다. 우리는 군자니까! 논어의 모든 구절이 그렇듯 박재희의 1장 독해만 정답일 수는 없다. 그러나 정치적 맥락에서 1장을 읽어야 한다는데는 누구도 반대하기 힘들다. 소라이가 말하듯 논어는 제도사 관점에서 읽을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박재희의 독법이 맞다면 논어의 근본 구분은 군자/소인이 된다. 군자의 원래 의미는 귀족을 말했다. 공자가 말한 군자나 그 이전의 군자나 모두 정치를 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공자가 재정의한 군자는 자리에 걸맞는 능력을 갖춘 자이다. 큰 자리에서 "큰 것을 쓰는 만큼 그에 맞는 인격이 따라야 하고 큰 것을 쓰는 만큼 그것을 쓰는 사용법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 논어의 내용이다. 그렇다면 큰 사람인 군자는 작은 사람인 소인과 구체적으로 무엇이 다른가? "공도자가 물었다. 다 같은 사람인데 어떤 사람은 큰 사람이고 어떤 사람은 작은 사람인 것은 어째서입니까? 맹자가 말했다. 큰몸(大體)을 따르면 큰 사람이 되고 작은 몸(小體)을 따르면 작은 사람이 된다. 공도자가 물었다. 다 같은 사람인데 어떤 사람은 큰 몸을 따르고 어떤 사람은 작은 몸을 따르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맹자가 말했다. 귀와 눈의 기능은 생각하는 데 있지 않기 때문에 외부의 사물에 의해 가려진다. 귀와 눈이 외부의 사물과 접촉하면 귀와 눈은 외부 사물에 이끌려가게 된다. 이와 달리 마음의 기능은 생각하는데 있다. 생각하면 도리를 이해할 수 있고 생각하지 않으면 도리를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ㅁ마음은 하늘이 나에게 준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그 큰 것을 확고하게 세우면 작은 것이 큰 것을 빼앗아가지 못한다. 이거쇼이 큰 사람이 되는 까닭이다." 맹자 - 고자 상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멋진 말이다. 인간의 모든 것을 버리더라도 생각한다는 것만 남는다면 그는 인간이란 말이다. 데카르트의 이 말은 이후 서양철학의 톤을 결정햇다. 인간은 이성의 존재이고 이성의 존재이니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을 다르게 규정한다. 인간은 언제나 어떤 감정의 톤을 갖는다. 합리성이니 이성이니 하는 것도 그 감정의 일종이다. 합리적 존재자라 하지만 그 합리성이란 특수한 감정의 일종일 뿐이다. 하이데거 식의 인간 이해는 동양에선 적어도 중국에선 낯설지 않다. "혜시가 말했다. 사람이면서 정이 없다면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까? 장자가 말했다. 도가 사람에게 얼굴을 주고 하늘이 사람에게 형체를 주었는데 어찌 사람이라 아니 할 수 있습니까? 혜시가 말했다. 이미 사람이라고 한 이상 어찌 사람에게 정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장자 - 덕충부 여기서 情이란 초코파이의 정이 아니다. 희노애락의 칠정, 감정을 말한다. "고대 동아시아 지식인들이 생각한 '정'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특징이었다. 아니 '정'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이었다." "'性'이란 타고난 경향이요 情이란 그 性이 움직이는 바탕이요, 欲은 情의 사물에 대한 감응이다." 순자 - 정명 순자의 정에 대한 정의이다. 현상학에서 말하는 지향성은 흔히 불교에서 말하는 欲으로 해석된다. 현상학에서 인간의 의식은 언제나 무언가 대상을 향한다. 그것이 외물이든 내물이든 항상 어떤 대상을 지향하는 것이 인간의식의 본질이다. 의식을 이렇게 정의하면서 훗설은 칸트의 물자체란 딜레마를 해소해버렸다. 하이데거는 지향성을 불교적인 欲으로 재해석하면서 지향성의 본질을 감정, 또는 중국식의 情으로 재정의했다. 그러나 고대중국에서 정은 문제가 된다. "정이란 모든 외물에 대해 감응하는 몸의 반작용 모두를 가리"켰다. 그러나 그 외물에는, 적어도 사람에게는, 두가지가 있다. 심리학이 말하는 식으로 하자면 인간에게 외물은 그냥 외물과 사람이 있다. 희노애락과 같은 감정 또는 7정은 파충류 시절부터 내려온 본능에 속한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본능을 진화했다. 동정심같은 것이 그것으로 맹자가 말하는 4단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듯 7정만 있다면 인간은 이기적 차원에만 머물러 사회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적 동물로 진화한 인간은 이타적 차원을 갖게 되었고 이 역시 인간의 본능이다. 그러므로 性은 7정과 함께 4단도 포함한다는 맹자의 말은 옳다. 문제는 4단이 7정보다 약한 본능이란 점이다. "신유학에서 말하는 이기론 혹은 성정론은 결코 이성 대 감성 혹은 이성 대 욕망의 처절한 투쟁의 기록이 아니다. 정확히 말해 그것은 오히려 똑같은 정인 사단과 칠정의 관계에 대한 논의다. 즉 보다 문화적(사회적이라 보는 것이 옳겠다)으로 고양된 감정(理-4단)을 키워 상대적으로 원초적이고 격렬한 정(氣-7정)이 초래할 수 있는 부조화를 극복하자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안은 성인에게는 희노애락의 정이 없다고 하는데 그 논의가 매우 치밀하였다. 종회 등 당시의 유명한 논자들이 모두 하안의 학설을 추종했다. 그러나 왕필은 이에 동의하지 안고 성인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것은 神明이고 보통 사라과 같은 것은 五情이라고 하였다. 신명이 뛰어나기에 늘 마음이 조화로워 어떤 상태에서도 동요하지 않고 오정이 같으므로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감정이 없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이 지닌 정은 다른 사람처럼 감응흐면서 그에 얽매이지 않는다. 오늘날 사람들은 얽매이지 않는 것을 감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커다란 잘못이 생각했다." 삼국지 -하소왕필전 왕필은 논의는 맹자가 군자(성인)와 소인을 구분한 논리와 연결된다. 소인도 군자도 자신의 정에 충실하게 산다. 저자는 소인이든 군자든 자신을 위해 살기에 모두 이기적이라 말한다. 그러나 군자와 소인은 이기적으로 사는 방식이 다르기에 구분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옛날 사람들은 제 몸을 위해(爲己) 공부했는데 요즘 사람은 남을 위해(爲人) 공부한다." 논어 - 헌문 공자는 위기 즉 이기를 위인 즉 이타보다 더 좋은 것으로 말한다. 이게 무슨 의미인가? 주자는 이 장을 이렇게 풀이한다. "자신을 위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찾으려고 공부하는 것이고 남을 위한다는 것은 인정받으려고 공부한다는 뜻이다." "우리 같은 소인들에게는 뜨끔한 이야기이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오로지 출세와 취직을 위해 공부하는게 우리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주희의 성리학은 다른 말로 도학 혹은 성학이라고 부른다. 이때의 성학이란 곧 위기지학 즉 스스로가 공자와 같은 성인이 되고자 하는 학문을말한다. 그런데 주희는 성학의 교본이라 할 '근사록'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대부가 닦아야 할 학문이다' 공자가 말하는 위기지학이란 바로 국가의 관직에 있는 사람 혹은 적어도 그런 위치에 나아가려는 사람들이 닦아야 하는 것이다." 성인이 되기 위한 학문이라 해서 테레사 수녀같은 이타적 인간이 되기 위한 학문이 아니란 말이다. "동아시아 전통에는 오늘날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대립이란 없다. 이타적이란 말은 사실 보통 사람이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 우리가 공자나 주희, 퇴계나 율곡 같은 인물을 성인이라 추앙하겠는가." 테레사 수녀같은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이들은 우리 소인들과 달리 '자신을 위하는' 방법마저도 우리와 달랐기 떼문이다". "그런데 이런 걸 두고 이기적이라고 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시커먼 중형차 안에 계신 분께서는 '이기적'인 게 아니라 '몰상식'한 것이라거나 '방종'한 것이고 해야 한다. 법률적으로는 '위법'이라ㅏ고 하는게 맞다. '이기적'이란 말을 그렇게 쓰는 것은 무식한 것이ㅏㄷ.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이기주의'는 근대 서구문명의 치초가 되는 대단히 의미있는 사상이다. 이기주의를 오로지 나 하나만을 위해라고 읽어서는 안된다. 자기 혼자만의 이익을 위해 사는 사람은 이기주의자와는 관계없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니 우주로 내보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공자나 그를 추종한 유학자들이 '수많은 몸들의 집합'인 백성을 위해 스스로 성인이 되어 올바른 인간의 길을 열려고 한 것은 그러한 개개인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윤리학적 이기주의'라고도 볼 수 잇다. 그것이 지금 우리식의 표현으로는 ';큰 사람의 이기주의'이며 그런 노력과 실천을 공자는 '위기'적이어야 한다고 표현했다." 이렇듯 공자는 이기주의에 대해 부정적이 않았고 소인을 소인답게 하는 利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지 않았다. 그런데 공자가 주자가 소인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할 때도 많았다. 그건 무슨 이유였을까? "인간은 누구나 이로운 것을 추구한다. 왕은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의 이익을 대부는 자신의 집안을 그리고 선비와 서민은 제 한 몸의 이익을 생각한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왕이나 대부의 지위에 있으면서 어떻게 하면 내 몸을 이롭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면 그런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공자나 주희가 '소인'을 극단적으로 욕했던 것은 바로 이런 경우를 염두에 둔 것이다. 대인의 자리에 있으면서 소인철럼 사는 인간을 욕햇던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지금도 소인의 시대인 지금도 (대인을 위한 책인) 논어가 쓸모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소인은 소인을 잘 알아본다. 그리고 소인이 대인의 자리에 앉았을 때 대인이 어떻해야 하는가를 논어를 보며 알자는 것이다. 우리는 소인이 대인인 척하며 산 장구한 역사를 겪어왔다. 무능한 군자, 덕도 없는 군자, 다시 말해 소인에 불과한 위군자들. 그런 자들을 알아보고 그런 자들이 마땅히 해야 할 것을 논어를 보며 배우자고 저자는 말한다. 바로 아래와 같은 경우 때문에 저자는 지금도 논어를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조선의 유학에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라의 중추인 지식인이자 예비 관료들인 유생들이 직업이 없었다.! 선비는 장사를 할 수도 없었고 물건을 만들어 팔 수도 없었다. 농사도 사대부의 할일은 아니었다. 율곡이 해주에서 생계를 위해 호미를 만들어 팔았을 때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율곡의 선택은 그만큼 예외적이었고 체모가 손상되는 일이었다. 貧富有命이니 貨利에 有情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자기 검열과 사회적 시선으로 의식해온 사람들이다. 그 빈자리는 아내들이 감당해야 했다. 바느질과 길쌈. 식구들의 밥을 벌기만 했는가, 봉제사 접빈객에 가정의 경제를 도맡아 하느라 주부의 수명이 단축되었다. 아내가 죽으면 상실의 그리움보다 고생시킨 회한 플러스, 앞으로 식구들 데리고 살 일이 막막하여 슬피 운 사람들이 많았다. 그것을 스스로 부끄러운 줄 모르고 적은 기록도 숱하다. 식솔을 팽개치고 세운 도덕이 뭐 그리 대단하겠는가. 선비들도 직업을 가졌어야 했다. 다산은 헛기침을 접고 학당이라도 열어 아이들이라도 가르치라 권했다. 사대부들의 유일한 직업은 정치와 행정, 즉 관료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기이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관료가 되는 것도 떳떳한 직업이 아니다. 우선 누구도 거기 취직할 자격을 갖추기 힘들었다. 과거가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것은 아니다. 거기 사적 관심과 이해를 철저히 배제한 성인의 인격을 갖추어야 했는데 ‘내가 그렇다’고 나설 파렴치가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사람들은 그 높은 기준으로 다른 집안. 다른 지역, 다른 당파 사람들을 쉽사리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관직에 임하는 그 포부의 스케일이 자못 컸다. 사대부가 정치라는 직업을 맡는 취지는 자잘한 사무를 처리하고 제도를 가다듬는 데 있지 않고 ‘이 땅에 인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요순의 시대’를 재현하는 데 두었다. 이 이 험준함 때문에 자부가 심하고 명망이 무거운 사람일수록 정치라는 직업을 택하기를 꺼렸고 물러나 비판에 주력하는 것으로 책임을 대신했다. 그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정치’에 취업한 사람들은 정작 그 직책에 걸맞는 지식과 기술이 부족했다. 이 실무적 노하우는 주자학이 가르쳐주지 않는다. 주자도 짧은 기간 행정을 맡았지만 그는 주로 재야에서 당대의 군사적 정치적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일관한 사람이다. 건설에 필요한 학문과 비판에 필요한 학문은 서로 다르다. 사대부들은 본령인 정치에 나아가서도 군사나 재정, 생산에 관련된 업무를 맡기면 체모를 깎는다 하여 화를 냈다. 그들이 선호한 직책은 세자의 교육이나 임금과의 학문 토론 그리고 정무에 대한 비판이었다. 훈수하기는 얼마나 신나겠는가. 밖에서는 천하를 들었다 놓을 수 잇지만 안에서는 반걸음을 떼기도 험난하다. 그 진흙탕에서 뜻있는 사람들은 혹은 다치고 혹은 절망하여 한사코 물러나고자 했다. 물러나면서 그들은 자신의 선택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이 같은 ‘은둔 권위주의’는 그들이 추앙하는 만세의 성인 공자의 지향과는 아무래도 다른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의 도통은 항거자와 은둔자를 축으로 하여 이어져왔다. ‘무능과 도덕은 자주 이웃한다!’ 山林이란 이런 재야 군자들의 집합적 이름이었다. 이상을 외치고 도덕을 선점한 사람들이 정치에 개입할 때 그 폐단은 상상외로 심각하다. 무능한 ‘군자’가 권력을 주리 때의 위협과 혼란을 직접 겪은 정조는 이렇게 말했다. ‘소인은 물정에 밝지만 군자는 사리에 어둡기 쉽다. 사람들은 소인이 나라를 그르친다 알지만 군자가 더 큰 병폐를 끼친다는 것을 모른다. 소인이 나라를 그르치는 것은 바로잡을 수 잇지만 군자가 재주도 덕도 없이 당면한 현실에 어둡다면 나라에 독을 끼치는 것이 누구나 알 숭 ㅣㅅ는 소인의 폐단보다 더 심하다.’” (한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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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개인의 행복을 찾는 동양 지식인들의 내면 읽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비슷한 시기에 나온 <행복한 이기주의자>와는 달리 - 며칠전 <행복한 이기주의자>를 읽고 혹평을 가한 일이 있었다 - 이기주의자가 되라고 이야기하면서도, '이기주의'의 의미에 대해 다시금 생각케한다. 소위 자기계발서라는 책들이 말하듯 지침을 주고 나를 따르라, 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이에 대해 깊이 있는 사색을 이끌어낸 다음 왜 이기주의자를 옹호하는지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그것이 '이기주의'를 이야기하는 다른 책과 이 책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여러 철학자들이 옛 고전을 오늘날의 시각으로 읽어내려 한다. 이 책도 그와 같은 작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아주 오래전의 중국의 철학자들, 누구나 다 아는 공자를 비롯하여, 그의 후계자 맹자, 순자, 그리고 장자와 노자, 묵자와 한비자, 양주와 상앙 등등의 <중국철학사>에나 등장할 법한 굵직굵직한 주요 철학자들은 다 등장했다고 봐야한다. 저자 김시천은 이 많은 철학자들을 책에서 언급하고 있지만 그가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묵가학파와 양주이다. 이들은 당시 공맹의 유가철학에 딴지를 걸었지만 그네들의 파워가 너무나 큰지라 상대적으로 묻혀버렸던 인물들이다.
우리는 지금껏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에 따라 군자와 성인이 되라고 윗사람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크게 보고 크게 마음을 쓰고 큰 그릇 큰 사람이 되라고 들었다. 그런데, 저자는 이에 딴지를 건다. 다 큰 사람이 되고자 하면 안된다. 도덕책에 나와있는대로 누구나 다 옳고 선하고 순수하고 남을 돕우며 사는 대인, 군자, 성인이 될 수는 없다고 한다. 현실적이다. 정말 그렇다. 다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누구나 다 그렇게 될 수는 없다. 누구나 다 대통령, 국회의원, 우주비행사, 대기업 CEO, 변호사, 판사, 의사가 되고 싶어하지만 누구나 다 될 수는 없다. 왜. 그럼 왜 안된다는거야.
거참 맹렬한 놈일세 아니 하겠다는데 왜 못하게 해. 그래 꿈은 다 꿀 수 있다. 하지만 결국 누구나 되지는 못한다. 큰 인물은 큰 인물 다운 일을 해야하고, 작은 인물은 작은 인물 다운 일을 해야한다. 대인은 대인답게, 소인은 소인답게 자신을 찾아가야 한다. 우리는 마치 '대인=좋은 사람, 소인=나쁜 사람'이라는 등식으로 대인과 소인의 개념을 인식하며 살아왔고, 모두가 다 대인이 되기 위한 삶을 살아왔다. 안되는 데 되게 하려니 어렵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안되면 되게하라'이다. 안되는데 어떻게 되게 해. 이런 억지가 어딨어. 안되면 안되는거야. 안되는데 되게 하려고 애쓰고 노력하며 스트레스 받는 이들에겐 어쩌면 이 책은 위로가 될지도 모르겠다. 안되면 하지마. 넌 너다운 길을 찾으면 돼. 소인의 삶을 찾아가라.
이 책은 이기주의에 대한 옹호다. 우리는 도덕시간에 이기주의는 나쁜 것이고, 이타주의는 좋은 것이라고 배웠지만 - 도덕교사인 나부터 그렇게 가르쳤다. 그러니 다들 그리 알 밖에. 이 책을 읽었으니 다음부터 조심해서 가르쳐야겠다. 그전에 도덕교과서부터 전면 개편해주면 안되나. 영 가르칠 때마다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인양 가르치는거 같아 미안하네. 그거 싹 무시하고 내 맘대로 하려니 난 따로 닦아놓은 뭔가가 없고 이런걸 내공부족이라고 하지 - 결코 이기주의는 나쁜 것이 아니다. 이기주의가 왜 나빠. 나를 위해 살겠다는데. 나를 위해 살겠다는 이기주의는 '위기지학爲己之學'과 연결된다.
나를 위하는 학문. <여씨춘추> 중기에는 이래 나와있다.
"지금 나의 생명은 '나를 위해(爲我)'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이롭게 하는 것 또한 크다. 나의 생명은 그 귀천을 논하자면 지위가 천자가 되더라도 비할 바가 못된다. 그 경중을 논하자면 부가 천하를 소유하는 것이라 해도 바꿀 수가 없다. 그 안위를 논하자면 하루아침에 나를 잃게 되면 죽어서도 회복할 수 없다."
나를 위해 공부를 했다. 공자는 말했다. "옛날 사람들은 제 몸을 위해(爲己) 공부하였는데, 요즘 사람들은 남을 위해 공부한다"(논어), " '자신을 위한다(爲己)'는 것은 배운 바를 신중하게 실천에 옮긴다는 뜻이고, '남을 위한다(爲人)'는 것은 배운 바를 말로만 한다는 뜻이다. "(논어집해), "자신을 위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찾으려고 공부하는 것이고, 남을 위한다는 것은 남에게 인정받으려고 공부한다는 뜻이다." (논어집주)
옛 사람들은 나를 위해 공부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람들은 남을 위해 공부하라고 배운다. 공부해서 남주라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타인에게 이로운 행위를 하고, 사회와 국가와 인류를 위해 위대한 사람이 되라고 배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학교에서는 이래 배우지만 집에서는 돈 많이 버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침을 받지 않나. 집안 마다 다르겠지만. 요즘 아이들의 머리 속에 돈돈돈 들어있는걸 보면 그것이 가정교육의 여파가 아닌가 싶다. 분명 학교에서 돈 많이 벌라고 가르치진 않았으니까.
이기주의의 본래 의미는 우리가 알고 있듯 내 이익을 위해 타인을 해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은 누구나 자신의 행복 추구에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행동해야 하며, 국가나 사회는 바로 각 '개인'이 행복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행동을 정당화하고 이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근대 이기주의의 원리이다. 그러한 이기주의 원리가 제도화된 것을 우리는 '권리'라고 한다. "(P112) 이기주의는 곧 근대 민주주의의 권리인 셈이다. 사람들의 이기주의적 행동을 보고 있노라면 그것이 그다지 나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물론 이때의 이기주의는 엄격히 구분지어야 할 필요가 있다. 나를 위한 행동이기는 하되 남을 해치지 않는 범위내에서의 행동. 그렇게 보면 도덕시간에 배운 이기주의의 의미와도 어느정도 일치한다고 봐야하나. 저자는 말한다. "당신의 이기주의는 이렇게 소박하고 작은 것이다. 당신의 생명이 해침을 당하지 않으려는 작은 이기주의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작은 이기주의를 요즈음 말로 '권리'라고 부른다. 당신의 이기주의는 속되게 말하면 먹고 살려는 몸부림이고, 고상하게 말하면 행복해지고 싶은 작은 소망이다. 그래서 괜찮다. 얼마든지 이기적이어도 상관없다. 당신의 이기주의는 기껏해야 당신과 당신의 가족을 행복하게 하려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P220)
그래 이 정도 선에서는 얼마든지 나는 이기적이어도 상관이 없다. 내 '이기'라고 해보야 고작 이런 정도 밖에 되지 않으니깐 말이다. 이기를 위해 타인을 해치고 피해를 주는 정도의 선까지가게 되면 이는 이기주의가 아니라고 봐야한다. 그것이 저자의 이기주의에 대한 의미가 아닌가 싶다. 저자는 그 정도 선은 이기주의를 넘어서 '인간답지 못함'으로 보고 있으니 말이다. 다음의 저자의 말을 읽어 보면 그 의미가 더욱 명확해지지 않을까 싶다.
"인간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세상을 폭력과 전쟁으로 얼룩지게 하는 악'을 인간의 이기적 본성으로 치부하는 것, 혹은 어느 한 개인의 이기심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한 개인이 다른 사람에게 가하는 폭력의 원인은 그 사람의 이기적 본성보다는 삶의 문제, 사회적 관계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악 또한 사회적인 차원에서 진단되고, 해결책 또한 사회적 차원에서 마련되어야 한다. 이기주의라는 어떤 철학적 입장이나 모든 개인이 갖는 몸의 이기적 본성도 악의 궁극적 원인은 아니다. "(P241)
저자는 결론적으로 이기주의에 대해 이렇게 정의내린다. " 이기주의란, 각 개인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임을 바탕으로 하여 이에 대한 사회적 배려와 지원이 우리 사회의 어떤 가치보다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입장일 뿐이다." 대인의 삶이란 것은 그 자리가 큰 것이지 사람이 큰 것이 아니라 한다. 맞는 말이다. 제 그릇이 아닌 자가, 솔직히 말해 소인의 그릇 밖에 안되는 자가, 대인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앉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 그 자리가 커질수록 "인간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세상을 폭력과 전쟁으로 얼룩지게 하는 악"이 많아지게 된다. 이를 막아야 한다. 고로 소인은 소인답게 살자는 것이다. 안되는 그릇에 몸에 좋은 귀한 약을 담고 담다가 넘쳐흐르게 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릇을 늘리면 문제가 해결되지만 그 그릇은 늘어날 그릇이 아니고, 늘어나더라도 시일이 필요하다. 왜냐. 안되는 그릇을 억지로 늘이려 하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대인은 대인답게, 소인은 소인답게 라는 모토는 선천적으로 제 그릇의 크기가 정해져있다는 식으로 들릴 수도 있겠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생긴 의문점은 그것이었다. 그러면 제 그릇의 크기는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선천적으로 정해져있는 것이 아니라면, 또 정해져있다 해도 그것을 알아볼 수 없다면, 언제쯤 그 그릇의 크기를 알아볼 수 있을까. 15살? 20살? 30살? 의문이다. 언제쯤부터 '대인은 대인답게, 소인은 소인답게'를 적용시켜야 할지. 이런 의문은 아직 해소되지 않았지만 이 책은 분명 우리가 알고 있는 '이기주의'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케 해보는 기회를 제공했다. 대인이 대인의 삶을 꿈꾸는 것은 대인의 이기주의요, 소인이 소인의 삶을 꿈꾸는 것은 소인의 이기주의다. 그리고 이때의 이기주의는 남에게 피해를 주며 나의 이익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나의 이익에 관심을 갖고 나의 행복을 위해 행동하는 이기주의이다. 공자왈 맹자왈 대인이 어쩌느니, 군자가 어쩌느니 그런 말보다 현실적으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소인의 삶이 아닌가 싶다. 고전의 재조명이란 것은 바로 이런 뒤집기가 아닐런지. 바른 말 백번 하는 것보다 우리가 당연하다 여기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게 해주는 이런 글이 훨씬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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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인으로 살고 싶은 사람. 하지만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 또한 필요한 일이다. 이기주의라는 말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어디에서 부터 생겨났는지 말해준다. 또 소인배라는 말의 부정적의미에 얼마나 속고 살아왔는지를 일깨워주는 책이다. 색다른 해석이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자신의 삶의 방향에 참고가 되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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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천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2006년 9월, 12,000원)
이 책은 동양고전에 대해 우리가 갖는 선입견(따분하고 재미없다)을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식으로 풀어주어 상당히 재미있다. 반면에, 제목에서 표현되듯 간단한 명제의 규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기에 골치가 아프다(나는 그랬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기주의는, 논어(論語)에서 자주 대비되는 군자 vs. 소인의 관계에서 소인의 도, 즉 利를 말하는 것이다.
이 점은 서구의 학문을 위주로 학습하였던 우리들의 견해를 그대로 보여준다. 특히, 내가 전공하였던 경제학에서 인간의 이기심은 '합리성(rationality)'이라는 말로 '합리화'되며, 개별 인간이 이기를 추구하는 행위들을 적절히 '방임'하는 사회경제제도로서의 자본주의가 오늘날에 볼 수 있는 비약적인 생산력의 확대를 가져왔음을 의심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책에서 우리의 상식과 달리 '이기주의'를 추구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새로운 주장을 담고 있다기보다는, 동아시아의 전통적 사고가 반드시 소인의 도인 '利'의 추구, 개인 행복의 추구를 반대하였던 것은 아니라는 해석을 달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흔히 우리가 논어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고전을 탐독할 때 [군자 vs. 소인]의 비교에서 당연히 군자의 도, 즉 義를 좆아야 한다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대부분의 경우에서는 현실은 소인의 도, 즉 利를 좆게 되는(한 편으로는 좆아야 하는) 것이 현상이다. 소수의 군자(?)가 이끄는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다수의 소인이 만들어가는 세상이기에 다수의 소인이 접하게 될(즉, 대중화될) 논어의 해석도 달라져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공감이 간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고전에는 논어에서처럼 군자의 도를 강조하는 주장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을, 동아시아 개인주의 사상의 싹이라고 할 수 있는 양주(楊朱)의 '위아(爲我)'나 장자의 '강호'에서 찾고 있다.
그러면, '군자' 또는 '대인'의 개념은 폐기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군자의 자리에 있으면서 소인처럼 행동하는 사람들 때문에(즉, 군자의 자리에 앉아있는 소인 때문에) 사회가 어려운 것이다. 군자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보다 큰 나'를 위해야 할 사람인데도 작은 나의 이익을 취하고자 하면 '보다 큰 나'에 속하는 많은 소인들을 힘들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소인에게는 利를 추구할 권리와, 군자의 자리에 있으면서 소인의 도를 행하는 자들을 비판할 권리가 주어진다. 그리고, '보다 큰 나'를 위해 나아가는 사람에게 논어와 같은 동양고전은 아직도 유효한 것이다(논어에 갑갑한 말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새길 만한 말들이 많은 것을 보고 놀라고 있는 중임).
그리고, 이러한 생각들로부터 궁극적으로 추구할 바람직한 사회상은 공자의 질서정연한 천하(天下)일 수도 있겠지만, 장자의 서로 방임하는 강호(江湖)일 수도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한 사회가 단일한 가치로 일사불란하게 나아가는 것도 좋겠지만, 나와 다른 가치를 인정하지는 못하더라도 방임할 수 있고 반대로 다수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나의 생각에 간섭받지 않을 자유를 누릴 수 있다면 더 좋은 세상이 아닐까.
내 눈에 걸렸던(?) 주요 부분을 정리하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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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29)
<<장자>>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장자가 산길을 가다가 잎과 가지가 무성한 거목을 보았다. 그런데 나무꾼이 그 곁에 있으면서도 나무를 베려고 하지 않았다. 그 까닭을 묻자 "쓸모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장자가 말했다. "이 나무는 쓸모가 없어서 수명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장자가 산을 내려와 옛 친구의 집에 머물렀다. 친구는 매우 반기며 심부름하는 아이에게 거위를 잡아 대접하라고 일렀다. 그러자 아이는 "한 마리는 잘 울고 또 한 마리는 울지 못합니다. 어느 놈을 잡을까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주인은 "울지 못하는 놈을 잡아라"라고 대답했다. 다음날 제자가 장자에게 물었다. "어제 산길의 나무는 쓸모가 없어서 수명을 다할 수 있었는데, 이 집 주인의 거위는 쓸모가 없어서 죽었습니다. 선생님은 어느 입장에 머무시겠습니까?" 그러자 장자가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나는 쓸모 있음과 없음의 사이에 머물겠다." -<<장자>> <산목山木>
... 장자의 말은 단순하다. "나는 이용당하지도 버림받지도 않겠다"는 뜻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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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51)
<<논어>> <이인里人>에서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 可矣)"는 숭고한 말을 한다. (중략) 참으로 공자다운 말, 성인다운 말이다. 하지만 양주는 그렇게 보지 않았던 듯하다. <<맹자>>가 말하는 양주의 '위아'는 지극히 파렴치한 이기주의적 주장으로 보이지만, <<여씨춘추>>에서는 같은 '위아'라는 말을 아주 다른 차원에서 설명하고 있다.
지금 나의 생명은 '나를 위해(위아爲我)'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이롭게 하는 것 또한 크다. 나의 생명은 그 귀천貴賤을 논하자면 지위가 천자가 되더라도 비할 바가 못 된다. 그 경중輕重을 논하자면 부가 천하를 소유하는 것이라 해도 바꿀 수가 없다. 그 안위安危를 논하자면 하루아침에 나를 잃게 되면 죽어서도 회복할 수 없다. - <<여씨춘추>> <중기重己>
(중략) 이제 우리는 양주의 '위아' 사상을 <<맹자>>의 극단적인 이기주의의 맥락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가장 중시하는 삶 중심주의 사상으로 바로 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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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106~119)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옛날 사람들은 제 몸을 위해(爲己) 공부하였는데, 요즘 사람들은 남을 위해(爲人) 공부한다." - <<논어>> <헌문憲問>
(중략) <<논어>>의 가장 오랜 판본인 삼국시대 위의 <<논어집해論語集解>>는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자신을 위한다(爲己)'는 것은 배운 바를 신중하게 실천에 옮긴다는 뜻이고, '남을 위한다(爲人)'는 것은 배운 바를 말로만 한다는 뜻이다. - <<논어집해>>
(중략)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그의 밑에서 일하기는 쉽지만 그를 기쁘게 하기는 어렵다. 정당한 방법으로 기쁘게 하지 않으면 기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군자가 다른 사람에게 일을 시킬 때는 일하는 사람의 재능에 따라 합당하게 임무를 부과한다. 이에 반해 소인은, 그의 밑에서 일하기는 어렵지만 그를 기쁘게 하기는 쉽다. 비록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기쁘게 하더라도 그는 기뻐한다. 소인은 다른 사람에게 일을 시킬 때에는 완전할 것을 요구한다." - <<논어>> <자로(子路)>
(중략> 그런데 <<논어>>에서는 공자는 이런 말도 한다. 소인에 관해서 한 말 가운데 가장 괜챦은 말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상달(上達)하고 소인은 하달(下達)한다." - <<논어>> <헌문>
(중략) <<논어정의>>에서는... 이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공자의 이 말씀은 ... 군자는 덕과 의에 통달하고 소인은 재물과 이익에 통달한다는 뜻이다. - <<논어정의>>
(중략)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바로 '이익을 추구하는 도'를 중심으로 세워진 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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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87~188)
샘의 물이 마르면 물고기들은 땅 위에 모여서 습기를 뿜어내며 서로를 거품으로 적셔준다. 하지만 이는 강과 호수에서 서로를 잊고 지내느니만 못하다. - <<장자>><대종사大宗師>
샘의 물이 마르니 물고기들이 서로 자신의 몸에 남은 얼마 안 되는 축축한 물기를 서로에게 비벼대며 도와준다는 것은, 어려운 처지가 되면 서로 돕는 인정을 은유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강과 호수에서 자유로이 헤엄치며 그런 마음 자체를 잊고 사는 것보다 나을까?
(p.223)
당신의 이기주의는 이렇게 당신의 생명이 해침을 당하지 않으려는 작은 이기주의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작은 이기주의를 요즈음 말로 '권리'라고 부른다. 당신의 이기주의는 기껏해야 당신과 당신의 가족을 행복하게 하려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기주의라는 말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는 것일까?
우리의 삶이 힘들고 어려운 까닭은 소인이면서 소인답지 못하게 대인의 자리에 가 있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대인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천하에 도를 실현하려는 원대한 이기주의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기업에서, 큰 기관에서 천자의 검, 제후의 검으로 자신이 먹을 달콤한 사과를 깎는 소인이 있기 때문에 어렵고 힘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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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241)
전통 동아시아의 유가적 이해에 의하면, 오늘날 우리가 '악'이라 부르는 사회적 현상은 어떤 개인이나 개개인의 이기적 본성이 아닌 '자리(名)'에서 오는 것이다. 당연히 '자리'라는 것은 개인이 차지하는 사회적 관계의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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