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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 철학자인 보부아르의 유명한 저서들을 뒤로 하고 우선 이 책으로 시작하려 한다. 그녀는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라고 말한 사르트르와 계약결혼을 한 일로도 유명한데, 보부아르의 자전적 소설인 이 책에서 사르트르가 종종 등장한다. 보부아르와 사르트르가 서로 계약결혼을 하면서 합의한 조건 세 가지는 첫째, 결혼 후에도 각자 다른 사람과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고 둘째, 서로에게 언제나 진실해야 하며, 셋째 각자 독립된 재정 관리를 하는 것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평범한 사랑을 못 하는 건가 싶은데... 당시엔(아마 지금에도) 그런 계약결혼이 굉장한 파격이었다고 한다. 정작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는 이러한 결혼에 만족도가 높아서 죽을 때까지 계약을 갱신하며 살았는데,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 서로를 만난 일이라고 말하고는 했다. 또한 비정상적이라는 세간의 손가락질에 대해서 보부아르는 자신들의 결혼이야말로 가장 ‘자연스러운’ 결혼이라고 반박했다. 이런 일화들 때문인지 보부아르의 자전적 소설을 펼치며 나는 곧 그녀의 강인한 면모를 보게 될 것을 막연히 기대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실제적인 죽음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강인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특히 그 대상이 자신의 엄마라면 더더욱. 어느 날 대퇴부가 부러져 병원에 가게 된 엄마는 암을 진단 받는다. 두 딸인 보부아르와 푸페트는 엄마에게 암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복막염이라고 둘러 대는데, 남은 시간 동안 엄마가 두려움 없이 최대한 편안히 죽음에 이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엄마는 죽어가고, 보부아르는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일을 ‘겪는’ 중이다. 사랑하는 가족의 실제적인 죽음은 철학자인 그녀가 생각하던 죽음의 관념보다 훨씬 더 절망적이고 고독하며 우울하고 공허하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병실 침대에 누워 온갖 고통을 감당하며 죽음으로 홀로 걸어가는 엄마를 보며, 삶이 지독하게 고독하다는 것을 처절하게 느낀다. -나는 사르트르에게 그날 아침에 내가 보았던 엄마의 모습을 그대로 이야기했다. 그리고 내가 거기서 읽을 수 있었던 것들을 빼놓지 않고 이야기했다. 거절당한 탐욕, 비굴할 정도의 겸손, 희망, 참담함, 결코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던 고독을. 그 고독은 죽음 앞에 혼자 서야 하는 고독이자 결국 혼자일 수밖에 없는 삶에 대한 고독이었다. 엄마에 대한 연민으로 내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p.55) 원래 엄마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엄마는 자신의 삶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다른 신자들처럼 죽음을 ‘신의 곁으로 가는 일’로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렇다, 그것은 죽음에의 저항이었다. -나에게도, 더구나 엄마에게도, 종교가 죽음 뒤에 오는 행복에 대한 희망일 수는 없었다. 영원불멸이라는 것이 천국에서 이루어지든 지상에서 이루어지든, 삶을 사랑하는 자에게 그 영원불멸이 죽음에 대한 위로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p.190) 두 딸이 바라던 대로 엄마는 너무 고통스럽지는 않게 눈을 감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엄마의 죽음은 ‘프랑수아즈 드 보부아르(엄마)’의 존재를 더 선명하게 만든 동시에 그녀를 둘러싼 세계를 영원히 끝나게 했다. 보부아르에게 엄마의 죽음은 ‘죽을만 해서’ 닥친 것이 아니고 존재를 강탈당한 사건으로 인식되었다. 저항하는 한 존재를 기어코 없어지게 만드는 죽음이라는 ‘폭력’이 지나간 자리는, 공허하다. -우리는 모두 죽어야 할 운명이고, 80세면 죽어도 그다지 억울하지 않을 만한 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사람은 태어났기 때문에 죽는 게 아니었다. 다 살았기 때문에 죽는 게 아니었다. 늙었기 때문에 죽는 것도 아니었다. 사람은 ‘그 무엇인가’에 의해 죽을 뿐이다. (p.216) -자연사란 없다. 인간에게 닥쳐오는 어떤 일도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세상에 그들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그러나 개인에게 자신의 죽음은 하나의 돌발 사건이다. 죽음은, 그가 인식하고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무엇으로든 정당화할 수 없는 폭력이다. (p.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