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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이 가능할까? 사랑 역시 사람의 감정에 대한 표현이기에, 그 구체적인 모습과 감정들은 겪는 이들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기본적으로 사람의 감정은 항상 동등한 수치로 교환되는 것이 아니기에, 어느 한편으로 감정의 무게가 기울면 더 이상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가 없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독자들은 누군가의 사랑 얘기에 공감하기도 하지만, 어떤 스토리에 대해서는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에 공감을 하지 못하기도 한다. 이 책에서 제목으로 설정하고 있는 ‘에로스’ 역시 사랑의 한 형태로 지칭되는 용어이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의 이름이기도 하며, '에로틱'이라는 수식어에서 연상되듯 흔히 격정적인 사랑의 형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독일에서 활동하는 철학자 한병철의 예술이론에 관한 책으로, 사랑의 한 범주로 여겨지는 '에로스'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책에는 독특하게 저자 서문이 아닌 알랭 바디유의 글이 서문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에로스의 관점에서 '사랑의 재발견'이라는 관점에서 저자의 글을 평하고 있다. 책의 목차에 따라 세밀하게 정리하고 있어, 책을 읽기 전에 서문을 통해서 일차적으로 내용에 대해서 점검해볼 수 있었다. 그러나 본문의 내용들은 처음에는 다소 어렵게 느껴졌는데, 그것은 아마도 저자가 특정 예술 작품을 예로 들면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영화와 그림 그리고 음악 등을 전거로 하여 펼쳐낸 저자의 사랑론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논의가 추상적으로 전개되어 다소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저자가 제시한 영화 등의 작품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여겨진다.
문고본의 크기로 100면 남짓의 간략한 분량이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은 그리 간단치 않다고 생각되었다. 전체 7장으로 구분하여 '에로스와 사랑'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세밀한 목차에 걸맞게 다양한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멜랑콜리아’라는 제목의 1장은 라스폰 트리에의 영화 ‘멜랑콜리아’와 그 작품에 등장하는 그림과 음악 등을 예로 들어 에로스의 본질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할 수 있을 수 없음’이라는 다소 역설적인 문장으로 이뤄진 2장의 내용 역시 푸코와 레비나스 등의 이론을 끌어들여, 사랑의 복잡하면서도 미묘한 성격을 제시하고 있다. 이어지는 항목들에서도 헤겔과 아감벤 그리고 바르트 등 다양한 사상가들의 이론이 동원되면서, ‘포르노’와 ‘환상’ 등의 제목으로 에로스와의 관련을 설명하고 있다.
<에로스의 종말>이라는 책의 제목은, 아마도 진정한 사랑이란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제목에 담은 것이라 이해된다. 다양한 이론을 통해서 에로스의 본질과 의미를 설명하고 있는 이 책이, 마지막 7장에서 ‘이론의 종말’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의미심장하게 생각되었다. 에로스를 포함한 사랑의 본질은 결국 이론을 통해서는 완벽하게 설명되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에도 저자는 이 장의 내용 역시 다양한 이론들로 채우고 있다. 실제로 사랑의 본질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 뿐더러 그에 대한 관점도 사람마다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저자의 논리에 공감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나 역시 그 본질을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별개로, 이 책을 읽으면서 사랑에 대해 재삼 음미할 수 있었던 시간을 가졌던 것에 만족하고자 한다.(차니) * 개인의 독서 기록 공간인 포털사이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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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 작가는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작가다. 서울대 사회학과의 김홍중 교수님과 더불어 이 분들의 책을 읽고 있으면 내가 하고 싶었던 연구와 말들을 어떻게 이렇게 정확히 풀어놓고 있는지 좌절감이 들게 한다. 그리고 책을 모두 읽고 나면 사고의 폭이 확장되는 것을 안쓰던 뇌의 부분에 실질적인 자극으로 느낄수 있을 정도다. 무튼 요즘 사랑에 관한 글을 쓰고 있는데 도움을 좀 받아야 할 것 같아서 관련 책들을 찾아보고 있었고, 한병철 선생님께서도 마침 에로스의 종말이란 제목의 책을 쓰셨기에 망설임 없이 구매하게되었다. 책의 서문에 “..진정한 사랑은 타자가 도래하기 위해 정신이 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나 이외의 것, 나의 피부 바깥의 모든 것들은 내가 아닌 것들이다. 공기도 사물도 자연도 사람도 나 아닌 모든 것들은 그렇기에 철저한 부정의 존재들이다. 그러나 사랑은 그러한 완전한 부정성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를 위해 나는 내 안에 존재하는 나에 대한 긍정성을 줄여야 할 수 밖에 없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것이 사랑인지 아닌지 조차 알 수 없을 초반에 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슬맺힌 풀잎 끝에도 ‘너’가 있다는 표현의 시를 지을 수 있는 것이다. 어쨌든 한창 고민이 많던 시기에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서 온종일 그에 대한 생각만 하느라 모든 고민이나 번뇌가 사라졌던 기억이 난다. 나는 나의 뇌 안에 그가 대신 들어와 앉아 그가 나의 번뇌를 모두 짊어지고 생각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것이 완전히 타인을 받아들였던 경험이 아닌가 싶다. 현대 사회에서 그러한 진정한 사랑이 도대체 가능한 이야기인가 깊은 고민에 빠진다. 왜냐하면 부정과 긍정이라는 나와 타자의 구분의 전제 조차 무색해 질 정도로 모두가 ‘동일자로 평준화’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오늘날 모든 삶의 영역에서 타자의 침식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 이와 아울러 자아의 나르시스트화 경향이 강화되어가고 있다는 점에 있다”(p.18)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는지 조차 알지 못한 채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것은 허상과도 같고, 밑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다. 애초에 맨 바닥에 감정을 계속해서 쏟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갈증을 느낀다. 채워지지 않는 충만한 마음의 갈증. 이 책에 따르면 그것은 나를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비우는 부정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저자는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멜랑콜리아]라는 영화 작품을 통해 그러한 사랑과 우울에 대한 관련성을 말한다. 사랑은 타자의 침입이자 자신의 부정이다. 에로스는 그렇기에 나르시즘적 자아 우울을 끊어내는 힘이 있다고 한다. 학교에서 꽤 많은 아이들이 자해를 한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했고 예방을 위한 관련 연수에도 참여했지만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은 아직도 부재한다는 사실을 느꼈었다. 내가 현장에서 직접 목격한 것은 ‘청소년 자해’가 예방하고 상담하는 것이 물론 대처방안으로 필요하지만 이제는 또 다른 접근 방식과 이해의 관점에서 그 문제를 다뤄야 할 만큼 막을 수 없는 ‘사회적 사실’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에로스의 종말’을 읽으며 아직은 뚜렷하지 않지만 그에 대한 단서를 조금은 얻을 수 있었다. 자해는 얼핏 보기에 자신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을 죽이려고 하거나, 자신에게 상처 입히는 것만큼 뚜렷한 자기 부정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해러’, ‘자해계’라는 용어가 만들어질만큼 아이들은 자신이 자해한 모습을 SNS를 통해 공유하고 전시하고 있다. 이것은 자신의 부정이 아닌 책에서 말하고 있는 ‘나르시즘적’ 행위이며 과도한 자기 긍정의 신호로 해석될 수도 있다고 본다. 그것이 상처의 형태로만 나타날 뿐이지 자해한 상처는 오히려 이들에게 자기 착취를 통해 얻은 성과이며, 이러한 실체없는 성과를 통해 결국 심리적 파산상태에 이르고 만다. “우울한 나르시즘적인 주체는 어떤 결론도 맺지 못한다. 하지만 결론이 맺어지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흘러가고 떠내려가버릴 것이다. 우울증의 주체가 안정된 자아상을 갖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우유부단함, 결단력의 결핍이 우울증의 전형적 증상이라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울증은 과도한 개방과 탈경계의 와중에서 끝맺음을 하고 완결지을 수 있는 능력이 실종되어버린 이 시대의 특징적 현상이다. 사람들은 삶을 완결지을 줄 모르기 때문에 죽는 법도 잊어버렸다. 성과 주체 역시 결론을 맺지 못하고, 완결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그는 더 많은 실적을 올려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바스러진다.”(p58) 그러한 아이들의 심리상태의 근원지를 따라가다 보면 채워지지 못한 사랑의 갈증을 만나게 된다. 애초에 진정한 사랑을 받아본적이 없는 부모가 아이들에게 비뚫어진 사랑을 주고, 그 사랑을 받아 또 비뚫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악순환의 고리 안에서도 자해하지 않는 아이도 있다. 그러나 내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자해하는 아이들에 대한 내용이며 점차 그런 아이들이 많아지는 것을 보면서 이사회에 앞으로 진정 에로스의 종말이 도래할 것이란 추측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자기를 사랑할 것을 가르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자기가 누구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고 너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은 가르쳐주지 않은 공식을 내어주고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어라는 잘못된 문제에 불과하단 생각이 든다. 나또한 책임감없이 아이들에게 네 인생을 사랑해라, 말했던 것을 이 책을 읽으며 후회했다. 꼼꼼히 따져보지 않은 채 자해하는 아이들에게 그저 생각없이 좋은 말이라고 여겨 단순히 따라서 말한 것에 그친 것이 아닌가 처절한 자기반성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나 또한 나를 비우지 못한 채 아이들을 사랑한다, 착각하며 오히려 나를 나르시스트와 같이 사랑한게 아닐까. 과거에 누구도 사랑한적 없이 살아온 것은 아닐까, 앞으로도 누군가를 진정 사랑할 수 있을까 여러 모로 읽고 난 후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역시 무엇이든 완전에 이르는 길은 험난하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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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 혹은 타자와 더불어 사유하는 능력 - 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한병철은 에로스를 “나의 지배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를 향한 것”(18쪽)이라고 단언한다. 에로스가 향하는 타자는 무한의 영역에 존재한다. 무한은 의미로 환원될 수 없는 잉여를 내장하고 있다. 지은이는 동일자의 지옥이 되어버린 오늘의 사회를 넘어서는 대안으로 타자의 비대칭성과 외재성을 전제하는 에로스를 제시한다. 그는 타자를 아토포스(atopos)로 부른다. 아토포스는 ‘장소가 없는’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현대의 소비사회는 이러한 아토포스로서 타자성을 제거하고 이를 소비 가능한,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적 차이로 대체한다. 미셸 푸코가 고안한 헤테로토피아는 ‘다른heteros’와 ‘장소topos’의 합성어이다. 현실 밖에 있지만 동시에 현실 속에 존재하는 공간으로서 헤테로토피아는 현실이 된 유토피아를 가리킨다. 이를테면 성소, 금기 구역, 정원, 묘지, 정신병원, 도서관, 극장, 축제 등이 이에 해당된다. 지은이는 이러한 헤테로토피아적 차이를 타자성과 반대되는 일종의 긍정성으로 규정한다. 긍정성의 반대편에 부정성이 있다. 지은이는 오늘날 부정성은 도처에서 소멸하고 긍정성이 그것을 뒤덮고 있다고 주장한다. 에스엔에스(SNS) 상에서 우리가 아무 의미 없이 누르는 ‘좋아요’가 이러한 긍정성을 대표하는 예시이다.
에로스가 타자로 가는 길을 연다면, 나르시시즘적 질병인 우울증은 주체를 자기 속으로 추락하게 만드는 길을 연다. 오늘날 나르시시즘에 빠진 성과주체는 무엇보다 성공에 집착한다. 성공으로 가는 길 위에는 타자성이 존재할 자리가 없다. 무한 경쟁이 금과옥조처럼 받아들여지는 신자유주의 사회를 떠올려 보라. 신자유주의를 긍정하는 성과주체들은 언제나 ‘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스스로를 소진시킨다. 성과주체는 언제나 ‘나’를 중심에 두려고 한다.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남들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타자들과 벌이는 무한 경쟁에서 이기려면 그래서 끊임없이 노력을 해야 한다. 노력만으로는 안 된다. 안 되는 상황을 되는 상황으로 만드는 ‘할 수 있다’는 마음이 필요하다. 지은이는 성과주체가 살아가는 성과사회와 이전의 규율사회를 구분한다. “성과사회는 금지 명령을 발하고 당위(‘해야 한다’)를 동원하는 규율사회와 반대로 전적으로 ‘할 수 있다’는 조동사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29쪽) ‘해야 한다’와 ‘할 수 있다’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생산성이 어느 지점에 이르면 해야 함은 곧 한계를 드러낸다. 생산성의 향상을 위해서 해야 함은 할 수 있음으로 대체된다. 착취를 위해서는 동기 부여, 자발성, 자기 주도적 프로젝트를 부르짖는 것이 채찍이나 명령보다 더 효과적이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 명령하고 착취하는 타자에게 예속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는 자유롭다고 할 수 있지만, 결코 진정으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주체는 자기 자신을, 그것도 자발적으로, 착취하기 때문이다. 착취자는 피착취자이기도 하다.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다. 자기 착취는 자유의 감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까닭에 타자 착취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다. 이로써 지배 없는 착취가 가능해진다. (29~30쪽)
오늘을 사는 우리는 ‘동기 부여, 자발성, 자기 주도적 프로젝트’ 등과 같은 용어들을 자주 쓴다. ‘자기 계발’이라는 명목 아래 무분별하게 살포되는 이 용어들에서 지은이는 생산성의 한계에 이른 규율 사회의 이면을 본다. 규율 사회는 ‘해야 한다’는 당위로 사람들을 독려하지만, 그 규율이 사람들 내면에 새겨지지 않는 한 그 한계 지점은 명확할 수밖에 없다. 성과사회는 ‘해야 함’을 ‘할 수 있다’는 말로 대체한다. ‘할 수 있다’고 외치는 성과주체는 스스로를 자유로운 주체로 오인한다. 내가 지금 이렇게 몸을 소진하며 일을 하는 것은 ‘나’를 위해서이다. 누군가가 세운 규율에 따라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든 규율에 따라 ‘긍정적인 마음’으로 일을 한다는 것. 지은이는 이러한 상황을 ‘자기 착취’로 정리하며 “자기 착취는 자유의 감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까닭에 타자 착취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라고 말한다. 모든 사람이 경영자(?)가 되는 성과사회에서는 지배 없는 착취가 가능해지는 셈이다.
자기를 강제하는 마음은 타자를 강제하는 마음보다 더욱 치명적으로 성과주체를 압박한다. 타자 강제에는 저항하려는 마음이라도 낼 수 있지만, 자기 자신에게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경영자로서 성과주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신자유주의를 선전하는 매체가 된다. 신자유주의는 사람들을 자유의 환상 속으로 빠뜨린다. 환상 속에서 성과주체는 스스로를 기획하는 프로젝트Projekt로 이해한다. 스스로가 기획한 일이므로 일에 실패하면 책임은 당연히 성과주체가 져야 한다. 조직에 속해 있는 자영업자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성공하면 그가 속한 조직은 막대한 이익을 취하지만, 실패하면 그 책임은 오로지 성과주체가 진다. 이것이 ‘무한 경쟁’이라는 신자유주의 담론에 감추어진 비밀이다. 신자유주의는 ‘자유’라는 말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유혹에 빠진 사람들은 성공의 길로 매진한다. 성공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오로지 자기 능력에 달려 있다. 타자와의 경쟁에서 이기면 성공하고, 타자와의 경쟁에서 지면 실패한다.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우리가 에로스를 기대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지은이를 따르면 “에로스는 타자에 대한 비대칭적 관계다. 에로스는 교환 관계를 중단시킨다. 이질성은 부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질성은 대차대조표 상에 나타나지 않는다.”(48쪽) 타자를 무한 경쟁의 소비 대상으로 생각하는 성과주체들은 애초부터 타자를 비대칭적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타자는 어떻게든 밟고 넘어서야 할 존재이다.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모든 사람들을 밟고 넘어서야 한다는 상황이 무한 경쟁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점에 있다. 성과사회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타자를 넘어서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도 넘어서야 한다. ‘자기 계발’은 자기를 넘어서는 방법을 사회적으로 유포한다. 자존감이 없으면 자기 스스로 자존감을 살려야 한다. 우울증에 빠지지 않으려면 자기 스스로 우울증에 빠지지 않는 인간관계를 맺어야 한다. 사회가 사라진 자리에 고립된 개인들이 들어선다. 타자는 사라지고 수많은 주체들만이 광장에 좀비처럼 우글거리고 있는 것이다.
지은이는 헤겔이 주장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으로 성과사회의 우울한 풍경에 접근한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삶과 죽음을 건 싸움을 가리킨다. 성과주체들은 온힘을 다해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려고 노력한다. 살기 아니면 죽기다. 성공에 다다른 성과주체들은 그럼 노예를 벗어나 주인이 된 것인가? 지은이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한다. 성과주체들은 무엇보다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성과주체들은 지금 사회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한다.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목숨을 거는 척 연기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스스로를 착취하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스스로를 기획 주체로 생각하는 성과주체들은 무한 경쟁 사회에서 떨려나는 걸 그 무엇보다 무서워한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든 타자들을 바깥으로 내몰려고 한다. 세계화라는 담론과 더불어 강화되는 극우 민족주의나 테러리즘을 생각해 보라. 세계화는 장벽을 철폐하는 게 아니라 더 높은 장벽을 쌓는다. 세계화 바깥으로 내몰린 난민들이 이 장벽을 넘을 수 없는 것은 이리 보면 당연한 현상이라고 하겠다.
모두가 자기 자신의 경영자인 사회에서는 생존의 경제가 지배한다. 그것은 에로스, 혹은 죽음의 비경제와 정반대된다. 자아의 충동과 성과의 충동이 전혀 억제되지 않는 신자유주의의 사회 질서 속에서 에로스는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죽음의 부정성을 밀어내버린 긍정사회는 오직 “불연속성 속에서 생존을 확보”해야 한다는 일념만이 지배하는 벌거벗은 삶의 사회다. 그러한 삶이란 노예의 삶일 뿐이다. 벌거벗은 삶에 대한 염려, 생존에 대한 염려는 삶에서 모든 생동성을 빼앗아간다. 생동성은 대단히 복합적인 현상이다. 오직 긍정적이기만 한 것은 생동성이 없다. 부정적인 것은 생동성의 본질적 계기를 이룬다. “그러니까 오직 모순을 자기 안에 내포하고 있는 것, 모순을 자기 안에 품고 견딜 수 있는 힘을 지닌 것만이 살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생동성은 벌거벗은 삶의 활력 또는 건강한 체력과 구별된다. 벌거벗은 삶의 활력에는 어떤 부정성도 없다. 생존하는 자는 살아 있기에는 너무 죽어 있고 죽기에는 너무 살아 있는 산송장과 비슷한 존재다. (61~62쪽)
생존의 경제는 살아남기 위해 타자와 무한 경쟁을 벌이는 상황을 나타낸다. 성과의 충동이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오로지 현실을 긍정하는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긍정이라는 것은 어떤 상황에 처해서도 ‘할 수 있다’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처럼, 무한 경쟁에 내몰린 사람들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즐기려는 마음으로 세상에 적응한다. 지금을 긍정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상황에서 지금 너머를 생각하는 게 무슨 소용인가? 그래서 생존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벌거벗은 삶을 유지하는 일에만 집중한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살아남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어떻게 사느냐는 다음 문제다. 살아남기도 힘든데 ‘잘 사는’ 문제를 생각할 겨를이 어디에 있는가? 지은이는 생존의 경제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생존하는 자”라고 표현한다. 그들은 “살아 있기에는 너무 죽어 있고 죽기에는 너무 살아 있는 산송장과 비슷한 존재다.” 죽음을 모르는 좀비와 같은 존재들이라고 해도 좋겠다.
‘산송장’이라는 말을 듣고 우리가 사는 사회를 너무 비하하는 게 아니냐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질문을 던지기 전에 우리는 살아있는 사람을 ‘산송장’으로 만드는 신자유주의 사회를 먼저 들여다봐야 한다. 한국사회에서 신자유주의는 1997년에 일어난 아이엠에프(IMF) 이후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지금 우리가 흔하게 듣는 비정규직이니 하는 말은 바로 이때 생겨났다. 비정규직은 말 그대로 정규직이 아닌 사람들을 가리킨다. 정규직은 정년까지 일이 보장된다. 당연히 기업에서 함부로 자를 수도 없다. 비정규직은 다르다. 계약직인 비정규직은 기간이 채워지면 아무 이유 없이 잘릴 수 있다. ‘성과’를 기준으로 계약이 연장될 텐데, 성과의 기준을 만드는 것은 당연히 기업이다. 비정규직은 일을 계속 하려면 뚜렷한 성과를 내야 한다. 기업 입장에서는 참 좋은 제도이다. 마음에 들면 계약하면 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계약을 해지하면 된다. ‘국가 부도 사태’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기업(한국사회에서는 재벌)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국민들을 제 손아귀에 틀어 쥔 것이다.
‘산송장’이라는 말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나온 말이다. 일하는 사람을 비하하는 말이 아니라는 얘기다. 갑과 을의 관계를 생각해도 좋다. 기업은 당연히 갑이 되고, 비정규직은 을이 된다. 설사 정규직으로 기업에 들어가도 비정규직인 것은 마찬가지다. 40대가 훌쩍 넘으면 기업에서는 퇴직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승진의 문은 올라갈수록 더욱 좁아지기 마련 아닌가. 기업에 취직을 하는 것도 어렵지만, 취직 후 승진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무한 경쟁은 또 다른 무한 경쟁으로 이어져 결국에 살아남는 사람은 극소수다. 경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여전히 무한 경쟁 논리를 다음 세대에 적용한다. ‘출신 성분’이 좋은 사람들이야 무한 경쟁을 하지 않고도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지만, 출신 성분이 안 좋은 이들은 애초부터 무한 경쟁을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신자유주의는 사람들의 이러한 약점을 교묘히 이용하여 자본의 논리를 관철하는 도구로 삼는다. 자본이 만든 세상에 살려면 자본의 논리를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자본의 논리를 거부하는 순간 우리는 정말로 송장이 될 수 있다. 송장이 되지 않기 위해 ‘산송장’이 되는 격이라고나 할까.
과잉가시성은 문턱과 경계의 해체 과정과 함께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것은 투명사회가 지향하는 궁극적 목표다. 평탄하게 다듬어진 공간은 투명하다. 문턱과 다리는 아토포스적 타자가 등장하기 시작하는 비밀스럽고 수수께끼 같은 지대다. 경계와 문턱이 사라짐과 동시에 타자에 대한 환상도 사라진다. 문턱의 부정성이, 문턱의 경험이 없는 곳에서는 환상도 위축된다. 오늘날 예술과 문학이 직면한 위기의 원인은 환상의 위기, 타자의 소멸, 즉 에로스의 종말에서 찾을 수 있다. (80쪽)
산송장들이 비틀거리며 떠도는 사회에는 문턱과 경계가 없다. 문턱과 경계는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는 지점이다. ‘틈새’라는 말로 표현해도 좋다. 새로운 상상이 시작되는 지점. 낯선 것이 갑작스레 튀어나오는 지점. 다른 것이 같은 것들 속으로 섞이는 지점. 지은이 말대로라면 긍정만이 넘치는 세상에 부정성이 들어서는 지점. 문턱과 경계가 없는 사회는 한없이 투명하다. 다른 길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계와 문턱이 사라지면 타자에 대한 환상도 사라진다. 타자를 무한 경쟁의 대상으로 보는 사회에서 어떻게 타자에 대한 환상에 빠질 수 있겠는가. 지은이는 오늘날 예술과 문학이 직면한 위기의 원인을 이러한 환상의 소멸에서 찾고 있다. 타자에 대한 환상이 소멸했다는 것은 타자와 더불어 펼치는 에로스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의 제목인 ‘에로스의 종말’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된다. 에로스의 종말은 곧 타자가 소멸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지은이는 “에로스는 사유를 이끌고 유혹하여 전인미답의 지대를, 아토포스적인 타자를 거쳐가게 한다.”(96쪽)고 주장한다. 전인미답의 지대는 아무도 발을 딛지 않은 곳이다. 아무도 발을 딛지 않았으므로 그곳에는 수많은 의미가 다양하게 열려 있다. 정확히 말하면 그곳은 아토피아와 같은 곳이다. 어디에도 없는 곳.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그곳을 상상으로 떠올릴 수 있다. 어디에도 없는 아토피아는 상상을 통해 어디에나 있는 장소로 거듭난다. 에로스가 사라진 세계에서는 의미가 뻗어 나오는 원천인 타자가 애초부터 배제된다. 타자와의 공감이 없는 에로스가 과연 가능한가? 그것은 나르시시즘에 불과할 뿐이다. 지은이가 에로스를 타자를 향한 ‘사유’와 연결시키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사유’는 언제나 바깥으로 향한다. 바깥이 없는 사유는 나르시시즘에 빠진 우울한 주체를 양산할 뿐이다. 좀비에 물린 사람들은 좀비가 된다. 좀비는 바깥이 없다. 성과주체가 왜 좀비와 같은 산송장으로 불리겠는가? 성과주체는 사회의 바깥을 상상하지 않는다. 바깥을 상상하지 않는 주체는 에로스를 모른다.
지은이는 플라톤을 빌려, 포로스(풍요의 신)를 에로스의 아버지라고 주장한다. 포로스는 ‘길’을 의미한다. 풍요로 가는 길. 그리로 가려면 에로스라는 ‘사유’가 필요하다. 에로스가 실현되는 길은 타자를 환대하는 길과 다르지 않다. 신자유주의는 무엇보다 타자를 환대의 길 바깥으로 내쫓음으로써 이 세계 전체를 지배한다. 세계화에 드리워진 짙은 그늘을 떠올려 보라. 세계화는 가진 자들을 위한 체제로 이 세상에 실현된다. 가진 자들은 세계 곳곳을 제 집처럼 드나들 수 있지만, 없는 자들은 자기가 사는 곳에서조차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다. 신자유주의는 국가와 정부의 역할을 어떻게든 축소하려고 한다. 개인이 공동체를 벗어나 단지 개인으로만 자유로운 사회를 신자유주의는 그린다. ‘개인’으로 존재할 수 없는 사람들은 그럼 어떻게 되는 것일까? 자기 착취에 빠진 성과주체가 그 개인들의 미래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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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책을 추천하거나 찬양하는 일이 때때로 폭력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지난 초여름부터 초가을 사이 내게 가장 짙은 영감을 준 책이 한 권 있다. 바로 한병철의 <The agony of Eros 에로스의 종말>이다. 이 책에서 다수 인용된 문장들에 잔뜩 반한터라, 머지 않아 알랭 바디우의 <사랑예찬>과 에바 일루즈의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도 읽을 수 있었다. 세 책을 같이 읽으면 현대사회를 에로스에 연결지어 사유하는 데 시너지를 낼 수 있다.
현대인의 앎, 사유, 그리고 사랑은 전시가치에 종속되어 있다. 보여주기 전까지는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것이다. 더불어 이들은 마트에서 주고받는 화폐처럼 값이 매겨지고‘교환’된다. 우리는 과잉의 정보를 충분한 지식으로 착각하고 있으며, 오래 머무르는 일보다는 쉽고 빠른 쾌락을 추구한다. 성격 유형 검사, 소셜 네트워크를 통한 자기반성 및 자기표현, 특정 감성이 곧 유행으로 전락하는 사회, 토크 콘서트, 수많은 독서모임, 이야기 모임, 상담과 글쓰기 수업.
왜 2022년의 우리는 나 자신을 제대로 알고 싶어 전전긍긍하는 걸까? 어떤 부분이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있는 걸까? 라는 의문을 가졌던 적이 있다. 무언가를 목표로 삼고 분주하게 살아가는 와중에도 인간은 그것이 진정한 ‘나의 것’이 아님을 자각한다. 현대인의 일분일초에는 초대받지 않은 타자의 삶들이 침투한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는, 분주하다. 주류에 뒤처지지 않는 사랑을 하고 있다고 전시해야 하고, 남들이 아는 정보는 같이 알아야 하고, 남의 일상까지도 들여다 봐야 직성이 풀리며, 청소년들은 자신의 꿈보다 타인의 꿈을 더 궁금해 한다.
최근 플라톤의 대화편 중 <symposium>을 읽었다. 기원전 그리스의 심포지온 현장에서 ‘에로스신’을 각기 다른 관점에서 찬양하는 이 책과 한병철의 <에로스의 종말>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떠올리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그 역사의 간극 속에서 우리가 얻은 건 무엇이고, 상실한 건 무엇일까.
한병철의 사유 여정을 함께 시작하기 앞서 우리는 기존의 ‘에로스’와 ‘포르노’를 구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포르노는 어떠한 이면도, 내러티브도, 진정한 환상도 지니지 않는다. 반면 에로스는 아토포스(무소성)적이며, 나를 타자에게 내던질 때 발생한다. 한병철은 현대인의 나르시시즘적 우울증을 "과도한 개방과 탈경계의 와중에서 끝맺음을 하고 완결지을 수 있는 능력이 실종되어버린 이 시대의 특징"으로 설명한다.
그는 담담하게 지적한다. 어쩌면 비극적인 발언이다. “현대사회는 진정한 에로스를 상실했다. 사회는 포르노그래피로 전락했다.”
한병철은 <에로스의 종말>, 그리고 <투명사회>에서 공통적으로 현대사회의 뜨거운 투명성에 대해 논의한다. 그는 니체의 용어를 빌려 말한다. 우리는 ‘거리의 파토스’를 상실했다고. 빠르고 자극적인 반응만을 독촉하는 미디어의 전형이나, 데이터를 복제하거나 삭제하는 식으로 인간관계를 대하는 현대인의 모습에서 이러한 현상들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서로를 잘 안다고 착각하고, 서로를 잘 알아야만 한다고 믿는 현대인들의 모습에서는 폭력적인 투명성들이 발견된다. 더불어 그는 현대인을 ‘성과주체’라고 칭하며, I can의 사유가 뿌리깊게 내려앉은 성과중심주의 문화에 대해 고찰한다. 우리는 할 수 있고, 그래서 하기만 하면 돼. 그렇게 비가시적인 착취가 순환되고, 판옵티콘은 끝없이 생성된다.
“자기 강제는 타자 강제보다 더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게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체제는 자신의 강제 구조를 개개인이 누리고 있는 가상의 자유 뒤로 숨긴다. 그 속에서 개개인은 스스로를 더 이상 예속된 주체가 아니라 기획하는 프로젝트로 이해한다.”
성과주체들은 자신이 직접 만든 판옵티콘 속에서 살아가는 데 익숙해졌다. 여기서 ‘자기착취 self-exploitation’이라는 한병철의 주요 개념 또한 이해할 수 있다. 착취자와 피착취자가 명확하지 않은 사회. 타자와 나의 경계가 희미해지다 못해 소실된 사회. 전시가치를 제쳐두고는 특정한 이벤트나 사물의 가치를 논하기가 어려워진 시대.
2022년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세상의 이미지들을 떠올려보자. 겉보기에는 엄청난 속도로 다양성과 개성을 쫓는 것 같지만, 실은 서로가 서로를 '과잉'으로 감시하고 훔쳐보며 "동일자의 지옥"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 하다. 진정한 에로스는 '부정성의 가치' 그리고 '이질성의 가치'에서 비롯된다.
성과, 누적, 개선, 발전, 성장. 이 반짝거리는 단어들에게서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더불어 잃어가고, 비우고, 상실하고, 때로는 실패하는 행위들은 과연 열등한가? 열등함은 우월함보다 열등한가? <에로스의 종말>은 사회를 지적하는 데 급급한 '불편러'가 아니다. 이 책은 우리와 닿아있다. 심지어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는 행위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ubc 학교서점에서 독일어가 영어로 번역된 <The agony of Eros>를 처음 구매했고, 나는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이 책은 얇지만, 묵직하고도 영원한 사유를 자극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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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죽음의 역사>에 대한 글을 쓰면서 나는 죽음의 이야기는 살아있는 자만이 들려줄 수 있는 것이라고 그래서 죽음의 역사는 곧 삶의 역사라고 말했다. 같은 이야기를 에로스의 종말에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누군가의 죽음을 보면서 그 사람의 생을 떠올린다. 마찬가지로 에로스의 종말에서 에로스는 피어난다. 에로스는 무엇인가. 이 책에서 에로스에 대한 정의는 동일성을 파괴하는 부정성의 현전으로 나온다. 이게 에로스를 관능으로 바로 번역하기 어려운 이유다. 한병철은 자본주의 시대를 동일자의 시대라고 말한다. 나와 너는 다르지만 우리는 같다. 왜 그런가. 바로 우리가 같은 욕망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이다. 나는 차를 사고 싶어하지만 너는 애완동물을 키우고 싶어할 수도 있다. 이것을 위해 필요한 것은 돈이다. 누군가는 많은 돈을 원하고 누군가는 그보다 적은 돈을 원하지만 중요한 것은 너와 내가 자본의 자유 속에 살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돈으로 움직이는 세상에서 돈 걱정하지 않고 사는 자유를 꿈꾼다. 이 자유를 꿈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에로스는 악몽이다. 에로스는 동일성을 파괴하는 부정성이다. 나는 나와 다른 욕망을 가진 비동일자에게서 에로스를 느낀다. 그러니 에로스의 다른 이름은 사랑일 수 있다. 왜냐하면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나는 자본의 자유를 꿈꾸는 욕망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동일자의 자아는 에로스라는 부정성에 의해 사멸한 뒤 그 속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부활한다. 윤종신의 <환생> 중 “오 놀라워라. 처음 보는 내 모습”라는 가사는 말하자면 너로 인해 새롭게 태어난 나를 가리킨다. 에로스는 부정성으로 동일자의 죽인 뒤 새롭게 탄생시키고 사랑은 원래의 나를 죽인 뒤 새로운 나를 만든다. 그러므로 에로스는 사랑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 프로이트는 에로스를 그 짝인 타나토스와 묶으면서 전자를 생에 대한 충동으로 후자를 죽음에 대한 충동으로 설명한 바 있다. 이 말은 얼핏 보기에 이상하다. 부정성은 자아를 살해한 뒤 부활시킨다. 그렇다면 에로스는 오히려 죽음에 대한 충동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로스를 생에 대한 충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이 생이 동일자의 생이 아니라 부정성으로 인해 새롭게 태어난 생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말이 맞다면 에로스는 욕망을 좌절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욕망을 각성시킨다. 에로스는 거대한 부정성으로서 완강하게 닫힌 나의 삶에 균열을 내고 그것을 깨뜨린 뒤 새롭게 조직한다. 동일자의 세계에서 나는 늘 심심하거나 불안하다. 내 삶이 움직이는 방식은 남들과 같으므로 어딜봐도 새로운 것은 없어서 심심하고 삶은 시간만 남아 있을 뿐 이대로 완결된 게 아닐까 싶어서 불안하다. 에로스는 이 심심하고 불안한 삶을 가로막는다. 이 삶은 닫혀 있으므로 완강하다. 나는 에로스 앞에서 완강한 세계가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이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소멸하고 말 것 같은 공포에 휩싸인다. 그러나 이 공포는 한편으로 매혹이다. 에로스의 이름이 부정성인 이유는 나와 같지 않은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는 동시에 새로운 세계를 예감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 세계는 짐작조차 할 수 없어서 우주이거나 심해다. 하지만 이세계로 통하는 길은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문 뒤편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에로스 앞에 서 있곤 한다. 그 문을 두드려서 안으로 들어갈 용기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 문을 떠날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에로스는 희망希望이다. 에로스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과 기존 세계의 멸망을 암시한다. 생의 충동은 환희로만 채워져 있지 않다. 헤르만 헤세도 <데미안>에서 말하지 않았는가. 태어나려는 자는 세계를 부숴야만 한다고. 한병철이 <에로스의 종말>에서 종말을 언급한 것은 우리가 부정성이 사라져가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유튜브나 인터넷에서 쉽게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이제 신세계를 기대하지 않는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기존 세계의 안전성이다. 이 안전성을 위해 우리는 돈을 찾는다. 자본주의는 무엇이든지 돈으로 교환이 가능한 세계다. 교환 대상은 상품에 한정되지 않는다. 프로이트가 말한 출생 로망스는 내가 부유한 집의 자손이라는 상상을 부추기는데 이 말은 돈으로 가족도 바꿀 수 있다는 말이다. 얼마나 성공했느냐는 얼마나 돈을 벌었느냐 혹은 벌 수 있느냐로 판단된다. 돈이 있으면 아름다운 이성을 만나는 일이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고 돈이 있으면 가능한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돈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살 수 있는 것 같은 환상을 부추긴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환상이다. 한병철은 자본주의를 포르노에 비유한다. 포르노란 전시다. 그것은 아무것도 숨기는 것 없이 모든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면도 없고 비밀도 없다. 부정성은 어둠이므로 빛만 있는 곳에서는 태어날 수 없다. 자본주의는 세상의 모든 곳에 저울과 계산기를 가져다 댐으로써 크레딧 라이트를 비춘다. 그것이 무엇이건 가치는 ‘얼마’로 환산된다. 비싸면 가치 있는 것이고 싸면 가치 없다. 여기에는 금전적 가치 외에 다른 가치가 개입할 여지가 없으므로 모든 것은 ‘얼마’라는 빛에 노출된다. 나의 성공은 얼마를 벌었느냐에 달려 있으므로 동화책을 백일 동안 읽는데 성공한 것은 성공이 아니다. 하지만 그 동화책이 논술 시험에 나오는 텍스트라면 그것은 성공에 해당한다. 논술 시험은 성적을 말하고 성적은 그가 앞으로 얼마를 벌 수 있는지 알려주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 크레딧 라이트를 비추는 이 세계에 정말 어둠은 존재하지 않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격표를 붙일 수 있는 것이 점점 늘어나는 것처럼 보여도 세상에는 여전히 가격을 매길 수 없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눈앞에 나타난 부정성에 가격표를 붙임으로써 그것을 순식간에 동일자의 세계 혹은 포르노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가격표를 붙이기 망설여지는 것들이 있다. 나는 그것을 사랑이나 우정 혹은 가족이라고 말하지 않겠다. 한병철이 에로스라고 말하고 프로이트가 생의 충동이라고 말했던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에게 존재하는 향상성이다. 나는 사람에게는 세계에 머물고 싶어하는 욕망과 함께 세계를 뛰쳐나가고 싶은 욕망도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보르리야르가 <시뮬라시옹>에서 말하고 이후 <매트릭스> 같은 영화에서 구현된 가상의 세계는 현존과 탈출을 둘 다 말한다. 가령 <매트릭스> 속의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는 얼핏 가짜와 진실로 구분되어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쌍방의 진실과 거짓이다. 인간을 에너지원으로 삼는 세계에서 살기 싫은 사람은 매트릭스로 탈출하고 싶어하는 반면 매트릭스를 가짜 세계로 인식하는 사람은 진짜 세계로 탈출하고 싶어한다. 중요한 것은 어디가 진짜인가가 아니라 그곳이 어디든 우리는 파란 약 대신 빨간 약을 선택한다는 점이다. 지금과 다른 세상을 꿈꾸는 자에게 에로스는 사라지지 않는다. 빛은 어둠이 없으면 하얀 어둠이다. 우리는 모든 것이 가격으로 노출된 세상 속에서도 반드시 각자만의 어둠을 찾아낸다. 그리고 이 어둠에 붙이는 이름이야말로 생의 근원이다. 여기서 말하는 어둠은 가격을 환산할 수 없는 무가격성의 대상이지만 심리학적인 의미로도 사용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내면의 어둠, 즉 상처와 괴로움의 기억 혹은 트라우마 같은 것은 말하자면 그의 에로스다. 그는 바로 그러한 어둠을 껴안음으로써 어둠을 고통스러워했던 과거의 자신과 결별하고 새로운 삶을 쟁취한다. 나는 예전에 잊히지 않는 기억 속에는 앞으로 나아갈 문을 여는 열쇠가 있다고 적었다. 같은 말이다. 나의 미래는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 속에 존재한다. 에로스는 죽음이면서 삶이다. 2023년 10월 10일부터 2023년 11월 21일까지 읽고 생각하고 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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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한병철 작가의 책에 관심을 가지고 읽게 된것은 아마 나와 이 책을 읽는 많은 이들이 그렇듯 피로사회에서부터였을 것이다. 삶 자체에 조금은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내게 현대사회의 피로가 과도한 긍정성에서 온다는 내용의 책은 묘하게 위로가 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렇게 에로스의 종말까지도 읽게 되었다. 에로스의 종말은 그가 피로 사회에서 주장하고 있는 소진 된 인간들이 과연 어떻게 사랑을 소비하고 있는가에서 출발한다. 그가 보기에 현대인들은 사랑을 경제적으로 소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 같다. 과도한 긍정성은 사회적으로는 거대하고 우울한 피로를 낳았지만 개인적으로는 관계나 삶에 어떤 결말도 맺지 않고 책임도 지지 않으려는 그러면서도 사랑을 하려는 나르시시즘을 발생시켰다. 현대인들에게 사랑의 결말은 결혼이지만, 그것은 결말도 안정도 아니었기에 그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또다른 우울과 혼란야기하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그는 사랑의 존재를 믿는다. 각자가 주체자가 되어 결단하고 존재를 넓여주는 큰 의미의 사랑. 종말을 이야기 하지만 종말은 분명 또다른 창세를 불러 오는 것이기도 하다. 에로스의 종말은 자신이 쓴 피로사회에서 주장한 사상을 전제로 하여 다른 철학자들의 글을 비판하고, 소설이나 영화에서 자신이 생각한 것을 전개하기에 시작 되기에 그다지 새롭게 느껴지는 부분은 없음에도 읽는 이에게 기존에 가졌던 생각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온전히 사색에서 나온 철학이기 보다는 기존의 철학에 대한 비평을 통한 사상을 전개하는 방식은 그 철학을 알지 못한다면 짧은 책이지만 어렵게 느껴지고 공감하지 못할 부분도 분명 존재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읽고나면 분명 무언가를 생각하게 되는 책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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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쉬운 교양서들만 읽어오다 누군가의 추천에 단지 짧다는 이유만으로 구입. 그러고보니 이렇게 철학적 사고가 필요한 독서를 한 지가 얼마만 이던지. 짧고 술술 넘어가는 부분도 있지만 선뜻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많아 반복 독서가 필요한 책이다. 다행히도, 짧다. 에로스에 대한 고찰, 이라고 할까, 저자의 이전 저서에서 -많이 알려진 책인듯 하다- 말해오던 신 자유주의하의 성과 사회에서 자신에대한 착취가 이뤄지고 부정성을 보지 못하게끔 강요되는 현실에대한 탄식이라고나 할까. 에로스가 불가능해진 사회에대한 일갈이라고 할까. 정보 과잉 시대에서 또 다른 형태의 정보를 흡수하기 위해서 해온 나의 독서 습관을 뒤돌아보게 한 책이다. 정보보다는 사유가 더 중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