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민규의 단편소설은 발군이다. 분명히 그의 내러티브와 스타일의 독특함은 최근 나온 소설가들중 군계일학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핑퐁에 대한 기대도 컸다. 240페이지도 안되는 짧은 분량이지만 뭔가 굵직하게 내질러주는 something이 있을거라 믿었다. 그런데, 못과 모아이, 이지메 코드, 핑퐁과 지구의 생명체의 멸망, 영원한 듀스와 언인스톨이란 개념으로 풀어내는 이 책.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스타일이다. 뭐였지? 아.그래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그 소설이 줬던 기기묘묘하고 나른한 느낌. 그리고 구기종목으로 세상을 풀어내며 모든 역사가 그안에 있다고 '우기는' 태도. 소설은 뒤로 가면서 탄력이 붙지를 않는다. 어차피 성장소설의 코드가 함께 들어있기는 한데 그런 것 치고는 드라마의 힘이 약하다. 역시나 박민규는 고삐리 이야기보다는 힘빠진 30대의 무력감과 인생 뭐있어! 분위기가 어울리는 것 같다. 언론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은 소설치고는 먹을게 별로 없었단 말씀. |
|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주목 받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80 / 20의 사회라고 했던가. 단 20%의 힘에 의해 우리의 사회는 변화하고, 나머지 80%는 마치 20%를 돋보이게 만들기 위한 존재마냥 표류한다. 전자가 되기 위해 다들 부단히 노력하지만, 특권은 노력만으로는 획득할 수 없는 법. 사회의 법칙에 익숙해지는 것을 두고 우리는 ‘철이 든다’라는 표현을 한다. 하지만 이 작가는 아직 철들지 못한 듯하다. ‘한겨레 문학상’이라는 타이틀이 화려했던 것일까? 하지만 그의 첫 작품이었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작품성 좋은 혹은 잘 읽히는 소설 이상이었다. 신인 작가의 입에서 흘러 나온 이 야구팀의 이름은 잊고 지냈던 과거로 많은 이들을 인도했다. 이유야 각기 다르겠지만 무언가 생각하며 웃음 지을 수 있는 사람들, 일등만을 기억하는 세상에서 꼴찌를 기억하는 혁명적인 움직임을 그의 소설은 가능케 했다. 그 이후로 작가는 끊임없이 이류 혹은 삼류 인생에 대한 성찰에 젖어 들었다. 다소 난해하기도 했던 <카스테라> 역시 취업에 연거푸 실패한 남자가 등장하고, 오리배의 페달을 밟으며 인생을 씹는 소위 ‘비주류’ 인물이 등장한다. 이런 식으로, 어느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했을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가는 삶에 대한 또 하나의 지표를 제시해왔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은 모두 자기 삶에 있어서 만큼은 주인공임을… 평범한 이들의 입이 열릴 때마다 알아듣기 힘든 욕이 나온다. 누군가는 또 다른 누군가의 비난의 대상이 되고, 때론 심부름꾼 혹은 하인마냥 부림을 받기도 한다. 운 좋게도 신설학교만을 거쳐온 나에게 이와 같은 학내 폭력 문제는 익숙지 않은 것이다. 가해자가 있으면 피해자도 있다. 왜 누군가는 힘으로 누군가를 제압해야 하며, 또 누군가는 그와 같은 부당함 앞에 고개를 숙여야 하는 것인지… 굳이 묻지 않아도 누구나 상식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폭력의 이유가 무엇이건간에, 폭력의 가해자에게도 그리고 피해자에게도 인생은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에게 ‘치수’는 절대적인 존재이다. 그가 원한다면 언제라도 그의 곁에 있어야만 하고, 거역은 꿈도 꾸지 못한다. 이런 힘의 법칙은 마치 부정할 수 없는 자연의 법칙과도 같아서, 주인공은 그 이유조차 묻지 않는다. 그에게 따돌림은 다수결의 원칙과도 같다. 다수가 원한다는 이유로 정당화되는… 그에게 폭력은 그런 것이었다. 한편, ‘모아이’라고 불리는 그를 꼭 닮은 인물도 등장한다. 아픔을 공유(?)한 이 인물은,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주인공과는 한 쎄트란다. 말도 없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도통 짐작할 수 없는 이 기괴한 인물이 내뱉은 첫 마디는 “탁구 칠래?”였다. 그들에게 탁구대는 그들이 결코 속할 수 없는 거대한 세상이었다. 그들이 환상(?)의 랠리를 벌이는데 이용한 공은 그들에게 고통을 안겨다 준 인물이었다. 강력한 스매시를 가할 때마다 탁구공과 탁구대는 충돌한다. 하지만 그 때마다 이들이 들을 수 있는 ‘핑.퐁.’하는 소리는 경쾌하기만 할 따름이다. 그들의 반항은 세상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반항이 아닌 것이다. 사람을 죽이고 잠적한 치수나 오토바이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종모, 단상에 올라가 상을 받는 아이들, 심지어 9볼트 건전지의 (-)(+)극을 산소마냥 들이마시던 이름 모를 누군가까지… 자신들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이미 깨어지지 않을, 완고한 질서를 형성하고 있었다. 마치 고요한 호수에 던져진 돌마냥, 잠시의 파문은 가능할지 모르나 곧이어 잠잠함이 되돌아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스매시를 날리며 ‘럭키’라는 단어를 생각한다. 행복을 꿈꾸는 그들에게 어떠한 리시브가 주어질지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탁구에 있어서만은 천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새와 쥐는 주인공과 모아이에게 성공한 사람의 표상이었다. 하지만 작가는 이 완벽한 존재들에게 ‘과로사(過勞死)’라는 냉소를 던진다. 그렇다. 성공하지 못한다고 해서 세상을 살지 말란 법은 없지 않은가.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일상을 ‘성공’이라는 거대한 주머니에 담은 그들을, 이유야 어찌되었건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주인공과 모아이가 이겨버렸단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숟가락을 꾸부리며 누군가의 놀림거리가 되던 모아이의 삶이나, 구타에 길들여질 대로 길들여진 주인공의 일상에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이전과도 같은 삶을 택함으로써 영원한 약자로 남기를 자처한다. 그것은 부조리한 현실에의 안주가 아니다. 이 두 인물은 ‘저들은 행복한가?’라는 질문을 다시는 던지지 않을 테니 말이다. X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X같은 인물들이 참으로 많은 요즘이다. 변변한 직업도 하나 가지지 못했으며, 다른 이들에게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나’ 역시 그런 X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X같은 인물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차한 나의 일생은 끝을 모른다. 언젠가는 죽겠지만, 그 죽음이 지금 당장은 아닌 듯하고 할까나.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이것이 내게 어울리는 나만의 길일지도 모른다. 나뿐만이 아니라 이 책의 주인공, 아니 모든 이들은 각자 자신에게 어울리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각기 다른 색깔의 공을 다른 모양을 한 탁구대를 향해 날려대고 있는 건 아닐지… 모두가 똑같이 살아야 한다는 법 따위는 없을 테니 말이다. |
| 어떤 스토리가 좋은 스토리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기준은 설득력이며, 소설에서의 설득력은 충분한 개연성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겠다. 소설 핑퐁은 재기넘치는 신진작가 박민규의 입담을 통해 그가 잘쓰고 잘팔리는 작가임을 증명해주기는 했지만, 그 스토리가 충분히 설득력 있느냐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을 불러 일으킨다. 소설에는 여러가지 사건과 인물들이 나오지만, 사건이 왜 발생했는지, 인물의 성격과 운명이 왜 그러한지에 대한 설명이나 암시는 빈약하기 짝이없다. 못과 모아이는 왜 항상 두들겨 맞아야 하는건지, 치수의 친구인 마리는 왜 자살을 했는지, 왜 탁구 승부를 통해 인류의 미래가 결정되는건지, 그 승부를 참여하는 사람은 왜 하필 모아이와 못인지, 별다른 설명이 제시되지 않는다. 이유로서 제시되는 이야기들을 요약하자면, "그냥 그렇다"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작가는 여러 인물과 사건의 배경과 원인에 대한 상상을 독자에게 맡겨두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작가가 생각하는 올바른 소설쓰기의 모습일 수도 있겠다. 어떤 리뷰에 의하면 작가를 철학자로 칭하기도 했는데, 오히려 이 작가에게 어떤 명칭을 붙여야 한다면, 그것은 철학자와 정반대의 의미를 가진 무엇인가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우리는 이 소설가에게 철학과 비슷한 무엇인가를 기대하면 안된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때때로 재미를 느꼈고, 키득키득 웃기도 했고, 작가의 경쾌한 문장에 매료되기도 했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소설에 전혀 설득되지 않았다. |
| 박민규가 돌아왔다. 어딜 가버렸다가 다시 돌아온 건 사실 아니다. 허나, 그는 늘 그렇다. 마치 하늘에서 보급품을 던져 주고는 떠나 버리는 수송기 같다. 어디선가 "부웅"하는 굉음을 울리고 나타나서는, 훌쩍 무언가를 던져 놓고는, 떨어지는 그것에 시선이 홀려 있는 사이, 어느새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 그런 상상속에 문득, 오래된 영화 "머나먼 다리"의 한장면 - 목숨을 걸고 확보한(그 병사는 죽었다) 보급품 상자에서 쏟아지는 "빨간 베레모"가 사방으로 날려가는 장면이 스쳐지나 간다. 박민규는 이번에는 오래된 "신화사 탁구공"을 흩뿌리며 돌아왔다. 아니, 사라져 버렸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상상력이라고 할지라도 기존의 사실에 바탕을 두는 것"이라는 명제를 신봉한다. 그러나, 박민규의 글을 읽을때마다 그러한 명제는 무참히 깨져 내린다. 그렇지만, 그러한 그의 글은 내게 좌절을 안겨주기 보다는 오히려 통쾌함을 안겨 준다. 박민규의 상상력의 근원은 무엇일까? 알려고 노력하고 싶지 않다. 그저 즐기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박민규를 21세기의 "이외수"인양 동일시 한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글에 대해 일정한 정도의 "지분" 또는 "마켓쉐어"를 용인한다. 그의 긴머리, 수염, 또는 쓰고다니는 "고글"에 주목하기도 하고... 뭐... 일면 타당한 해석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목해야 한다. "바뀐 세계"에 대하여. 20세기에는 삶의 주체도 분명하고, 피사된 대상도 분명하고, 둘러싼 환경도 인식가능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진 세상에 살고 있다. 박민규는 주목한다. 그렇게 변화된 세상에 사는 우리의 모습을... " 세계는 여전히 듀스인데, 점점 탁구를 치는 인간은 줄어만 가고... 말하자면, 다들 어떻게 용서할 수 있었을까? "(118-9쪽) 과연 나는 <럭키>한 것일까? 이 책의 초판 1쇄본을 받아들고 좋아라 하는 나는 과연 <럭키>한 것일까? 이틀에 걸쳐 "무사히" 이 책을 다 읽고, 이렇게 리뷰를 신나게 두들기는 나는 과연 <럭키>한가? 나는 속으로 조용히 <럭키>, 하고 외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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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민규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사회에서 비껴난 비주류 인생들이 대부분이다. 장편소설 [핑퐁]에 나오는 인물들도 예외없이 비주류 인생이다. 그들 스스로가 말하듯 세상이 우리들을 '깜빡'해서 그저 견뎌야 하는 인생들의 이야기다.
왕따, 학교 폭력 등등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닌 현재 진행형이다. 간간이 뉴스에서 학교 폭력에 견디다 못해 자살에까지 이르는 일들이 보도될 때마다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하고,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그리고 잠시 뒤, 언제 그랬냐는 듯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자신들의 일상속으로 스며든다. 그것이 삶이고, 인생살이다. 그래도 학교 폭력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지금 이 순간도......
'못'과 '모아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중학교 3학년인 두 아이는 학교의 짱인 치수 일당에게 매일 맞고 다닌다.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보단 존재감이 없어서 늘 치수 일당에게 맞고, 상납금을 내고 시간시간마다 호출을 받으면 즉각 답을 해야 하는 존재들이다. 소설에는 학교나 집의 어른들 어느 누구도 그 아이들의 그러한 상황에 대해 모른다. 맞벌이 부모를 둔 못과 아버지에게서 받은 물을 마시고 7년째 병석에 누워있는 할아버지와 함께 생활하는 모아이는 그래서 더욱 외롭고, 따돌림을 일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처음엔 맞는 것이 아프고 괴롭지만, 어느 날부터는 하루라도 맞지 않거나 치수의 호출이 없으면 불안해지는 나날들이 계속된다. 그러면서 맞는 순간에 오히려 안도하게 되는 못고 모아이. 학교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러한 못과 모아이의 상황을 모른 척하고, 가까이 하지 않는다. 철저한 외면 속에서 못과 모아이는 스스로를 지켜나가게 되고 어느덧 시간이 흘러가면서 둘은 서로의 상황과 마음을 알아가게 된다.
못과 모아이가 치수에게 맞는 장소 중 하나인 벌판에서 어느 날 우연히 탁구대와 소파를 발견하게 되면서 중학생인 두 아이는 탁구에 입문하게 되고, 학교 폭력을 당하는 것과는 별도로 또다른 세계에 눈을 뜨게 된다. 아주 거국적인 탁구 세계로의 진입.
늘 치수에게 호출되면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두 아이를 보면서 가슴도 아프고 도대체 어른들은 다들 어디로 숨어 버렸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철저하게 배제되고 소외된 두 아이의 모습에서 세계가 그 아이들의 존재를 '깜빡'해 버렸다는 말에 통감하게까지 된다. 두 아이가 '이대로 살아가야 되는지? 왜 살아가는지?' 등등 여러가지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고통스러운 오늘의 시간을 견뎌내는 모습에선 안타까움을 지나 어느 누구 한 사람 그들을 도와주지 못하는 현실이 그저 답답할 뿐이다. 그나마 못과 모아이가 핑퐁을 알게 되면서 새롭게 접하게 되는 세계로 어느 정도의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이겨내는 방법에선 다행스럽기까지 했다.
모아이의 핼리혜성이 나타나 지구를 일갈해 버리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못도 모아이의 모임에 참석하지만, 못이 목격하고 겪게 되는 것은 또다른 이 세상으로부터의 소외되고 미친 인간들의 모습들이다. 못이 어디를 가야 좀 더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일까. 2%의 삶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못'처럼 많은 이들이 저마다 세계로부터 '깜빡' 잊혀지지 않은 인간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어서 옆을 돌아볼 여유가 없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차츰 못에게 일어나는 상황들이 정리되어 간다고 생각될 때, 또다른 우주와의, 세계와의 거국적인 탁구 게임이 둘을 맞이하고 있고, 못과 모아이는 우주의 대표로 핑퐁을 한 판 벌이게 된다. 그러면서 두 아이가 선택하게 되는 것은???
학교 폭력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슬픈 우리의 자화상이다. 하지만, 슬프고 안타깝고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은 일들을 작가는 넉살좋은 글솜씨로 특별하게 고통스럽거나 끔찍하게 그려내진 않는다. 대신 '못'이 자신의 상황을 주체하기 힘들어 통곡을 하는 모습에 가슴아플 뿐이다. 그러한 상황들에 놓여있는 삶들에게 그저 잘 견뎌내 달라고, 힘들고 괴롭더라도 잘 버텨주면 시간이라는 괴물이 해결해 줄거라고 얘기해야 하는가? 그 방법밖에는 달리 방도가 없는가? 그저 이러한 상황과 현실에서 너무나도 나약한 존재라는 자체가 괴로울 뿐이다. 핑, 퐁, 핑, 퐁, 핑, 퐁....또 다른 세계에 눈을 뜨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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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탁구에 인류를 걸었다. 이 무지막지한 상황을, 무지막지하게 왕따를 당하는 두 아이를 통해 보여준다. 박민규 작가를 만나는 네번째 소설. 핑퐁이다. 못과 모아이. 철저하게 세상에 의해 배제된 왕따 중학생. 허구헌 날 끌려다니며 죽을 듯이 매맞고 철저하게 자신의 <의견>을 잃어간다. 이 소설에선 2가지 코드에 집중해서 읽었다. 탁구가 환기시키는 이미지와 왕.따.
고등학교 때 당구를 즐기기 전까지(지금은 아니다.), 내가 유일하게 즐기고 잘했던 운동이 탁구다. 학원 수업을 빼먹기 일쑤, 늘상 수업과 동시에 우르르 몰려가 탁구를 쳤었다. 그 때의 경험으로 군대가서도 탁구대회에서 우승해 포상휴가를 나오기도 했다. 작년에 우연히 직장 동료와 탁구를 치러 갔었는데, 실력은 둘째치고 채 40분을 견디지 못하고 퍼졌던 기억이 난다. 그 조그마한 백색(혹은 오렌지색)의 공이 테이블을 오가며 내는 경쾌한 소리. 핑.퐁.
모아이와 못에게 핑퐁은 인생의 구원이었고, 인생 그 자체였다. 끊임없이 가해오는 스매싱을 온몸으로 리시브해야 했던 그들. 치수(이 녀석 장난아니게 무자위한 악당 그 자체다.) 일당에게 늘 불려나가 맞아야 했다. 딱 죽지 않을 정도로. 지금까지 상대해온 왕따 관련 소설 중에 가장 끔찍하고 처절한 소설이다. 김려령의 '우아한 거짓말'에서의 천지가 비수같은 말로 상처받아 목숨을 끊었다면, 못과 모아이는 끔찍한 린치를 이제 일상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왕따. 무엇이 문제인가? 일찍이 학창시절부터 난 왕따란 걸 전혀 모르고 살았다. 주위에 그런 녀석도 없을 뿐더라, 하나를 놓고 그렇게 무자비하게 몰아치는 광경도 본 적이 없다. 모두 TV의 뉴스 속이나 소설 속에서 접했다. 치수란 녀석은 그 나이에 여학생들을 꼬득여 원조교제를 부축이는 악한이다. 어느날 용기를 낸 못이 치수에게 묻는다. 왜 나를 고른거냐고. 거기에 대한 답이 걸작이다. '이미테이션' 같다고. 왕따 당하는 아이들의 공통점은 실제감 혹은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 이미테이션라고 말한다.
박민규 소설에서 낯선 풍경이다. 당분간 국수는 좀 먹기 힘들지 않을까 싶다. 분홍빛 국수. 뭐가 생각나는가? 여기선 치수의 항문을 수시로 넘나들던 회충이다. 심지어 여학생과 섹스를 하면서 한손으론 그 회충을 붙잡았다는, 실로 토악질을 뿜게 하는 악의 시뮬라시옹. 마치 잘 길들여진 짐승처럼, 치수의 한 마디에 조건반사로 움직여야 했던 주인공 못. 우연히 넓은 벌판에 덩그렇게 놓인 탁구 테이블을 발견하고 이내 핑퐁을 시작한다.
이 소설에선 직접적으로 나타나지만, 박민규 소설에선 가끔 간섭자(소설의 표현대로라면) 혹은 중간자가 등장한다. 바로 탁구용품샵 <랠리>의 주인인 프랑스인 세끄라탱이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의 사카에가 현실적인 매개자라면, 세끄라탱은 상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인물이다. 못과 모아이에게 탁구를 가르쳐주고, 결국 그들에게 경기를 제안한다. 인류를 담보로 하는 한판 승부. 경기는 새와 쥐(탁구계의 대표주자, 평생 탁구에 생을 걸고 훈련을 받아온 존재들)의 과로사로 중단됐고, 못과 모아이에게 선택이 주어졌다. 인류를 인스톨할 것인지 아닌지. 그들의 선택은 '언인스톨'이었다.
왕따를 가하는 주체는 집단이다. 직접적인 린치를 가하는 우두머리 외에도, 말없이 동조하는 그 무리들이 있다. 병렬로 연결된 건전지처럼 아이들도, 우리들도 평범한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어느 순간 건전지들은 직렬로 바꾸어 공격해오기도 한다. 쉼없이 맞기만 했던 못과 모아이의 선택은 과연 옳았을까? 세상은 바뀔까? 그들은 그렇게 짧은 1년의 시간(중3)을 보내고, 평생 아무렇지 않게 세상을 살 수 있을까? 끝나지 않는 핑퐁 경기처럼 수많은 드라이브와 스매싱, 숏공격을 받으며 담담히 리시브할 수 있을까?
재미로 따진다면, 이전 3권의 책보다는 덜한 편이었다. 하지만 무거운 주제를 예의 탁구란 경쾌한 운동으로 풀어나가는 방식은 흥미롭다. 어찌보면 소설집 '카스테라'는 박민규 작가의 앞으로를 가늠해보는 중요한 기점이란 생각이 든다. 거기에 수록된 작품들에 살을 붙여, 좀더 폭넓은 이야기로 끌어낸 것이 '핑퐁'이란 생각이 들었다. 대왕오징어의 빨판처럼 기이하면서도 흡입력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당분간 국수는 못먹을 것 같다. 악의 배설물처럼, 니밀거리며 내 속을 뒤집는다.
한편, 표지 디자인은 역시 오진경 선생의 작품이다. 수많은 탁구공의 조합처럼 점점이 패턴화되어 있고, 핑퐁이란 타이포그라피 자체도 탁구공 형상으로 표현됐다. 날개를 거쳐 블루 컬러의 면지, 박민규 작가가 직접 일러스트레이션으로 그린 일러스트가 살짝 얼굴을 드러낸다. 후에 '안심해. 안심해도 좋아'라고 박민규 작가의 능청스런 표제어가 등장한다. 안심하긴 뭘 안심해... 슬핏 웃으며 투정을 해본다. 분홍빛 국수는 심했잖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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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의 왕따 소년이 있다. 매일 이유없이 얻어맞고, 왜 살아야 하는지를 도무지 알 수 없는 소년들이 어느날 사람없는 벌판에 놓인 탁구대를 발견하고 탁구를 치면서 서로 교감하기 시작한다.
박민규의 핑퐁은 전작인 삼미수퍼스타즈와 마지막 팬클럽, 카스테라 등과 마찬가지로 비주류 인물들의 삶을 통해 비주류 및 주류라고 믿고 사는 다수의 인간들의 삶의 조건을 얽어매고 있는 체계의 그물과 그 폭력성에 대해 탐구하고 있다. 그러한 주제의식은 결코 가볍지 않으며, 탁구공을 주고 받는 두 소년의 이야기는 때때로 아름답고 때때로 찡하다.
그러나 반 판타지의 형식속에 느슨하게 펼쳐지는 이야기에는 완성도 높은 소설이 갖춰야할 서사적 긴장과 조형미가 부족하다. 굳이 고전적인 선형적 서사와 리얼리즘의 형식을 고수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소설이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이야기''라는 심미화된 형식으로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서사 양식이라고 볼 때 이를 한 치열한 노력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새로움이라기보다는 안이함으로 느껴진다. 형식적 긴장미를 추구하지 않고 느슨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풀어놓는 소설을 쓰기에 박민규는 아직 너무 젊은 작가다. 박민규가 반짝 스타가 아니라 오래가는 작가로 남아주길 바라며 다음 작품을 기대해 본다. [인상깊은구절] 인간은 서로에게 방사능이야. 신은 어디 있을까? 위스콘신에도 휴스턴에도 신은 없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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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전작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읽었을 때 느낌은 한마디로, ''와, 깬다. 이렇게 글을 쓸 수도 있구나''였다. 어쩜 이렇게 과거의 잔물결을 현실로 무늬 그대로 옮겨놓을 수 있을까.. 작가의 필력에 감탄 감탄 하였었다.
그로부터 꽤 시간이 흘러 작가의 새 글 "핑퐁"이 나온다고 했을 때 무조건 구매버튼을 먼저 눌렀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약간 불안한 것은 내가 너무 기대를 하면서 이 책을 대하지 않는가.. 라는 스스로의 불안감이었다. 배송되어 온 책을 휘~ 훝어 보았을 때 군데군데 등장하는 기호와 같은 단어 조합들이 나의 상상력과 궁금증을 더해 주었고, 읽어내려가면서 풀리는 그 해소감은 흡사 식사를 걸쭉하게 하고 맘껏 트름을 내뱉는 노가다판 아저씨의 점심식사 같았다.
이 책의 주인공은 세상에서 철저하게 왕따 당한 채 살아가는 두 아이이다. 하루라도 맞지 않으면 차라리 지루함을 느끼는 그런 생활의 반복. 절대적인 피해자의 삶을 묵묵히 살아가는 그들에게 오늘은 어제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하루였다. 그러던 어느날 아이들은 들판에서 우연처럼, 운명처럼 탁구를 만나게 된다. 그러면서 그들은 대화를 배우게 되고, 삶을 즐기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다수인 척하면서 평생을 살아간다. 하지만 두 주인공 아이들은 철저하게 그러한 평범함을 거부하며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알고 있다. 따를 당한다는 것은.. 소외가 아니라 배제되는 거라고. 아이들한테가 아닌 인류에게. 그들은 인류에게 깜빡 잊혀진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주변에 끔찍한, 아니 사소한 죽음들을 바라보게 되고 그 죽음들로 인해 주변에서 그들을 구타하던 먹이사슬이 변하게 된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따를 당하는 것과 구타를 당하는 것이다. 때리는 자가 바뀔 뿐 맞는 이는 변하지 않는 삶. 그리하여 이들은 정해진 수순처럼 독특한 모임에 참석하게 된다. 핼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임. 하지만 그들의 바램처럼 핼리는 오지 않고, 거기서 또한번의 죽음을 만나게 되고 그 죽음은 결국 마지막으로 치닫는 소설에 지린 냄새를 남기게 된다.
우린 럭키한 걸까? 탁구 용어 중 행운으로 점수를 얻게 되었을 때 상대편에게 매너있게 하는 말이 바로 ''럭키''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그 용어를 사용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우리는 럭키한 것일까? 그 두 주인공은 이 질문에 결코 답하지 못한채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탁구를 치며 살아간다. 랠리가 길어질수록 그들을 탁구를 알게 되고, 결국 탁구가 이루어온 역사의 신비를 그들의 스승에게서 듣게 된다. 전쟁과 역사가 결국 탁구때문에 일어났다는 신비로운 사실을 알게되고, 결국에는 그 스승이 인간이 아님이 밝혀진다. 그리고 그들은 인류를 대표하여 탁구시합을 하게 된다. 인디언 써머와 같은 날에,
마지막 순간 승리하게 되고 그들은 결국 인류의 언인스톨을 선택하게 된다. 언인스톨. 인류의 멸망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곰곰히 생각해 보며 열심히 학교에 다녀볼까 생각한다. 학교를 향해 걸어가면서 이 소설을 끝이 난다.
보통의 소설은 스토리를 이야기 해 줄 수 있지만 이 책은 결코 그럴 수 없는 책이지 않나 싶다. 단어와 단어의 연결에서 재미를 느끼고, 단락과 단락의 공간 속에서 맛을 느낀다. 나의 모범생같은 생각을 뛰어넘는 발칙함이 발랄하게 느껴지며, 소설 속에서 듣게 되는 소설이야기는 학교 앞 문방구에서 싼돈으로 사먹던 불량식품 같이 달콤하기 그지없다.
생김새는 이외수씨와 무척이나 닮은 듯한 저자는 철저하게 자신만의 언어 빛깔로 소설을 쓰고 있다. 이외수씨의 詩語가 담긴 소설을 전혀 흉내내지 않았다. 박민규의 소설은 발칙하다. 그 이상으로 명쾌한 설명은 없을 듯 싶다. [인상깊은구절] 결국 지구의 인간은 두 종류다. 끝없이 같혀 있는 인간과 잠시 머물러 있는 인간. 갇혀 있는 것도 머물러 있는 것도 결국은 당신의 선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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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무리 날고 기는, 전세계에서 랭킹 1위를 하는 선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게 탁구이다. 탁구는 혼자서 할 수 없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성장소설에서 '탁구'를 소재로 삼은 것은 매우 효과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핑, 퐁, 핑, 퐁... 서로 공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관계성이 중요하다.
모든 성장소설엔 꼭 친구가 등장한다.
이건 모아이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둘은 관계성 속에서 성장한다.
어차피 모두가 위인처럼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모두가 위인처럼 살 수 있다면 애초에 위인전같은 건 나올 필요가 없겠지. 그런 사람들은 일종의... 인간이 된 곰들인 거구... 대개의 사람들은 인간이 못된 호랑이같은 존재이다.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인생이 있다.
4. 이런 류의 작품은 일본 소설로 읽을 때는 거부감도 없고 자연스럽게 읽히는데 한국 작가가 쓴 소설을 읽을 때는 왠지 모르게 부자연스럽다. 왜일까?
예를 들면 갓을 쓰고 도포를 쓴 예수의 그림을 볼 때처럼 낯설고 어색하다. 이건 내가 백인으로 묘사된 예수를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일까? 이런 그림을 먼저 접했기 때문일까?
그러니깐... 이런 주제를 다룬 일본 소설을 먼저, 많이 읽었기 때문에 우리 나라 작가들의 작품은 뭔가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지는 걸까? 단지 그런 이유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 |
| 전작 ''카스테라''에 대한 리뷰를 YES24에 써둔 적이 있는데, 지금 돌아봐도 과하다 싶을 정도의 칭찬 위주였다. 박민규는 나에게 그랬다. ''삼미슈퍼스타즈''와 ''카스테라''에서 보여준 재기발랄함과 그 재기발랄함이 딛고 있는 현실에 대한 끈적한 이해는 이 작가를 새 시대를 열어제낄 인물까지로 평가할 수 있었던 요소였다. 잠시 장거리 여행을 다녀오면서 읽어야겠다는 마음으로 ''핑퐁''을 사들고 떠났는데, 돌아오는 길에는 대체 이걸 어째야 하나 하는 부담감이 앞섰다. 이번 핑퐁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패에 가까운 작품이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전달되지 않는 것도 아니고,작가 특유의 생기 넘치는 문체가 사라진 것도 아니다. 다만 그것만이 박민규를 규정짓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의 가장 큰 장점 하나가 이 소설에서는 빠져 있다. ''끈적함''이랄까... ''삼미 슈퍼스타즈''에서 그가 보여주었던 것은 끈적하고 나른한 삶 그 자체를 마치 4차원의 세계인 양 새로운 환상과 대비시키며 보여준 절묘한 줄타기였다. 삼미 슈퍼스타즈라는 꼴찌 야구팀과 그 야구팀과 함께 성장한 주인공과 그 주변의 꼴찌스러운 삶이 작가의 줄타기 속에서 일종의 이념과 종교로까지 융화되는 것이야말로 전작의 묘미였는데, 핑퐁에서는 그 시너지가 느껴지지 않는다.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탁구는 뜬금없고, 하나하나의 비유도 흐름을 갖지 못한 채 흩어져 표류한다. 전체적으로 소설이 난해하고 복잡해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며, 단편도 아닌 분량에서 이러한 혼돈은 작가가 미처 자신이 구상한 내용을 정리하지 못한 채 풀어냈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아마도 그의 삶이 아니기 때문은 아닐까. 삼미 슈퍼스타즈에서 풍겼던 느낌은 작가 그 자신의 삶 냄새가 푹푹 묻어났었는데 이번 핑퐁은 아무리 봐도 멀찍이 떨어져 스케치하는 아마추어 화가의 느낌이다. 정확한 이유를 짚어내는 것이야 평론가들이 할 일이겠지만, 전작에서 받은 기대를 모조리 투영했던 독자로서는 읽고 나서 조금은 허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