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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의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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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주열전 -성종편- >>       군주열전 그 새번째 이야기 흔히들 조선시대 군주중에서 손가락안에 꼽히는 군주가 우리가 알고 있는 성종이다. 경국대전의 완성, 문예부흥의 군주, 그리고 각종 방송사의 단골매뉴로 등장했던 폐비윤씨.... 성종시대를 논할려면 거꾸로 올라 세종이 훙하는 시점에서부터 살펴봐야한다. 세종의 가장 큰실수인 수양과 안평이라는 세자가 아닌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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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주열전 -성종편- >>

 

 

 

군주열전 그 새번째 이야기

흔히들 조선시대 군주중에서 손가락안에 꼽히는 군주가 우리가 알고 있는 성종이다. 경국대전의 완성, 문예부흥의 군주, 그리고 각종 방송사의 단골매뉴로 등장했던 폐비윤씨....

성종시대를 논할려면 거꾸로 올라 세종이 훙하는 시점에서부터 살펴봐야한다. 세종의 가장 큰실수인 수양과 안평이라는 세자가 아닌 걸세출의 정치가를 방치했다는점이다. 이를 시점으로 문종,단종,세조,예종으로 이어지는 권력싸움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계유정난을 통한 수양(세조)의 등장으로 조선의 군주 세습은 또다시 엉망이 되고 만다. 이런 와중에서 공신들(흔희들 훈구세력)과 세조의 결탁 그리고 예종의 의문스러운 죽음, 이어서 군주세습순위에서 한참이나 먼 잘산군(성종)의 등극까지 정말 이런 드라마가 없다고 할것이다.

 

사실 성종의 등극은 정희왕후(세조정비)와 인수대비(성종친모)와 한명회를 비롯한 훈구대신들의 사전작업에서 부터 철저하게 진행된 일이다. 어찌보면 성종은 조선의 군주중 가장 행운아인셈이다. 세종조에 다져지고 세조가 완전히 굳힌 조선이라는 나라를 거저 먹은거나 바름없는 셈이다. 그리고 성종제위기간중 정말 태평성대에 가까운 대란이 없다는 점또한 정말 행운이라고 할수있다. 물론 다른면에서는 성종시대부터 조선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볼수있다.

 

성종은 세자내지는 세재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등극한 조선의 최초의 군주이다. 어린나이에 위로는 3전(정희대왕대비,안순왕대비,인수대비)이라는 유일무일한 여성들의 치맛자락에 둘러쌓여 친정시까지는 원상들(훈구대신)의 비위를 맞쳐가면서 정치를 펴게 된다. 거기다 우리가 너무나 잘알고있는 중전 윤씨의 폐비 및 사사로 인하여 향후 희대의 폐륜아 연산을 탄생케 하는 독불장군같은 정치또한 펴게된다. 흔희들 성종을 문예부흥군주로 알고있는데 이는 잘못된 상식이다. 성종의 경우 태조-태종-세조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무인기질의 군주이다. 제위기간중 2차례난 원정을 했고 비록 성과는 없었지만, 수도없는 강무 및 사냥등을 통하여 신하들과 마찰또한 상당했던 군주였다.

 

성종시대의 또하나의 불운은 뭐니뭐니해도 사림들의 등장이라 할 수 있다. 성종으로선 훈구대신의 견제역활로 사림이란 부득이한 선택을 하였지만 이 사림의 성격이 기존 유학과 다른 교조적인 성리학일변으로 인한 붕당 그리고 당쟁 향후 조선의 먹구름을 드리우게되는 역활까지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성종을 폄하해서는 안됀다 어리나이에 3전을 모시고 그리고 언제든 왕을 교체할수 있는 어마어마한 권력집단이 훈구대신의 틈사이에 끼여 자기의 천정을 준비하면서 조선의 최상기를 구가하게했던 군주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또한 역대의 군주보다 더 왕권강화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가지고 있어고 또한 신하들과의 논쟁에서도 밀리지 않았던 점은 역시 대단한 군주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인것이다.

 

가장 안타까운 점은 교조주의적인 성리학신봉자들인 사림들의 정치세력화가 결국 향후 조선시대내내 피바람을 일으키는 원인되었다는 점에서 성종자신또한 자유로울수 없는 것이다.

l******e 2008.06.20. 신고 공감 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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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는 작은 오류도 범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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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에 대해서 잘 읽었다. 몇가지 의문이 있어 지적하고자 한다. 189페이지의 주계부정 심원에 대해 심회의 아들이라 설명하였는데, 주계부정 심원은 심씨가 아니고 전주이씨로 알고 있다. 즉, 주계부정 이심원이란 말이다. 실록에 주계부정 심원이라 나오는 것은 주계부정이 종친부의 관직이므로 당연히 성은 빼고 이름만 쓴것이 아닌지? 이심원은 효령대군의 증손이고, 보성군의 손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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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에 대해서 잘 읽었다. 몇가지 의문이 있어 지적하고자 한다. 189페이지의 주계부정 심원에 대해 심회의 아들이라 설명하였는데, 주계부정 심원은 심씨가 아니고 전주이씨로 알고 있다. 즉, 주계부정 이심원이란 말이다. 실록에 주계부정 심원이라 나오는 것은 주계부정이 종친부의 관직이므로 당연히 성은 빼고 이름만 쓴것이 아닌지? 이심원은 효령대군의 증손이고, 보성군의 손자이다. 보성군의 사위가 임사홍으로, 이심원이 임사홍을 탄핵 함에 있어, 보성군이 격분하여, 주계군이 불효하다 고발하여 고신을 뺏기고 귀양간 것으로 알고 있다. 가문을 무엇보다 중시했던 조선시대에 가문보다 명분을 우선시 한 표본 이다. 354페이지에 남효온 등과 함께 이심원이 나오는 데, 이는 앞의 주계부정 심원과 동일 인물로 보여진다. 373페이지에 국왕은 친형제는 말할 것도 없고, 이복형제도 서슴지 않고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이복형제는 말 할 것도 없고 친형제 까지도 라고 바뀌어야 문맥이 맞는 것 아닌지? 또, 436페이지 태종과 성종이 12명의 왕비와 후궁을 두었다고, 호색한 면에서 태종과 성종이 쌍벽을 이룬 다 했는데, 단순히 후궁의 숫자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태종의 경우는 원경왕후 민씨와 민씨 집안의 외척을 경계해서 또, 후궁 외척들의 세력균형과 발호를 경계해서 의도적으로 후궁을 늘린 측면이 더 크다고 보는 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위의 나의 글이 모두 틀릴 수 있지만, 만약 하나라도 맞는 것이 있다면, 역사를 집필하는 저자는 깊이 반성하고, 숙고를 하여 글을 써야 할 것이다.
k******p 2006.11.01. 신고 공감 7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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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성군의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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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교과서에서 역사를 배울 때 성종하면 문물 정비와 《경국대전》을 강조하여 가르친다. 이 시기 조선에는 커다란 우환이 없었고, 그랬기에 성종은 평화 속에서 내치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성종을 생각하면 태평성대가 떠오르고, 세종대왕만큼은 아닐지라도 그에 견줄 수 있는 성군의 이미지가 연상된다. 그의 집권기는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시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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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교과서에서 역사를 배울 때 성종하면 문물 정비와 《경국대전》을 강조하여 가르친다. 이 시기 조선에는 커다란 우환이 없었고, 그랬기에 성종은 평화 속에서 내치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성종을 생각하면 태평성대가 떠오르고, 세종대왕만큼은 아닐지라도 그에 견줄 수 있는 성군의 이미지가 연상된다. 그의 집권기는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시기지만, 그것은 외부에서 단편적으로 바라본 시각이고, 실제 성종의 집권기는 권력을 둘러싼 훈구와 성종, 그리고 신진세력 사림의 다툼이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냉정하게 생각해봤을 때 성종이 물려받은 정치적 유산은 굉장히 탄탄했다. 태종과 세종이 다져놓은 외적인 국가역량과 기반은 매우 탄탄했지만, 문제는 계유정난 이후, 세조가 강화한 훈구 공신들이다. 그런 훈구 대신들이 택군한 왕이었기에, 성종은 스스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기 위해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권력의 핵심은 훈구파가 고스란히 쥐고 있었으며,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았던 국왕 성종은 그저 대비와 훈구의 눈치를 보며 '국왕 수업'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따지고 보면 이런 악순환은 세조의 죽음에서 비롯한 셈인데, 신권을 강력하게 제압한 세조였지만 죽음에 이르러서 공신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원상제 제도'를 도입하여, 세조 이후 후대의 왕인 예종과 성종의 집권기에 커다란 부담을 남겼다.

책을 읽으며 내가 알고 있던 모습과는 다른 성종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성종하면 세종대왕과 더불어 조선의 문치를 상징하는 국왕이고, 그렇기에 세종의 마이너 버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실제 실록에 기록된 성종의 모습은 세종과 엄청난 차이를 보여주고 있었다. 마마보이 기질이 다분한 성격, 종친들을 극도로 편애하는 모습, 사치에 물든 모습, 인내심이 뛰어나지만 직설적이고 다혈질에 가까운 성격, 학문을 대하는 태도까지... 세종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새삼 놀라웠다. 물론 성종은 세종을 롤모델로 삼아서 통치를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기록을 통해 비교해보건대, 성종의 업적은 여러모로 다소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 그런 성종을 우리는 왜 세종과 견줄 수 있는, 혹은 세종과 버금가는 성군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인식은 훈구에 이어 집권하게 될 사림의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물려받은 결과가 아닐까 한다. 성종은 막대한 훈구 대신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 세력을 기용했던 군주다. 사림의 입장에서는 비주류로 있던 자신들을 정치무대에 나올 수 있게 만들어준 성종에 매우 감사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율곡 이이와 같은 현인도 자신의 저서 《동호문답》에서 성종을 세종과 버금가는 인물로 칭송했고, 이런 관념이 알게 모르게 지금까지 내려와서 우리에게 무비판적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실제 사서에 기록된 모습을 두고 냉정하게 평가하면 성종은 세종에 비하면 모자란 부분이 많은 지도자였다.

성종 시대를 읽으며 가장 아쉬운 부분은 바로 '가부장적 제도'의 강화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조선의 가부장적인 모습은 성종 시대에서부터 시작됐다. 여자의 재가를 부정적으로 보는 모습, 재가한 자식은 관직에 임용하지 않는 모습 등등의 법안이 이 시대에 만들어졌다. 재미있는 점은 당대의 신하들은 이런 법안을 만들 때 대체로 반대했다는 부분이다. 역사에 어느 정도 상식이 있는 사람들은 고려시대가 조선시대에 비해 훨씬 개방적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조선 초반만 하더라도 이런 고려의 풍습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어서, 여성들의 인권도 조선 중기에 비해 훨씬 자유로웠다. 그러나 성리학적 사고 관념에 함몰된 성종은 교조적이고 배타적인 성리학의 이념을 사회 전반으로 더욱 강하게 강조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조선은 한층 폐쇄적으로 나아갔다. 이렇게 바라보면 숭명주의와 극단적인 명분론을 강조하던 조선 중기의 모습은, 성종 시대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그는 조선을 한층 더 배타적으로 만든 지도자였다.   

사실 성종은 신하들에 의해 택군되었을 때, 거의 백지상태나 다름없었다. 왕위 서열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기에 탄탄한 교육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 백지의 10대 소년이 하루아침에 왕이 되어 국왕 교육을 받았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러나 성종은 공부를 싫어하는 체질이 아니라, 종국에 가서는 신하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에 지식을 갖추게 된다. 다만 이렇게 교육받는 과정에서 성리학에 너무 몰두하였고, 그런 성종의 관념은 조선을 한층 폐쇄적으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책에서는 지적 욕구가 왕성한 성종이 경연에서 《노자》, 《장자》, 《열자》 등의 도가삼서를 배우고 싶다고 했는데, 성리학에 함몰된 신하들은 이단의 책은 가까이해서는 안된다고 한 칼에 거절한다. 이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실록》에 의하면 성종은 경연에서 《전국책》과 같은 종횡가 서적을 배우겠다고 하지만, 역시 신하들의 저지로 읽지 못했다. 도가 사상이야 그렇다 쳐도 현실론적인 치국과 밀접하게 관련된 《전국책》과 같은 역사책을 멀리하는 것은 굉장히 지나친 처사다. 세종은 성리학 중심의 유학도 좋아했지만, 불교, 풍수, 지리, 병법, 역사, 과학, 농업 등등의 잡학 지식도 섭렵하려고 노력했다. 게다가 경연에서 세종은 《무원록》이라는 법전(법의학서)을 신료들과 읽었다. 그런 세종 시대와 비교해볼 때 성종시대의 모습은 아쉬운 부분이 많다. 만약 신료들이 융통성을 발휘하여 지적 호기심이 충만한 성종에게 다양한 학문을 권장했더라면, 그토록 폐쇄적인 조선이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너무 비판적인 논조로 써 내려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성종이 무능한 국왕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왕좌에 올랐지만, 힘든 학습 커리큘럼을 모두 소화해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문제였던 거대 훈구 세력에 문제점을 정확히 인식하였고, 그들에 맞서 사림을 이용하여 세력 간의 균형을 도모한 점 등을 살펴볼 때, 정치에 있어서도 감각이 있는 지도자였다. 그렇기에 집권 시절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와 비례하여 성종의 권력은 강화됐고, 그에 반해 훈구 세력에 대한 권력은 점차 시들어졌다. 국가 경영적인 측면에서도 성종은 뛰어나다고 하긴 뭣하지만 그렇다고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았다. 좋게 말하자면, 중간 이상인 지도자였고, 나쁘게 말하자면 이도 저도 아닌 지도자였다.

성종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바로 '양면성'이다. 성종은 정말 야누스적인 인물이다. 신료들의 강도 높은 직간을 인내하고 들어주는 모습을 보이다가도, 한편으로는 강압적으로 논쟁을 결말짓고, 일탈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사림의 의견대로 성종은 나라의 문풍을 드높이고 성리학을 한층 더 발전시킨 공로가 있지만 밤에는 여색을 가까이하며 술을 좋아하고, 유람을 좋아했다. 내 생각에 성종은 매우 감정적이고 직선적인 성격이었던 것 같다. 그런 성종이지만, 정통성 없이 즉위했고 그렇기에 국왕 수업에 최선을 다하다 보니 본성과는 다른 '국왕으로써의 인격'이 만들어진 것 같다. 그렇기에 그의 집권기를 잘 살펴보면 '인간 성종'과 '국왕 성종'의 충돌이 수시로 나타난다. 아마 왕이 되지 않았다면, 특유의 감성 어린 성격을 바탕으로 장안을 울리는 풍류가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흥미롭게도 이런 성종의 양면성은 아들 중종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맞이인 연산군은 자신의 본성을 억제하지 않고 폭주시킨 결과 몰락했지만, 중종은 그런 형과는 다르게 최대한 인내하는 모습을 집권 내내 보여줬다. 그런 중종도 조광조에 대한 신임을 바탕으로 사림을 밀어줬다가 금방 애정을 거둔 모습도 보여줬으며, 측근 정치를 경계해야 한다고 했지만, 정작 자신은 몇몇 측근에게 의존하여 정치를 행했다. 이런 중종의 양면성은 아버지 성종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아닐까 싶다.

책을 통해 성종뿐만이 아니라 성종의 주변 인물에 대해서도 새롭게 알게 된 부분이 많았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정희왕후 윤 씨. 세조의 처이며 손자 성종 집권기에 조선왕조 최초로 수렴청정을 한 인물이다. 일반적으로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은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책을 통해 문제점도 발견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것들을 꼽아보자면 사치하는 풍습과 더불어 인척 정치다. 정희왕후는 무능력한 사람이라면 정치에 자신의 인척을 쓰지 말 것을 당부하지만 한편으로는 인척이라서 등용에 차별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덧붙였다. 이 말인즉슨, 자신과 관련된 종친이더라도 능력이 된다면 기용하라는 말인데, 그래서 그런지 성종 집권기에 문제를 일으켰던 인사들 중에는 정희왕후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사람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대간들의 탄핵이 있었지만 성종은 문제의 인사를 최대한 감싸주려고 노력했는데, 아마 대비였던 정희왕후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두 번째는 한명회다. 우리는 흔히 한명회를 매우 부정적으로만 인식하고 간신의 표본으로 생각하는데, 물론 《실록》에서도 한명회는 비판적인 논조가 강하지만, 그의 졸기는 생각보다 굉장히 후하게 기록됐다. 한명회는 공과가 분명한 사람인데, 과는 사람들이 대체로 알고 있듯 권세에 심취하여 안하무인한 점을 꼽을 수 있으며, 공으로는 그래도 나라의 안정을 가져왔으며 제도와 법도 정비에 공을 들였다는 부분이다. 실제로 한명회는 성종의 견제를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권세를 누리다가 죽었으니, 처세와 권력 유지에 있어서는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다.

성종을 한 단어로 정리해보자면 '애매모호함'이다. 분명 조선을 위해 노력은 한 것 같은데, 그 노력의 결실은 다소 애매모호하고, 성군을 표방한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주색에 열중했으니 행실 또한 애매모호하다. 그뿐만 아니라 세종과 마찬가지로 내정을 정비했고, 2차례에 걸쳐 북방 군사활동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결과를 놓고 보면 참 애매하다. 신료들과의 관계도 그렇다. 성종은 친정 이후 훈구 세력과 대왕대비로 대표되는 왕실 웃어른들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했지만, 막상 살펴보면 그러한 권력적 자립을 이뤘다고 말하기도 애매하다. 새로운 인재 양성도 홍문관을 통하여 양성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막상 성종이 고용했던 신진세력 사림들은 중하위 말단직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성종의 집권기는 크게 보자면 세조 정권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는데, 세조의 정권이 창업에 가깝다면 성종의 정권은 수성에 가깝다. 세조 - 성종의 콤비는 냉정하게 비교해서 태종 - 세종의 콤비보다 훨씬 퇴보했다. 세조 역시도 태종의 정치력에 한참 못 미쳤고, 성종 역시 세종과 비교해보면 굉장히 애매한 구석이 많다. 물론 중간 이상만 하더라도 좋은 지도자가 아니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지만, 성종이 누군가? 세종과 비견되는 인물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세종을 기준으로 판단하다 보니 성종의 애매모호함이 더욱 부각됐을 다름이다. (하긴 세종을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어느 지도자인들 과가 없겠냐만...)

아무튼 그런 애매모호한 야누스적 성군인 성종이 묻힌 곳은 공교롭게도 강남 한복판이다. 과거 나는 아내와 연애시절 선정릉 데이트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선릉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저 무덤의 주인은 조선조 성종이라는 왕인데, 낮에는 공부를 열심히 했고 정사를 돌보는데 노력했지만, 밤에 주색 잡는 일에도 일등을 달렸던 왕이야. 그런 왕이 강남에 묻힌 것은 어쩌면 운명일지도 몰라. 강남이 어떤 곳이니? 낮에는 비즈니스의 노른자이지만, 밤이 되면 환락의 거리로 바뀌잖아. 낮과 밤이 다른 강남에 그런 성종이 묻혔으니 참 재미있는 것 같아.'

책을 덮는 순간에도 그랬고,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도 이 생각은 변함이 없다.

k******m 2018.11.12.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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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 조선의 태평을 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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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군주열전 세 번째인 성종편이다.  이한우 군주열전의 매력은 일왕일책이라는 열전이 보여주듯이 충실한 자료조사에서 나온 성실한 책이라는 것이다. 비록 그의 시선이 나와 "달라" 책을 던져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나와 다름일 뿐이고 책 자체는읽을만한 책이다. 성종편은 지루했다. 이한우의 글쓰기의 매력은 재평가와 그의 정치경제 이념이 드러난 해석인데 성종에게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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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군주열전 세 번째인 성종편이다.  이한우 군주열전의 매력은 일왕일책이라는 열전이 보여주듯이 충실한 자료조사에서 나온 성실한 책이라는 것이다. 비록 그의 시선이 나와 "달라" 책을 던져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나와 다름일 뿐이고 책 자체는읽을만한 책이다. 성종편은 지루했다. 이한우의 글쓰기의 매력은 재평가와 그의 정치경제 이념이 드러난 해석인데 성종에게는 그런 해석이 들어갈 여지가 없다. 운 좋게 왕이되어 운 좋은 시절 아무일 없이 왕위에 앉아 있었던 군주였다. 


성종에 대해 든 느낌 가운데 하나는 그가 억세게도 운이 좋았던 국왕이었다는 것이다. ~~~첫째, 어떻게 보아도 국왕의 자리에 오르기는 힘들었으나 한명회의 사위가 됨으로써 열세 살의 나이에 조선의 국왕이 될 수 있었다. 둘째 국제 정세가 안정되고 국내적으로도 태평성대가 구가되던 때에 왕위에 있었다는 것이다. 셋째, 딱히 뭔가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튼튼한 국가 역량을 물려 받았다. ~~~~그는 국력의 생산자가 아니라 소비자였다. "


이한우의 군주열전을 읽으면 그는 정조=노무현or 김대중, 선조=이승만, 태종=박정희로 대칭시키며 그의 보수적 이념이 역사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정조에게는 악평을, 선조는 뜬금없이 숭상이라는 재평가를 태종에게는 공이 과보다 컸다는 호평을 각각 내린다. 이한우 책을 읽는 재미다.  고개를 끄덕이게 하면서도 저자에게 욕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드문 책이다. 저자가 성종편을 쓰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나와있지 않지만 노태우정권이 대칭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87년 운 좋게 대통령이 되어 훈구세력을 적당히 등용하고 친익척을 최측근에 앉히며 정치를 하였다. 80년대 후반 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세계경제 호황기였기에 한국경제도 그냥 잘 굴러 갔다. 민주화세력이라는 신진사대부가 조금씩 등장했으나 왕권은 커녕 아직 양김씨라는 또다른 훈구세력에 힘이 미치지 못했다. 성종과 노태우 정권의 공통점은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새로운 인맥군을 형성하지도 못했고 국가의 활력을 높이기 위한 거대한 전략도 없었다. ~~~~이후 조선은 쇠퇴의 길을 걷는다.


잘 나아갈 때 아무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유지와 보신은 되지만 결국 연산군이라는 폭정과 김영삼 정권이라는 암흑기를 낳는 것이다. 


* 성종은 여색,사냥, 활쏘기라는 당대 최고의 유흥을 즐겼다. 노태우 정권시기에 룰살롱 등 한국 유흥업소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흥청망청 쓰기시작한 시대다.


* 매력없는 성종이 주인공인 "이한우의 군주열전 성종편"은 저자의 노력과는 관계없이 맥아리 빠진 책이 되었다.


* 매력은 없지만 부러운 왕이다.


* 가끔은 대통령과 정권이 아무일도 안했으면 하기를 바랄때도 있기는 하다.









   

YES마니아 : 골드 l****0 2015.08.30.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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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조선의 태평을 열다 - 이한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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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가서 보니 눈에 띈다. 군주열전이라고 조선시대 왕을 모두 다루는가보다 했더니 몇 명 골라잡아서 쓴 모양이다. 순서대로 읽을까했더니 가장 매력없어 보이는 성종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어쩔 수 없이 이 책부터 읽었다.   조선시대 임금 중 성군이라고 하면 세종과 함께 자주 거론되는 인물이 성종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성종은 그저 운이 좋았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종 조선의 태평을 열다 - 이한우 -" 내용보기

도서관가서 보니 눈에 띈다. 군주열전이라고 조선시대 왕을 모두 다루는가보다 했더니 몇 명 골라잡아서 쓴 모양이다.

순서대로 읽을까했더니 가장 매력없어 보이는 성종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어쩔 수 없이 이 책부터 읽었다.

 

조선시대 임금 중 성군이라고 하면 세종과 함께 자주 거론되는 인물이 성종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성종은 그저 운이 좋았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삼촌 예종이 죽었을 때, 왕위 계승 서열 1위는 사촌동생 제안대군이었고 2위는 형 월산대군이었다. 성종은 3순위였다.

 

보통은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이 왕이 되야 맞지만 당시 나이가 4살에 불과해 어리고 모자르다는 이유로 탈락.

어차피 수렴청정할 생각이었으면 나이는 크게 문제가 안될 듯 싶은데 좀 찜찜하다. 거기다가 4살 밖에 안된 애를 두고 모자르다고 판단하기엔 좀 이르지 않은가?

 

비실비실하다는 이유로 월산대군도 탈락.

제안대군과 달리 나이도 적당했고,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의 장남이었으니 혈통(?) 면에서도 동생 자을산군(성종)보다 유리한 입장이었는데 애매하게 건강문제 걸고 넘어진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왕좌와는 거리가 먼 왕자였음에도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아마 그의 장인이 한명회였다는 사실이 가장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싶다.) 사촌동생 제안대군과 형 월산대군을 제치고 왕이 된다.

 

성종이 즉위할 당시엔 이미 세종과 세조를 거쳐 왠만한 건 기틀이 다 마련된 상태였다. 밥상은 이미 차려진 상태였고 숟가락만 하나 얹고 맛만 보면 그만인 그런 상황이었다. 내란이나 외적의 침입같은 일도 없었으며 폐비 윤씨 사건을 제외하면 크게 골치아픈 일도 없었다. 운이 좋아 왕이 되었는데, 왕이 된 시기도 아주 좋았던 것이다.

 

성종, 그는 분명 똑똑한 임금이었다. 하지만 세종과 비교되며 성군 소리 듣기엔 조금 모자른 감이 있다. 선대가 이룩해놓은것을 그저 유지했을 뿐이고, 새로 이룩해놓은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적었다. 인재등용면에서도 새로운 인물들을 많이 발굴해내지도 않았다. 그저 처음 그대로 쭈욱- 같이 갔을 뿐이다.

 

그럼에도 세종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성군으로 과대평가된 까닭은 성리학이라는 족쇄를 제대로 단 임금이었던 탓이었다.

성종은 13살에 임금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게 되는데, 어린 탓에 학문적 바탕이 없었고 덕분에 아무 거부감없이 성리학을 밑바탕으로 받아들였다. 결국 신하들 뜻대로 된 것이다. 왕에게 사사건건 트집을 잡을만한 수단이 완성됐으니 말이다.

 

성리학 체계의 조선에서 어린 성종을 교육시켜 체제에 맞게 키워낸 것도, 그를 성군이라고 칭송하는 것도 모두  붓을 놀리는 성리학자들이었다. 태평성대라고 불리는 성종 이후로 왕권이 점차 약해지고 신권이 강화되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순서였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운도 좋았고 영민해서 나름 편안하게 왕 노릇을 하며 성군이라는 칭송도 들었지만, 결국 조선왕조 전체를 놓고 봤을 때는 참 애매한 임금이 되었다. 입만 살아있는 사람들이 득세하게 되는 기반을 제공해서 결국 쓰잘데기 없는 말싸움에 국력낭비를 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2011. 8. 31.

w********8 2014.05.04.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