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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고 있었던 민중가요 한 곡을 요 며칠 계속 듣고 있습니다. <그날이 오면> 고등학교 1학년 때 전교조 사무실 - 그때 따로 지칭하는 이름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네요 - 에서 산 노래테이프에서 처음 들었던 노래였는데, 기타 전주와 ‘한 밤의 꿈은 아니리’로 시작하는 가사의 감미로움을 아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허세욱 동지 분향소에 이 노래가 흐르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닐, ‘피맺힌 기다림도 헛된 꿈이 아’닐 ‘그날’이 과연 올까하는 절망과 안타까움으로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자기소개서’를 발표하는 아이들에게 너희들과 마찬가지로 그 분이 꿈꾸었던 세상이 어떤 세상일지 잠시라도 생각해 보자는 말로 면목 없는 애도를 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허세욱 동지가 남긴 짧은 유서를 아이들에게 읽어주면서 과연 이 세상을 구성하는 힘은, 민중들을 억압하는 권력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절대로 위에 서려고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온몸으로 보여주었던 민중의 진실과 정직을 왜 사람들은 비하하고 오해하려고만 하는지 답답했습니다. 자신의 몸을 나락으로 던지면서 까지도 비정규 동료들을 걱정했던 한 인간의 성숙함을 왜 그리 폄하하려고만 하는지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현실의 부조리와 답답함을 옛 글에 비추어 생각해 보는 책이 한 권 있습니다. 『조선의 뒷골목 풍경』을 쓴 강명관 교수가 최근에 출간한 『옛글에 빗대어 세상을 말하다』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옛글을 읽는 이유와 기준을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과거를 버릴 수도 없고 극단적인 부정도 옳지 않고, 극단적인 찬미도 옳지 않다면 과거의 문화와 옛글을 어떻게 이해하고 읽어야 할 것인가. 단 하나, 오직 인간 해방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읽어야 한다. 근대와 민족, 전통이란 코드가 아닌 오로지 인간 해방이란 관점이 필요한 것이다. 그 문화와 글이 과연 인간을 속박에서 해방하여 자유를 향해 나아가도록 말하고 있는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아무리 거룩한 이야기라도, 고전(古典)으로 정평이 나 있더라도 그 이야기가 혹 어떤 특정한 인간들만 자유롭게 한다면 평가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지나치게 엄격하고, 그래서 비현실적인 기준입니다. 조선시대는 ‘어떤 특정한 인간들만 자유롭게’한 텍스트가 거의 전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조선시대 문화 전체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자의 진정성은 충분히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를 위해 저자는 ‘인간을 ‘제작’해 온 역사를 역으로 추적하여, 나에게 진리로 설치되어 나에게 명령을 내리는 담론의 실체’ 탐구하겠다고 합니다. 인간의 사회적 존재이고, 사회의 총체는 문화이기에 인간은 문화적 존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발 딛고 있는 문화적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문화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때 비판적 사고는 멈춥니다. 자신의 존재론적 근거 그 자체를 객관화하고 문제시할 때, 비판적 근대인은 가능합니다.
저는 최근 옛글을 현대적으로 ‘가공’한 글 읽기를 좋아합니다. 1차 문헌을 읽기에는 제 능력이 부족한지라 연구자들이 써내는 대중적인 글을 읽습니다. 그러면서 나도 점점 고루하고 보수적인 사람이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보수’를 참칭하는 모 정당 때문에 이 단어가 똥칠이 되기는 했지만 사실, ‘보수다운 보수’는 사회에 꼭 필요한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옛글을 읽으면서 엿보는 옛 성현들이 진지하고 엄정한 삶의 태도를 보면 더 그렇습니다. 오른쪽으로만 직진할 수 있다고 믿는, 그러나 사실은 제자리로 돌아오는 ‘꼴통보수’도 문제지만 좌회전 깜빡이를 켜놓고 갑자지 우회전해서 우리를 당황하게 만드는 ‘무늬만 진보’도 문제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 책이 미덕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옛글’과 그것에 비추어 살펴보고자 하는 지금 ‘세상’의 연관성이 너무 일차원적이라 분석의 깊이와 재미가 덜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사안에 대해 글을 쓰다보니 옛글에서 기대하는 인문학적 넓이 또한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곳곳에서 발견하는 옛글의 형형함은 그런 아쉬움을 달래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대한매일신보>에 ‘글호통’을 소개합니다. 이 글에서 ‘학부(學部)’는 지금의 ‘교육인적자원부’에 해당한다고 하는데, 이를 ‘대한민국 정부’로 고쳐 읽으면 현 사태를 통박하는 글로 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아, 저가 아무리 한국을 멸망케 하는 학부인들 저도 역시 사람이라 일반분(一半分)이나마 인간의 마음이 있다면 어찌 이런 말을 차마 할 수 있단 말인가. 저가 혹 한국인이 자주독립할까, 혹 한국의 현 상황이 파괴될까 우려하고 두려워하며, 어떻게 하면 한국이 망할 수 있을까 노심초사하다가 이런 요망한 계책을 생각해내어 마귀의 술수를 부리는 것이로다. 오호라, 저가 아무리 한국에 이익이 되는 학부는 아닌들, 한국이 망하는 것이 저에게 어찌 통쾌할 리가 있으며, 한민족의 멸망이 저에게 어떤 즐거움이 있기에 그 우려하고 두려워하며 노심초사하는 것이 저처럼 심한 것인가?
한-미 FTA 체결을 위해 ‘노심초사’했을 노무현의 노고를 치하해야 할까요? 당나라 태종은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배를 전복시킬 수도 있다. 백성은 물이고, 임금은 배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에게 희망을 걸고 4년 전 국민의 신성한 권리를 행사했던 수많은 민중들이, 노무현은 두렵지 않은가 봅니다.
고 허세욱 동지를 추모하는 사이트에, 고인이 오려는 ‘그날’을 기다리는지, 아니면 동지가 갈 저 세상을 미리 살피는지 살풋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는 사진이 있습니다. 동지에게 딱 어울리는 표현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자서전에서 발견했습니다. ‘마음이 몸 속에 다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넓은 아기 거인.’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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