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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에 빗대어 세상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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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은 비슷하다. 일상의 편안함과 가족의 행복 더 나아가 자신이 속한 사회와 나라의 안정과 밝은 미래의 희망을 찾는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며 풀리지 않은 모순이나 개인적인 답답함을 토로하는 사람들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시대를 이해하고 앞으로 살아갈 미래를 희망으로 가꾸고자 하는 마음속에는 현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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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은 비슷하다. 일상의 편안함과 가족의 행복 더 나아가 자신이 속한 사회와 나라의 안정과 밝은 미래의 희망을 찾는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며 풀리지 않은 모순이나 개인적인 답답함을 토로하는 사람들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시대를 이해하고 앞으로 살아갈 미래를 희망으로 가꾸고자 하는 마음속에는 현실에서 찾지 못하는 답답함을 동반하기도 한다. 그럴 때 찾아보는 것이 옛사람들의 살아온 흔적이며 그들의 마음을 담고 있는 글이다. 옛 사람들의 흔적을 더듬어 그 속에서 교훈을 얻고 내 미래를 밝혀줄 실마리를 찾아보는 위안을 삼곤 한다. 

그렇게 찾아본 옛글에는 그들의 높은 사상과 학문에 대한 지향이 드러나는 글도 있고 소소한 일상을 꾸밈없이 그대로 드러내는 글들도 있다. 대게 내가 공감하고 위안을 받는 글들은 옛 사람들의 정치적, 사상적, 학문적 이상을 높이 표현한 글들보다 사사로운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잡문에서 얻는 경우가 많다. 따스한 가슴으로 세상을 보고 자신의 속내를 숨김없이 보여주는 글에 마음이 더 간다는 말이다. 그러한 글을 읽을 때면 현실의 자신 역시 민망한 속내를 드러내는 것처럼 수즙은 미소를 지어보곤 한다. 굳이 옛글을 찾아 읽는 남다른 이유가 그것이 아닐까 싶다. 

[옛글에 빗대어 세상을 말하다]는 [시비是非를 던지다] 이후 다시 접하는 저자 강명관의 글모음이다. 이 책은 총 7부로 나눠 세상을 바라보며 하고 싶은 저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굳이 순서를 지켜 읽어나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현실에서 자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요소가 있을 때 옛글의 한 부분을 실마리 삼아 이야기를 꺼낸다. 그 이야기에는 정치, 사회, 교육, 문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다뤄지고 있으며 지극히 저자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담고 있다. 한문학을 전공한 저자가 학생을 가르치고 연구하며 글을 쓰는 동안 스스로의 속내를 스스럼없이 드러내고 있는 글들이기에 저자에 대한 정겨움마저 일어난다.

저자는 옛글을 통해 글 속에 담긴 속뜻을 살피는데 있어 경계해야 할 부분이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예를들면 조선시대 소학이 집권 양반세력의 체제유지에 필요한 사상적인 기조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는 점이나 춘향전이나 심청전이 열녀나 효부에 대해 이야기 하는 본질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도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고전이라고 선정된 일부 목록이 어떤 이유에서 선정되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한다. 무턱대고 누군가가 선정한 도서목록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말이다. 저자가 세상을 보는 시각에 흥미를 느끼게 되는 부분이다.

또 한편으로 주목되는 부분은 저자의 글에 대한 인식부분이다. 논문이나 소위 말하는 격이 있는 글과 일상생활을 담은 글인 잡문에 대해 글을 담는 그릇이 다르다고 글 속에 담긴 내용까지 차이가 이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형식과 내용이 적절히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뜻에는 동의하나 글 담는 형식에 치우쳐 내용도 미미한 글들이 우대받는 현실은 다시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옛글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이나 배격은 지양해야 할 자세가 아닐까? 저자의 옛글을 통해 오늘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따스한 가슴으로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는 마음이 있다. 그러기에 공감하는 마음이 있어 미소를 보낸다.



m*****8 2009.12.21. 신고 공감 1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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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관, 옛글에 빗대에 세상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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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고 있었던 민중가요 한 곡을 요 며칠 계속 듣고 있습니다. <그날이 오면> 고등학교 1학년 때 전교조 사무실 - 그때 따로 지칭하는 이름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네요 - 에서 산 노래테이프에서 처음 들었던 노래였는데, 기타 전주와 ‘한 밤의 꿈은 아니리’로 시작하는 가사의 감미로움을 아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허세욱 동지 분향소에 이 노래가 흐르고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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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고 있었던 민중가요 한 곡을 요 며칠 계속 듣고 있습니다. <그날이 오면> 고등학교 1학년 때 전교조 사무실 - 그때 따로 지칭하는 이름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네요 - 에서 산 노래테이프에서 처음 들었던 노래였는데, 기타 전주와 ‘한 밤의 꿈은 아니리’로 시작하는 가사의 감미로움을 아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허세욱 동지 분향소에 이 노래가 흐르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닐, ‘피맺힌 기다림도 헛된 꿈이 아’닐 ‘그날’이 과연 올까하는 절망과 안타까움으로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자기소개서’를 발표하는 아이들에게 너희들과 마찬가지로 그 분이 꿈꾸었던 세상이 어떤 세상일지 잠시라도 생각해 보자는 말로 면목 없는 애도를 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허세욱 동지가 남긴 짧은 유서를 아이들에게 읽어주면서 과연 이 세상을 구성하는 힘은, 민중들을 억압하는 권력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절대로 위에 서려고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온몸으로 보여주었던 민중의 진실과 정직을 왜 사람들은 비하하고 오해하려고만 하는지 답답했습니다. 자신의 몸을 나락으로 던지면서 까지도 비정규 동료들을 걱정했던 한 인간의 성숙함을 왜 그리 폄하하려고만 하는지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현실의 부조리와 답답함을 옛 글에 비추어 생각해 보는 책이 한 권 있습니다. 『조선의 뒷골목 풍경』을 쓴 강명관 교수가 최근에 출간한 『옛글에 빗대어 세상을 말하다』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옛글을 읽는 이유와 기준을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과거를 버릴 수도 없고 극단적인 부정도 옳지 않고, 극단적인 찬미도 옳지 않다면 과거의 문화와 옛글을 어떻게 이해하고 읽어야 할 것인가. 단 하나, 오직 인간 해방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읽어야 한다. 근대와 민족, 전통이란 코드가 아닌 오로지 인간 해방이란 관점이 필요한 것이다. 그 문화와 글이 과연 인간을 속박에서 해방하여 자유를 향해 나아가도록 말하고 있는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아무리 거룩한 이야기라도, 고전(古典)으로 정평이 나 있더라도 그 이야기가 혹 어떤 특정한 인간들만 자유롭게 한다면 평가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지나치게 엄격하고, 그래서 비현실적인 기준입니다. 조선시대는 ‘어떤 특정한 인간들만 자유롭게’한 텍스트가 거의 전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조선시대 문화 전체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자의 진정성은 충분히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를 위해 저자는 ‘인간을 ‘제작’해 온 역사를 역으로 추적하여, 나에게 진리로 설치되어 나에게 명령을 내리는 담론의 실체’ 탐구하겠다고 합니다. 인간의 사회적 존재이고, 사회의 총체는 문화이기에 인간은 문화적 존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발 딛고 있는 문화적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문화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때 비판적 사고는 멈춥니다. 자신의 존재론적 근거 그 자체를 객관화하고 문제시할 때, 비판적 근대인은 가능합니다.  

저는 최근 옛글을 현대적으로 ‘가공’한 글 읽기를 좋아합니다. 1차 문헌을 읽기에는 제 능력이 부족한지라 연구자들이 써내는 대중적인 글을 읽습니다. 그러면서 나도 점점 고루하고 보수적인 사람이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보수’를 참칭하는 모 정당 때문에 이 단어가 똥칠이 되기는 했지만 사실, ‘보수다운 보수’는 사회에 꼭 필요한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옛글을 읽으면서 엿보는 옛 성현들이 진지하고 엄정한 삶의 태도를 보면 더 그렇습니다. 오른쪽으로만 직진할 수 있다고 믿는, 그러나 사실은 제자리로 돌아오는 ‘꼴통보수’도 문제지만 좌회전 깜빡이를 켜놓고 갑자지 우회전해서 우리를 당황하게 만드는 ‘무늬만 진보’도 문제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 책이 미덕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옛글’과 그것에 비추어 살펴보고자 하는 지금 ‘세상’의 연관성이 너무 일차원적이라 분석의 깊이와 재미가 덜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사안에 대해 글을 쓰다보니 옛글에서 기대하는 인문학적 넓이 또한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곳곳에서 발견하는 옛글의 형형함은 그런 아쉬움을 달래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대한매일신보>에 ‘글호통’을 소개합니다. 이 글에서 ‘학부(學部)’는 지금의 ‘교육인적자원부’에 해당한다고 하는데, 이를 ‘대한민국 정부’로 고쳐 읽으면 현 사태를 통박하는 글로 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아, 저가 아무리 한국을 멸망케 하는 학부인들 저도 역시 사람이라 일반분(一半分)이나마 인간의 마음이 있다면 어찌 이런 말을 차마 할 수 있단 말인가. 저가 혹 한국인이 자주독립할까, 혹 한국의 현 상황이 파괴될까 우려하고 두려워하며, 어떻게 하면 한국이 망할 수 있을까 노심초사하다가 이런 요망한 계책을 생각해내어 마귀의 술수를 부리는 것이로다. 오호라, 저가 아무리 한국에 이익이 되는 학부는 아닌들, 한국이 망하는 것이 저에게 어찌 통쾌할 리가 있으며, 한민족의 멸망이 저에게 어떤 즐거움이 있기에 그 우려하고 두려워하며 노심초사하는 것이 저처럼 심한 것인가?


한-미 FTA 체결을 위해 ‘노심초사’했을 노무현의 노고를 치하해야 할까요? 당나라 태종은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배를 전복시킬 수도 있다. 백성은 물이고, 임금은 배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에게 희망을 걸고 4년 전 국민의 신성한 권리를 행사했던 수많은 민중들이, 노무현은 두렵지 않은가 봅니다.

고 허세욱 동지를 추모하는 사이트에, 고인이 오려는 ‘그날’을 기다리는지, 아니면 동지가 갈 저 세상을 미리 살피는지 살풋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는 사진이 있습니다. 동지에게 딱 어울리는 표현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자서전에서 발견했습니다. ‘마음이 몸 속에 다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넓은 아기 거인.’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d********n 2008.11.26.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