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 시간을 통해 인류는 고도의 규칙들을 생성, 축적해왔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골격을 이루고 있는 많은 제도들은 자연적이라기보다는 인위적이다. 인간이 만든 규칙에 의해 인간이 구속당하는, ‘인간과 제도의 상호작용’이라는 말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나타내는 핵심이 아닐까 한다. 많은 이들이 그리스 신화를 그리고 심리학 관련 분야를 접하면서 알게 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역시 이러한 특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남성이 어머니를 두고 자신의 아버지와 경쟁을 벌인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개념은, 실제로 존재하는지 여부는 불문하고, 한 인간이 아이에서 어른으로 되어가는 과정에 있어서 중요한 단계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이 개념은 지극히 남성적이다. 여성 아이의 아버지를 선망하는 태도를 두고 ‘엘렉트라 콤플렉스’라 칭한다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비해 비중이 떨어진다고 할까나? 아무튼, 급조된 듯한 인상을 줄 때가 많다. 남성이면 어떻고 여성이면 또 어떠한가? 어차피 이 세상의 것들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인위적인 것이라면 여성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빠져보는 것도 가능하리라. 이러한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다 보면 남성과 여성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이 모호함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을 경우, 조말선 님의 시는 이해하기 힘들다. ‘발작’은 대게 격렬하다. 하지만 시인은 그 앞에 ‘둥글다’라는 형용사를 덧붙임으로써 자신이 추구하는 시가 격렬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실제로 그녀의 시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경계를 거부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이는 첫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시인 <행렬>에서부터 여실히 나타난다. 암탉과 나를 독립된 두 개체로 인식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은 다름 아닌 긴 행렬이다. 하지만 암탉은 알을 낳고, 그 알은 달걀판이 그리고 꽃송이가 되어버림으로써 점차 ‘나’에게 당도한다. 이어지는 시 <낭비>에서도 저자는 개념의 분화를 거부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준다. 그녀에게 구멍은 곧 재스민이요, 음부이며 또 지갑이기도 하다. 재스민은 향기를 낭비함으로써 이토록 다른 단어로 설명되는 개념들을 ‘낭비’라는 하나의 테두리 안에 가두는데 성공을 거둔다. 이와 같은 독특한 시각은 침대나 냉장고 등 독립된 개체로서 인간이 분명히 지각할 수 있는 물체를 서술할 때도 드러난다. <망가진 침대>에서의 침대는 인간이 몸을 눕히는 공간이자 동시에 인간에 의해 망가진 인간 자신이다. 망가진 침대는 무언가를 곧 내뱉을 것 마냥 ‘만삭’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망가졌으니 버려야겠다며 다짐하는 인간의 몸 위로 버려짐으로써 인간을 구속한다. 작가는 여성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오이디푸스’라는 개념을 지속적으로 노래함으로써 남성과 여성의 경계마저도 무너뜨린다. 말 없고, 가족으로부턴 언제나 소외 아닌 소외를 당하는 듯한 그녀의 그리고 우리 사회의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 시인에게 필요했던 것은 다름 아닌 오이디푸스나무였다. 가족 안에서 하나로 융화되지 못하는 아버지를 이해하는 것은 고통을 수반한다. 그녀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하여 진실을 보지 않고자 노력하지만, 두 눈을 멀게 한 그녀의 행위는 오히려 그녀로부터 시각을 앗아감으로써 그녀가 오히려 진실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돕는다. 작가가 파낸 눈알은 천 배 혹은 그 이상 자라 한 그루의 나무로 성장하고, 부조리해 보이는 아버지의 소외감은 사회가 고용한 정원사에 의해 더욱 견고해진다. 이렇게만 본다면 그녀의 시는 여성지향적인 것마냥 여겨진다. 하지만 그녀에게선 이미 남성과 여성의 구분이 없기에 남성 혹은 여성 한 쪽을 탓하거나 벌하려는 태도 역시 존재할 수 없다. 오이디푸스나무는 남성의 것이지만, 수많은 아버지들 못지 않게 수많은 엄마들도 그 나무를 풍성하게 만드는데 기여한다. 정원사가 잘라낸 오이디푸스나무 역시 그와 그녀라는 남성과 여성 모두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서술되어 있다. 물론, <자라는 오이디푸스나무>에서 나타나듯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가시적으로 앓는 대상은 남성이며, 아버지이다. 하지만 이를 생성, 성장시키는 데는 여성도 남성 못지 않은 역할을 한다. 오이디푸스나무가 꽃을 맺고, 가장 화려한 시기를 거쳐 다음 해를 준비하는 소멸 아닌 소멸의 단계에 도달하는 데에도 여성은 ‘가해자’로서 등장한다. <오이디푸스나무의 꽃>에서 볼 수 있는 ‘사타구니가 문드러지며 웃고 있는 나’는 ‘화대를 받을 수 없다’는 표현을 통해 여성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치명적인 병’이라는 단어를 통해 알 수 있듯, 오이디푸스나무의 성장을 도왔던 그녀는 나무의 성장으로 인하여 고통스러워 한다. 하지만 작가는 이 고통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원인을 찾아내어 누군가를 탓하거나 하는 식의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이미 남성과 여성,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을 없애버린 그녀이기에… 그녀의 언어는 묘사적일 뿐이다. 세상은 그녀의 이러한 시선을 ‘분산적’이라 평한다. 그리고 다분히 정신분열증적인 속성을 담고 있다 할 수 있는 그녀의 관점을 바라보는 우리 자신의 시선을 우리는 ‘정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는 사회의 일반적인 시선을 말하기 위해 ‘정상’ 아닌 ‘고정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세상 사람들과 동질적인 생각을 하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초원에 누워버림으로써 아예 고정적인 시선에 동화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그런 의미에서 시 <분산적인 시선을 보는 고정적인 시선>의 마지막 문구는 이 시집을 통해 시인이 드러내고자 했던 가장 큰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