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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해당한 메시아의 재림: 새만화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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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새만화책을 통해 소위 초현실주의 만화라는 걸 처음 접해봤다. 초현실주의 미술이나, 영화를 본적은 있지만, 초현실주의 만화라.... 어떤 것인가 상당히 궁금했었는데, 사실 초현실주의 미술이나 영화를 뛰어넘는 만화만이 가지는 힘이 여기에 있었다. 나는 그걸 그림과 문자의 완벽한 조화에서 우선 경험할 수 있었다. 꿈을 영화로 만들어내는 것보다 만화로 만들어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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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새만화책을 통해 소위 초현실주의 만화라는 걸 처음 접해봤다.

초현실주의 미술이나, 영화를 본적은 있지만, 초현실주의 만화라....

어떤 것인가 상당히 궁금했었는데, 사실 초현실주의 미술이나 영화를 뛰어넘는 만화만이 가지는 힘이 여기에 있었다.

나는 그걸 그림과 문자의 완벽한 조화에서 우선 경험할 수 있었다.

꿈을 영화로 만들어내는 것보다 만화로 만들어내면서 언어의 결핍을 볼 수 있었고, 동시에 언어의 결핍을 메워줄 것이라 생각했던 그림 이미지들이 오히려 언어를 통해 자신의 결핍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렇게 드러나는 상호적 결핍들과 이 결핍들의 무한한 생산 앞에 독자인 나는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뻥뻥 뚫리고 마는 서사구조! 칸과 칸 사이의 심각한 시-공간적 서사적 단절!


그런데 동시에 나는 그런 결핍들의 무한한 생산 사이에 엄청난 의미의 심연이 가능성의 영역으로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러한 의미생산의 가능성과 잠재성이 다른 한편으로 언어와 이미지를 결핍을 통해 상호 보완하면서 활기차게 의미생산으로 전화되는 양상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건 분명히 독자의 참여를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양상이다.

나는 마치 이상한 나라의 폴처럼 현실을 중지시키고, 그 현실에 틈을 내어 만화 속으로 들어가버린 셈이 되었다.

그 정지된 현실 속에서도 폴이 이야기를 계속 생산해내는 것처럼 나 역시 그 만화 속으로 뛰어들면서 정지된 현실 속에서 다양한 의미를 생산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엄청난 언어와 이미지의 결핍 그리고 이를 통해 해석될 수 없는 파편화된 의미의 증폭, 그 도저한 증폭의 힘을 동시에 경험하고만 나는 이 만화의 이미지가 갖는 초반의 불쾌감이 쾌감으로 역전됨을 절감할 수 있었다.


불쾌의 쾌!

이거 칸트가 숭고미를 설명할 때 쓰던 개념 아닌가.

사실 불쾌의 쾌를 뼈저리게 경험한 것이 자연미도, 그렇다고 예술로 인정받는 것을 당연시 여기던 예술들이 아니라, 만화를 통해 경험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아니, 사실 조금은 이런 기대를 하고 만화를 접했다고 해야 보다 자신에게 정직한 말이 될 것이다.


이 만화가 갖고 있는 심연이 생산하고 증폭시키는 힘을 통해, 나는 또 하나의 인물과 재회할 수 있었다. 프란츠 카프카!

만화를 다 읽고난 지금도 이런 생각이 든다. “아~ 카프카가 만화를 알았더라면……. 카프카의 소설을 이 만화가들이 재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얼마나 새로운 카프카가 발견될 수 있을까?”


이러한 잠재력뿐만 아니라 심지어 몇몇 만화가 보여주는 디테일한 묘사와 절제된 감성은, 수다한 가능한 이야기가 담겨있는 잠재성의 토양을 더욱 기름지게 만들어 준다.(나이트 타임) 또 어떤 만화는 일하는 사회를 관리되는 사회로 적절히 보여주면서, 이러한 삶이 끝나지 않은 전쟁의 연속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비록 상투적인 상징으로 보여질지 모르겠지만, 이러한 상징이 만화이미지와 만나면 그 폭발력이 한 없이 커진다. 이는 이미지의 감각적 특징만이 가지는 장점이지 않을까.

뿐만 아니라 자아의 이야기와 타자의 이야기가 대결하는 내용들의 등장은 추방된 자, 그래서 비식별영역에 존재하는 잠재성으로서의 존재를 여실히 부각시킨다. 이는 오늘날 다문화주의 사회 속에서 소외된 계층을 대변하는 탁월한 특징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한데, 이 만화는 이 계층이 가능성의 영역이며, 이 가능성이 펼쳐지지 않을 때 수행되는 객체의 보복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목도할 때, 살해당한 메시아의 재림을 경험하게 됨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기실 만화의 운명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특히나 한국 사회에서는 지금도) 예술 외부에서 멸시 당했던 소외된 장르로서의 만화, 그러나 그것이 예술을 향해 외치는 새로운 의미를 향한 계시, 그러나 현실에서는 살해되고마는 그런 계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무력해지지 않는 계시. 다시 말해 살해당함으로써 계시가 진정한 자신의 힘을 발휘하게 되는 그런 계시를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경험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만화책은 무한한 결핍과 단절을 통해 무한한 의미를 생산하고, 이 의미가 독자에게 언제나 새로운 계시로 탄생할 수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다. 현대 미술이 자신을 자각하기 위해 600년의 세월을 소비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만화는 평면성에 대한 자각에 도달했으며, 이 평면성이 갖는 예술의 자기 정체성을 회화에 외치고 있었던 셈이다. 뿐만 아니라 이미지와 문자의 투쟁과 조화를 그 기법상, 즉 만화만의 특수한 방법론으로 실천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미지의 역동성을 영화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이는 오늘날 영화가 CG라는 기법을 통해 만화적 이미지의 자유로운 특성을 표현하는 것과도 일맥상통할 것이다.


이 만화책은 만화가 우리 주변에 있던 지극히 일상적인, 그러나 지극히 비일상적인 계시였음을 다시 한번 생생하게 증명하고 있다.

t******3 2008.07.01.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