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전에 실제로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 모습을 보고 좋지 않은 인상을 가졌던 현대 한국사회의 '철학자'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내가 보았던 당시는 지금만큼 인기가 있진 않았고, 인문학에 관심 있는 일반인들 사이에서 사랑에 대한 강연을 하며 팬층을 만들어나가던 시기였다. 그의 발화법이나 태도에서 부정적인 인상을 받았던 것인데, 그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니 자세히 얘기하진 않겠지만, 그를 보았던 에피소드는 그때 하려던 일과 아주 밀접해 있어서 특별할 것이 없었다. 나는 그 즈음 사랑하는 학문이 대중화되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과 그와 동시에 나를 매료시켰던 고상함을 잃어가는 모습을 동시에 보았다. 그러한 상황과 인기 '철학자'를 마주한 일련의 사건을 통해 한 달도 되지 않아 마음을 접고 그 일에서 발을 뺐다. 인문학의 대중화라는 그 사업에서 말이다. 하고 싶다고 부르짖다가 냉큼 관두어 버린 것은, 분명 채용해준 이들에게 미안한 일이기는 하지만 지금도 후회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내 당돌한 단호함은 그 문제의 '철학자'를 볼 때마다 되새기게 된다. 예술의 대중화, 인문학의 대중화, 과학의 대중화. 예술과 순수학문에 애정을 품으며 대학을 다니는 동안, 현실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에 내가 좋아하는 학문을 하며 돈을 벌 수 없을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결국 이제와서는 내가 기피해 마지 않는 그 '철학자'와 같은 삶을, 그 때에는 꿈꾸었던 것 같다. 막상 그러한 삶과, 그가 미친 영향을 보고 있자니 내 생각이 짧았던 것 같다고 느낀다. 대중이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는 것은 학문 발전의 씨앗이 될 수 있지만, 겉만 핥는 사회적 풍조에서 이는 오히려 어설픈 선무당들을 낳으며 발전을 저해하는 원인일 수도 있다. 오해된 지식과 잘못된 논리가 궤변에 포장되어 마치 그것이 진리인듯 사회적으로 허용된다면, 오히려 해당 학문 뿐 아니라 인류를 무너뜨리는 결과까지도 불러오지 않을까.
나는 보수적인 입장에서, 내가 사랑하는 것을 모두가 사랑하게 되는 일을 두려워하는, 옹졸한 과거의 인문학도일지 모른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과 같이, 동경했던 철학자의 글을 읽고 있으면 역시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었지 않나 하고 뒤덮여 있던 철학의 매력이 다시금 와닿는다. 물론, 그의 글은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그 '철학자'의 글보다 훨씬 어렵다. 익숙해지면 이보다 논리정연하고 보기 편한 것이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어쨌든 낯설어 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구조적으로도 복잡하고 난해하다. 하지만 그의 논리적 사고는 어떤 감정적 호소보다 짙고 명료해 보인다. 최근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의 겸손하고 울림 있는 글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는데, 그도 여기에서 비트겐슈타인과 비슷한 주장을 한다. 진리는 없다는 것. 정말로 똑똑한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을 진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틀릴 수 있음을, 자신이 정답이 아닐 수 있음을, 그것만은 분명하게 믿는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안다는 것에 대해 회의한다. 그는 회의하는 것 또한 무언가를 믿을 때 가능한 것이라고 본다. 무언가를 안다고 생각하든, 의심하든, 모두 믿음이 우선한다고 말한다. 데카르트는 의심의 끝에 자신이 안다고 믿을 수 있는 근거를 대며,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을 확고히 했지만, 비트겐슈타인은 그와 다르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아는 것이 불확실할 수 있음을 전제한다. 자신이 안다고 믿는 것은 여지껏 배움을 통해 믿어온 것들에 기반하며, 자신이 안다고 믿는 근거를 댈 수는 있지만 안타깝게도 증명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내가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을 타인이 그르다고 주장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반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건 그 사람들의 배움이 나와 다르고, 따라서 그들의 믿음이 다를 테니 말이다.
그의 논리를 접하면 우리가 안다는 것은 허황된 믿음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가 보여주는 것은 맹목적인 믿음을 막아줄 뿐 아니라, 전혀 다른 앎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포용력을 키워준다. 이러한 것이 있을 때 우리가 하루에도 몇 번 씩 원하는 '진실'이라는 것에 그나마 가깝게 다가갈 수 있고,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진리'가 아닐까. 대중을 현혹하는 몇 마디 말로 철학 운운하는 것이 철학의 대중화가 아니라, 가치 있는 철학적 논의를 쉽게 풀어 새로운 가치정립을 해나가는 것이, 철학으로의 대중의 진입장벽을 낮추어 철학적 물음을 대중 안에서 공론화 하는 것이 진정한 철학의 대중화가 아닐까. 160. 어린아이는 어른들을 믿음으로써 배운다. 의심은 믿음 이후에 온다. (52쪽)
286.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는 우리가 무엇을 배우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 모두는 달에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고 또 그런 일이 때때로 일어난다고 믿는 사람들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말한다: 이들은 우리가 아는 많은 것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의 일을 제아무리 확신하더라도―그들은 오류에 빠져 있고, 우리는 그것을 안다. 우리가 우리의 앎의 체계를 그들의 것과 비교한다면, 그들의 체계는 훨씬 더 빈약한 것으로 드러난다. (75쪽)
404. 나는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사람이 어떤 지점들에서 완전히 확실하게 진리를 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완전한 확실함은 단지 그의 입장과 관계되어 있을 뿐이다. (99쪽)
611. 서로 화해될 수 없는 두 원리가 실제로 마주치는 곳에서, 각자는 타자가 바보니 이단자니 하고 선언한다. (146쪽)
668. 내가 어떤 보고를 하고, 그 점에 있어서 나는 오류를 범할 수 없다고 덧붙인다면, 그것은 어떤 실천적 결과들을 가지는가? (나는 그것 대신 또한 이렇게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 나는 내 이름이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점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오류를 범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은 나의 진술에 대해 의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나를 신뢰한다면, 그는 기꺼이 나의 말을 들어 볼 뿐만 아니라, 나의 확신으로부터 나의 행동에 관해 특정한 결론들을 이끌어 내기도 할 것이다. (15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