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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라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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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김정희 세 글자로 말하기보단, 흔히 추사 김정희로 알고있는 그분.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을 읽고 그 그림들, 그리고 한국의 멋에 젖어있다가, 흥취가 가시지 않은 시점에 추사 김정희 서거 150주기 특별전을 접하게 되었고, 지난 11월 8일에 특별전을 보러 다녀왔다. 시발점은 한국의 그림, 한국의 미(美)에 대한 호기심이었으나, 전시회를 가고 오고 그 동안에 김정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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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김정희 세 글자로 말하기보단, 흔히 추사 김정희로 알고있는 그분.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을 읽고 그 그림들, 그리고 한국의 멋에 젖어있다가, 흥취가 가시지 않은 시점에 추사 김정희 서거 150주기 특별전을 접하게 되었고, 지난 11월 8일에 특별전을 보러 다녀왔다. 시발점은 한국의 그림, 한국의 미(美)에 대한 호기심이었으나, 전시회를 가고 오고 그 동안에 김정희라는 한 인물에 대해 알고싶어졌다. 도대체 김정희가 뭐 하는 사람이었나. 추사(秋史) 김정희. 하면 그냥 말 다한 것인가. 그분은 추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일까. 특별전에 다녀오고 나서도 그 궁금증은 풀리지 않았다. 반면, 증폭되었다고나 할까. 걷잡을 수 없는 호기심. 특별전은 그 매개인 셈이었다. 순간 교보문고에서 마주쳤던 유홍준씨가 지은 『김정희』가 떠올랐고, 구입해서 사 보게 되었다. 사실 사족을 덧붙이자면 - 내가 다른 책들과 다르게 책의 외형을 많이 찍어서 올린 것과 관련하여 - 책 자체에 대한 호감도 있었다. 나중에 책에서 읽게 되었던 入古出新(입고출신: 옛 것으로 들어가 새롭게 나옴) 정신과도 같이....... 현대적 도서의 모습을 취하고 있으나 겉면에 쓰인 고풍스런 한자라든지, 빛바랜 종이와도 같은, 그러나 격조높은 옛 멋을 풍기는듯한 색감+재질의 표지, 그리고 양장은 나를 이끌기에 충분했다. 책의 외부 표지 중 뒷면에는 김정희가 그린 난초라는 불이선란의 모습이 보이는데,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유려하고 부드러운 난초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잡초같기도 한, 특유의 멋이 있는 난초이다. 겉 표지를 벗기면, 양장이 보이는데 양장에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라고 음각으로 파여있다. (파여있다기 보다는 양장 만드는 과정에서 강한 압력을 가해 움푹 들어가게 했을 것이겠지만.) 금석학과 고증학의 대가라는 김정희를 여기서 또 매개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비석과도 같이, 금석기가 묻어나오는 음각의 한자. ''알기 쉽게 간추린'' 완당평전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이 책은, 간추린 것은 맞지만 알기 쉬운 것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이 책을 통해 평전이라 하는 장르를 처음 접했는데, 애초에 평전이라는 인식을 덜 했었나 보다. 국어사전에서는 평전(評傳)이란, ''개인의 일생에 대하여 평론을 곁들여 적은 전기''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알기 쉽게 간추린 평전이라함은 맞는 말인 것 같다. 본문만 450여 쪽에 달하는 짧지 않는 이야기지만, 애초에 여러권이었던 유홍준씨의 완당평전을 간추려 완당 김정희가 일생동안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 주위의 평가들과 함께 만들었으니, 알기 쉽게 간추린 것이 맞다고 하겠다. 하지만, 나는 김정희의 활동과 주위의 평가를 읽으면서 , 내내 김정희의 활동 이면의 김정희의 사고(思考)의 본질에 대해 궁금해했다. 직접 물어볼 수도 없고 주위의 평을 통하여 2차적으로 들어야 하는 한계가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그래서 ''알기 쉽다.''라는 말에 긍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대신, 김정희가 어떤 사람이냐 함에 대한 물음에나마 간략하게 대답할 수 있으리라. 내가 판단하는 김정희는 한 마디로 말할 수는 없지만, 르네상스 시대의 대가 미켈란젤로를 생각나게 한다. 미켈란젤로는 자부심이 대단했고, 까탈스러웠다고 한다. 주문받은 작품일지라도 영감이 떠오르지 않거나 제작동안에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완성을 하지 않아 주문자들에게 원성을 들었고, 시스티나 대성당에 벽화를 그려달라 하니 성스러움의 본당에 나체 군상들로 그림을 뒤덮었고(최후의 심판에 그려진 나체는 그가 죽기 전에 교황의 명령으로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옷을 덧칠하게 하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조각과도 같은 미려한 신체묘사에서 벗어나 울룩불룩 다소 흐트러진 인체를 그려냈다. 자신의 신념을 주위와 타협하지 않은 것이다. 그만큼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김정희도 매우 까다롭다. 따뜻한 인간 관계를 가졌다고는 하나, 유배 시절에 친인척들에게 무엇이 필요하니 보내달라는 둥, 보낸 것이 좋지 않으니 다시 보내라는 둥, 적적하니 나를 방문해달라는 둥 쉴새없이 요구사항을 쏟아냈다. 유배지가 제주도씩이나 되는데도 말이다. 붓을 쓸 때도, 종이를 쓸 때도 아무 붓과 종이를 쓰는 것이 아니라 쥐 수염으로 만든 귀한 붓, 붓과 마찰이 적당한 고급 종이가 아니면 글씨 쓰기를 꺼렸다고 한다. 그의 대가적인 풍모가(그림 감식, 금석학과 고증학, 문인화, 불교사상 등) 그런 까다로움을 완벽히 정당화하지는 못하지만, 그를 평가하는 사람들에게 ''이해''의 근거를 줄 수는 있을 것이다. 다만 그는 개성이 넘쳤으나 관용이 부족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보다는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다소 아쉬운 부분이다. 이외에 그의 글씨에 대한 것은..조금 더 알아보아야 겠다. 아직 전서, 행서, 해서, 예서도 잘 모르고 추사체를 한번에 알아보지도 못하겠다. 아는만큼 보인다고, 단지 멋있어 보이는 글씨를 골라낼 뿐이다. 그 이상 더 나아가질 못한다. 지금까지 내가 김정희와 서예에 대해 대강 아는 것은, 탁본 등을 통해서 옛 글씨를 연구하고 입고출신하여 자신의 글씨가 되었다는 것이다. 스스로의 미학(美學)이 있었고, 그에 입각하여 입고출신하였다. 탁본을 많이 구했다고 쓰여있고, 무슨무슨 비석에 무슨 글자가 없어서 그 글씨를 본따지 못했다고 하는 말로 미루어보아 탁본은 오늘날로 폰트(font)의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금석에 새겨진 옛 글자의 폰트들에서 전아함과 금석기를 끄집어내어 자신의 미학에 따라 글자디자인을 연구했다고나 할까. 아직도 궁금한 것들이 많다.
i*****e 2006.11.17. 신고 공감 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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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당 김정희의 민족적 자부심과 북방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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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당의 민족적 자부심과 북방의식   『완당은 평소 금석학자답게 답사를 좋아하였다. 완당은 북청에 유배 와서도 천성을 속이지 못해 유적을 찾아가서 살피고, 고증학자답게 그것을 논증하고, 시인답게 그것을 시로 읊곤 했다.   더욱이 북청은 옛 숙신 땅이고 발해(渤海)의 구지(舊地)였기 때문에 관심이 높았다. 완당은 자신의 귀양살이 굴피집이 있는 성동(城東)이 곧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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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당의 민족적 자부심과 북방의식

 

『완당은 평소 금석학자답게 답사를 좋아하였다. 완당은 북청에 유배 와서도 천성을

속이지 못해 유적을 찾아가서 살피고, 고증학자답게 그것을 논증하고, 시인답게 그것을

시로 읊곤 했다.

 

더욱이 북청은 옛 숙신 땅이고 발해(渤海)의 구지(舊地)였기 때문에 관심이 높았다.

완당은 자신의 귀양살이 굴피집이 있는 성동(城東)이 곧 대조영(大祚榮)의 발해 5()

15부() 중 남경(南京)쯤 되는 곳임을 늘 의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여름날

지은 시성동피서(城東避暑)>는 첫 행부터 대조영으로 시작한다.

 

大氏南京夕照紅/대씨남경석조홍

山川猶記霸圖雄/산천유기패도웅

一筇只管漫閒境/일공지관만한경

散暑松濤柳浪中/산서송도유랑중

 

발해[大氏]의 남경 땅 붉게 물든 저녁 노을

산천 보니 오히려 웅대한 포부 기억되네.

한 지팡이 한만한 지경을 거느리며

버들 물결 솔 파도에 더위를 흩날리네.

 

 

완당은 여러 면에서 뛰어난 역사지리학자였다. 그가 논문으로 발표한 것은 없지만

이 방면에 뛰어난 그의 학식이 「완당선생전집」 곳곳에 드러나 있다. 그 중 한 예를

일찍이 벗 권돈인이 갑산(甲山)에 유배되었을 때 그곳 허천(虛川) 지역에 대해 말한

것에서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역사지리학자들이 그렇듯이 완당에게도 강한 민족의식이 있었다. 완당은

청나라 학자들과의 깊은 교유 때문에 국제적 감각의 지식인, 심지어는 사대주의적

분위기에 젖어  있던 지식인으로 흔히 인식되고 있다. 나 또한 한동안 그렇게 생각해

왔지만 실제로 그는 민족적 자부심이 대단히 강하고 우리 민족의 대륙적 기상과

북방적 기질을 사뭇 동경해온 분이었다.

 

그것은 그가 읊은 영사시(詠史詩)를 모두에 조선의 북진(北進)과 강국(强國)에 대한

희망이 들어 있는 데서 엿볼 수 있다. 귀양 오면서 함흥의 만세교에서 읊은 시의

첫 구절이 진흥왕 복수하던 때인 것도 그런 기상의 표현이다. 완당은 이곳 북청에

와서도 그런 북진의 기상을 계속 노래하고 있다. <연무당(鍊武堂)>이라는 시에서는

고려 시대 윤관(尹瓘) 장군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魚鳥風雲畫閣東/어조풍운화각동

六城一路垜頭通/육성일로타두통

殘山剩水先春迹/잔산잉수선춘적

惆悵當年尹侍中/추창당년윤시중

 

물고기 새 바람 구름이 그려져 있는 누각 동쪽은

여섯 성의 한 길이 보루로 통하누나.

낡은 산, 넘치는 물은 선춘령(先春嶺)으로 통하니

당년의 윤관 장군을 생각할수록 슬프기만 하네.

 

 

완당의 북방의식, 민족의식은 북청시절에 이처럼 더욱 명확히 발현되곤 했다.

 

김정희(알기 쉽게 간추린 완당평전)[학고재/유홍준] 371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인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 완당(阮堂) 등 이고 부친은 병조판서 김노경의 장남으로

백부 대사헌 김노영에게 출계되었다.

 

관직은 1819년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세자시강원설서, 규장각대교, 암행어사, 예조참의,

판의금부사, 병조참판, 성균관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완당척독’,

‘담연재시고, ‘완당선생이 있다

 

추사는 조선 후기의 명문가 집안 중 하나로서 고조부 김흥경이 영의정을 지내고,

증조부 월성위 김한신은 영조의 둘째 딸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다. 조부인

김이주는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친부인 김노경은 병조판서를 지낸 명문가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글을 좋아한 추사는 초정 박제가를 스승으로 모시고 글을 배웠다. 초정은

연경을 세 차례나 다녀온 실학자로 명망이 훌륭한 분이었다. 초정이 연경을 다니면서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어린 제자인 추사에게 성심성의것 가르쳤다. 조선의 선비들이

성리학의 테두리를 못 벗어날 때 새로운 학문인 북학의를 직접 쓰고 서양의 문물들을

배워서 전달한 것이다. 청나라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힌 초정의 가르침은 새로운

학문에 목말라한 추사에게는 큰 희망이자 꿈이었다.

 

추사가 생원에 합격하고 친부인 김노경이 호조참판으로 동지부사로 180910월에

연경에 갈 때 자제군관으로 동행하게 된다. 스승에게서 수 없이 듣고 배웠던 새로운

세계인 연경에 직접 가보게 되어 청의 신선한 학문과 예술경향에 큰 충격을 받는다.

연경에서 스승의 벗인 조강을 만나고, 조강을 통해서 서송 그리고 담계 옹방강과

운대 완원을 만났다. 옹방경과 완원은 당대 중국의 최고 석학들이었다. 또한 두 분외에도

연경의 문인들을 많이 소개 받아 만났다. 추사는 새로운 학문의 물결을 접하고 그들과

함께 논하고 배웠다.

 

추사는 서예뿐만 아니라 경학, 고증학, 금석학, 선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특히 나라

사랑하는 마음은 그 누구도 따라갈 사람이 없을 만큼 사랑하였다. 이러한 해박한 지식은

연경에서 들어오는 새로운 학문을 배우고 익히고, 다양하고 많은 독서량이 힘이 되었다.

추사의 예산고택 장서고에는 수만 권의 장서가 있었으나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직접 연경의 연행사절로 몸소 체험하고 배워서가 아닌가 한다.

 

신라의 전성기 시 진흥왕 순수비는 황초령비, 북한산비, 창녕비, 마운령비 4개가

있었으나 천 년의 세월 속에 잊혀졌다가 다시 찾게 된다.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는

1816년 7월에 친구인 김경연과 함께 북한산 비봉에 올라가 무학오심도차비

비문을 탁본하여 분석한 결과 그 비가 북한산 순수비로 확인되어 다시 찾게 된다.

황초령비도 친구인 권돈인이 함경감사로 나가게 될 때 함흥의 황초령비를 찾아 달라는

간곡한 부탁으로 찾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리하여 다시 찾은 황초령비를 탁본을 하여

추사에게 보내게 된다. 지금은 비의 일부분 3조각을 찾아서 북한의 함흥력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북청에 유배 가서도 우리의 역사에 대하여 자부심을 대단하여 민족의 성산인 백두산을

바라보며 해동성국이었던 발해의 위대함을 성동피서란 시에서 나타냈다. 우리나라의

남북국시대를 연 발해는 영토가 거대하여 5(5)의 수도를 두었는 데 그 중의 하나인

남경은 지금의 북청에 해당된다. 그리고 고려의 윤관장군이 1107년에 고토 회복을 위한

북벌로 동여진 땅인 두만강을 7백리 지나 선춘령까지 정벌하여 공험진이라는 성을 쌓고

‘고려의 국경이란 비를 세워 국토를 크게 확장하였다. 추사는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기억하여 연무당이란 시에서 자랑스럽게 읊었다.

 

이렇게 추사는 우리의 옛 영토인 만주나 연해주를 되찾는 북벌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자랑스러운 선비였다. 그는 조선시대의 제일의 명필이요 독창적인 추사체로

완당바람을 일으켰으며 또한 민족적 자주성이 강하고 고구려의 강대한 국권을 회복하는

것에 대한 원대한 꿈을 갖고 있는 애국자였다.

 

답사기행에도 일가견이 있는 추사는 국토 어디를 가던 우리 역사에 관련된 것을

회상하곤 하였다. 북청 유배를 1851년 7월 22 한양을 떠나 포천, 철원, 회양, 철령,

함흥을 지나 흥원의 함관령 고개를 넘어 성천강에 있는 만세교를 지나면서 신라의

진흥왕이 이 곳을 점령하고 함초령비를 세운 것을 기억하여 만세교를 지나며라는

시를 지으며 읊었다.

 

만세교를 지나며(萬歲橋途中)

 

緬憶眞興北狩年/면억진흥북수년

飛騰綺麗一樓前/비등기려일루전

長橋落日堪廻首/장교락일감회수

數抹雲煙若個邊/수말운연약개변

 

진흥왕 북수하던 때를 추억하니

누대 앞에 화려하던 모습이 드날리네.

긴 다리 지는 해에 고개 돌려 바라보니

두어 가닥 구름 연기 변방인 듯하구나.

 

 

그리고 제주도 유배시에는 몽고의 침입으로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진도로 마지막에는

제주도에서 항몽전쟁을 벌였으나 1273년 진압되었던 역사를 기억하고, 유배의 어려움

속에서도 조국을 위해 마지막까지 항쟁한 삼별초의 흔적을 찾았으나 그 흔적이 없음을

아쉬워하면서 임소에 가는 탐라백을 작별하다란 시를 남겼다.

 

임소에 가는 탐라백을 작별하다[別乇羅伯之任] 4수

 

성 동쪽 한 번 이별 작은 못 가일러니 / 城東一別小池頭

푸른 일산 멀리 놀아 제주로 떠나가네 / 葱蓋弧南博遠遊

천년이라 한가한 땅 성주의 옛나라에 / 星主千年間暇地

군민의 총관님은 바로 곧 군후로세 / 軍民摠管卽君侯

철옹같은 서방에다 토문마저 곁따르니 / 鐵罋西防又土門

변방을 튼튼히 한 모든 계획 분명해라 / 分明籌策壯邊垣

옹어의 바다 위서 깃대 돌림 고작인데 / 鰅魚海上纔廻節

붉은 인끈 지금 옮겨 유자 나는 고장으로 / 朱紱今移橘柚園

삼십칠 도 위선이 사뭇 높아 길 고른데 / 極高卅七線途勻

하미는 서로 연해 석진을 지나가네 / 河尾連躔度析津

목노는 영주 땅을 벗어나지 못하나니 / 木奴不過瀛洲植

위대로 친다면은 회남이 곧 이웃일레 / 緯帶淮南可比隣

담모가 옛날에는 탐부로도 일렀나니 / 聃牟於古亦耽浮

유리성 비었어라 바다 머릴 베개했네 / 儒李城空枕海頭

구한의 풍토지를 보충해야 하겠는데 / 要足九韓風土志

다루화치[魯花] 유적을 어찌하면 구한다지 / 魯花遺蹟若爲求

                                   [완당전집 제10]

 

탐라국주(耽羅國主)는 였날에 성주(星主)라 칭하였음.

() 나라 때 군민총관부(軍民摠管府)를 세웠음.

설문(說文)에 옹어는 동이(東暆)에서 난다 했는데 곧 지금 강릉(江陵).

위도(緯度)가 회남(淮南)과 더불어 동대(同帶)이기 때문에 유자가 바다를 건너면 역시

탱자가 됨.

《수서(隨書)》에담모라(聃牟羅)는 백제(百濟) 해중에 있다.’ 하였고, 한문(韓文)

‘해외유수 탐부라의 나라[海外流水 耽浮羅之國]’라고 하였으며,《당서(唐書)》에는

‘담라국(儋羅國) 왕 유리도라(儒李都羅)가 내도하다.’ 했으니, 모두 탐라(耽羅)

가리키는 것인데 성음이 비슷하여 서로 변한 것임.

《풍토기(風土記)》에 ‘구한(九韓)의 목에 탐라(耽羅)가 그 하나를 차지하는데

원 나라 때에 다루가치(達魯花赤)를 두었다.' 하였음.

하미 : 하괴성(河魁星)과 미성(尾星).

석진 : 석목(析木)의 나루라는 것으로 제주를 말함. 석목은 미성(尾星)

별칭인데 남쪽에 위치함.

목노(木奴) : 유자의 별칭.

YES마니아 : 골드 h****i 2009.04.25.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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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당 김정희의 평전. 한학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유홍준이 말하는 완당의 학문적 성취의 대단함은 잘 모르겠다. 오히려 이 책에서 흥미로운 것은 그의 인생 역정이다. 완당은 그의 드높은 학예의 경지 만큼이나 오만하고 까다로운 인물이었다. 젊은 시절, 당대의 석학 정약용에게 대드는 것은 젊음의 치기라고 하자. 하지만 이순(耳順)이 다 되어 가는 나이에도 그의 불같은 성정은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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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당 김정희의 평전. 한학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유홍준이 말하는 완당의 학문적 성취의 대단함은 잘 모르겠다. 오히려 이 책에서 흥미로운 것은 그의 인생 역정이다. 완당은 그의 드높은 학예의 경지 만큼이나 오만하고 까다로운 인물이었다. 젊은 시절, 당대의 석학 정약용에게 대드는 것은 젊음의 치기라고 하자. 하지만 이순(耳順)이 다 되어 가는 나이에도 그의 불같은 성정은 그대로였다. 전주의 이름난 서예가 창암 이상만이 자신의 글씨에 평을 부탁하자 ˝노인장께선 시골에서 글씨로 밥은 먹겠습니다˝라고 깔본 일화나, 80이 다 된 노납 백파선사와의 禪 논쟁에서 ˝망증(妄證)이 들었느냐˝라고 안하무인격으로 깎아내린 일화는 이를 잘 보여준다. 그러했기에 당연히 적이 많았고, 권세가 안동 김씨 집안의 미움을 사서 제주로 유배된다. 그런데 완당은 9년 간의 유배 생활을 통해 서예에 크나큰 성취를 이룬다. 추사체가 이 때 완성된 것이다. 큰 고난을 겪으며 인격과 예술 모두 비로소 완숙해진 것이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 그가 앞서 모욕했던 창암 이상만이나 백파선사에게 사과하러 가는 대목은 코믹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완당이 이전에 얼마나 지독하게 사람을 무시하여 적을 많이 만들었던지, 유배가 끝나고 조용히 살던 완당은 3년 만에 또 다시 북청으로 유배된다. 북청 유배는 1년 뒤에 풀리지만, 이미 집안은 풍비박산나고 완당은 가난하며 고적한 말년을 마치게 된다. 당대의 명문가 자제로 태어나 타고난 재능을 마음껏 펼쳤으나, 그로 인해 불행한 말년을 보낸 완당. 하지만 말년의 불행이 아니었다면 그의 예술 세계가 완성될 수 있었을까? 

d******e 2017.06.16.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