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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을 적어도 번역된 소설 마지막 권이다. 순서대로 읽지 않고, 그때그때 생각날때마다 구입해서 읽었기때문에 이 소설이 1986년작임에도 불구하고 독자에게는 꼭 최신판처럼 느껴진다. 전후를 배경으로 한 '창백한 풍경의 언덕', '남아있는 나날'과 함께하는 소설이라고 하는데, 연도별로 '창백한 언덕의 풍경',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남아있는 나날' 순이다. 재미있는 것이 첫번째 작품이 영국에서 일본을 회상하는 배경으로 썼고, 다음 작품은 오로지 일본을 배경으로, 마지막은 영국을 배경으로 해서 썼다는 것이다. 모두 2차세계대전을 이후를 배경이 현재이나, '남아있는 나날'같은 경우는 1차세계대전까지도 거슬러 올라간다. 전후를 배경을 한다는 것은 사실, 많은 혼란을 가져온다. 승리와 패배가 존재하고, 당시만의 선악도 존재한다. 주관적이긴해도 승리가 곧 선인 된다. 적어도 2차 세계대전은 그렇지 않은가? 전범국가들은 악이 되고 사죄했다. 작가는 일본이라는 패망국에서 태어나 승전국으로 이주한다. 그리고 패망국이 된 모국을 배경으로 혹은 승전국이 된 제2의 모국을 배경으로 소설을 쓴다. 그래서 패망한 일본이 '악'이 되지 못하고 승리한 '영국'이 선이 되지 못한다. '창백한 풍경의 언덕',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의 일본은 전후 갈등이 점철한 사회임을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 '악'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당연히 일상적인 필부필녀들이 주인공이어서 그럴테지만, 개인적인 차원에 머문다. 그리고 미국이라는 국가를 동경 혹은 따라가는 모습을 보인다. 한 소설에서는 미국인을 따라가려고 애쓰는 여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고, 본서는 미국의 시스템을 따라가는 전후 일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둘 다 주인공들은 '의심'을 갖고 다른 생각을 소극적으로 전달한다. '남아있는 나날'에서 영국은 승전국이나 '선'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한 집사의 소극적인 개입으로 인해 역자의 해설을 약간 빌리자면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소설화 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렇다고 일본을 좋게, 영국을 나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소설을 굳이 영국과 일본, 승전국과 패전국으로 구분해서 살펴본다면 저자는 일본은 비교적 우호적으로 영국은 상대적으로 '창백한 풍경'으로(주인공의 딸이 자살한 곳은 영국이다.)미국은 '창백한 풍경의 언던'과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에서는 의심스러운 국가로 보고 있다. 물론, 영국과 미국이 반드시 '선'일 필요도 없고 일본이 '악'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작가의 소설 속에서 간헐적으로 보이는 생각은 상대적으로 일본을 우호적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전쟁을 배경으로 썼지만, 국가가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개인의 삶이 더 큰 관심사이다. 사실, 당시를 다루면서 개인의 삶만 귀추했을 수는 없다. 저자의 글은 분명 사회를 상당히 깊게 살펴보고, 생각해 봤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때문에 본서의 화풍의 변화를 따져보고 그 변화를 세밀한 수준은 아니지만, 적절한 수준에서 소설 속에 배경으로 스케치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소설은 '야망', '덧없음'으로 대비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시구로의 소설 속에서 어떤 단어가 본 소설에서처럼 드러나는 것을 본적이 없다. '파묻힌 거인'에서 '망각'이라는 키워드가 등장하긴 하지만, '망각'이 갖는 안개같은 뉘앙스로 '야망'과 같은 언어의 느낌을 갖지 못한다. 소설속에서 주인공의 야망, 그리고 그 야망은 일반인들에게 없는 것이어서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라는 판단은 실제로는 무서운 생각이다. 소설속에서 일본이 실제로 그랬다는 것을 주인공은 비록 실패했고, 그것의 과오가 있음을 인정했지만 그래도 그것은 마땅히 해볼만했다라는 인식은 전범국가이나, 공개적인 사죄를 거부하는 일본의 현재 모습의 이유를 알 수 있게 한다. 저자는 이 의식을 솔직히, 독자에게 맡기고 있다.
"한 인간이 평범을 넘어서기를, 보통을 능가하는 그 무엇이 되기를 열망한다는 것은, 설사 실패하고 그 야망으로 인해 재산을 잃는다 해도 찬탄받아 마땅한 것이기 때문이다."-소설 중-
개인이라고 할 때 이 구절은 그다지 틀렸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역사, 국가, 전쟁이라는 커다란 그림 속에서 위의 구절은 참람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이러한 부분을 저자는 독자의 판단으로 넘긴다. 철저히 작가로서의 역할에 머물고 있다. 그점이 이시구로의 소설을 더 읽게 만드는 매력인지도 모르지만.
그렇다면, '부유하는 세상'은 무엇일까? 전작인 '창백한 풍경의 언덕'은 제목이 소설 전체를 은유하면서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본서는 제목이 내용과는 역설적이다. '부유'는 떠도는 것을 의미하는데, "밤과 일체가 되었다가 아침과 함께 사라지는 환락의 세계"(역자의 말 중)를 의미한다. 실제로 존재했던 '유키에요'라는 일본미술의 유파과 중요시 여기는 주제, 혹은 배경이라고 할 것이다. 주인공은 실제로 이러한 유파에서 양육을 받았고, 그 유파에서 떨어져 나와서 자기재능을 새롭게 발휘하는 기회를 얻는다. 그를 안내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제대로 나오지 않지만, 분명 국가기관과 연계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천황에게 충성을 다하기 위한 부류. 세상 물정 모르는 주인공은 빈민굴에 갔다가 충격을 먹고, 공산주의도 모르면서 아는척하고, 마르크스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아는척하고 레닌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아는척하다가 결국, 동참하게 된다. 이시구로는 세상을 잘 모르면서 오로지 그림에만 매몰되어 있는 예술가를 비꼬는 것이었을까? 그리고 이러한 예술가들에게 이데올로기가 주입되면 그 어떤 일이라도 당위성을 갖고 하게 되는 모습을 비판하는 것일까? 적어도 나는 독자로서 그렇게 느낄 수 있었다. '무지'는 무서운 적이 된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무지는 일방적이다. 게다가 권력이라는 것,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권력까지도 어느 정도 주어진다면, 더 열심히 세상을 바꾼다는 신념가운데 최선을 다할 것 아닌가? 조금은 똑똑한 아이히만이 등장하는 것인가? 명령에 따라 기계적으로 일하는 군인이 아니라, 그것이 명령인줄도 모르고 자신의 야망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일하는 예술가를 보여주는 것인가?
"우리는 적어도 믿는 바를 위해 행동했고, 최선을 다했다. 말년에 자신의 성취를 재평가한다고 해도, 내가 그날 그 높은 산길에서 느꼈던 것 같은 진짜 만족감이 깃든 한두 순간들이 자신의 삶에 있다는 것은 언제나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 소설 중 -
스스로가 타협하고 있다. 주인공은 둘째 딸의 결혼을 위해 자신의 과거를 비판한다. 여기서 또 한 가지 느껴야 할 것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자살한 음악의 거장이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목을 맸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의 가족들은 이러한 비극이 있을까봐 노심초사한다. 물론, 주인공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왜? 그는 죄책감을 갖지 않는다. 단지 과오를 인정할 뿐 이다. 그 시대에는 그렇게 하는게 맞다라는 것이 그의 생각인 것이다. 현재 비판도 달게 받겠고, 제자의 무례함도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자신은 그것을 부인할정도로 꽉 막힌 파렴치한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자살한 음악가만큼이나 영향력이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는 것도 그가 죽지 못하는 이유가 된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필부이다. 가족을 사랑하고 제자들을 아끼고. 그리고 상처도 잘 받고, 자상한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어떻게보면 열린 사고로 자신에게 가해지는 비판도 비교적 잘 수용한다. 여기서 작가는 주인공에 대한 평가를 독자에게 또 넘긴다. 일반적인 필부, 그는 야망이 있었고, 그 야망을 위해 열심히 최선을 다한 것 뿐이다. 그는 그러한 노력이 큰 영향력을 행사했을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래서 그와 같은 위치의 거장이 자살을 택해도 주인공은 죽을 이유가 없다. 면죄부를 주는 것인가? 살아가기 위해서 내면 속에서 타협하는 인간을 그려낸 것인가? 작은 죄책감으로도 죽어야 한다면, 인류는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다라는 것을 전달하고 싶은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은 독자들 마음이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참 다양한 생각을 하게 된다. 전쟁, 인간, 망각, 야망, 생각, 복제인간, 영혼 등. 소설은 허구이기에 소설가가 할 수 있는 역할은 한계가 있다. 단, 주제의식이 명확한 소설들이 있고, 그렇지 않은 소설이 있다. 저자는 후자에 속한다. 늘 판단의 조건을 충분히 제공하면서 저자는 끼어들지 않는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하기야 포스트모던을 한 참 넘어오는 시대에 이것이 답이다라고 하는 것은 독자들에게 불쾌감을 던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회피아닌 회피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면, 전쟁을 배경으로 전개된 세 소설은 오히려 영국이나 미국 서구를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이 강하다. 본문에 수용된 양이 적은 두 소설은 그렇기 때문에 더 분명히 드러나고, 영국을 배경으로 전개된 소설은 주인공의 신분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크지도 않다고 생각되는데, 역자가 아이히만을 데려올 정도로 맹렬하기도 하다. 그리고 일본에 대해서는 변명을 한다. 역자는 그저 예술로써 소설을 번역했기에 '역사'는 별로 따지지 않는다. 역사 의식을 통해 이시구로를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역사의 과오가 분명한 문제, 특히 2차 세계대전과 같은 수천만명이 사망한 전쟁에서의 변명과 타협은 솔직히 몰지각한 발상이다. 저자가 주인공에 몰입된 거라면, 그래서 공산주의도 모르고 마르크스와 레닌이 동료정도로 생각하는 무지한 수준이라고 자기 비판하며 소설을 쓴거라면? 그렇다면 용납될까?
소설은 문학이다. 문학을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지는 말자. 소설가로서 이시구로의 책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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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읽었던 소설, <남아 있는 나날>과 닮은 느낌이다. 옮긴 이 김남주의 글에서 소개된 작가의 인터뷰를 보니, 이시구로는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남아 있는 나날>과 아직 읽지 못한 <창백한 언덕 풍경> 세 편에 대해 “같은 책을 세 번 썼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이 더 좋았다. 옳다고 믿었던 신념. 그 정당성에 대한 집착. 인간이기에 그릇된 선택을 할 수도 있고, 노년에야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타협하며 스스로를 용서할 수도 있다. 타협이 비겁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타협에도 용기가 필요한 것이었나 보다. 어디에 도착했는지 보다, 어떻게 그 길을 갔는가에 우리는 더 관심이 있으니까. 멈추지 않고 걸을 수 있다는 것에 우리는 더 마음을 주게 되니까.. “때때로 인간은 틀릴 수도 있는 신념을 전력으로 붙잡고 자기 삶의 근거로 삼는다. 내 초기 작품들은 이런 인물들을 다룬다. (중략) 그 신념이 결과적으로 잘못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환멸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건 그저 그 탐색이 어렵다는 걸 발견한 것뿐이고, 탐색을 계속해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파리 리뷰>와의 인터뷰) p278 옮긴 이의 말 중에서. #부유하는세상의화가 #가즈오이시구로 #소설 #책읽기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쓸쓸한 노년의 회한만큼이나 내 눈길을 끈 부분은 전쟁에 동조했던 세대와 전쟁에 내던져졌던 세대 사이의 갈등이었다. 노년의 고백으로 읽는 이야기들이 이제는 조금... 덜 불편해졌다. |
| 이시구로 다시 읽기에 재미를 붙인걸까. 그의 초기작을 한역으로 다시 읽게 된다. 소위 초기 3부작, 그중 2번째이고 일본에서 드라마로 제작 되었다는데 궁금하다. 기억, 회환, 늙어간다는 것. 너무나 이시구로적인 감성이 일본의 군국주의 시대와 그 이후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그또한 너무나 이시구로적이라고 할까. 영국에 이민온 나가사키 출신의 일본인의 눈으로 바라본 시대라니. |
| 가즈오 이시구로의 창백한 언덕풍경, 남아있는 나날과 연결되는 3부작이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인간만이 온연히 느낄수있는 폭발적인 감정을 간결하고 조용히 글속에 내뱉고있다는 느낌이 들때가 많다. 너무나도 간결하지만 그 속에는 여러감정이 있는것이다. 때때로 인간은 틀릴 수도 있는 신념을 붙잡고 자기삶의 근거로 삼는다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말에 딱 걸맞는 작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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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오이시구로 부유하는세상의화가 굿 도스토예프스키 있는 날 각별히 것이다 이렇게 확신을 갖고 있는 날 각별히 것이다 이렇게 확신을 갖고 있는 날 각별히 것이다 이렇게 확신을 합니다 있는 날 각별히 것이다 이렇게 확신을 갖고 있는 날 각별히 것이다 이렇게 확신을 갖고 있는 날 각별히 것이다 이렇게 확신을 합니다 있는 날 각별히 것이다 이렇게 확신을 갖고 있는 날 각별히 것이다 이렇게 확신을 갖고 있는 날 각별히 것이다 이렇게 확신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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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현실 사이의 간극. 예술가의 이상향과 현실의 제한. 시대가 요구하는 예술과 시대가 요구하는 용기 있는 삶.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은 뭔가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올바르다고 믿고 하고 있는 이 일, 내가 가치 있다고 믿고 자부하면서 하고 있는 이 일은 과연 시공간을 초월하여 절대적인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오늘 내가 한 일이 내일 거부당한다면, 오늘 내가 바르게 살았다고 여겼던 지침이 내일 그릇된 것이었다고 평가받는다면, 나는 살아서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견딜 수 있을까? 견뎌야 하는 것일까? 견딜 수밖에 없는 것일까? 어쩌자고 삶은, 인간은, 역사는 이렇게도 막무가내로 섞여 버리고 마는 것인가. 대책 없는 이게 인생이었던가.
세상은 부유하고 있고, "우리 모두 요동치는 사태에 초연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100쪽)" 한다는데, 나는 길을 잃는 기분이다. 잘 보이던 길까지 흐려진다. 이 소설은 나를 완전히 버리고 놓게 한다. 길조차 보이지 않는데.
일본인에게 원자폭탄은 명백한 트라우마일 것이다. 직접 겪었든 아니든 일본인이라면 후손으로서 감당해야 할 몫이 있을 것이다. 전쟁은 그런 것이다. 직접 겪고 살아 남은 사람에게는 그들대로, 후손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또 그들대로. 우리에게는 가까운 6.25 전쟁이 있을 것이고, 세상의 곳곳에서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전쟁을 도대체 왜 하는 것인지. 전쟁을 하는 인간은 어떤 존재이며, 전쟁의 아픔을 겪었으면서도 또 전쟁을 준비하는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국가는 무엇이며, 우리 편 남의 편은 또 무엇인지. 내가 하는 일은 내 편을 위한 것이 맞기는 한지. 내 편도 내가 하는 일을 그렇게 봐 주는 것인지. 아, 별로 길지도 않은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 물음을 나에게 던졌는지 모르겠다. 떠오르는 답도 없고, 물어 봐서 답을 알아낼 곳도 없는 물음들을. 묻지 않을 수 없어서 묻고 또 물으면서 나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생각했다. 지독히도 불완전한 우리의 본성에 대해.
읽을 때마다 다른 감동, 비슷한 감탄을 하게 된다. 한 작가의 작품을 계속 읽으면서 이런 기분을 갖게 되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아직까지는 고마운 마음이 들 정도이다. 책마다 소재가 달라서 신선했고, 흐르는 주제는 한결같이 진지해서 좋았다. 어떤 표현도 자극적이지 않아서 더 좋았고 그럼에도 전하고자 하는 의도는 무거워서 책임감이 들었다. 이 글을 읽었으면 응당 이런 마음가짐 정도는 가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는 것 같아서.
질리지 않는다. 읽을 책이 아직 남아 있다. 흐뭇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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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오 이시구로의 초반작품인 '창백한 언덕 풍경'과 마찬하기로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에서도 일본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가고 있었다. 유명화가인 마스지 오노의 인생은 세계2차대전의 전 후로 극명하게 갈리는 평가를 받게 된다. 정부의 바람대로 전쟁을 지지하는 그림을 그리며 유명해진 그는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한 뒤 전범으로 전락하며 손가락질을 받게되고,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마치 아무일도 없다는 듯한 태도로 일관하던 그는 딸의 결혼을 앞두고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다쳤으며 살아남은 사람들은 몸도 마음도 피폐해져 슬픔으로 가득한 그 시기에 뻔뻔함으로 가득찬 마스지오노의 모습이 씁쓸함과 분노로 다가왔다. 그가 전쟁을 위해서 저질렀던 행위들은 그 어떤 것으로도 보상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했다. 아마 전쟁후의 실제 일본에서도 전범자들과 상처입은 사람들 사이에 극한의 갈등과 불란의 불씨가 번지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전쟁의 위협에서 자유로울수는 없지만, 평화를 위해서 노력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노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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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친절도 하나의 전략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이 책에서 저자는 중요한 배경 정보를 미리 알려 주지 않는다. 왜 둘째 딸 노리코가 파혼을 당했는지. 옛 제자인 구로다는 왜 그를 외면하는 것인지. 일단 결과를 알려주고는 주인공 오노와 주변 사람들의 모호한 대화를 통해 독자를 궁금하게 만들고 마치 기억 상실증에 걸린 듯이 딴 청을 부리며 과거의 인물들을 찾아다니는 오노의 발걸음과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게 만든다. 그렇다고 대단한 미스터리나 반전의 결말이 있는 것도 아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에는 일부러 남긴 지문과 의심스러운 알리바이 투성이다. 결국 밝혀진 증거들에도 풀리는 의문은 없다. 나중에는 애초에 무엇을 의심했는지 조차도 모르게 되어 버렸다. 결국 오노에게 의구심을 품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죽거나 몰락해서 사라져 버리든지 아니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며 시치미를 뗀다. 내가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작년에 나에게 경고한 사람도 바로 너였지. '예방 조치'라고 했던 거 기억하니. 세쓰코? 너도 알겠지만 나는 네 충고를 그냥 흘러 넘기지 않았단다." "죄송하지만, 아버지. 무슨 충고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런 세쓰코, 그렇게 시침 뗄 필요 없다. 내 지난 경력에 내가 자랑스럽게 여길 수 없는 면이 있다는 걸 이제는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다. 물론 네가 제안한 대로 맞선 자리에서도 그렇게 인정했고 말이다."
"죄송하지만 저는 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p256
부유하는 세상은 혼란스럽다. 결점 투성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간 군상들 중 미심쩍지 않은 자가 없고 일련의 사건들 중 불명확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을 살아오면서 충분히 완벽하거나 분명한 것을 얼마나 직접적으로 보았는지 자문해 보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완벽이라는 말은 제한된 만족감을 표현하는 형용사에 불과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희망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개념어가 아닐까. "화가가 포착하고자 하는 가장 섬세하고 부서지기 쉬운 아름다움이 해가 진 뒤 환락의 집 안에 떠돈다네. 그리고 이런 밤들이면 말일세, 오노, 그 아름다움 중 어떤 것이 이곳 우리의 거처로 은연중에 스며든다네. 하지만 저기 있는 저 그림들은 그런 덧없고 꺼지기 쉬운 꿈 같은 그 무엇을 암시조차 못하지. 저 그림들에는 지독한 결점이 있다네, 오노." -p201 결함이 있어도 아름다울 수 있고 완벽....에 가까워도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완벽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생의 목표를 가지는 것이 허무한 끝을 예약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것은 조작된 회고에 가깝지 않을까? 이시구로의 책을 계속 읽어볼 예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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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지 오노는 노년에 이르러 화가로서의 자신의 직업적 경력을 더듬어본다. 마침 둘째 딸의 두번 째 혼담이 오가는 중인데, 첫 번째 혼담이 알 수 없는 이유로 깨진 데다 딸의 나이도 혼기가 꽉 터라 걱정이 많다. 이런 상황에서 큰 딸 세쓰코는 부친의 과거 경력을 암시하며 혼담과 관련하여 무언가 조치를 해달라고 은근히 아버지 오노를 압박한다. 그리하여 화가 오노는 이제는 교류가 끊긴 과거의 인연들을 찾아 나선다. 평생 그림을 그려 오다 물러난 오노의 이야기를 편안하게 따라가던 독자가 일인칭 서술의 오노의 진실성, 또는 오노의 기억의 진실성에 의문을 품게 되면서부터 잔잔하게 진행하던 내용은 날카로운 현재성을 얻고, 퍼즐을 맞추어 가는 듯한 흥미로운 내용으로 전환한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앞자리에 서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했던 그의 전력 때문에 둘째 딸의 혼담은, 수제자였던 구로다가 냉정하게 된 것은, 아버지를 압박했던 세쓰코는 작품의 끝에서 자신이 언제 그랬냐고 시치미를 뗀 것은, 패전후 소심한 반성과 은밀한 자긍 사이를 오가는 오노의 합리화가 진정한 자기 화해로 이루어질까? (옮긴이의 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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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0월, 이 책의 주인공은 자신의 집을 묘사하면서부터 글은 시작된다. 주인공 마스지 오노는 한때 명성을 높였던 일본의 은퇴한 화가이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아내와 아들을 잃은 후, 폭격에 부서져버린 호화로운 옛 저택을 이리저리 보수하고 손보며 여생을 보내고 있다. 제국주의 전쟁의 전범, 일본이 전쟁 이후 겪은 펙트도 곳곳에 묻어나 있고, 덧없이 부유하다가 결국 허물어지고 마는 우리네 인생과 욕망을 예리하게 그려낸 소설이다. 노벨상 수상작가인 가즈오 이시구로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기도 하다. 재밌게 읽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