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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1. 부모님이 계신 신도안으로 내려가는 버스를 타고 있다. 두 개의 의자에 한 사람이 앉을 정도로 한산하다. 그렇게 내 왼쪽의 좌석을 젊은 여자가 온통 차지한다. 그녀가 내 쪽을 향해 아예 의자에 올라 무릎을 가슴팍으로 모으고 앉는다. 신경이 쓰인다. 누가 가을이 남자의 계절이라고 했는가? 난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다는 조바심을 쉽사리 해소시키지 못한다. 대신 한차현의 소설집 {사랑이라니, 여름 씨는 미친 게 아닐까}를 읽는 것으로 조바심을 달랠 뿐이다.
풍경 2. 성장한 자식이 오랜만에 방문했다고 아버지가 횟감을 뜨러 가자고 하신다. 그럴 필요 없다며 말리지도 못하고, 아버지에 앞서 계산하는 성의를 보이지도 못한다. 그렇게 달리는 차 안에서 멀리 주홍빛 꽃이 선명한 나무들을 확인한다. 회색 빛 가지들과 선명한 주홍빛 꽃의 조합을 다시 한 번 바라보니 그것은 감나무다. 열매만 남기고 앙상하게 사그러들고 있구나, 그것들에 눈 맞추는데 올해말로 정년을 맞으시는 아버지의 왼쪽 얼굴이 겹친다.
풍경의 바깥이거나 안, 에 위치하여 소설을 읽는다. 잔망스런 제목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호기심이 생겨 읽게 된 소설집, 하지만 그 호오의 감정은 일단 유보해야 할 듯하다. 작가의 남다른 소설적 상상력과 모던한 감수성은 인정해야 할 듯하고, 자잘한 문장 기술의 남발과 헛헛한 메시지는 좀더 두고봐야 할 듯하다.
[자비로운 그녀]. 자비심이라는 이름을 가진 보살이었던 그녀. 그녀에 대한 이야기 중에 끼어 든 중독된 남자. 간간하게 간 맞추어진 주먹밥이라도 먹는 것처럼 잘 읽힌다. 그렇게 살다보면 스쳐가는 인연들이 있고, 또 우연히 그 인연을 아는 다른 인연을 만날 수도 있는 법, 이라고 말한다.
[사랑이라니, 여름 씨는 미친 게 아닐까]. 표제작이다. 50년생의 남자 임산부 여름씨와 겨울까지 380만원이라는 돈이 필요한 남자 파출부 하인의 이야기. 요염한 설정이라는 생각이 퍼뜩 든다. 늙은 남자의 임신이라니 말이다. 억지스러운 설정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작가의 침착함이 돋보인다.
[승재]. 나 상우에게 공부를 부탁하던 너 승재의 이야기. 언감생심 전문대조차 꿈꿀 수 없는 점수이던 승재가 일년여의 각고의 노력을 거쳐 명문 S대에 합겹하게 된다. 그리고 더욱 놀랍게도 승재는 자신이 그 대학에 갈 수도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실제의 진학은 포기한다. 만화에서나 이루어질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가, 만화에서도 쉽게 이루어지지 못할 설정이구나로 생각을 바꾼다. 어쨌든 읽다보면 나름의 통쾌함을 주는 승재, 파이팅.
[당신을 만나는 개와 늑대의 시간] 도서관에서 마주치는 그와 그의 그녀인 고등학생 겨울. 그리고 그가 간직하고 있는 늑대인간의 비밀. "개의 조상은 늑대이다. 수천 년, 어쩌면 수억 년 전쯤이었을 야생의 시절에."라는 화두에서 시작된 듯한 소설은 나, 그, 그녀, 쑥색 가디건의 남자만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들이 겹치는 공간은 용산 도서관이다.
[슈베르트, 1986]. '미친 년'이라는 흔한 변명을 가졌던 여자 음악 선생님과 나의 이야기. 염전의 소금더미만큼이나 건조한데, 또는 그래서 왠지 느낌이 짜다. 여선생의 행동에 대한 작가, 그러니까 소설 속 고등학생의 묘사가 흥미롭고 절치부심의 과정없이 단순하되 짜릿하다.
[에티카,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증명된] 이단의 짧은 생애에 대한 기록. 한 종교 집단의(매우 결속력이 강해 그만큼 배타적인) 일원이었던 그가 파문을 당하게 되는 과정 또는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고행처럼 그리고 있다. 물론 그 고행의 의미를 독자인 내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니 고행이 고행같지 않고 다만 애처로울 따름이지만. 스피노자, 존 위클리프, 존 후스 등 실존 인물을 끼워넣는 수법이 소설의 전체 양식과 잘 맞는다.
[악령]. "...남자는 대부분의 하루를 또한 하루의 대부분을 집에서 보낸다..." 으앗 내 얘기 아닌가, 화들짝 놀란다. 스케이트 보드를 타는 아이의 소리,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 여름 한 낮 끝이 없는 줄자라도 잡아 빼는 것처럼 늘어져 있는 일상. 그 일상 속의 불안감과 살인의 고백. 그러나 그 살인조차 증명되지 않는, 그래서 형성되지 않는 그의 일상. 이 얼마나 지루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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