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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스나이더는 교회의 근본 DNA를 선교, 대안, 언약, 삼위일체적 공동체로 놓고 있다. 선교 공동체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사명인 통상적인 선교랑, 하나님을 향한 사명인 예배 그리고 친교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대안적 공동체라는 것은 대항문화적인 의미를 갖는 공동체를 의미한다. 그리고 언약 공동체라는 것은 소규모 언약그룹으로 구성된 지체들의 구성체이며 성직자와 평신도가 분리되지 않으며, 복수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공동체로서 유기적인 공동체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속에서 안수에 대한 신학적 실천적 재고가 일어나는 교회를 말한다. 끝으로 삼위 일체적 공동체는 육화적이고 종말론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 공동체이다. 이에 기반을 두어 하워드 스나이더는 교회의 DNA에 이전의 하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인 교회론에 다양한, 은사적, 지역적, 예언적인 특성을 덧붙인다. 그리고 이러한 DNA의 분열을 막는 역할에 가난한 자들을 향한 선교가 큰 역할을 한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안타까운 것은 그가 교회 공동체를 DNA로 분석하는 이유에 대한 언급이 단순히 교회 공동체를 적절하게 분석해준다는 분석의 편의성과 그런 경향이 유행하고 있다는 언급 이상을 찾아보기 어렵다. 교회를 DNA를 통해 분석하는 것이 갖는 의미들과, 그때 사용하는 DNA라는 것이 은유적인 차원의 언급인지, 본질적인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밝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언급이 미비한 점뿐 아니라, 하워드 스나이더는 도대체 가난한 사람이란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에도 불성실한 편이다. 물론 그가 속한 교단이나 그의 특성 상 가난한 사람들은 실제로 경제적 물질적으로 궁핍한 자를 말하겠지만, 정작 책을 읽다보면 저자는 교회 공동체의 선교를 그렇게 단순한 차원으로 몰아가서는 안 될 정도로 복잡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저자는 누가 가난한 자인지에 대해서도 충실히 대답했어야 했다.(심지어 마지막에는 FTA가 정치적 민주주의를 가져왔다는 아주 북미 기독교적 오만성도 등장하지만, 여기서는 그에 대한 언급은 유보한다. 왜냐하면 그 내용은 책 전체의 내용에 비하면 아주 비중이 낮은 언급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쉽게 간과할 부분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러한 입장에서 저자는 초대형 교회와 초소형 교회 그리고 비즈니스교회의 모델에 반대한다. 우선 초대형 교회는 성장률의 신화를 그대로 따르고 있으며, 그래서 기업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제도에 쉽게 포섭될 위험을 안고 있다고 본다. 저자는 특히 이것이 가난한 자를 향한 선교의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반면 초소형 교회는 내적 성장을 도모할 수 있지만, 복음증거에서 빈약한 특징을 보인다고 언급한다. 특히 상처치유에 소모되는 에너지 량이 높은 단점도 있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내면화된 하나님 나라는 풍성한 반면 사회적이고 정치적 차원이 배제될 수 있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끝으로 비즈니스형 모델은 지나친 세속성, 반성경적 특성, 자본주의 문화에 대한 예속성, 공동체를 수단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공동체적인 특성을 지닌다고 지적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대안적인 공동체로 중․소형 공동체를 제안한다. 그런데 여기서도 우리는 문제를 하나 제기할 수 있다. 도대체 중․소형 공동체는 위에서 언급한 공동체의 약점을 보완하는 역할만 하는 것인가? 혹 이도 저도 아닌 공동체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 말이다. 이런 문제에 저자는 이러한 공동체가 반드시 성경을 중심으로 해야 하며, 갱신운동의 연속성 위에 서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특히 갱신운동의 연속성은 바로 성령의 새로운 운동을 반영하고, 주변부의 변화에 민감하고, 3위 일체의 균형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저자는 끝으로 생태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야만 교회 공동체는 통일성과 다양성을 고려할 수 있으며, 문화중심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기반을 두어 대항문화를 창조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교회는 심리학적인 요즘의 풍토를 넘어서고, 예수님과 하나님 없는 생태학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고 한다. 결국 이러한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교를 중시하며, 이러한 선교는 세계화의 위기를 기회(복음의 세계화)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몇 가지 안타까운 점은 저자가 선교의 세계화와 현실 자본주의의 세계화의 관계를 구분짓지도 않고 이 둘의 관계 문제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회는 세계화를 복음의 세계화로 단순히 이용할 수 있는 것일까? 저자는 복음의 세계화와 자본주의의 세계화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키거나 순진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닐까? 이런 약점은 그의 마지막 세 장(10, 11, 12장)에서 공적 제자도를 기도와 제대로 연결시키지 못한 점, 맑스주의를 어떻게 기독교적으로 혹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포섭해낼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이 생태주의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에 대한 언급 부족으로 이어졌다. 이것이 다소 아쉬운 점들이었다. 하지만 강연으로 이루어졌다는 이 책의 특수성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는 용인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스나이더가 이야기하는 내용을 통해 우리가 어떤 물음을 제기하고,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가가 아닐까? 우리는 아마 이 책을 읽는 동안 생기는 여러 가지 물음들을 하나님이 주시는 성스러운 물음으로 붙들어야 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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