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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의 작품들은 조금 읽은것 같다. 장편소설은 그럭저럭 대부분 읽어보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녀가 초기에 발표했던 작품들, 특히나 중,단편은 읽은 기억이없어 선택한 책이기도 했다. 창비가 복간되던 해, 발표된 [동트는 새벽]만 겨우 읽은 기억이 있지만 내용은 머릿속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총9편의 작품이 실려있는 이책은 한 주제로 묶을수 있다. 그나마 [사랑하는 당신께], [무거운 가방], [잃어버린 보석], [손님]등이 조금 다른성격이지만 마음속에서 생각하게 하는것, 그것은 얼추 비슷하다. 이 책에 실려있는 그녀의 작품들은 후일담 소설이다. 어찌보면 작가 자신이 겪었던 80년대를 바라보는 작품들에서 우리는 부채의식과 부끄러움만을 느낄 뿐이다. 그녀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말했듯이 우리들은 약삭 빠르게 일찍 빠져 나온 사람들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벌써 이십수년전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억압과 소외에서 절망하고, 몸부림치는 이야기들 이지만 지금의 세대보단 낫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게 보낸 청춘이었지만, 그녀 말대로 빠져 나오기만 하면 한몸 살아가는데 별다른 큰 걱정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세대처럼 취업에 목숨을 걸지 않아도, 다들 정규직으로 회사에 입사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래서 더욱 부끄러워 지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인간에 대한 예의]에서 화자가 그랬듯이 간혹 만나는 그들에게 월급봉투를 내밀수 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살육과 절망의 세대라는 80년대 사람들, 그들이 가슴속 깊숙이 안고 살아가는 부채의식은 시간이 지나도, 그리고 그때와는 다른 세상이 되었어도, 여전히 마음을 짓누르는 원죄가 되어버린 이유이기도 하다. [동트는 새벽]은 1987년 대통령선거 당시 구로구청 농성사건을 다루고 있다. 큰틀은 그것을 다루고 있지만, 작품 속으로 들어가보면 당시 모두가 실천의 장이라고 생각하고 선택했던 위장취업과, 그리고 실제 노동자들을 바라보는 그들의 내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한 생각을 지울수 없게 만든다. 경찰서에서 솔직하게 말하면 내보내 준다는 말에 부정선거에 대해 끝까지 싸울 거라고 얘기하는 순영의 말에 같이 끌려와 있던 학생들의 웃음이 가슴속에 찬바람을 일게 만든다. 그들은 과연 진정한 노동자가 되기 위해 취업을 했을까? 그들이 바라보는 노동자들은 어떠했을까? 비록 수십년전의 이야기 이지만, 그 자리에 내가 있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진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는 당시 금기시되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조직내의 사랑 이야기, 결코 밖으로 드러나서도 안되고, 해서도 안되는 사랑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신호등 건너편에 서있는 여자를 보는 순간, 당시의 자신을 떠 올리는 주인공. 자신이 겪었던 내면의 갈등을 표현하고 있다. 이제는 시간이 흘렀지만, 간혹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선 살아가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가슴속에 원죄를 안고 살아가는 그들의 이야기가 공허 하기만 하다. 그들은 당시 일찍 빠져 나온 사람들이기에.. 표제작인 [인간에 대한 예의]에서는 80년대에 이십대를 고스란히 보낸사람들이, 아직도 80년대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달의 책과 그 저자와의 인터뷰 내용을 여성지에 싫기위해 취재하는 화자, 그는 장기수 권오규의 인터뷰 내용과 화가이자 명상가 이민자의 인터뷰 내용을 두고 망설인다. 명상을 위해 모든조건을 갖추어놓고 사는 사람과 교도소에서의 습관 때문에 방안에서 미닫이문을 열지 못하는사람, 명상을 위해 인도에서 맨발로 수행한 사람과 교도소에서 자신을 붙들기위해 일곱걸음 앞으로 갔다가 다시 그만큼 뒤로걷기를 반복했던 사람, 그 둘의 이야기를 두고 화자는 저울질한다. 저자가 이 작품들이 발표한 것이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이었다. 따라서 그때를 감안하고 읽을 필요가 있다. 물론 지금도 당시의 살육과 폭압이 트라우마가 되어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저자는 80년대가 막 지난 시점에서, 겉으로는 80년대의 그 살벌함이 사라진 시점에서, 그 시대를 산 사람들, 아니 어쩌면 자신의 경험을 얘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절실함은, 비장함은 그다지 없어 보인다. 그것은 아마, 그 당시에 이십대를 보낸 사람들 모두가 똑 같은 삶, 똑 같은 정도로 시대의 아픔에 얽혀 살았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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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6일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시 미사가 열렸던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더부룩한 수염 때문에 더 핼쑥해 보이는 한 중년 남자의 손을 잡았다. 그 남자는 교황에게 편지 한 장을 건넸고 이 장면은 TV 화면을 통해 전세계로 퍼져 나갔다. 이 중년 남자가 바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 농성중인 유민 아빠, 김영오씨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을까? 그는 먼 이국 땅에서 온 교황에게 세월호 관련 편지를 건넸고 교황은 방한 내내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그들이 보이는 곳이면 걸음을 멈추고 그들의 하소연에 귀를 기울였고 위로를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교황이 떠난 후 대한민국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정부와 여당은 무능한 야당 뒤에 숨어 세월호 참사 진실 규명에 나몰라라 하고 있다. 게다가 40일 넘게 단식 중인 유민 아빠는 결국 병원 응급실로 실려갔다. 그렇다고 유민 아빠의 단신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병원에서도 식사를 거부하며 단신을 이어가고 있다. 차가운 물 속에서 억울하게 죽은 딸을 위해 자신의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투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그에게 요즘 차마 입에 담기에도 부끄러운 비난이 쏟아지고 있는 모양이다. 고 김유민양의 외삼촌이라고 주장한 한 누리꾼의 글이 올라오면서부터다. 김영오씨는 두 딸이 어릴 때 기저귀 한 번 갈아준 적 없는 아빠였고 이혼한 뒤에도 양육비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아 유민 엄마 혼자서 아이 둘을 키우느라 고통을 겪었다는 내용이었다. 또 김영오씨가 금속노조 소속 조합원이고 보상금 때문에 단식 농성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김영오씨는 물론 김영오씨의 둘째 딸인 유나양까지 나서 인터넷 상의 글이 사실 무근이라고 밝혔지만 보수언론까지 나서 확인되지도 않은 인터넷상의 글을 논란거리로 확대·재생산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김영오씨를 향한 막말 논란이 SNS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김영오씨의 주장은 제쳐 두고라도 자식을 잃은 한 아버지의 아픔을 두고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 이렇게 매몰차고 비정하게 되었는지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유민 아빠의 눈물겨운 투쟁에 동참하지는 못할지언정 묵묵히 바라만 주는 것도 자식을 잃은 아버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텐데 말이다. 소설가 공지영이 말한 '시대와 역사와 인간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그저 아파하고 슬퍼하는 한 '인간에 대한 예의'마저도 논란이 되는 현실이 정상적인 사회의 모습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공지영의 소설 <인간에 대한 예의>에서 주인공 '나'는 잡지사 기자다. '나'는 그 달에 화제가 되는 책을 선정해서 그 작가를 인터뷰하고 책의 내용을 소개하는 6페이지짜리 기사를 맡고 있다. 어느 날 데스크의 변덕으로 인도의 여러 지역을 맨발로 돌면서 명상에 정진하다 귀국한 이민자를 인터뷰하게 되면서 '나'의 갈등도 시작된다. '나'는 이미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책의 저자 권오규 선생을 취재해 놓았기 때문이다. 80년대 운동권에 몸담고 있었던 '나'가 갈등하는 것은 단순히 데스크의 변덕 때문만은 아니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90년대 사람들이 떠올린 80년대는 뜨겁고 치열했던 어제가 아니었다. 어쩌면 이미 박물관 저 깊숙한 곳에 처박아 둔 유물이 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스물여덟 나이로 무기수가 되어 20년만에 출옥한 권오규 선생의 책이 대중의 호기심을 제대로 자극해 줄리 없었다. 데스크의 변덕도 이런 세태를 반영한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민자의 통나무집을 나서면서 '열무 싹'같은 슬픔을 느끼게 된다.
며칠 동안 나는 뒤뜰에 가서 혹시라도 이제나저제나 싹이 나오려나 기다렸지만 퇴비를 머금어서 약간 거무스레해진 흙만 보일 뿐 싹이 돋을 기미는 그야말로 싹도 보이지 않았다. 섭섭한 마음은 있었지만 너무 이른 봄날에 씨앗을 뿌린 내 탓이겠지 생각하고 지내던 차였는데, 바로 며칠 전 그저 죽어버린 줄만 알았던 씨앗들이, 아직도 돌과 비닐이 남아있는 그 잡동사니 땅을 뚫고 녹두알만 한 새싹을 내밀었던 것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 중에서-
그렇다. 이민자의 통나무집을 보면서 권오규 선생의 허름한 한옥을 떠올린 것이다. 권오규 선생은 출소 후 동생 내외와 살고 있었는데 동생 내외가 외출했을 때 한나절을 방안에 갇혀 있었다고 한다. 20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어서 방문을 스스로 열 수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권오규 선생은 출소한 비전향 장기수들을 돌보고 같이 재판을 받고 사형당한 동료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 '열무 싹'같은 슬픔은 취재원이었던 권오규 선생에서 80년대 '나'와 함께 운동을 했던 동료들에게로 확대된다. 졸업 후 노동현장에 뛰어들어 임투 중에 죽은 후배 윤석을 떠올렸다. 어쨌든 '나'는 오늘까지 기사 원고를 데스크에 제출해야 한다. 그런데 하필 오늘 한 때 노동운동 동지였던 강 선배를 만났다. 강 선배는 노동자였던 아내와 헤어지고 지금은 아버지가 경영하는 버스회사의 사장이 되었다. 그런 그가 '나'에게 청첩장을 건네러 온 것이다.
오늘은 바람이 분다.
잊혀졌던 아픈 기억들이 문득 떠올랐던 '열무 싹'같은 슬픔의 진실은 따로 있었다. 아침에 마시고 버린 차 찌꺼기들은 열무 싹이 뿌리내린 흙에 뿌리고 다른 흙으로 덮었다. 하지만 이 차 찌꺼기들이 썩지 않으면 그들은 열무 싹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파릇파릇한 어떤 싹도 틔울 수가 없다. 그렇다면 열무 싹을 틔울 수 있는 사람은 누구였을까?
이민자의 통나무집을 나서면서 내가 느꼈다는 열무 싹 같은 슬픔이라는 것은 사실은 거짓말이었다. 슬픈 거면 슬픈 거고 열무 싹이면 열무 싹이지 열무 싹같은 슬픔 같은 건 애초부터 없었다는 말이다. 나는 이민자를 결코 권오규만큼 사랑할 수 없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녀가 사실은 더 매력 있고 더 재미있는 시간을 내게 내주었지만, 권오규의 동생은 지루했고, 권오규는 내가 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고리타분한 이야기만 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나는, 미안하다, 나는 그들의 지나온 삶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에 대한 예의> 중에서-
'나'는 데스크의 변덕을 거부하고 이번 달 기사로 권오규 선생을 선택했다. 그리고 제목을 이렇게 달 예정이었다.
여기, 시대와 역사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켰던 한 사람이 있다.
요즘 일각에서는 세월호 피로감을 얘기한다. 유민 아빠 단식을 두고 이런저런 논란이 생기는 것도 여기서 비롯되었으리라. 하지만 세월호 피로감의 진원지는 정부·여당과 언론이다.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의 '세월호 특별법' 요구와 유민 아빠의 단식을 정치적이라고 폄하하지만 정작 정치적인 것은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축소하고 은폐하려는 그들의 언론 플레이다. 세월호 피로감은 '또 다른 세월호 비극'를 예고하는 무책임의 극치일 뿐이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우리,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좀 지키며 삽시다.
공지영이 말한 것처럼 거창하게 '시대와 역사에 인간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그저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아버지의 절규에,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내놓으며 싸우고 있는 아버지의 아픔에 동참하지는 못할망정 최소한 돌은 던지지 말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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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한 것은 어지러운 마음 때문이었다. 자꾸만 쓰러지는 마음에 오뚝이 같은 무언가가 필요했다. 올해 들어 무척 화를 내는 일이 잦아졌지만 그 화를 밖으로 풀지 못함에 더 괴로웠다. 화를 내고 맘을 드러낸다 하여 내 속에 너무 크게 자리잡은 고통이 줄어들지 않음이 화를 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라서 그것이 나를 더 슬프게 했다. 이런 마음이 들 때마다 나도 모르게 공지영의 책이 떠오른다. 이 책은 개정판으로 다시 출판되었다. 그만큼 끊임없는 애정을 받는 작품인가 싶은 생각도 들고 그 많은 독자들 중에 나같은 사람도 있겠구나 싶은 생각도 스친다. 이제 아스라한 기억속으로 사라지는 80년대의 삶이 여기 저기 묻어있는 책. 다양한 길을 걷는 사람들의 분주한 삶을 만난다. 소설 속 많은 사람들은 모두가 우리네 인생사의 한 모습이기에 더 슬프기도 하고 더 정이 가기도 한다. 물론 80년대의 학생운동을 내가 알리도 없고 출간된지 이제 14년을 맞고 있으니 소설속에 등장하는 삶의 배경은 지금과는 많은 차이를 보일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책 속에는 여전하게 삶의 고단함을 견뎌내고 그 고단함 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는 이가 있기에 내게 주는 의미가 더 크다. 80년대를 치명적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고뇌와 현실속에서 자신을 찾으려 애쓰는 모습이 담긴 소설 (꿈, 인간에 대한 예의, 무엇을 할 것인가, 동트는 새벽)과 미련한듯 보이지만 최선을 다해 살고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사랑하는 당신께,무거운 가방, 절망을 건너는 법, 잃어버린 보석, 손님)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9편의 단편들 중에서는 '꿈'이라는 소설은 제목처럼 꿈속의 한 장면처럼 그려진다. 과거가 아닌 현재를 살고 있는 문학예술인들의 고민과 번뇌가 꿈처럼 지리하게 서술되고 있다. 반면 인간의 탐욕스럽고 비열한 욕심을 비틀어내면서도 자조적인 쓴 웃음을 유발하는 '잃어버린 보석'처럼 뻔뻔한 재미를 주는 글도 있다. 동 시대를 함께 사랑하고 싸우고 살았지만 다른이를 떠나 지름길로 빗겨나왔다고 스스로 자책하는 주인공의 내면묘사가 탁월한 '인간에 대한 예의'와 절망이라는 것의 기준은 누구에 의해 만들어 지는지 묻고 싶은, 그 절망이라는 것을 희망으로 만들어가는 내용을 담은 '절망을 건너는 법'은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단편들이다. 소설속에 한 주인공은 자신이 금 밖의 사람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금을 스스로가 긋어놓은게 아니라면 금 밖도 금 안의 사람도 아닌 것이다. 스스로에게서 조금은 자유로울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우리 모두가 스스로에게 그런 금은 긋지 말기를 바란다. 공지영의 글에서 더이상 슬픔이 담긴 잔을 만날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점점 새롭게 변화하는 세상에 당연한 일이라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가끔은 공지영이 내미는 그 슬픔의 잔에 슬그머니 내 슬픔을 부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날을 만나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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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에 20대를 보낸 이들의 행동하여야 한다는 맘과 움직이지 못하는 마음 사이의 고민, 그 시절을 살아온 젊은이들의 슬픈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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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무척 익숙하다. 인간에 대한 예의. 공지영 작가의 책이기에 덥썩 사전지식없이 집어들었다. 아! 그런데 단편모음집이다. 장편처럼 작가의 친절한 이야기 흐름에 익숙한지라 단편은 참 마음껏 느끼기란 아직 내겐 능력밖의 일이다. 작가가 다 들려주지 않은 깊은 뜻을 이해하기가 너무 힘들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나는 이해하지 못하는 그것들을 하나라도 느끼고 싶어서 단편집을 집어든다.
"사랑하는 당신께" 첫 단편에서는 처자식이 있는 유부남을 사랑하는 여인의 독백이 이어진다. 남자는 여자에겐 진부한 일상의 탈출구였다. 가정이 있는 남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남자를 사랑했다. 남자는 현실이 힘들다며 곧 이혼할거라며 여자에게 기대어온다. 하지만 이내 드러나는 남자의 진실. 여자는 지금껏 남자를 위해 몸바쳐온 것들을 오롯이 들여다보기 버겁다. 남자를 위해 김장을 하고 싱상한 굴을 사서 남자가 좋아하는 보쌈을 만들었다며 집에서 저녁을 먹으라 전화를 하지만 남자는 바쁘다며 전화를 끊어버린다. 남자의 아내가 찾아와 남자는 착한 사람이 아니라며 정신차리라고 그 인간은 악마라고 말하지만 믿지않는다.
"저는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말에 제 인생을 걸었는데 이제야 당신의 아내라는 사람이 불쑥 나타나서 당신이 악마라고 하다니요......" - 21page
남자를 만나러 회사앞으로 가보지만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고 만다. 남자가 어린시절 자신에게 했던 행동들을 똑같이 다른 여자에게 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런데 여자의 마지막 행동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일생을 걸었지만 자신을 배신한 남자를 향해서 비난스런 외침도 해보지 못하고 시원한 따귀한데 날리지 못하고! 목숨을 버린다. 아니 도대체 왜! 안타까운 행동에 답답하고 스멀스멀 울화가 올라온다. 여성들의 가치관도 이 책이 쓰인 시점과는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아니면 나만 변한 것일까.
"인간에 대한 예의" 제목이 참 마음에 들어서 제일 먼저 펼쳐 본 이야기였다. 잘나가는 '나'는 한때 운동권에 몸을 담았지만 지금은 먹히는 이야기를 찾아 인터뷰를 하고 글을 쓰는 잡지사 기자일 뿐이다. 데스크에서는 노동운동을 하다 20년동안 감옥에 갇혀 살았던 권오규선생 인터뷰 기사를 미루고 대중의 흥미를 끄는 인도명상가 이민자의 기사를 실으라고 한다. 마감이 코앞으로 다가온 날 '나'는 오래전 같이 운동권에 몸담았던 지인을 만나 아직까지도 벗어나지 못한 그때의 기억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대중의 흥미는 끌 수 없겠지만 인터뷰는 권오규 선생의 기사를 써야겠다고 마음 먹는다.
"하지만 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아직도 수배중인 후배와 아직도 감옥에 있는 선배와 그리고 버얼써 죽어버리 친구들...우리들은 말이야. 우리들은 저 팔십녀내를 결국에라도 말이야, 벗어날 수 있을까." -103page
"나는 이민자를 결코 권오규만큼 사랑할 수 없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녀가 사실은 더 매력있고 더 재미있는 시간을 내게 주었지만, 권오규의 동생은 지루했고, 권오규는 내가 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고리타분한 이야기만 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나는, 미안하다,
"여기, 시대와 역사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켰던 한 사람이 있다." - 109page
이 이야기를 읽다보면 한 때 체류탄과 데모가 있던 시절을 떠올리게된다. 돌이켜보면 까마득하게 오래된 이야기처럼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야기다. 많은 사람들이 잊고 살고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마음에는 지워버릴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요즘 세대의 학생들에게는 이런 이야기들이 쉽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닐거라 생각된다. 그만큼 세월이 많이 지나버린 것이 아닌데도 어느 순간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진 듯하다. 개인의 스펙 쌓기에 열을 올리고 취업에 목숨을 거는 세상, 한 때는 나보다 다른 사람들의 인권이 우선이 되던 때가 있었다는 사실을 나보다 '우리'라는 단어가 익숙하던 때가 있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줬다.
"인간에 대한 예의" 지금 시대에 딱 필요한 말이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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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 창비
정확하게 갈리는 나의 호불호 안에서 나의 확실한 호에 속하는 그녀, 공지영...
사실 출간된지는 꽤 오래 된 책이었으나, 어떤 내용인지는 잘 알지도 못한채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제목이 좋아 책을 쟁여 놓은게 한참이었는데.
몇달 사이 거의 책을 놓다 시피 했더니 이제서야 다 읽게 되었다.
격정의 80년대를 보내고 그 지나가는 시대의 한가운데서 88년부터 93년까지 써내려간 9편의 단편들.
서로 다른 듯 하면서도 알수 없이 연결된 이야기들. 그리고 화자의 얼굴을 하고서 그녀가 그때 당면했던 문제들.이야기들.
그녀의 자전적인 글을 조금만 읽어본 사람들은 얼핏 알겠지만..
그녀는 꽤 잘 살던 집의 명석한 막내딸이었고 그 모든 것들 던지고 노동운동을 하기도 했었고 그 이후 몇번의 이혼을 겪기도 했다.
한줄도 써내려가지 못한 작가 이야기도, 여자이기에 일과 가정을 모두 가져갈 수 없던 그때의 시대상도 그리고 어느 보호실에서 노동노래를 부르던 그들의 밤도. 나는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 그 시절 피는 끓으나, 결국 많은 걸 변화시킬수 없다는 것을 알던 그때, 그때의 고뇌와 안락함과 타협하고 사는 자신에 대한 갈등도 어느만큼은 있었겠지..
아직 다 다듬어 지지 않은 지금보다 더 여리고 혼란스러웠던 그녀의 옛날 글들이 다시 한번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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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길을 가는듯 하면서도 그 귀착지는 같은듯한 9편의 서로다른 중,단편소설들.... 솔직히 조금 난해한 부분이 없지아니하지만, 그 시대를 조금 비껴살았던 나로서는 많은걸 생각하며 정독하게 많드는 좋은 소설이었다. 개정판에 나올때까지 접하지 못했다는게 나로서는 후회와 아쉬움이 남는다. 가볍지 않은 내용이지만 그리고 조금은 과거의 소리같지만, 지금의 내느낌은 바로 곁에서 겪는 현실의 목소리같았다. "사랑하는 당신께" "꿈" "인간에 대한 예의" "무엇을 할 것인가" "무거운 가방" "절망을 건너는 법" "잃어버린 보석" "손님" "동트는 새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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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의 첫 소설집이라고 팍 찍혀있다. 나는 이분의 소설을 잘 읽고 있는데, 대중은 우호적이지 않다.
어쨌던 이 소설은 단편집이여서 여러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떤 부분들은 연결이 되고, 어떤 부분들은 연결이 되지 않았다. 특히 맨 처음 작품인 <사랑하는 당신께> 와 <잃어버린 보석> <손님>은 조금 다른 성격이다.
그외 단편들은 소위 후일담류의 소설이고,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자기 이야기로 보인다. 이 소설에서 임수경의 오빠 임용준이 군대에서 의문사했고, <숲속의 방>의 영화의 각색을 했으며, 그의 첫번째 결혼 과정등을 알 수 있다.
가장 큰 부분은 부채의식일 것이다. 학생 운동을 하던 시기에 그 빛나고 빛나는 사람들이 90년대에 들어서면 그저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고, 오히려 초라하다. 세상이 변화에 재빠르게 순응한 사람은 잘 살고 있지만, 순수하고 열정적이었던 사람들은 그냥 초라하게 살아가고 있다. 시인인 선배가 그렇고, 한때 사랑했던 운동권 선배는 골프 용품을 팔며 살아간다. 어쩌면 그들 때문에 다른 세상이 왔는데, 세상은 공평하지 않고, 그들을 배려하지 않는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킨 사람은 오히려 무시당한다.
두번째는 작가의 안락함에 대한 갈등일 것이다. 서울에서 좋은 환경에서 잘 살아온 작가로서는 위장 취업을 하기위해 고행하는 과정등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 부분에서 나는 시도조차 못해 봐서 존경스럽다.) 작가가 살아 온 시대가 학생이면 누구나 돌을 들고 구호를 외쳐야 하는 시기였지만, 그것을 실행하기는 너무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고민이 잘 나타난다. 또한 그것을 실행에 옮기고 한 작가는 존경스럽다. (그런일을 고민없이 잘 한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다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세번째는 여성작가로 보는 페미니즘일 것이다. 이책 전에 나왔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란 책을 내신 분이지만, 그녀가 여자로서 겪어야 했던 부분이 잘 나타나고 있다. 특히 20년전인 1980년대 말이나 90년대 초반은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단점으로 뽑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감상주의이다. 사실 후일담 소설이지만 치열함이나 비장함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신경숙의 노동 경험이 훨씬 쉽게 느껴진다. 엘리트 공주의 이야기로나 보인다면 너무 심한 말일까.
결론으로 공지영 작가의 초반 소설집으로 그 분의 고뇌와 삶이 반영된 소설이었다. 읽기 시작하여 쭉 읽었다. 재미도 있고, 특히 나의 80년대의 부채의식을 일께워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솔직한 작가의 마음을 볼 수 있었고, 80년대말의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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