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보다 붉은 오후'라는 꽤나 강렬한 제목을 단 이 시집은 예상과는 달리 투명하고 정결한 언어들로 빚어진 정갈한 시들이 수록되어 있다. 시인은 대체로 산수유꽃, 벚꽃, 따뜻한 그늘, 집, 낮잠, 후박잎, 풀잎 등등 자연과 일상적인 것들을 다정하게 그려낸다. 표제작인 '피보다 붉은 오후'에서도 '피보다 붉은 것'은 모란 꽃잎이고, 그것이 툭 떨어지는 순간을 시인은 포착하고 있다. 그 하늘 아래 빈 발자국 몇 개 남겨놓은 일이 너무 눈부셔 어때에 묻은, 달빛 같은 바람을 쓸어안는다, 고 시인은 소회를 남긴다. 1945년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경험하고, 현대사의 모든 굴곡을 관통하여 살아온 사람이, 그것도 성인 남성이, 이렇게 다정한 시선으로 자연과 사물과 인간을 볼 수 있을까 경이로울 지경이다. 그러나 이것은 본성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어떤 결연한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가령, 시집 거의 뒷부분에 있는 '소금을 바르며'라는 시에서 그런 점들을 유추할 수 있는데, 시인은 '쓰라린 고통은 견딜 수 있어도/ 비루한 가려움은 견딜 수 없다고/ 어금니 악물고 상처를 노려본다'라고 쓰고 있다. 기억하라 육체는 찢어지고, 눈 부릅뜬 정신만이 칼자국을 억누른다 상처는이제 길이다! 소금 속으로 길을 뚫으며 개같은 대낮 속으로 걸어가리니 이런 의지와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다정함과 따스함이기에, 그 결연함의 무거움이 다정함에 더욱 진정성을 주는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