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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나의 가까운 친구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었다.
"듣자하니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더니, 그게 독후감 머쉰이되는 거였냐?" 하루아침에 독후감 머쉰이 되어버린 나는, 그 녀석에게 탑 시크릿임을 주지시키고 누설될 경우, 말레시아인에게 난자 당할 각오를 하라고 말했다. 그랬다. 친구들에게는 굳이 숨겨야 할 이유가 있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반공부체제에서 활동해 온 굳건한 동지들이었다. 그러므로 내가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들의 입장에서 변절이나 다름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의 친구들은 문학보다, 새로나온 소주는 흔들어야 하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녀석들이기 때문이었다. 개중에 누군가 "왜 흔들어야 해?" 라고 묻고, "이효리가 흔들면 같이 흔드는 거지 왜가 어딨어 임마." 라고 누군가 답한다. 그렇지 않아도 요사이 친구들은, 술자리에서 자꾸만 똑똑해지는 나를 경계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던 참이었는데, 그 와중에 이 사실이 누설된다면 나는 이십년전으로 돌아가 뭇매를 맞게 될판이었다. 내 아무리 전사의 아들로 태어나 뛰어난 신체조건을 가기고 있다고는 하나, 예닐곱 놈의 발길질을 동시에 막아내기는 어려운 것이었으며, 개중에는 분명 오뎅국물을 퍼먹던 숟가락을 들고 설치는 놈도 있을 것이다. 버젓이 부모님의 주머니를 털어서 미시건까지 날아가 그 이름도 유명한 MBA까지 마치고, 그 이름도 저명한 보스턴 컨설팅 그룹에 취직이되어 다시 서울로 날아든 놈이 있었다. 오뎅바에 둘러 앉은 우리중에는 그 놈이 유독 많은 매를 맞는 녀석이었다. "그러니까 브레이크 이븐 포인트가 말이야..." 그러면 여지없이 오뎅국물이 묻은 숟가락 몇개가 날아드는 것이고, "그냥 손익분기점이라고 말해 이 새끼야!" 라며, 몇명의 톤이 다른 목소리가 중창단이라도 되는 듯 어우려져 허공을 가르게 되는 것이다. 나 역시 며칠전 "사디즘적이군" 이라고 말했다가 사디즘적으로 두들겨 맞았다.-물론 고기서 폭력부분만 떼어서 말이다.-
백가흠처럼 뜻하지 않은 기대감에 흥분을 시키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그와는 반대로 기대에 차서 보았다가 실망이 드는 작가도 있는 것이다. 소설에 대해 독후감 머쉰인 나의 생각은 대체적으로 이랬다. 내용이 없으면, 이야기가 죽여주면 되는 것이고, 이야기가 없으면 문장이 기가막히게 맛깔나면 되는 것이고, 그 셋다 없으면 그냥 무조건 웃기면 되는 뭐 그런건데.... 그게 전부 없으면 어쩌냐... 그때의 최종적인 책임은 독자가 지면 그만이다. "니가 이해를 못하는 거거든!" 이렇게.
이 작품은 총 팔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소설집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물속에 아이]라는 작품을 재미있게 읽었다. 그 나머지도 그리 나쁜 것은 아니었으나 나의 개인적인 취향에는 그다지 맞지 않았다. 일단, 일본 작가 [호시 신이치]를 생각나게 하는 이야기들이었는데, 그것은 SF적이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그렇지 않다고 말하기도 그런 조금은 애매한 경계에 서있는 얘기들이어서 그랬다. 내 취향이 아닌 이유는 이랬다. 차용. 그러니까 타인의 지식을 그대로 데려와 짜집기 이야기 식으로 엮은 것 같은 느낌이 일단 그랬다. 그게 티 안나게 잘 엮여진 것이었으면 나았을 법한데, 그 용어와 단어들이 낯설고 깝깝한 것이어서 슬슬 짜증이 나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건 마치 이런 식인 것이다. [이 플룻의 개연성은 역대 옥타비아누스의 설파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것으로 아우슈비츠에서 복무한 플루타르크에 의해 정리된 것이다. 그것은 최초 춘추 전국시대의 연나라의 산둥성, 왕뚱시, 헐렁면에서 출생한 봉추방통의 선조에 의해 재발굴되어 오늘날에 이르는 것이다....] 물론, 저자의 글은 이처럼 엉터리도 아니고, 사실에 근거한 서술이었겠지만 어쨌든, 쉽게 읽히지 않는 단어의 나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재치가 담긴 문장이 곳곳에 포진되어있었는데 그게 때로는 앞뒤 문장하고는 어울리지 않게 툭 튀어나오는 것이라 박민규나, 이기호에게 밀리는 듯한 인상이었고, 상상을 자극하는 이야기면에서는 또 천명관에게 밀리고, 좋은 문장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또한 요즘 좋은 문장을 가진 작가가 너무많아서 그것만으로 대단하다고 말하기도 좀 그렇다. 그렇다고 김연수와 같이 감성적인 부분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뭔가 특징을 딱 잡아내기가 조금 허한데, 굳이 하나를 말하라면 [호시 신이치] 타입인 것이다. 결정적으로 지루했다는 것이 치명적이었다고나 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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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 3일>
- 목 차 - 논쟁의 기술 날개 노란 육교 물속의 아이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 존재, 혹은 고통 따위의 시시하기 짝이 없는 것들 진실의 방으로 두유 전쟁
11월 21일자 한겨레 신문에 실린 인터넷 기사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펴들기만 하면 내 웃을 줄 알았지" 라는 제목의 이기호, 박민규, 박형서 세명의 작가에 대한 혹은 그들의 책에 대한 기사였다. 두명의 작가는 눈에 익었지만 생소한 작가 한명이 있어서 그 작가에 대한 기사를 더 유심히 읽었고 인터넷 서점에서 그의 책에 대한 리뷰들을 읽고는 망설임 없이 그의 책을 구입했다. 그것이 바로 본 책이며 본 작가이다.
오랫만에 할얘기가 많은 책 한권을 만났다. 이번 책은 "창작"이라는 단어에 대해 충실하다 못해 "창작"으로 뒤덮어 버린 순오리지널 100% "픽션의 결정체"라고 하고 싶다. 기성세대 혹은 소설은 실생활에서도 있음직한 내용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혹은 소설을 진지함으로만 접근하고 싶은 독자들에게는 이 책이 반란 일수도 있겠다. "이게 무슨 소설이란 말인가." 라는 생각이 들수도 있겠다. 문학작품이 아닌, 삼류 소설 나부랑이로 취급 될수도 있겠다.
그만큼 그의 소설은 형식을 깨고, 상상력을 넘어 뜨리고, 표현력을 뛰어 넘는다. 하지만 문학이든 예술이든 모든 창작물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재미와 즐거움을 줘야 한다고(물론 이것은 보는 이에 따른 상대적 재미와 즐거움이니 이 책이 전혀 재밌지 않았다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생각하는 나로서는 무척이나 제격인 책이었다.
특히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와 "두유 전쟁"은 정말 나를 파안대소 하게끔 해주었다. 그의 상상력과 표현력과 설득력에 나는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을 지경이다.(나도 하마터면 「사랑손님과 어머니」를 음란물로 인정할 뻔했다) 물론 나머지 작품들도 꽤 재밌었다. "진실의 방으로"나 "물속의 아이"는 진지한 무게감도 있었다.
작가의 프로필을 보니 국문학을 전공하고 박사 과정을 마친, 시쳇말로 '가방 끈이 긴' 학자 작가이다. 그런 학도 스타일은 또한 작품의 여기 저기에서도 볼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어려운 말로 빙빙 돌려 글을 썼다는 뜻은 아니다. 형식 자체가 학도 스타일이라는 뜻인데 허나, 막상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면 직설적 일때는 너무나도 직설적이고 육두문자가 난무하기도 한다. 그래서 더욱 재밌다는 것이다. 논문 형식에 저질과 욕설이라면 누군들 흥미롭게 보지 않겠는가.
참 즐거운 작품, 즐거운 작가를 만나는 것도 복이다 싶다. 작품에서도 진지하고 기품있고 수준 따지는 사람들에게는 먼 발치로 밀려나 거들떠도 안보는 책이 될지라도 누군가는 이 책을 읽고 너무 재밌었어요. 읽으면서 많이 웃었어요. 정말 대단하세요. 라고 말해주는 독자가 있으면 그것으로 작가는 만족하지 않을까 싶다. 솔직히 그거면 된거 아닐까. 나에게는 이런 작가들이 많을수록 마냥 좋다. 그의 전작인 「토끼를 기르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들(2003)」도 어서빨리 만나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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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의 픽션
한국의 최근 소설가를 소개하는 책에서 이 작가를 처음 접했다. 불과 얼마 전에. 그 책엔 수많은 작가들이 소개되어 있었지만, 이 작가만큼 나를 강하게 빨아당기는 사람은 없었다. 왜냐.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던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 - '달걀'을 중심으로> 때문이었다. 호기심을 마구마구 샘솟게 하는, 소설보다 논문에 가까운 이 단편 때문에, 이 단편이 담긴 소설집 <자정의 픽션>을 사버렸다.
'남근' 중심에서 '불알' 중심으로
작가는 <사랑손님과 어머니>라는 교과서에도 수록되었던 그 아름다운 작품을 야릇하게 파헤친다. 다름 아닌 바로 '달걀'로. 작가는 길고 두툼한 건 모조리다 남근으로 해석해버리는 지체 높은 양반들에게 일침을 가하면서, 남근이 아닌 불알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럼 왜 달걀이냐. 간략히 이야기하면, 달걀은 단백질로 구성되어 있고, 또 그 단백질은 몸에서 성기를 통해 뿜어져 나온다. 고로 달걀을 먹는다는 건, 그 단백질을 자기 몸에 넣는다는 것이고, 또 이것은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랑손님과 어머니>는 우리가 흔히가 아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아저씨를 두고 엄마와 딸이 벌이는 신경전이자 처절한 싸움이라는 것!!!
마구잡이로 뻗어대는 촉수
혹자는 <사랑손님과 어머니>라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난도질한 작가를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촉수가 단지 이런 분야(음란물)에만 뻗쳐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상상력은 어떤 한 분야로 수렴되는 특정 유형의 것이 아니다. 한국의 한 젊은이의 머리에서 하루 이백만 배럴의 원유가 흘러나와 그걸 가지고 한국과 미국이 다툼을 벌이는 이야기(두유전쟁), 난데없이 미래를 본다며 이야기를 읊어대는 여자의 슬프고도 당황스러운 이야기(날개),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서 유유히 죽음의 문으로 입장하는 망자의 이야기(노란 육교) 등... 전후좌우 가릴 것 없이 뻗치는 그의 촉수를 따라가다 보면, 일단 재밌고, 두 번째로 기가 막힌다.
한편으론 아프기도 한
이외에도,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아이가 벌이는 자작극(물속의 아이), 논쟁이란 상대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굴복시키는 것이라며 여러가지 전략을 동원해 이기기 위해 발악을 하는 교수의 이야기(논쟁의 기술), 진실을 알기 위해, 아니 진실을 만들어 내기 위해 몸부림 치는 자의 이야기(진실의 방) 등이 있는데, 이 작품들은 재밌으면서도 한편으론 아프다. 특정 인물이나 사회문제가 떠올라서가 아니라, 내 마음 한 구석에 있는 본능과 욕망을 쿡쿡 찌르는 것 같아 아프다. 사랑을 주기보단 받고자 하는, 가능하다면 다른 사람들이 받는 사랑마저 빼앗아 받고 싶어하는, 말싸움에서 지고 나면 화가 머리 끝까지 차올라 울화통이 치밀었던, 때때로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이라고 믿고 싶어했던, 그런 모습들이 떠올라 조금은,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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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 보고 싶었던 책인데 우연치 않게 구하게 돼 읽었다. 박형서 소설은 처음이다. 단편으로 구성된 소설집인데 칼국수에 칼이 없듯이 이 단편집 안에는 '자정의 픽션'이란 단편은 없다. 그냥 소설집 전체 타이틀이 '자정의 픽션'인 것이다.
전체적으로 이 책의 이야기들은 망상에 가까운 상상력의 향연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공감하기 쉽고 손에 닿을 듯 가까운, 낯익은 일상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책이 싫을 수도 있다. 공감보다는 놀람과 경악(?)을 불러일으키는, 독창성... 깊이 의미를 따지고 들어 생각하면 난해하기도 하다.
좀 다른 시각으로, 삐딱하게 사물을 바라보고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딱일 듯.
나는 '논쟁의 기술'과 '진실의 방으로'가 제일 재밌었다.
감성의 자극보다는 이성과 논리를 자극하는 책. 가슴 찡한 감동보다는 찌릿한 정신적 충격을 주는 책.
이 책은 나에게 그랬다. |
| 박형서 / 문학과 지성사 / 2006 논쟁의 기술 날개 노란 육교 물속의 아이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 존재, 혹은 고통 따위의 시시하기 짝이 없는 것들 진실의 방으로 두유전쟁 박형서씨의 단편 소설 모음집이다. 제목만으로도 이 소설들이 얼마나 쾌활하고 엽기 발랄할 지 조금은 예측할 수 있고, 읽어보면 우리 나라에도 이런 소설가가 있군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물론, 이런 류의 어느 정도 삐딱하게 바라보기 소설은 이미 널리 퍼진 방법이지만 매우 우리스러운 글을 처음 접하는 것은 새로운 느낌이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는 바와 다르게, 뒤통수를 팍 치며 이루어지는 결말이라던지, 뻔히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밀고 나가는 글쓰기 등등이 의외로 실증나지 않고 오히려 재미난다. 그래. 이런 소설이라면 두껍지 않더라도 만원을 기꺼이 낼 수 있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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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의미도 부여하고 싶지 않은 글. 이게 가장 내 마음을 잘 표현하는 문장이다. 어떠한 개연성도 존재하지 않고....단순히.. 또..그냥 생각이라는 놈이 흘러가는대로 펜을 움직인...나에게 있어서 소설이라고 할 수 없다. 여러가지 단편이 실려있지만 내가 말하는 소설 속과 같은 인과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재미 없다. 이 글을 쓴 박형서라는 작가..자유분방한 사람일 것이다. 느끼는 그대로 표현하는 모습이 망상가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그런 사람이 아닐까? `노란 육교` `날개` `두유전쟁 `물 속 아이`.....그 중에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에 대한 단편이 있는데..정말 궤변...어의 없는 논리로 전개되는...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글을 보고 있는 동안에 설득당하고 말았다. 물론 내가 불리한 입장이기는 했지만..분하다 작가에게 놀림당했다는 그런 느낌이 드네..거참 똑똑한걸.. 머리 식힐려고 아무 생각 안 할려구 본 책인데..이 놈의 버릇때문에 더욱 더 골만 아프게 만든 책..그래도 개미작가군이 쓴 "나무"랑 조금 비슷한 느낌이 드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전개..발상...그 어이없음이 도를 지나쳐 유치찬란하지만..그게 이 소설이라고 부르기 싫은 글의 매력이겠지..내 의도와는 상관없는 글이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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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생각들을 편견이라고 외치며 전면적인 선전포고라도 하는 것만 같다. 각각의 소설들이 가지는 발상이 독특하고 불온하며 괴기하고 유머러스하다. 물론 여기까지는 기존의 젊은 작가들 또한 구사하는 방식인데, 작가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서사를 무시하거나 평론과 같은 다른 장르와의 결합을 시도함으로써 마치 소설 무용론을 펼치는 사람과도 같다.
「논쟁의 기술」. “논쟁이란 이견이 있는 사실에 대해 상대와 겨루는 과정이 아니다. 역으로, 상대와 겨루기 위해 이견이 있는 부분을 모색하고 그걸 극대화시키는 과정이다... 논쟁의 성과는 단 한 사람의 것이며, 다른 이는 오직 패배자로서만 기억된다. 그러므로 논쟁에서는 상대를 일부러 무시하고, 약 올리고, 극도로 불안하게 만듦으로써 실수를 이끌어내야 한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논쟁에 대한 기술을 실전처럼 익히며 자라 이제 대학 교수가 된 주인공의 인생을 건 논쟁 이야기이다. 제 꾀에 제가 속아 넘어가는 것처럼 자신이 생각하는 논쟁의 기술을 이용하려다 그것에 역으로 당하고, 결국 살인으로 이어지는 어처구니없는 논쟁의 기술에 대한 이야기...
「날개」. “... 반세기 전, 거인은 너무 보고 싶어서 날아왔다고 대답했다. 날아왔다고? 그 덩치로? 그렇게 바보 같은 말은 처음이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더 이상 만나지 못할 줄 알았다. 자기 가슴속에 영원히 묻혀 있을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SF 장르를 택하고 있지만 SF 소설이라고 부리기에는 뭣하다. 인간의 수명이 거의 무한대로 늘어난 미래에 살고 있는 한 여자, 그리고 그 여자가 사랑했던 거인과 같은 남자의 이야기이다. 현재와 근미래를 오가는 상상력이 다채롭다.
「노란 육교」. “... 어쨌든 사람들은 세상엔 죽은 존재를 위한 부분도 존재함을, 또 그 부분은 우리와 멀리 떨여져 있지 않으며 심지어는 우리 삶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와 간혹 부드럽게 겹치기도 한다는 사실을 이견 없이 받아들였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의 아이디어를 읽는 것만 같다. 어느 날 우연히 발견된 길... 그 길은 망자들이 현세를 떠나는 일종의 게이트임이 드러나고, 이제 그 죽은 사람들을 위한 길은 산 사람들을 위한 관람장 노릇을 하게 되는데...
「물속의 아이」. “흐릿해지는 동공으로 본 환영 혹은 무뎌져가는 피부로 접한 환각의 그것은 언젠가 아이가 막 장난을 시작하던 시절 꿈에서 본 가볍게 반짝이는 수면이었으니 그 아래 고요한 물 속에 아이는 누워 있는 것인데 ... 마침내 그들을 쓰러뜨린 사연은 무대 위에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소도구들 그리고 음향을 몰아 시커멓게 덮쳐오는 장막 너머로 깨끗이 사라져갔다.” 제 어미의 사랑을 얻기 위한 한 아이의 끝없는 노력이 애달프다. 스스로에게 충격을 가하고, 그 충격을 통해 어미의 시선을 끌고, 이러한 충격 요법을 반복하고 그러다 가정은 파탄이 나고...
「「사랑 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 - 달걀을 중심으로」. “이 소설은 단순한 성장기 소설(Initiation story)이 아니라 성교를 중심으로 세계의 원리와 끝없는 갱신을 해명하고자 한 알레고리(Allegory) 소설이다... 작품의 의의는 재고되어야 한다. 우리는 모든 걸 도덕적이고 희망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선량한 욕망과 투쟁해야 한다...” 「사랑 손님과 어머니」라는 단편 소설에 대한 작가의 새로운 분석 시도기...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소품들에 대한 굉장히 쓸데 없어 보이고, 허황된 연구들을 통하여 기존의 소설은 폭파되고 전혀 새로운 의미의 소설이 탄생하고 있다.
「존재, 혹은 고통 따위의 시시하기 짝이 없는 것들」. “무료함에 성기를 잘라보았더니 피가 많이 흘렀다. 허둥대며 수건으로 도려낸 자리를 감싸자, 하얀 수건에 붉게 물들어가는 피의 눈부신 무심함이 과연 무료하지 않아 좋았다.” 단편이라기보다는 엽편에 가깝고, 소설이라기보다는 그저 산문에 가깝다. 무료하기 짝이 없는 생활에 지쳐 성기를 잘라낸 한 사내의 심겨 들여다보기...
「진실의 방으로」. “모든 소음이 사라진 방. O는 거대하고 고동치는 진실의 심장, 아니 째깍째깍 움직이는 자신의 시계 초침 소리를 들었다...” 무엇을 은유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마도 일종의 고문이 자행되는 지하 창고와 같은 곳에서 벌어지는 진실에 대한 공방... 결국 진실은 누군가가 원하는 그 무엇으로만 존재할 뿐이며, 우리가 진실이 내는 소리라고 믿었던 것들은 그저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시간이 흐르는 소리였을 뿐이라는 것인지...
「두유전쟁」. “... 모든 수치는 정확히 한 가지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멍청하게 생긴 이십대 청년의 머리에서 하루 이백만 배럴의 원유에 해당하는 고농축 유분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가장 강한 스토리라인... 머리에서 원유가 나오는 청년 성수범을 사이에 둔 한국과 미국의 쟁탈전...
소설집의 제목 『자정의 픽션』은 박형서가 꿈꾸는 새로운 허구를 지칭하는 용어인 것 같다. 작가는 지금까지의 소설, 혹은 픽션이 가지는 허구들과 자신이 꿈꾸고 지향하는 허구를 구별하기 위해서인 듯, ‘자정의 픽션’이라는 제목을 쓰고 있다. 기존에 소설을 읽을 때 느낄 수 있는 재미는 절대로 기대할 수 없지만, 이런 것들도 소설이 되고 이런 허구들도 소설의 기술로 구사가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정도는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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