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 한 권을 한 단어로 표현하다는 게 가능하다면, 이 소설에는 몽환적이라는 단어가 제격인 것 같다. 소설을 읽는 내내 꿈속에서 허우적대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나의 꿈의 아닌 다른 사람의 꿈 말이다. 꿈이라는 것은 찰나에 이루어지는 두뇌의 활동이지만 잠에서 깨어나 베갯머리에서 되새기는 그것은 그 길이도 시점도 주인공도 불분명하다. 꿈이라는 것도 결국 하나의 이야기 혹은 여러 이야기가 겹친 또 하나의 이야기일진데, 그 연결이 부자연스럽다. 시작도 끝도 없이 개연성 없이 점점이 떠오르는 기억의 파편은 지척만 보이며, 그 이상을 보려면 갑갑증만을 유발시킨다. 그것은 꿈이라는 것 자체의 성격이라기보다는 꾸고 나서 되새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파리의 생소한 지명들, 캐릭터에 대한 친절한 묘사의 부재, 종잡을 수 없는 시제 등은 그렇게 나를 그의 꿈속에서 헤매게 한다. 집중하면 집중할 수 록 미궁이 빠지는 이야기의 흐름은 베갯머리에서 쥐어짜내는 자나간 꿈을 복원시키려는 헛된 노력과 같았다. 어쩌면 꿈이라는 것 자체가 쥐어짜내면 낼수록 허황된 살이 덧붙는 것처럼 이 소설을 서사구조에 짜 맞추려는 노력도 그 본질을 저해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밤중의 우연한 사고는 ‘나’의 신체에 입한 물리적인 상처 뿐 아니라 평온함을 가장한 ‘나’의 일상에도 균열을 가져온다. 그 한밤중의 사고는 어느 과거에서 회상한 어느 과거의 사고와 겹치고 같은 사고 속에서 만난 그녀는 언제인지 알 수 없는 과거의 그녀와 닮았다. 십 몇 년의 시간차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그녀와 또 다른 그때의 그녀는 같은 사람일 수도 있다. 그 균열은 그렇게 조그만 모래를 흘리기 시작하더니 결국에는 내 기억 전체의 구석구석에 구멍을 내, 밑바닥을 드러낼 듯 기억을 쏟아 붓는다. 그렇게 뒤틀린 머릿속을 다 잡기위해 그가 한 일이라고는 과거의 기억이 있는 거리와 그녀가 있을 법한 거리를 헤매는 단조로운 것이지만 그 속에는 격렬한 기억의 흐름이 존재한다. 부비에르 박사가 즐겨 말했듯, 인생이란 영원한 회귀이다.(본문 중) 인생이란 영원한 회귀이다. 기억이라는 것도, 기억 속에서 찾고자 하는 나라는 존재도 어딘가에 맞닿아있다.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기억들 간의 격렬한 전투는 그 맞닿음의 마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에게 그 마찰은 거부감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 마찰은 그에게는 복이 되는 충격이었으며, 때마침 발생함으로서 그의 인생에 새로운 출발점을 준 것이었다.(본문 중) 그 사고 이전의 그의 일상은 겉으로만 편안했을 뿐, 중요한 무언가를 억지로 모르척하고 지냈던 것이었다. 오히려 그가 사고로 인해 겪게 되는 사고의 혼란이 본질이고, 그 이전의 평온한 삶은 꿈속에서 허우적댄 꼴이었다. 이제 그가 꿈에서 깨어나는 방법은 삐걱거리는 과거의 기억과 마주하고 그녀, 자클린 보제르장을 찾아가는 것이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여느 소설과 같이 ‘한밤의 사고’ 역시 뚜렷한 형상도 명확한 끝도 없이 흘러간다. 덕분에 읽기가 편하지는 않지만 그 흐릿한 이미지 속에서도 특유의 애잔함은 나도 모르는 순간 책을 따라가는 시선에 젖어든다. 어떻게 헤어졌는지 조차 명확하지 않은 아버지의 존재와 집 앞의 노파인지, 어린 시절 당한 사고의 기억 속에 있는 수녀인지, 읽는 사람으로서는 종잡을 수 없는 어머니의 존재에 대한 기억은 불명확하기에 더욱 쓸쓸하다.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는 그녀, 자클린 보제르장을 만난다면, 과연 그 쓸쓸함을 보상받고 방황하는 자신의 중심을 찾을 수 있을까? 혹시 어딘가의 카페에 있을, 부비에르 박사라면 명쾌한 정답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아니, 그가 찾고 싶은 것은 그녀도, 부비에르 박사도, 아버지도 아닐 것이다. 흔하디흔한 말이지만 잃어버린 자신을 찾고자 했으리라. 백일몽 속의 자신을 말이다. (리더스가이드 서평도서) |
그러니까 시간은, 사건은, 세계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리고 내가 죽어서도 영원히 혼돈의 상태에 있다. 단지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편의를 위해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시간에, 사건에, 그리고 세계에 질서를 부여했을 뿐이다. 따라서 내가 겪은 시공간 속에서 실제로 일어났었던 일과 현재의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 때의 일은 조금 과장되게 말하자면, 전혀 별개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두 시공간의, 사건의, 세계의 공통점이라고는 "나"의 존재일 뿐이지만, 사실은 "나"라는 존재로 인하여 전혀 별개의 사건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 소설은 이처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상태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가 이 작가의 평생의 모티브라고 한다. 그래서 또 한권을 읽어볼 지 조금은 주저할 수 밖에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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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아무리 애를 쓴들, 삶은 처음보다 더 명확하고 조화로워지지 않는다. 작은 사건 하나가 갑자기 당신을 돌아가게끔 할 수도 있는 것이다. - 63p -
다섯번째로 읽는 모디아노의 작품이다. 사실, 모디아노는 지난 연말로 끝을 내려고 했었다. 묘하게 땡기는 건 땡기는거고, 분위기가 그닥...정초 새해까지 갖고 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화자가 겪은 교통사고로 인하여, 어린 시절 아버지, 죽은 개를 떠올리며..사고를 냈던 그 여자를 찾아다니는 이야기로...다른 소설과 그렇게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그간 모디아노에게 별을 쏟아부었던 것에 비하면, 이 작품의 임팩트는 다른 것 보다 작다.
뭐랄까...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내용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꿈을 꾼듯..뒤숭숭하고 찝찝하다.
어제 읽었던 장폴 뒤부아, 오늘 읽었던 파트릭 모디아노, 리뷰를 읽었던 외딴방의 신경숙...
지나온 '과거'에 대해서 깔끔할 수 없는 건... 동양이나 서양이나 매 한 가지 인가보다. 다들 그렇게...
덧붙임. 그래도 책 중에서 고르라면, 문학작품에 먼저 손이 간다. 어차피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내 맘속에 살아 남은건... 토익책이 아니라 문학작품이였으니... 이를 통해서, 얼마나 인간답게 내 마음이 세팅되었는지 모르겠으나...당분간 문학작품 읽기는 참아보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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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소설을 읽을 때는 낯선 상쾌함이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와 다른 세계를 알게 되는 기쁨, 내가 사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읽는 새로움. 예스 블로거 이웃들의 권고로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을 연달아 읽게 되었는데, 이제는 프랑스 파리와 프랑스 아저씨 한 사람이 우리 땅 우리나라 사람처럼 여겨지기 시작하고 있다. 신기한 노릇이다.
내가 기억하는 파리의 거리 몇 도막. 관광지 중심이지만 그래도 생생하다. 소설 속 거리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겠지만 그 거리를 떠올리면서 주인공의 행적을 따라가기에는 충분하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 거리들을 아무리 떠돌아다니더라도 소설처럼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 남기는 하지만.
이 책 역시 소설 자체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그러고 보면 모디아노의 작품 세계에 아직 제대로 가 닿지 못한 탓일지도 모르겠다. 자꾸만 소설 밖 배경으로 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
그럼에도 어렴풋이 잡히는 가닥 하나. 모디아노에 대해 개인적으로 할 말은 생겼다는 것.(나로서는 이 작가의 글을 쉽게 권하지는 못하겠다. 어떤 점이 어때서 좋더라까지는 아니니까.) 모디아노의 글을 몇 권 읽었더니 이런 기분이더라는 것.
그런데 묘한 것-나는 이 작가의 글을 읽어 나갈수록 더 집중이 잘 된다는 점이다. 처음 읽었던 작품보다는 이 작품이 더 그러했듯이. 물론 재미는 여전히 없었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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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점이 일이칭이냐 삼인칭이냐 전지적 작가시점이냐 하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그에 따라 독자는 몰입도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확한 이름을 내놓지 않고 화자의 입장이 독자의 시점과 겹치게 되면, 화자의 경험과 생각에 독자는 공감을 느끼기 쉬울 것이다. 그 어딘가 재클린이나 피터 내지는 사쿠라가 아닌, '나'로 시작되는 이야기에...
그런데 말이다. 작가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개인적인데서 (하늘아래 새롭지않고, 그리고 작가가 경험하지 않은 얘기를 쓸 수 있게는가 말이다) 시작함에도, 보편적인 감정을 실게 되면 그건 개인적인 레벨보다 보다 폭넓은 반향을 지니게 된다.
이 작품에서 30년전의 사고, 최근의 공항, 그리고 소년기의 차사고, 아버지 등등이 불어의 복합과거를 사용하건 아니건 간에, 아무리 복잡하건 간에 모호한 정체성을 찾아헤매고 (물색 푸른빛 피아트로 '나'를 치고 병원까지 손을 잡아준 자클린 보제르장은 과연 어떤 인물인가, 왜 나를 찾아오지 않고 갈색의 덩치가 사인을 하게 하고 돈을 주고 식당에서 모른채를 하는가), 사건을 계기로 과거에 대해, 자신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강연회에서 만난 여인 등에 대해 되집어 가는 계기로 등장한다.
그 하나로 분명하지 않다. 오로지 구체적 사건도 없는 한장의 이미지 영상만 던져준 셈이다. '나'로 표현되는 작가에게는 분명한 영상이겠지만, 그렇게 던져준 것을 보는 독자인 나로선 뿌연 은유가 섞인 문장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의 일련의 작품을 통해서 작가는 정신과의사의 카우치에서 말할 것들을 늘어놓을 뿐이란 생각만 들 뿐이다. 작가의 개인적 레벨인, 그의 영혼의 성장에선 되집을 만한 뚜렷한 영상이지만, 독자에겐 뿌옇기만한 미로일 뿐인.
아름다움도 의미가 있어야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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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릭 모디아노 소설 연달아 읽기, 네번째.
화자는 30년전, 20대 초입에 겪은 한밤의 교통사고를 추적한다. 이를 추적하면 더 어렸을 때 겪은 사고를 추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역시 파리 시내를 헤맨다. 역시 어떤 결말없이 소설은 끝난다. 독자에게 남은 것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미지.
동어반복적이다. 이제 모디아노는 그만 읽으련다. 그의 작품은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가 제일 좋았던 것 같다. 이 작품은 전작들에 은근 숨어있던 2차대전의 경험과 고발도 보이지 않는다. 영원회귀, 전생,,, 뭐 이런 단어들을 보면 이 작가가 나이들면서 불교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책 뒤, 역자의 해설에 복합과거와 단순과거에 대한 언급이 있다. <잃어버린 거리> 리뷰쓰면서 프랑스어 원작의 시제가 궁금하다고 쓴 적이 있는데, 역시나 뒷북친 셈이었다.
영원회귀,,, 여자들에 대한 추적,,, 윤대녕 작가가 생각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