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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탕달의 「적과 흑」에는 나폴레옹을 흠모하는 소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소년은 프랑스 외딴 섬에서 태어났지만 황제의 자리에 오른 나폴레옹처럼 자신도 영웅이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가치가 출세와 성공에 닿아있던 쥘리앵이 스물셋 꽃다운 나이에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잘못된 가치관의 형성이라고 본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나폴레옹 시대가 끝나고 다시 시작된 왕정복고 시대가 뛰어난 재능을 지녔다하더라도 쥘리앵처럼 하층민에게는 출세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불평등한 사회였기 때문이다. 언제 또다시 혁명이 일어나 목숨이 위태로워질지 모르는 불안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족을 비판하는 쥘리앵에게 베풀 자비는 없었다.
『파르마의 수도원(민음사)』에 등장하는 파브리스 역시 나폴레옹을 흠모한다. 쥘리앵과 달리 파브리스는 귀족이지만 영민하기 보다는 낭만적이다. 파브리스는 나폴레옹을 흠모하는 마음을 황제의 군대에 들어가는 것으로 표현한다. 겨우 열여섯에 불과한 소년이 워털루 전투에 참전하기로 결심한 이유도 감상적이다. 코모 호수 위를 나르는 독수리, 즉 나폴레옹의 새가 파리를 향해 날아가는 모습을 발견한 게 전부다. 군사 훈련도 받지 않은 파브리스가 전장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이탈리아인인 파브리스는 파리로 황제의 군대를 쫓아가지만 첩자로 오해받아 감옥에 갇히고 만다. 감옥지기 아내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나온 뒤로도 병사들의 뒤를 쫓아다니기만 한다. 군대에서는 부대에 소속되고 제복을 입어야하는 당연한 일조차 모르는 애송이였던 파브리스는 빵을 구하지 못하고 말을 빼앗기면서도 정열과 낭만을 잃지 않는다. 파브리스를 통해 본 워털루 전투는 한편의 연극을 보는 듯하다.
전쟁이란 나폴레옹의 포고문들을 보고 자신이 상상해 온 것처럼 영광에 헌신한 사람들이 일치단결해서 매진하는 저 고귀한 약동이 아니었단 말인가?(p.80)
이탈로 칼비노의 「반쪼가리 자작」에서 전쟁에 나갔다가 돌아온 ‘메다르도 자작’이 전혀 다른 인물이 되어 나타났듯이 파브리스도 달라진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을까, 순간! 기대했다.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여인숙에서 머무는 동안 ‘파브리스도 딴사람이 되었다(p.114)’는 문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세상물정 모르고 정열과 낭만만 가득했던 애송이의 모습에서 벗어났을까?
파브리스는 메다르도 자작처럼 극적인 반전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여전히 위험한 순간을 낭만적으로 해석하는 성향은 바뀌지 않았지만 감상에 빠져 무모한 결정을 내리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어머니와 고모가 전하는 위험 신호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어른들의 조언을 그대로 따른다.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파브리스는 밀라노 경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 있었다. 파브리스의 형이 동생을 밀라노 경찰에 고발했다.
파브리스가 밀라노 경찰에 고발되었는데, 그 고발 내용이란 그가 이탈리아 왕국 내에 조직된 대규모 비밀결사의 건의문을 전하러 나폴레옹을 찾아갔다는 것이었다.(p.116)
여기서 파르마 공국의 대신 모스카 백작이 등장한다. 모스카 백작은 파브리스의 고모 피에트라네라 백작부인에게 사랑을 호소하고 있었다. 아내와 떨어져 혼자 살지만 결혼한 상태인 모스카 백작은 피에트라네라 백작부인을 파르마 공국으로 데려오려고 별난 결혼을 제안한다. 피에트라네라 백작부인은 산세베리나 탁시스 공작부인이 되어 파르마 공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고 그때까지 가짜 이름으로 숨어살던 조카 파브리스를 사면시킬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조카를 ‘고위’ 성직자로 만들기 위해 나폴리로 보내 신학공부를 시킨다.
신학교에서 가르쳐주는 것은 무엇이건 무조건 믿어라. 네가 조금이라도 이의를 보이면 그 일을 자세히 적어두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돼. (…) 머릿속에 재치 있는 이론이나 대화의 기세를 장악할 만한 멋진 대답이 떠올라도 반드시 침묵을 지켜라. 남의 눈에 띄려는 유혹에 결코 넘어가서는 안 돼.(p.186)
모스카 백작과 산세베리나 공작부인은 나폴리에서 4년간의 공부를 마친 파브리스를 단박에 보좌주교 자리에 앉힐 계략을 꾸민다. 파르마 공국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두 사람이 파브리스를 후원했기에 그가 대주교 자리까지 평탄하게 오를 것은 자명해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광대 질레티와 결투를 벌였고 그가 파브리스의 칼에 죽어버린다. 파브리스는 도주했고 파르마 공국에서는 이 사건을 이용해 모스카 백작을 쓰러뜨리려는 음모가 꾸며진다. 파브리스는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는 것도 모르고 도주 생활 중에 여자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고독한 생활을 달래고 있었다. 모스카 백작과 산세베리나 공작부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파르마 공국의 대공은 은밀하게 파브리스 델 동고를 체포하라고 명령해버린다. 파브리스는 이 사건으로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일까? 파브리스의 마지막은 「적과 흑」의 쥘리앵과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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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말미를 읽고 역자해설을 읽으면서 파브리스를 향한 고모 지나 델 동고의 묘한 사랑과 집착을 생각하면서, 의문이 들었다. 가만 있거라, 파브리스가 누구의 아들이었지?
해서 1권 1장으로 다시 돌아갔다. 원래 소설의 초반 부분은 지루하고 낯설어서 읽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소설의 결말과 과정에 대한 모든 장치들이 숨어 있는 것이 전반부 혹은 1장이다. 이 책에서 전반부 혹은 1장과 후반부 혹은 마지막장의 분위기는 매우 다르다. 혁명과 전쟁의 시대 전반부와 반동과 수구의 시대 후반부는 마치 소설의 전후가 바뀐 것처럼 느껴진다. 반동과 수구를 깨고 혁명과 전쟁이 오는 것이 아니라 혁명과 전쟁이 깨지고 반동과 수구의 시대가 도래한다는 것이 이 책의 전개 과정인데 ...... 뭘까? 전편(全編)을 다 읽고 전편(前編)을 다시 읽으니 뭔가가 약간 눈에 보이는 듯하다. 작가가 하고자 하는 얘기......
1896년에 프랑스의 젊은 군대가 밀라노에 들어온다. 뿔달리고 흉측한 악마가 아니라 젊디젊은 청년의 군대였고 마귀의 군대로 믿고 있던 사람들에게 정서적 문화적 충격은 대단했다. 젊은 장교 로베르 중위는 델 동고 후작부인의 저택에 머문다. 시누이인 지나 델 동고는 당시 열 세살로서 올케언니와 같이 살고 있었다. 군대는 1899년에 퇴각을 한다. 그 즈음에 후작의 둘째아들 파브리스 델 동고가 태어난다. "후작부인은 아들 파브리스의 사랑스러움에 감탄했다. 그런데 부인은 A백작, 지금은 장군이 된 로베르 중위에게 지금도 여전히 일년에 두세 번씩 편지를 보내고 있었다. 부인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이었다." -<파르마의 수도원>1권 1장-
1815년 워털루 전쟁 당시 파브리스의 나이가 16살이었으니... 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이 복귀하자 파브리스는 무작정 나폴레옹의 군대를 찾아 프랑스로 들어가고 마침내 워털루전투에 휩쓸린다. 사령관이 된 로베르를 만나지만 서로를 알아보지는 못한다. "이 장군은 A백작으로 1796년 당시 로베르중위였던 바로그 사람이었다. 그가 파브리스 델 동고를 만났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얼마나 좋아 했을까!" -<파르마의 수도원> 1권 3장-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이탈리아로 돌아오지만 이탈리아는 이미 반동의 시대로 복귀해 있어서 파브리스는 쫓기는 신세가 된다.
1장에, 이 책의 전개과정과 결말에 대한 것들이 암시되어 있음을, 다시 읽고서야 파악이 가능하고 책전체에 걸쳐 작가가 말하고자하는 것, 혹은 내가 얻고자하는 것이 어느 정도 와 닿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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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적과 흑'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19세기 소설 중에서 지루한 사건이 아니며, 극적으로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스탕달의 이탈리아 문화에 대한 동경-긍정도 흥미로운데요, 머릿말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독자 입장에서, 등장인물들이 이탈리아 사람이기 때문에 아마도 흥미가 덜하리라는 점이다. 이 나라 사람들의 감정적 성향은 프랑스 사람들과는 상당히 다르다. 이탈리아인들은 정직하고 선량하며 무슨 일에든 겁먹는 법이 없다. 그들은 생각하는 대로 말한다. 그들이 허영심을 품는 것은 단지 발작적인 경우일 때뿐이다. 그럴 때 그 허영심은 정념이 되는데, 이것을 푼티글리오2)라고 한다. ' 이탈리아 문학이나 영화 등을 별로 접한 적 없지만 이 '푼티글리오'라는 개념이 궁금해서 챗gpt에 물어봤군요. 인공지능의 답변은 이랬습니다. 스탕달 소설에 '입문'하려는 독자가 있다면 이런 포인트들이 흥미로울 것 같아요. ----------------- #### 원래의 의미 이탈리아어 단어 `puntiglio`는 자존심, 자부심, 고집, 집착, 또는 어떤 일에 대한 경솔한 완벽주의 등을 의미합니다. 이는 자존심이나 명예와 관련된 사소하고 집요한 성격을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 문화적 중요성 #### 과거 과거의 이탈리아 사회에서 `puntiglio`는 개인의 명예와 자존심을 강조하는 중요한 가치로 여겨졌습니다. 특히 귀족 사회나 상류층에서 자주 나타났으며, 개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사소한 행동들도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
| ‘파르마의 수도원’에 대해서는 오노레 드 발자크와 작가 스탕달과의 작가적 대화들 (당대 신문에 실린) 이 유명하죠. 발자크와 스탕달의 예술논쟁 등의 제목으로 한국어 출판도 되어 있는데요, 스탕달의 이 소설을 읽고 역작이라 감동하여 작가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고 실은 발자크의 문장들을 읽고, 또 그에 답신하는 스탕달의 글도 무척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이 소설을 읽으면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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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흑"에서 표현된 18세기 프랑스의 사회구조의 모순과 이를 따라갈 수 밖에 없는 주인공을 비롯한 등장인물의 생생한 모습에 감명을 받아 본 작품을 구입해서 읽어 보았는데, 스탕달이 50여일만에 구술로 완성한 작품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구성도 짜임새가 떨어지고 등장인물들의 쌩뚱맞은 행동이나 필요 이상으로 길게 늘어지는 작중 화자의 마음속 상태 표현이 본 작품을 끝까지 읽기 힘들게 만들었다. 작품해설을 보니 등장인물 각자가 반도덕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걸 보여준다고 하는데, 주인공의 고모가 주인공을 연인으로 삼는 동기도 약하고, 주인공이 다른 여인들과 사랑에 빠지는 과정도 설득력이 약했고, 결정적으로 작가가 말하고 싶은게 뭔지 정확히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