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유-
감동적이라는 영화는 대개 상투적이거나 지나치게 감상적, 혹은 교훈적, 혹은 지루하기 쉽다는 생각이 있어서 누가 '감동적이다'고 칭하는 영화에는 썩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
그런데 이 영화, 정말 <감동적>이다. 그야말로 마음이 따뜻, 촉촉, 훈훈, 뭉클해진다. 아아 이런 상투적인 단어 말고는 지금의 내 마음을 표현할 단어가 이렇게도 생각나지 않는 어휘력이라니.
내 취향과 99% 일치하는, 너무 사랑하게 된 영화다. 만일 내가 영화감독이 꿈이라면, 바로 이런 영화를 만들게 해달라고 신께 기도했을 것이다.
- - - - - - - - - -
열악한, 고아원 비슷한 수용시설에 실패한 음악가 마티유가 선생님으로 부임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교장은 작용 반작용의 법칙을 신봉하여 잘못에는 무조건 체벌, 아이들은 교장의 학대 속에 더더욱 문제아들이 되어 간다. 아이들을 감싸 주고 아이들 편에 서주는 마티유는 아이들로 합창단을 조직하게 되고 마티유의 애정과 자신들이 부르는 노래를 통해 아이들은 서서히 변화해간다. 말이 없던 모항쥬의 재능은 마티유에 의해 꽃피워가고 오지않는 부모님을 기다리던 페피노는 마티유의 사랑 속에서 포근함을 느낀다. 그리고 학교 선생들과 분위기도 서서히 변화해가는데.
하지만 문제아 몽당의 등장으로 그런 변화에 제동이 걸리게 되고 결국 그게 발단이 되어 마티유는 학교를 쫓겨나게 된다.
- - - - - - - - - -
음악을 통한 감화, 선생의 사랑으로 인한 아이들의 변화, 소망의 발견 대략 이런 이야기. 말해놓고 보니 시덥잖게 보이지만 영화는 전혀 시덥잖지 않다.
사실 지금까지 이 영화를 미국 영화로 알고 있어서 썩 볼 마음이 생기지 않았는데 영화를 틀어놓고 배우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프랑스어 대사를 듣고서야 '아니, 프랑스 영화?' 하는 걸 알았다.
프랑스 영화는 예술적이긴 해도 '재미'에 있어서만큼은 글쎄 좀 그렇고 잘 나가다가 그 특유의 뭐랄까 난해함? 정서상 받아들이기 힘든 그런 요소들이 꼭 등장하곤 해서 참 가끔은 곤란한 영화라는 생각이 있는데 이 영화는 그런 편견(?)을 깨주었다.
하나도 지루하지 않고 어떤 분들은 너무 잔잔하다는 분들도 있었는데 글쎄 난 하나도 잔잔하지 않던데. 오히려 이런 영화의 특성상 꼭 뒤에 가서 비극적 사고가 터지기 때문에 영화를 행복하게 보는 와중에도 '대체 언제 터뜨릴꺼냐!' 조마조마해하며 봤다.
결국 영화는 문제아 몽당의 등장에 의해 분위기가 뒤틀려가고 마지막에 뻥 하니 터지는 사건도 결국 다 몽당에 의해서이다. 이 영화가 99% 만족스러운 영화이지만 딱 1% 부족한 게 이 부분이었다. 문제아 몽당은 왜 구원받지 못했는가? 하는 것. 영화 전체를 흐르는 따뜻한 감성에 이 부분만이 유독 일치하지 않는 것 같아 의아했다. 앞부분이 지나치게 쉽게 흘러간다는 느낌이 들어 현실적인 요소를 끼워넣으려 한 걸까? 그렇다고 해도 공감하기 힘들다. 하다못해 몽당이 눈물을 흘리거나 슬퍼하는 장면을 딱 딱 한 컷이라도 넣어주었음 좋았을껄 싶다.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교장의 캐릭터도 잠시 왔다갔다햇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왔다갔다 할 수는 있지만 그 부분이 조금 설명이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모든 불평은 모두 사치에 지나지 않는다. 조금만 삐긋했다간 자칫 지루하거나 전형적이거나 계도적이고 감동을 강요하는 영화가 될 수 있는 소재와 내용임에도 하나도 보는 사람 부끄럽지 않게 보는 내내 마음은 한껏 푸근 두 눈에는 눈물이 핑 핑 ..
내용도 내용의 전개도 게다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너무나 아름다운 음악들도 캐릭터들도 어느 것 하나 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없었다네. 그래 결국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랑인게야. 아직도 마음이 훈훈 뭉클하다.
성격이 다소 다르지만 여러 모로 <죽은 시인의 사회>를 떠올리게도 하는 영화였다. 감동의 색은 다르지만 그 감동이 절절하고 가슴 속에서 흘러넘친다는 점은 똑같네그려.. 너무 좋아서 감독의 다른 작품이 있나 검색해보앗는데 이상하게 이 작품 이후로는 필모그라피가 비워져있었다. 어디서 뭘 하시는지.
정말 너무 좋다. 자주 꺼내어 봐야겠다. |
|
1. <코러스 Les Choristes> (합창단) 보는 이의 콧잔등이 시큰거리고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잘 봤다는 생각이 올라오는 프랑스 영화다. 2004년 크리스토프 바라티에 감독이 3류 학교에서 가르치는 음악 선생과 말썽꾸러기 학생들이 합창단을 만들어 삶을 바꾸는 모습을 그렸다.
아이들과 어른들의 모습에서 웃기기도 하고, 어른끼리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도 나오고, 성이 가득찬 아이가 어른을 미워하면서 생긴 일을 그리기도 해서 눈요기감이 풍성하다.
2. 리옹에서 떨어진 시골학교인 봉드레탕 보육원은 새로 선생님이 왔는데도 대머리라며 놀려대기나 하는 골통 아이들이 다니는 따라지 학교다. 먹고 자면서 배우는 학교이지만, 가르치기도 배우기도 쉽지 않다.
아버지가 2차 세계대전 때 죽었지만 토요일이면 데리러 올 것 같아 교문에서 기다리는 여덟 살짜리 페피노는 작고 귀엽긴 해도 토요일이 아닌데도 마냥 아버지를 기다린다. 얼굴은 천사같이 보이지만 말을 하지 않는 모항쥬(장 밥티스테 모니에), 하모니카를 엉터리로 불면서 선생님을 놀리는 노래를 부르는 코르방, 어버이가 즐기려고 아이들을 버렸다며 눈에 힘을 주고는 어른들을 노려보고 아이들을 괴롭히는 몽당...
새로 온 음악선생 클레망 마티유(제라르 쥐노)의 손가방을 훔쳐 안에 있는 종이를 꺼내보는 아이들... (벌거벗은 아가씨 사진이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꺼내 보니 악보만 들어 있다...쩝, 이게 아닌데...) 어떤 쪽에서 보아도 선생님 말씀은 한귀로 흘려 듣고 제 멋대로 지내는 아이들이 있는 학교다.
'작용과 반작용'을 외치며 걸핏하면 아이들을 때리거나 독방에 가두는 라샹 교장(프랑수와 벨레앙), 체육 선생으로 처음에는 힘으로 아이들을 다루다가 클레망 선생의 영향을 받아 나중에는 음악과 체육이 아이들을 바르게 한다고 믿는 체육 선생 샤베르(카드 메라드)... 선생들도 사랑으로 아이들을 돌보지 않고 제 멋대로 아이들을 다룬다.
3. 1949년 새로 온 클레망 선생은 아이들은 본디 착하다면서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려고 한다. 나쁜 짓을 한 아이를 교장한테 말하지 않고 뉘우치도록 끌어낸다. 아이들한테 첫 시간에 앞날에 뭐가 될 것인지를 쓰라고 했는데, 소방관이나 나폴레옹 같은 장군, 스파이 따위를 썼지만, 아무도 선생은 쓰지 않았다. 아이들이 몸소 보고 겪은 선생들은 본받을만한 사람들이 아니었나 보다. 더구나 라샹 교장을 보면.
이름나지 못하고 그냥저냥 시골 따라지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지만 클레망 선생은 아이들을 다독거리면서 길을 찾아준다. 합창단을 만들어 노래를 부르게 하여 비뚤어진 마음을 바르게 잡고, 꿈을 찾아주려 한다.
그런데 골칫덩어리들이 잘 따라줄까? 목소리가 아름답고 음악에 뛰어난 솜씨가 있는 모항쥬와 학교에서 바리톤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딱 한사람인 몽당을 합창단에 끌어들여야 하는데 할 수 있을까?
게다가 교장은 처음에는 합창단을 만들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때려치우라 하고, 교재 준비할 돈마저 누가 훔쳐가버려 더운물로 몸을 씻지도 못하는 아이들을 어떻게 끌고갈는지...
언제나 아이들은 어른의 거울이다. 어른의 잘못으로 아이들이 나쁘게 바뀔 뿐, 아이들이 처음부터 나쁜 건 아니다. 아이들의 응어리진 마음을 어른들이 녹여줘야 한다.
보육원의 아이들은 클레망 선생을 만나 꿈을 되찾고, 토요일마다 아버지를 기다리는 페피노도 꼭 아버지를 만났으면 좋겠다.
4. 클레망 선생 덕분에 커서 나중에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된 이가 있다. 누굴까? 같이 노래하던 동무와 함께 클레망 선생이 남긴 일기를 보면서 50년 전의 일을 되돌아본다.
영화 뒤에 깔리는 합창단의 여러 노래가 듣기에 그지없이 아름답고, 이야기가 잘 짜여져 있어 시간이 가는줄 모르며, 보고 있자면 마음 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올라오고 눈가엔 눈물이 맺힐 수도 있다.
처음에는 같이 안 보겠다고 빼던 아들 녀석들이 다 보고는 "이건 좀 재미있네요" 하면서 일어선다. 큰 놈은 늦은 시간인데도 다시 한번 보면 안되냐고 한다. 피붙이들끼리 오손도손 앉아 같이 보면 딱 좋을 영화다.
디브이디는 화면도 좋고, 소리도 괜찮다. 나온지 오래지 않아 그런지 공을 많이 들였다. 보너스가 따로 한 장 짜리로 들어 있는데, 볼만하다.
아이들을 거의 다 촬영하던 곳 가까이 있는 학교에서 여섯 살에서 열다섯 살까지를 뽑았는데, 한번도 연기를 해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지만 차츰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는 이야기들, 여름에 촬영을 한 탓에 1월인 겨울을 나타내려고 기계로 눈과 흰 소금을 뿌리고 파란 담쟁이 잎을 떼어내었으며, 옷을 두텁게 입은 아이들이 더워서 혼이 났다는 따위의 일들이 들어있어 보기에 즐겁다. |
| 2차 대전 후 어려운 프랑스 어느 시골 보육원, 고아나 가난한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쳐서 꿈을 갖게 한다. 멜로디가 자꾸만 흥얼거리게 되는 정서 만점 영화. |
|
꼭 보면 해당 주제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갖추지도 못한 주제에 말만 쎄게 하면 그게 비판이 되는 줄 착각하는 하층민이 있다. 당장 뉴턴의 역학법칙이 뭔지도 모르는 주제에 목소리만 높인다고 썩은 머리통 속에 안목이 생기겠는가? 이런 건 입으로 과학을 떠들어도 그건 이미 과학이 아니라 무슨 무당의 푸닥거리 같은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이란 발음에서 절로 신통력이 생긴다고 믿는 모집인이 읊어 대는 과학은 이미 과학이 아니라 '내 머리에 지식을 생기게 해 줘. 없는 뇌세포가 생기게 해 줘(늙어서 썩은 것도 아니고 아예 날 때부터 없음)' 같은 미신적 애원(코믹한)에 불과하다. |
![]() 끝이었다.. 선생님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것은 키팅 선생이 끝이였고.. 선생과 학생의 이야기가 가슴 벅찬 감동으로 다가온 것은 죽은 시인의 사회가 마지막이었다. 그 후로, 어느 정도의 감정과 재미는 있었지만.. 어떤 영화에서도 키팅 선생만큼 울림을 주는 선생님은 없었다. 오히려, 비슷한 감동으로 모습으로 다가오는 영화들은 거부감을 주기도 했다.. 역시나 조금의 감동이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어쩌면 코러스도 그렇다. 내용 면에서 절대 죽은 시인의 사회의 감동을 넘지 못한다. 떠나는 선생님을 위해 종이 비행기를 날리던 모습도, 조금 열려진 문 사이로 ‘캡틴 마이 캡틴’을 외치면 책상으로 올라서던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키팅 선생의 미소만큼 감동적이지 못하다. 하지만 이 영화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은 없다. 비슷비슷한 이야기로 감동을 주려고 하든 다른 영화에서 느껴지는 아쉬움이 없다. 왜냐하면, 어차피 영화는 키팅 선생 이상의 선생을 강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마티유 선생은 이미 잊혀져 가는 희미한 기억 속의 선생일 뿐이다. 굳이 떠올리려고 하지 않으면 기억나지 않는.. 그리고 그가 아이들에게 끼친 영향이라는 것도.. 딱 거기까지이다.. 그의 일기를 통하지 않았더라면 잊고 지났을 기억..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다른 영화 속의 선생님들 만큼 학생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는 실패한 작곡가이지만 그런 이유로 자신의 인생을 허비하지도 비관하지도 않았고, 사랑받지 못하고 관심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뭔가 해주기를 바라는 그런 사람이다. 여기까지가 그저 교육영화가 가지는 단순한 줄거리라면.. 이 영화를 이끌어주는 강력한 매력은 마티유 선생이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매개채가 바로 음악이라는 것이다.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그들 목소리에서 나오는 합창.. 아직은 순수한 목소리에서 나오는 그 아름다운 화음은 단연코 이 영화의 압권이다.. 영화 중반부부터 계속 들을 수 있는 이 합창만으로도 영화는 충분한 감동을 전해준다.. 특히나 모항쥬의 솔로부분에선 음악이 끝나는 게 아쉬운 생각이 들 정도니.. 아마도 이 영화에서 또 다른 키팅 선생을 찾고자 한다면.. 그다지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지 않다. 이 영화에서는 평범하지만 여전히 따뜻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약간은 촌스러운 마티유 선생만이 있을 뿐이니까..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마음의 위안을 찾고 싶다면.. 이 영화를 강력히 추천한다.. 무엇과도 비교하지 않고.. 영화가 들려주는 아름다운 화음에 내 귀를 그리고 내 마음을 맡겨둔다면.. 분명 영화는 아름다운 음악을.. 그리고 약간 진부하지만.. 여전히 감동스러운 이야기를 들려줄 테니까.. |
|
꼭 보면 해당 주제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갖추지도 못한 주제에 말만 쎄게 하면 그게 비판이 되는 줄 착각하는 하층민이 있다. 당장 뉴턴의 역학법칙이 뭔지도 모르는 주제에 목소리만 높인다고 썩은 머리통 속에 안목이 생기겠는가? 이런 건 입으로 과학을 떠들어도 그건 이미 과학이 아니라 무슨 무당의 푸닥거리 같은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이란 발음에서 절로 신통력이 생긴다고 믿는 모집인이 읊어 대는 과학은 이미 과학이 아니라 '내 머리에 지식을 생기게 해 줘. 없는 뇌세포가 생기게 해 줘(늙어서 썩은 것도 아니고 아예 날 때부터 없음)' 같은 미신적 애원(코믹한)에 불과하다. |